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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월레 소잉카 시인도 극찬
스님이 말한 행복한 삶은
이웃을 위한 보시와 봉사
적멸은 생사없는 열반 적정
열반은 탐·진·치 불꺼진 평화
진리 일깨운 품격 높은 시조
님의 침묵 이후 불교시 으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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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을 위하여’는 2012년 11월12일에 ‘문학사상’에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권영민이 엮어낸 조오현문학전집의 이름이다. 원래 ‘적멸을 위하여’는 2005년 금강산에서 개최된 세계평화시인대회에서 ‘평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낭송 발표된 시조로서, 당시 참석했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월레 소잉카 시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다.
필자는 ‘적멸을 위하여’를 읽고 큰스님의 사세송(열반송)을 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그렇게 가실 때가 이르다고 생각은 했지만, 스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시더니 죽음을 준비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의 묘지명을 써놓은 인사도 있고, 유서도 써놓은 일은 다반사이니까, 사세송(辭世頌)이라 생각해도 방정맞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현 스님은 ‘내가 죽어보는 날’에서 자신의 죽는 과정을 상상해 본다.
부음(訃音)을 받는 날은
널 하나 짜서
눈 감고 누워도 보고
화장장 아궁이와 푸른 연기
뼛가루도 뿌려본다.
중생은 사는 일도 바쁘고 벅차다. 죽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고 상상해 보는 일 조차도 겁나고 싫은 일이다. 인생은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단멸론(斷滅論)적으로 산다. 인과도 없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짐승처럼 산다. 죽음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무상한 삶을 깨닫는 사람이다. 따라서 현재의 삶이 소중하고, 아름답게 잘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이 죽어보는 날을 생각하며 앞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예시하고 있다.
‘적멸을 위하여’를 살펴보면 행복한 삶이란 이웃을 위하여 보시하고 봉사하는 삶이라고 교시(敎示)하고 있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티베트의 장례법에 조장(鳥葬)이 있다. 죽을 때가 되면 숲에 들어가 명상하다가 앉아서 죽는다. 그래서 새들의 먹이가 되어 자신의 육신을 완전히 중생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중국의 총리 주은래가 죽으면서 자신의 몸을 반은 화장하여 비행기로 조국의 산하인 전국의 땅에 뿌리고, 반은 새들의 먹이로 주라고 하였다고 한다. 중국이 공산국가이면서도 망하지 않는 이유가 그런 선지적 보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허망한 육신에 대한 애착을 끊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의 행위는 보통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 전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하고 청정한 죽음을 통해서 죽음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세계가 아니라 아름답고 황홀하며 평화롭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마지막 5·6연 “이 다음 숲에 사는 /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는 온 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얼마나 멋진 시의 종장(終章)인가.
이 시조는 3장 6연으로 된 변형된 시조이다. 1·2연이 초장, 3·4연이 중장, 5·6연이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장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를 살펴보자. 오현 스님의 시 속에는 죽음은 항상 삶과 한 짝이 되어 붙어 다닌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삶과 죽음은 본래 하나인 것이다. 삶을 떠나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없고, 죽음을 제외시키고 삶을 말할 수 없다. 생사의 소식을 말로 표현하면 한계가 있다. 겸손하게 ‘오직 모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본래 자기의 고유한 성질인 실체가 없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성질의 요소들이 인연 따라 모여서 형상을 이루었다가 인연이 끝나면 자연과 허공 속으로 되돌아간다. 색즉시공이요 공식시색이다. 진리의 세계인 공의 세계에서는 있음과 없음의 유무(有無), 삶과 죽음의 생사(生死), 오고 가는 거래(去來), 옳고 그른 시비(是非)가 없고, 범부와 성인도 차이가 없다. 중생과 부처가 차이가 없어 둘이 아니다. 생사가 곧 열반이다. 이것이 분별사량(分別思量)이 끊어진 적멸의 세계, 중도의 세계이고, 깨달음의 세계이다.
중장 “어차피 한 마리 /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에서 시인은 자신을 ‘기는 벌레’라고 표현했다.
‘내가 나를 바라보니’에서도 “무금선원에 앉아 / 내가 나를 바라보니 / 기는 벌레 한 마리 /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 배설하고 / 알을 슬기도 한다.”고 노래한다. 그의 시에서 하루살이·쇠똥구리·피라미들·기는 벌레·좀거머리·개구리·허수아비·아지랑이·지푸라기 등 네 글자의 하찮은 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깨우침을 주는 유마거사이다. 중생과 부처는 하나이다. 미물중생을 통해서 짐승보다 못한 인간중생을 깨우치고 있다. 내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무아(無我)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덜어주는 영약이다. 시인은 하찮은 벌레의 꿈틀거림 속에서 무한한 생명을 관찰하고 경애하고 있다. 미물중생이나 인간중생이 생명체를 가지고 수억 년을 진화한 동류중생이란 입장에서 보면 미물도 인간과 똑같은 등가(等價)의 위대한 생명체이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도 마치 한 가지이다. 고륜중생의 삶을 살피는 자비심과 오도의 세계가 오현 스님의 시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멸(寂滅)은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적정(寂靜)과 입멸(入滅) 입적(入寂)을 뜻하는 말이다. 열반은 “탐욕의 불·성냄의 불·어리석음의 불이 완전히 꺼진 평화로움 상태를 뜻한다. 불교의 이상적인 경지로 부처님의 죽음 즉, 입멸(入滅)의 뜻도 있다.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평화’라고 번역하면 좋겠다.
죽음에 대한 집착은 고통스런 죽음이고, 죽음에 대한 초월심은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열반이고 축제이고 행복이고 쉼이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생사는 일여(一如)이고, 생사가 곧 열반이다. ‘적멸을 위하여’는 생사일여의 진리를 일깨워주는 품격이 있는 시조이다. 우리 불가에서 큰스님께서 열반할 때 어려운 한시 게송으로 열반송을 만드느라 고생할 것 없이 이처럼 우리말 한글로 담담하고 멋지게 한 가락 읊으시고 가시면 후인들에게 두터운 선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오현 스님은 1968년 ‘시조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시조시인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최초로 시조시 형식에 선시를 도입한 선구자이며, 본격적으로 한글로 선시를 구가한 시승이다. 만해의 ‘님의 침묵’ 이후 불교시의 성과 가운데 으뜸이다.
정지용문학상(아득한 성자), 공초문학상(아지랑이), 가람시조문학상에 이어 10월12일에 수상하게 될 제13회 고산문학대상의 수상작 ‘적멸을 위하여’에 힘찬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큰스님께서 강건하게 오래 우리 곁에 있어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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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삶의 힘이요 반려자의 위안이다. 한가위 추석날 홀로 걸어서 고향 가는 길보다는 여래의 고향열차를 타고 함께 가면 금방 갈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불문에 들었으면서도 어찌하여 정법과 부처님의 공덕을 여우의 의심으로 인생을 소모하였던가. 고달픈 인생살이 관세음보살만 진심으로 불렀다면 가슴을 도려내는 아픈 고통을 덜어낼 수 있었으련만….
김형중 문학평론가·문학박사 / 동대부중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