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기록
․통산기록 1,949경기 출장 통산 타율 0.282, 340홈런, 1,145타점,
1,771안타
․1990-1992 3년 연속 홈런왕 (1992년 한시즌 최다홈런 41개 기록)
․1988, 1990-1992, 1995 골든글러브 수상
․1991-1992 시즌 MVP
․1999 소속팀 한화 이글스 한국시리즈 우승
․2006-현재 한화 이글스 코치
야구에도 학벌이 필요할까? 프로야구 초창기 활약한 대부분의 스타선수들은 대졸선수였고 고졸출신은 일부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정식계약도 못한 연습생이 팀의 주전을 넘어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해낸 선수가 있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던 보통 선수에서 한국의 홈런왕이 된 선수, 바로 장종훈이다.
가. 연습생에서 한국 최고의 타자가 되다
장종훈은 아마시절 별볼일 없는 선수였다. 1986년 제7구단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하여 한 명의 선수도 아쉬웠던 입장이었음에도 장종훈은 정식계약조차 못하고 연봉 300만원에 연습생 신분으로 빙그레에 입단하게 된다. 이듬해인 1987년에도 여전히 장종훈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오히려 퇴출대상으로까지 분류되었지만 당시 배성서 감독의 배려로 겨우 팀에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광길 선수가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마침내 선발출장 기회를 얻게 된다. 데뷔 첫해 성적은 94경기에 출장해 타율 0.270, 8홈런, 34타점을 올리며 주전 유격수가 된다.
1988년에는 비록 타율이 0.241로 낮아지지만 12개의 홈런과 57타점으로 유격수 부문에서 골든글러브를 받게 되고, 1989년에는 타율 0.254, 홈런 18개, 46타점을 기록하며 서서히 빙그레 이글스 타선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에는 28개, 1991년에는 35개, 1992년에는 41개의 홈런을 치며 3년 연속 홈런왕이 된다. 더욱이 한 시즌 30개의 홈런조차 넘기기 힘들었던 시절에 장종훈의 1992년 41개의 홈런 기록은 놀라울 뿐이었다. 수비 위치도 당초의 유격수에서 1루수로 옮겼고 1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장종훈의 활약과 함께 빙그레구단도 최강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해태의 벽 밖에 번번히 분루를 삼키고 만다.
나. 부상 후 평범한 선수로
소속팀인 빙그레 이글스가 팀명을 한화 이글스로 바꾼 1993 시즌 장종훈에게 뜻하지 않은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부상이었다. 1993년 겨울내내 따라다니던 왼쪽 무릎 부상으로 동계훈련이 부족하여 17개 홈런의 부진한 시즌을 보냈고, 1994년에는 고작 10개의 홈런만을 치는 최악의 4번타자가 된다. 1995년에 타율 0.326 홈런 22개, 78타점으로 부활하는 듯 보였지만, 1996년에 타율 0.266, 홈런 15개, 57타점, 1997년엔 타율 0.293 타율, 홈런 22개, 76타점, 1998년에는 118경기, 타율 0.275, 홈런 17개, 66타점을 기록하면서 평범한 타자로 전락하고 만다. 장종훈의 부진과 함께 소속팀 한화구단도 예전의 다이너마이트 강타선이 위용을 잃어버리고 만다.
다. 소속팀의 우승
장종훈으로서는 1999 시즌을 잊을 수 없다. 자신의 전성기 시절에도 이루지 못했던 팀 우승의 꿈을 마침내 이뤘기 때문이다. 1999 시즌 한화 이글스는 로마이어-데이비스 용병듀오와 함께 중심타자 장종훈 등을 앞세워 탄탄한 공격력을 형성했고, 구대성-정민철-송진우 등의 라인을 구성하며 막강투수진을 자랑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마침내 우승컵을 거머쥐고 된다. 이 당시 장종훈도 126경기에 출장하여 0.284 타율, 홈런 27개, 86타점을 기록하며 1992년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 더욱이 비록 포스트시즌의 전체적인 성적은 부진하였으나 맏형으로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줬고,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만루홈런,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역전 희생타를 기록하며 중요한 시점마다 중심타자로서의 제몫을 톡톡히 하였다.
라. 기록의 사나이 행진, 그리고 은퇴
장종훈은 2005년 은퇴할 때까지 개인통산 최다인 1,949경기에 출장해서 6,290타수 1,771안타로 통산 타율 0.282, 340홈런, 1,145타점을 기록했고, 홈런과 타점, 득점, 경기, 타수, 안타, 4사구에서 심지어 삼진까지 타격의 각종 기록에서 통산 1위에 올라 있는 말 그대로 '기록의 사나이' 행보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의 페이스는 점점 하향곡선을 그린다. 2000년에 타율 0.264, 홈런 28개와 81타점으로 어느정도 제몫을 하였으나 2001시즌 타율 0.273 홈런 15개 54타점을 기록했고, 2002시즌은 타율 0.248 홈런12개 42타점 마크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팀 기여도는 얼마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장종훈 계륵론이 대두되었다. 은퇴의 시기를 두고 고민할 때가 오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2003시즌 새로 한화구단의 사령탑을 맡은 유승안 감독은 팀의 체질개선을 선언하고 장종훈을 은퇴시킬 결심을 한다. 당시 한화구단에는 신예 김태균이 4번타자로 급부상하던 시기로 수비 포지션 1루가 겹치던 상황이었다.
마침내 장종훈은 은퇴를 선언했고 KBO는 이례적으로 2005 올스타전의 특별선수로 그를 초청했다. 장종훈은 2005년 9월 15일 대전 홈경기를 마지막으로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쳤다. 한화구단에서도 그동안의 장종훈의 기여도를 고려하여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은퇴식을 준비해 주었는데 그 동안 사랑해 준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무료입장경기로 열었다. 구장은 만워사례를 이뤘고 경기장 좌측 외야 상공에는 그의 넘버의 35가 적힌 유니폼이 펄럭이고 있었다. 2회 말, 7번 타자로 타석에 나서자 관중들은 ‘Forever 35’가 적힌 수건을 펼쳐 들었다. 그의 마지막 타격이 끝나자 1만명이 넘는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5회 클리닝 타임 후, 20여분간 ‘홈런왕’ 장종훈의 은퇴식이 치러졌다. 19년의 선수생활 내내 그와 함께했던 등 번호 ‘35’번은 이날 한화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오픈카를 타고 홈 구장을 한 바퀴 돌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동료들의 헹가래와 함께 많은 이들이 ‘역대 가장 화려한 은퇴식’으로 기억하는 행사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장종훈은 은퇴이후 “프로야구에 첫발을 내딛던 연습생의 마음으로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은퇴사처럼 한화의 2군 타격코치가 되었으며 2008년부터는 1군 코치로 승격되었다. 지도자로서의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마. 촌놈 장종훈
장종훈이 1992년에 기록한 한 시즌 최다 홈럼 41개는 이미 이승엽이 56개로 늘려놨고 수많은 타격관련 통산기록도 양준혁에 의해 깨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위대함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꼭 시골에서 금방 올라온 학생처럼 너무 착하게 생기고, 심성도 너무 착해 '촌놈'이라는 정겨운 별명도 가지고 있는 장종훈 선수는 기록도 기록이지만, 유일무이한 연습생의 성공신화를 이루며, 2군에 뛰고 있는 젊은 선수한테 많은 꿈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2군에서 연습생으로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역할을 했던 장종훈이 한국 최고의 타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피나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로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었다. 고졸출신 연습생선수로 들어와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대기록을 남긴 장종훈, 그는 진정 한국프로야구가 낳은 최고의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