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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11코스 바람이 된 애국의 혼
서귀포시 화순에서 모슬포까지 14.8km의 제주올레 10코스와 모슬포 출발 무릉에 이르는 18km의 11코스는 역사의 뒤안길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올레길 주변은 모슬포 거센 바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험난한 세월을 보냈으며 특히 근대사와 현대사가 녹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인간의 애증을 보여주고 있고 보이지 않게 국가와 안보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교훈을 암시하고 있다.
제주올레 10코스 출발지인 화순항은 긴급한 국제피난처로 지정되어 있다. 강풍이 몰아쳐 폭풍주의보가 내리면 제주도 먼 바다에서 조업중이던 중국어선들이 수백척씩 몰려와 피항을 하고 있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조화를 이루며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가끔 중국의 선원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우리 해경이 후송을 하여 치료를 한 후 보내주었다는 훈훈한 뉴스를 접하기도 하지만 중국 어선에서 쓰레기가 무단으로 투기되어 인근 해변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말도 무성하게 흘러나온다. 나아가 중국인들에게 밀입국 및 밀수 기회를 준다거나 북한 공작원이 상륙할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등 문제점도 제기 되고 있음에 따라 폭풍주의보만 내리면 공안기관은 긴장하게 된다.
화순에서 시작된 올레길은 산방산 용머리바위를 돌아 사계리 해안을 지나치게 된다. 지난 2003년 10월 사계 해변의 넓다랍게 펼쳐진 암반 위에서 사람과 새 등 동물의 발자국이 발견되어 탄소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 결과 7,000~1만5,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져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로 인해 현재 이곳에는 펜스가 쳐져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는데 이러한 보호 수단이 몇 년이나 갈지 알 수 없다. 바위 자국 마모는 파도와 바람이 주범이고 이미 1만년을 거쳐 흔적을 지워 왔는데 얄팍한 인간의 전시 행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한다. 막상 해야 할 것은 안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사계 해안을 지나면 송악산에 다다른다. 송악산은 이중 화산체로서 학술적 가치가 많다고 하는데 둘레 500m 깊이 70m의 분화구 안에는 아직도 화산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해안에 접한 절벽 위에서는 “외상으로 음식을 먹은 후 멀리 섬 두 개를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갚아도 그만 말아도 그만)” 고 하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눈앞에 바짝 다가와 보인다. 두 섬은 아주 편평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본래 바위와 키 큰 나무도 있었지만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군 군함으로 착각하여 집중 포화를 함으로 인해 평지가 되었다” 라는 말도 바람따라 전해져 내려온다. 그만큼 이 일대가 군사적 요충지로 작용했던 것 같다.
제주올레 10코스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것은 일본군 전적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쪽의 송악산과 서북쪽의 모슬봉 그리고 동북쪽의 단산을 연결하는 땅은 500만평이 넘는 제주도 최대의 해안 지대 평야로써 일제당시 일본군이 이중 알뜨르 일부를 군사시설로 활용했다. 알뜨르는 아래쪽에 위치한 들녘이라는 뜻으로 유사시 맨 땅에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고 레이더망에도 잘 잡히지 않는 지형학적 특성이 있어 일본 공군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일본과 중국의 중간지역인 제주도를 대륙침략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1926년경부터 20만평 규모의 비행장을 건설하고 오무라 항공기지를 이전하였으며 2차대전 막바지에는 공군기지를 40만평으로 확장하였다고 하는바 현재 이곳 일대에는 비행기 격납고가 여러 개 실존하고 있다. 격납고는 이 지역 농민들이 농기구와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하는 것도 있고 잡초 속에 묻혀있는 것도 있어 과거 일본군의 만행 흔적을 거울 삼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지 못해 애석할 뿐이다.
어찌 격납고뿐이랴. 파도와 바람이 소리쳐 운다고 해서 절울이오름이라고 불리는 송악산의 바다와 접한 절벽에는 곳곳에 일본군이 뚫어 놓은 해안진지동굴이 아픔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있다. 일본은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도 해안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일반인의 접근조차 어려운 절벽에 열악한 장비로 작업을 하였던 제주도민의 강제노역 고통이 어떠했었는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방어진지는 해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도 있었다. 단산의 5봉우리 중 4번째 봉우리 정상에는 완벽한 전투용 진지가 그대로 남아있다. 비록 10m 내외의 미로형 땅굴이라 하지만 엎드려 기어야 통과가 가능하기 때문에 베트남의 구찌땅굴을 연상케 할 정도의 체험 효과가 있다. 이 모두가 국가안보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할 생생한 교육 자재이다.
올레 10코스 끝나는 지점과 11코스의 시작 지역이 모슬포이다. 이곳모슬포 인근은 역사적 사연이 많은 곳이다. 조선시대 당시 네델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하기도 하였고 구한말에는 천주교 백서사건 주역인 황사영의 처이며 정약용의 조카딸인 정난주 마리아가 유배되어 순교했고 천주교가 계기가 되어 이재수의 난도 발생했었다. 발악을 하던 일본군이 물러간 후에는 제주4.3사건의 후유증으로 인해 섯알오름의 과잉단속에 따른 인명 피해와 백조일손지묘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곳 모슬포는 6.25동란이 일어나자 국가안보의 요충지로 더욱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군사 유적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제주문화예술제단은 기존의 올레코스와는 무관하게 “알뜨르 역사의 올레” 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수차례 답사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대정역사문화연구회는 3군 상징 표상탑을 설치하는 등 모슬포 지역의 중요성을 정착시키려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모슬포 전쟁유적지의 제1번지는 육군제1훈련소다. 논산이 제2훈련소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도 바로 모슬포에 제1훈련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훈련소는 1951년 창설되어 1956년까지 모슬포 땅 60여만평 부지에서 50여만명의 장병을 훈련시켜 전선에 투입시켰다. 6.25전쟁에서 승리를 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공산화되지 않도록 역할을 한 것도 이 훈련소였다. 북한이 적화통일에 실패한 것 중 하나가 4.3사건을 계기로 제주도를 먼저 공산화시키지 못한 일이라고 평가했다는 말도 여기에서 기인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 훈련소가 폐쇄된 이후 시설물은 하나 둘 사라지고 현재는 낡은 정문 기둥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다만 강병대교회는 건재하여 제1훈련소가 강병대로 불린적이 있고 강병대교회에서 장병들의 종교생활과 더불어 기초교육(유치원)을 실시했었음을 알려준다.
모슬포에는 29사단이 창설되어 주둔한 흔적으로 “주먹사단” 기념비가 남아 있고 잠시나마 대정초등학교에 이전하여 생도 1,000여명을 교육시켰던 공군사관학교의 훈적비도 남아 있으며 98야전병원의 정문 기둥도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것들도 오래가지는 아니 하리라. 모슬포의 바람은 사물이 오래 남아있는 것을 싫어한다. 세월의 힘을 실어 삭게 만들고 강한 힘으로 부수어 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이곳에서 버티며 살아온 악찬 일꾼을 “대정 몽생이”라고 한단다.
6.25전쟁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에만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주도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연합군의 압록강까지 진격과정에서 많은 포로가 발생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포화상태가 되자 모슬포에도 3개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반공포로 석방시까지 운영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때 대한반공청년회 제주도지회장을 맡았던 임재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평양철도고등학교를 나와 열차기관사로 일하다가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투입되었었다고 한다. 그는 반공포로 석방시 북송을 거부하고 한국에 잔류하여 모슬포 훈련소에서 3년 복무 후 전역하고 제주도에 터를 내리고 살면서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우선 같은 한국사람이면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함에 따라 마치 외국에서 생활하는 느낌이 들었고 고량부 3성이 본래 북쪽 출신이라 그런대로 적응할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구걸을 하다가 봇짐장수 노릇도 했고 오일장을 돌아다니며 막과자 행상도하며 풀칠을 하였다고 했다.
6.25전쟁 이후 타 지역에서는 이북5도 출신들이 강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대부분 잘 산다고 평가를 받아왔지만 제주도에서는 아니었으며 외부인에 대한 배타의식으로 정 조차 갖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제주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만 애국심과 안보의식만은 투철했었다. 물론 적화통일되면 제일 먼저 처형당한다는 입장에 처하여 있기는 하지만 그 보다도 북한 공산체제에 신물이 난다면서 수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국가관 고취 교육을 시키곤 했다. 그가 대한반공청년회(현 통일안보중앙협의회) 회원임을 떳떳하게 내세웠지만 그의 자손들은 아버지가 반공포로였다고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전쟁의 상처가 남겨준 매우 안타까운 사례가 아니었던가 싶다.
모슬포에는 근· 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적 유적지가 많아 안보교육장 설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나가 인정한다. 지난 90년대 말 국민의 정부 당시 모슬포에 “국방기념관” 을 건립하여 관광객들은 물론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하는 초· 중· 고교 학생들의 답사 코스로 정착 시키자는 정책이 국무회의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시행 주체 부처가 토지 관리자인 국방부에서 보훈정책 주관자인 국가보훈처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행안부를 거쳐 지자체인 제주도로 이관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예산 배정 문제가 정책을 핑퐁시킨 것이었는데 민자까지 거론하다가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는바 당시의 정부 각 부처는 입으로만 애국을 부르짖는 꼴이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국민의 정부부터 4.3평화공원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이 국방기념관 건립비는 4.3위령 사업비 총액 3,000억원의 1/10조차 들어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외면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이는 모슬포의 바람만을 더욱 매섭게 하는 것 같았다.
제주올레 제11코스는 모슬포 시가지를 벗어나 북쪽으로 대정여고를 지나게 된다. 현 대정여고 자리는 98육군야전병원이 있던 곳이었다. 육군제1훈련소의 의무대와 전쟁 부상병 후송병원을 겸해 설치된 육군 98병원은 50여개동으로 구성되었었는데 동 장소에 1964.3 대정여고가 들어서면서 모두 철거되고 현재 1개동이 남아 대정여고의 가사실습실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어떤 여고에 괴담이 없을까만은 특별히 대정여고 괴담은 한 때 애절했다고 한다. 98야전병원에는 훈련부상병을 비롯해 포탄에 의해 신체가 절단된 장병과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 부상자 등 여러 유형의 환자가 많았지만 당시의 의료 수준은 열악할 수밖에 없는 형편임에 따라 사망자가 상당수 배출되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에 죽은 사람에 대한 정식 장례식은 없게 된다. 더더욱 신원확인이 안 되거나 연고지와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서의 시신 인도도 사실상 불가능함에 따라 현장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사망한 군인들은 대부분 병원 옆의 노른고지화장터에서 화장을 한 후 인근(모슬봉)에 뿌려졌고 어떤 경우에는 집단매장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매우 애석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대정여고 건물을 지으면서 많은 유골이 나와 인부들이 겁을 먹었다는 말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러한 상황이니 대정여고에 어떠한 괴담이 나올 것인지 충분한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소풍가는 날이 오면 비가 온다는 가장 기본적인 풍문부터 가사실습실엔 유령이 떠돌고 아직 땅에 묻혀있는 유골들이 맞춰져서 밤에 춤을 추는가 하면 특히 총각귀신들은 여고생 모습에 반해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등의 괴담이 난무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할 것이다. 대정여고는 교화인 수선화를 교정에 많이 심었다. 수선화는 엄한 겨울을 보낸 후 이른 봄에 순박한 꽃이 피며 아픈 과거를 버리고 희망을 기다린다. 교목인 동백도 울다 토한 핏빛을 벗어나 맑은 내일을 표현한다. 한 맺힌 군인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대정여고 학생들이 밝은 표정을 지니고 즐거운 학창생활을 하며 수시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하는 등의 성과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대정여고 옆에 또 하나의 애국적 상징물이 있었다. 아무도 알수 없는 노른고지 화장터 나무숲속에 방치되어 있던 육군 군의관 충혼비다. 98야전병원에서 진료활동을 하다가 부상병에서 전염병이 옮아 순직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의헌 소령, 윤기만 하사, 박희덕 일병을 추모하기 위해 단기 4288.10.31 육군병원 장병이 세운 것이다. 후면에 “겨레 위해 몸 바친 제 영위의 공적은 기리 조국 위해 바치오리” 라고 명기된 동 비석(좌대 높이 96cm, 본비45×16×101cm)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비석을 발견한 어느 의사가 관계기관에 내력에 대한 의견문의를 해 보았지만 모른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제주도의사협회가 동 충혼비의 순직 사항을 확인하게 되면 매년 군의관의 공적을 현양하는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도 참 애석한 일이다.
올레길은 대정여고 뒷길로 하여 모슬봉으로 오른다. 제주도 조랑말을 상징하는 간세(느리고 게으름뱅이를 의미하는 간세다리에서 따온 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길을 따라 걷게 된다. 이곳은 바람코지라고 한다. 일년 내내 바람이 몰아치는데 특히 겨울철에는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는 미친바람이 넓은 밭을 통과하면서 많은 폐기 비닐을 가져다가 모슬봉 인근의 나뭇가지에 얼기설기 걸고 굿을 한다고 한다. 모슬봉 북서쪽은 제주도 남쪽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라고 하는 말과 연관시켜 보니 섬뜩한 장면이었다. 모슬봉은 조선시대 봉화대가 있어 조선군인이 관리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여 있었으며 해방후 미군이 잠시 있다가 현재 공군 레이더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11코스 올레길은 기지 옆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모슬봉에서 모슬포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보게 된다. 넓은 땅을 보면서 과거의 역사와 인간의 생과 사, 그리고 국가 및 안보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와 연관되어 희생되었던 혼을 회상하면서 방금 지나며 보았던 비닐걸친 나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모슬포를 떠도는 애국의 혼들이 바람되어 나뭇가지에 걸쳐진 비닐을 마구 흔들어 대는 것 같다.
나 아직 여기 있노라고!
유유에세이~ "바람의 개똥철학" - 제주올레 11코스 바람이 된 애국의 혼 입니다.
유유시인님이.. 제일 신경써서.. 쓴 작품이기도 하구요..
우리내 아픈 역사를.. 실감하는... 가슴 찡~ 해지는 작품입니다...
첫댓글 사진은 실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