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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는 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다. (10)
주 제 : 예수님
성 경 : 막14:60-65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교회
논 지 :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목적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설교요약
1,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 하셨다.
2,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해방자의 길을 가지 않으셨다.
3, 빌라도는 시류에 영합했다.
4, 제사장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예수님을 처형했다.
개역 막 14: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는~이다」(I Am)라고 일곱 가지로 자신을 계시(啓示)하셨습니다.그런데 성경에는 이 일곱 가지의 자기 계시 선언 이외에도,예수님이 간접적으로 자신을 밝히신 부분이 있습니다.특별히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사흘 동안에 자신에 대해 밝히신 세 부분이 있는데, 가룟 유다와 빌라도와 가야바의 반응이 각각 포함되어 있습니다.본문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지금까지 우리가 본 예수님의 「나는~이다」라는 말씀의 핵심은“예수님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권위”라는 선언이었습니다.이 권위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이 땅에서와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이 응답의 문제는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즉, 주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실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가룟 유다와 빌라도와 가야바는, 예수께서 하나님 되심의 권위를 주장하셨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우리는 이들의 반응 속에서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제 이 세 경우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유다의 반응
요한복음 18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1절).이 구절에서 <동산> 은 겟세마네 동산을 가리킵니다.“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2-5절).이 말씀을 얼른 읽으면, 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 잡아갔다는 정도로만 넘어가기 쉽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을 좀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때는 밤이어서, 등(燈)과 홰를 가져왔지만 예수님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이때 예수께서 물으십니다.”누구를 찾느냐?”『나사렛 예수를 찾소.』 이때 예수께서 권위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내로라”(I AM).이 “내로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나 다”라고 하는 말처럼 대단히 평범하게 들릴지 모릅니다.그러나 이것은 매우 당당한 대답입니다.뿐만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예수께서 자기의 정체를 나타내신 이 말씀 앞에서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이것은 보통의 반응이 아닙니다.땅에 사정없이 엎드러질 정도로 기절초풍하는 장면입니다.도대체 그 말씀이 그리도 대단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내로라”는 말은 희랍어 성경에서 “에고 에이미”(������Δβ´ψ δ������θλθ)라는 두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영어로는 “I am” 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만 쓰여지던 단어 입니다.모세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나는 스스로 <있어서> 있는 자다”(「I AM」 THAT I AM)라고 대답하셨습니다.이때 쓰인 “I AM”의 표현을 지금 예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지금 군병들이 나사렛 예수를 잡으러 왔습니다.“나사렛 예수가 어디 있소?”이때 예수님이 그냥 “내가 여기 있다” 정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인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그러니까 이들이 깜짝 놀라 몸둘 바를 모르고 땅에 엎드러진 것입니다.“나는 야훼다.여호와 하나님이다”이것은 어마어마한 선언입니다.
유다의 배신
지금 유다는 왜 이 동산까지 올라왔습니까?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입니다.물론 돈에 대한 욕심도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판 가장 중요한 동기가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더 중요한 동기는 아마 자기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본래 가룟 유다는 셀롯인 출신으로 열심당원이었습니다.지금으로 말하자면 민족주의자입니다.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그 민족을 최고의 이상(理想)으로 삼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가룟 유다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18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와 기대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가룟 유다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우선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여기에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예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이분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다니!”그들이 보는 앞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사람들은 전부터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병자를 고치는 등의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을 보아 왔고, 그분이 메시야일 것이라는 기대도 했었습니다.그러나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모든 열망을 결정적으로 부풀어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0절부터 보십시오.“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10절).살아난 나사로를 죽일려고 모의했습니다.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1절)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12절부터는 장면이 바뀝니다.이른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入城)사건입니다.“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12절).무리들이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이것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 다음에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그냥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죽은 사람을 살리신 자로서 예루살렘에 오시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그 배경을 오늘의 현실로 옮겨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쇼가 아니라, 정말로 죽은 사람을 살리신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신다면 교회가 미어 터지도록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왔습니다.“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절).“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16,17절).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과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할 때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했습니다.이 말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 압제하에 있었습니다.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생활을 했듯이 말입니다.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열심당원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분께 당연히 정치적인 회복을 기대할 수있지 않았겠습니까? 피끓는 열심당원이었던 유다의 마음 속에도 정치적인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그들이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세주로서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그들이 요구하는 메시야는 구세주가 아니라 혁명가였습니다.그들은 로마를 쳐부수고 자기 민족을 그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인 메시야, 정치적인 혁명가를 원했던 것입니다.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높았습니다.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마음만 먹으면 이스라엘의 정치적 영웅이 될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였습니다.군중들은 애국심에 불타 있었고 정치적인 메시야가 불만 당기면, 금새 사방으로 쏟아져나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 그런 판이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그 기회를 무너뜨리셨습니다.민족의 영웅이 될 정치적 메시야의 길을 가시지 않습니다.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부각시키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분은 민중 봉기에 의한 혁명가의 길을 걸으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구세주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예수님은 선동된 사람들의 응집된 힘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시려 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그러더니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힘없이 내어 놓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매우 실망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제자들입니다.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열심당원 출신의 사람들이 더 낙심했을 것입니다.시므온도 그랬겠지만, 가룟 유다는 더욱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대부분의 제자들이 정치적 메시야像에 계속 연연해 있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모두들 다시 모여들었습니다.사도행전 1장 6절에 무명(無名)의 한 제자가 주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우리는 이 말에서 “그때는 안 하셨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짜 찬스가 왔어, 부활하신 그분이 이제는 정말 뭔가를 하시겠지”라는 정치적 메시야像에 대해 끈끈하고도 집요한 기대가 제자들에게 여전히 팽배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그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하여간 가룟 유다는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당신이 여호와라면 이 민족을 이 수치와 굴욕에서 해방하셔야 합니다”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그게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을 이용한 민족 해방의 꿈은 멀어져만 갔습니다.치밀어오르는 배신감을 억제키 어려웠으나, 아직은 실낱 같은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는지 모릅니다.“예수를 팔자.막바지의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혹시 비장의 카드를 던질지도 모르지 않는가!”이런 생각으로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 정치가들과 흥정했습니다.그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장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군병들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왔을 것입니다.군병들이 묻습니다.“나사렛 예수가 누구요?”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내가 그로라!』(에고 에이미!)이 얼마나 놀라운 기회입니까? 예수께서 한 번 더 분명하게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계시하셨습니다.가룟 유다가 생각한 대로,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 같습니다.잠시 긴장하며 기대 가운데 숨을 죽입니다.이제야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순순히 잡혀가셨습니다.혁명이 아닌 죽음의 길로 가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기대하는 그 방법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특권이 없습니다.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지만, 반드시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그 능력을 행사하시지는 않습니다.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도 역시 능력의 나타남이라는 사실입니다.십자가를 부수고 로마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모습만이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놀랍게도 사람들을 구원하고 감동시키며 세계를 변화시키셨던 것입니다.예수님은 가장 弱한 자로 오신 가장 강한 하나님이십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십자군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힘으로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그게 아닙니다.외적인 힘은 절대의 부패를 낳습니다.예수님은 오히려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기 원하셨습니다.자신을 못박음으로, 자신을 희생함으로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 주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혈기 왕성한 민족주의자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운동권 출신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말입니다.유다는 이 사건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그가 주님의 손등에 입맞추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떠나갑니다.하지만 주님은 이 제자를 붙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아마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아픔으로, 사랑했던 제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다.주님이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했지만 이 마지막 기회 앞에서도 회개하기를 거절했던 유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멸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간 유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 앞으로 달려오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그분이 자신의 깨어진 꿈을 이루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그러나 신앙 생활의 여정 중에 그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돌연히 신(神)의 무의미를 선포하고 내팽개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그들이 바로 유다의 후손입니다.당신은 주님께 어떤 기대를 걸고 계십니까? 혹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유다와 같은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빌라도의 반응
요한복음 18장에 기록된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를 들어보겠습니다.빌라도는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이었습니다.“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官庭)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33,34절).예수님의 질문이 아주 흥미롭습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5,36절).
“네가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대답은“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였습니다.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정치 왕국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만일 예수께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기 원하셨다면, 그분은 이 로마 병정들과 빌라도의 군대들을 능히 물리치셨을 것입니다.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내가 왕이니라」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37절).
“내가 왕이니라”(I am a king)는 예수님의 대답에는 “I Am”이라는 선언이 한 번 더 나옵니다.그러나 이미 주님이 전제하신 것처럼, 이 왕은 이 땅의 정치가들이 자리를 탐하는 세속 왕국(kingdom)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왕국, 즉 하나님 나라의 왕입니다.사랑의 원리와 세계를 향한 비전을 품고 확장되어 가고 있는 보이지않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께서는 “내가 그 나라의 왕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이에 빌라도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38-40절).빌라도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러나 빌라도는 적어도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마침내 십자가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데는 나름대로의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라도의 인기 영합
빌라도는 시류(時流)에 편승하고 인기에 영합하여 인생을 살던 사람입니다.즉, 확고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철학을 빌려서 사는 사람입니다.그는 군중들의 박수 갈채에 도취하고, 무엇이 옳든 간에 그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 정치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그래서 군중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그리스도 자신이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지 않고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서였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거절합니다.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놀랍게도 빌라도와 똑같은 이유로 주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내가 예수를 믿으면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할지 몰라.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질지 몰라”그들은 빌라도의 후예입니다.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가야바의 반응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기록된 요한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47절).나사로가 부활한 후의 사건입니다.여기에 등장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단순한 종교인들이 아닙니다.특별히 대제사장들은 막강한 정치적 힘을 행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정치가들은 나라를 올바로 이끌어가야 할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라를 혼란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 정치가인 경우가 많습니다.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몇 사람이 모여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답니다.먼저 의사가 말했습니다.“가장 오래된 직업은 의사다” 다른 친구들이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으실 그때부터 수술이 있지 않았는가?”그러자 옆에 있던 건축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합니다.“아닐세,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세계를 설계하실 때부터 건축업은 이미 있었네”깊은 사색(思索)에 잠겨 있던 철학자가 무겁게 입을 열며 말합니다.“자네도 모르는 말일세.성경에 보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땅이 혼돈했었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혼돈(chaos)이라는 철학적인 관념이 존재했네”그때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정치가가 한바탕 웃으며 말합니다.“아니, 이 사람들 여태 그걸 모르는가? 그 혼돈을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우리 아닌가? 흐흐흐…”
대제사장들은 당시에 일종의 정치가들이었습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8절).나사로가 살아난 후 주님의 인기는 그만큼 높았습니다.그것 때문에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던 사람이 바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가야바가 등장하여 유명한 말을 합니다.“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50절).이 말은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는 저 예수를 죽음에 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52절 이하를 보십시오.“또 그 민족만을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2,53절).그러니까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도 나사로의 부활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이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인 마가복음 14장으로 돌아갑니다.“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60절).이 대제사장이 바로 가야바입니다.예수님을 심문하는 그 마당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예수님에게 대제사장 야바가 “왜 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61절).예수님의 무거운 침묵입니다.그는 자신을 구태여 변호하고자 하지 않으십니다.왜냐하면 자신이 십자가를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그분은 그 길을 가셔야 합니다.변명해야 할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사실상 이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치밀하게 각본을 짜 놓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단서는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그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맹점(盲點)이었습니다.증거가 없으면 재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그래서 대제사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기 위해 이렇게 되묻습니다.이것이 유명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질문입니다.“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물음입니다.찬송받을 자,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가야바는 제발 이 말에 대답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며 묻는 것입니다.그래서 만약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면, 영락없이 신성 모독죄로 몰아부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참람하도다”라는 무서운 선언이 그들에게서 내려질 수 있는 순간입니다.그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62절).여기에 다시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선언을 다시 한번 하시고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은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63절).인간으로서 범할 수 있는 최대의 범죄가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일 것입니다.그것은 최대의 범죄입니다.이것은 가장 끔찍한 죄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그는 자기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합니다.“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이런 결과가 올 줄을 뻔히 알고 계셨을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내용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예수께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를 분명히 보시면서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시고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64,65절).
예수님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그런데 지금 그분이 저주를 받고 계십니다.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이 이제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모욕과 무시와 거절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사람들의 조롱감이 되어서 그들 앞에서 치욕을 받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모습을 지켜보십시오.가야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야바의 기득권 수호
가룟 유다는 주님에게서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배신감에 사로잡혔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선언과 그 권위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빌라도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지 못했습니다.그는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인기를 위해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가야바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밝히는 이 엄청난 선언의 순간에도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신성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잘 알았으면서도, 가야바는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바치기를 거절했습니다.왜 그랬을까요? 요한복음 11장과 관련시켜서 왜 가야바가 나사로의 부활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로 그분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습니다.대제사장들은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인기가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이것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에도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어쩌면 권력 유지가 불가능 해지리라는 두려움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이렇게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자,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앞에 굴복하기 보다는 그분을 죽이기로 음모했던 것입니다.당신에게는 가야바와 같은 모습이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메시지를 계속 선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가야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그들은 예수 믿으면 손해본다고 생각합니다.또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모든 것에서 바보가 될 것 같습니다.이 기득권의 이해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가야바의 후예들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적 용
“나 다!”“I AM!”“에고 에이미!”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하나님 되심과,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가룟 유다, 빌라도, 가야바의 반응은 과거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오늘날에도 우리는 복음 가운데 선포되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세 인물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 위치가 흔들릴까봐 또는 손해를 입을까봐 그분을 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더 슬픈 것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빌라도처럼 사람들에게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인간의 올무에 매여 죄악의 탁류 속을 헤매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아니 가룟 유다처럼 자기의 꿈을 성취하려 했다가, 자기 생각대로 안 되자 배신감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판 유다의 후예들은, 오늘 우리의 거리에서도 별로 낯선 얼굴들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다”예수께서는 지금도 당신 앞에 다가오시며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십니다.그분이 하나님 이시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그냥 예수님 이라고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심판자이신 그 하나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이시라면 그리고 당신이 그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 안에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이 순간 그 하나님의 권위 앞에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나! 나는 그분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그러나 누구든지 그분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분은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놀라운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이제 그분의 거룩과 권위 앞에서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그분이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십니다.우리는 너무나 자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갑니다.그러나 우리가 모시고 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이 신비, 이 놀라움, 이 경이!“예 수! 하나님!”
예수님이 단순한 우리의 친구라면, 우리는 그분의 의견을 묵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존경받을 만한 단순한 스승 정도라도 그분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분이 하나님 이시라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그런데도 인간적인 욕망과 이기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살았던 일 세기의 죄인들이 있습니다.아니 지금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행여 당신 자신의 모습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환한 미소로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항상 품어주기 원하십니다.지금 주님의 품에 안겨, 주님 안에 늘 거하면서 풍성한 삶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오, 주님! 제게 남아 있는 날 동안에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항상 인정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주 예수께서 진정 저의 하나님이 되시고, 제 삶의 주장자가 되시길 원합니다.주께 순복하고 예배하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제 목 : 다니엘의 사람됨. (11)
주 제 : 종말론
성 경 : 다니엘1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 교회
논 지 : 다니엘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우상 생활을 강요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책은 요한계시록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문자나 개념, 혹은 사상 등이 상당 부분 다니엘서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장1,2절은 다니엘서의 서론입니다. 유다 왕국의 최후를 보여 주는 대단히 비극적인 서론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다니엘서의 역사 철학이 드러나 있습니다.“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位)에 있은 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유다 왕국의 멸망과 최후는 다분히 유다 백성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였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교도소에 갇힌 수인(囚人)들도 일을 합니다. 아마 봄철이 되어서 씨를 뿌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간수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어느 수인에게 “무엇을 뿌리고 있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죄수가 대답했습니다.『뿌리는 것이 아니라 거두는 것입니다.』아마 자기의 행위대로 거두고 있다는, 즉 죄의 값을 지불하고 있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확실히 1절은 비극적인 사건을 보도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닙니다. 2절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주께서”라는 단어입니다.“<주(主)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神)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寶庫)에 두었더라”하나님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 가고 성전은 다 불에 타고 성전에 놓여져 있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의해서 바벨론 땅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아마도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섬기는 신(神)의 우월성을 자기 백성들에게 선전할 목적으로 전 기구들을 바벨론 땅까지 실어 왔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유다 민족의 대단히 슬픈 종말이요 비극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단순히 비극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글리슨 아처라는 유명한 신학자도 다니엘서의 중심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니엘서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이 이 역사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슬프고 슬픈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 본문의 사건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인생을 안이한 태도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불신자들과 역사 앞에 조롱거리로 삼으시기도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세속 사가(史家)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보면서, 이제 하나님의 역사는 끝났다고 단정지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징벌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징벌이 반드시 그들의 최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다만 새로운 내일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위해 징계라는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비록 유다 백성은 그들의 나라를 상실하여 포로요 노예요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될 것입니다. 결국 유다 백성들이 경험했던 이 비극적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셨던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다니엘서의 주제는 실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불신앙을 선택하느냐 하는, 신앙과 불신앙간의 전쟁터다”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다니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과 함께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
첫째 시험/신앙고백에 대한 시험 : 유다 백성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시험은 그들의 이름을 개명(改名)하라는 압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벨론 땅에 끌려간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입니다. 또 그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들의 본명이 아닙니다. 1장6절을 보십시오.“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니”(6,7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포로로 끌려간 후에 개명된 이름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입니다.『엘』이라는 말은 언제나“하나님”을 가리키며 『단』은 “심판”을,『니』는 소유격 “나의”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합치면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가 됩니다. 그의 이런 이름 속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부모의 신앙적인 기대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도 이름에 대해 상당히 집착하지만 유대 민족도 이에 못지 않아,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이름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에는 개명을 해서라도 삶과 이름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다니엘”이것은 다니엘 가문의 신앙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나의 판단자가 되신다”
그런데 그 이름을 벨드사살로 바꾸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벨”이라는 말은 이방신(異邦神)의 명칭이며 이 신은“느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대의 보호자 벨. 그대의 보호자 느보”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의 우상신이 그대의 보호자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기분 나쁜 이름을 다니엘에게 준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벨의 왕자”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벨드사살은 이방신과 관련된 명칭입니다.『하나냐』란 이름의 뜻은“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냐”입니다. 혹은“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이름을“태양신에게 배운다”는 뜻의 “사드락”(<락>은 우상신이었던 태양신의 이름)으로 개명하게 했습니다. 결국 “이제부터 이방신에게 배우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미사엘』은“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메삭으로 바꿉니다.“삭크”는 정욕과 욕심의 신의 이름입니다.“욕망의 신과 같은 자가 누구랴”마지막으로,“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뜻의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바꾸었습니다. 『느고』는 바벨론의 또다른 우상신인 달의 신의 이름이며 『아벳트』라는 말은 “종”을 뜻합니다.“너는 느고의 종이다”
이상에서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들을 바벨론의 우상신과 관련된 이름들로 바꾼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과거 일본이 우리의 국민성을 말살하기 위해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했던 것과 비슷한 사례를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각자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의 유망한 청년들은 개명부터 강요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막 5:9)고 물으셨을 때 그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귀신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름이 군대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자아를 상실한 현대인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 줍니다.
이름을 바꾸라는 유혹과 시험에 대해 다니엘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우선 중요한 사실은, 비록 자신의 이름이 정복자의 입장에서 바뀌어지기는 했지만 다니엘이 그것을 받아들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니엘을 틀림없이 벨드사살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다니엘로 자처했습니다. 그 증거가 다니엘서 8장1절에 나옵니다.“<나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이상(異象) 후 벨사살 왕 삼 년에 다시 이상이 나타나니라”그는 자기 자신을“나 다니엘”로 호칭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다니엘이었던 것입니다. 8장15절을 보십시오.“<나 다니엘>이 이 이상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마귀는, 어두운 역사는, 다니엘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끊임없이 압력을 가했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다니엘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적인 영향으로, 혹은 그간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이루어진 자기의 존재됨에 대한 확신으로,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판단자라는 신앙고백 앞에 여전히 성실했던 것입니다. 9장2절을 보십시오.“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다니엘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다니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나 다니엘”이라고 강조한 데에서 자기에게 가해진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한 진정한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다니엘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새로운 언약의 시대, 곧 신약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저와 당신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이름, 그리스도인. 당신은 혹시 이 이름을 포기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 되기를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를 나타내는 삶 앞에 충성스럽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신앙고백에 대한 시험에서 훌륭하게 승리하는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둘째 시험/신앙정절에 대한 시험 :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을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다니엘이 이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단순히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의 태도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의미를 해석하려는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바벨론의 문화적인 혹은 종교적인 습관에 따라 왕의 상에 오르는 음식은 먼저 바벨론의 우상신에게 바쳐진 후에 진상(進上)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의 진미를 먹으라는 요구에는 그저 “포도주를 마실 테냐 안 마실 테냐”“고기를 먹을 것이냐 안 먹을 것이냐”라는 표면적인 질문 이상의 저의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즉, 포도주를 마시고 진미를 취함으로써 이제는 바벨론의 우상신에게 나도 마음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다니엘은 도저히 그 요구를 수락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불신자들과 어울릴 때, 특히 남자들이 불신자들로부터 “한잔 하자”는 유혹을 받았을 때, 함께하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그러한 제안에는 저의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잔을 받아들일 때 불신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그렇지 별수 없지. 네가 무슨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순히 마시느냐 안마시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확신 혹은 신앙의 정절에 관한 시험이 그 배후에 숨어 있기에 우리는 그러한 제안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른 데에서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저의를 꿰뚫어 보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이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사건을 중심으로 시험을 받으면서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징계와 시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내일의 새로운 역사의 불씨를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등장시키셨습니다.
다니엘의 사람됨
첫째로, 다니엘은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8절).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즉, 마음에 확고한 목적을 정했다는 말입니다. 이때 다니엘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아십니까? 불과 16세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니엘의 출생 연도는 B.C. 621년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그 첫번째 시기가 B.C. 605년입니다. 다니엘도 이때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나이를 계산해 보면 16살이 됩니다. 아니, 16세 된 소년이 이런 확고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니... .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이 그런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가정에서부터 가치관에 입각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청소년부에서 수양회가 있었는데 우리 학생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강사가 한 말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유산을 남기는 것은 죄다. 부모의 유산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그때 학생들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의 유산을 받을 것을 진지하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관에 입각하여 우리의 자녀를 교육하고 있습니까? 그 어린 나이의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의연함을 보였습니다. 이런 다니엘의 모습에 비춰 볼 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둘째로, 다니엘은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 우리는 다니엘의 삶 속에서 이미 그가 오래 전부터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진미와 포도주를 다니엘에게 건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이었습니다. 눈 딱 감고 한 잔 받아 마시기만 하면 출세의 가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세보다도, 명예보다도, 황금보다도, 권력보다도 소년 다니엘에게는 자신이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자신의 삶에서 거룩함을 얼마나 열망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저와 당신에게 만일 출세의 가도가 열리고 명예의 보좌가 눈 앞에 보이고 황금이 굴러 들어올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모든 가능성 앞에서도 다니엘처럼 자기의 깨끗함을 견고하게 유지하기를 원할 이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셋째로, 다니엘은 겸허한 사람이었습니다. : 이것은 12절 이하에서 그가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에 결정한 바가 있으니까 당신네들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오. 물러가시오”라고 항의하지 않고 비록 자신이 견고한 확신 가운데 있다 해도 그 확신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온유하고 겸허한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습니다. 12절에서 그는“청하오니”라는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합니다. 원문에는 이 말이 최고의 존경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써 씌어져 있습니다.“<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12,13절). 제 3의 방안을 제시하면서도 아주 겸손하고 온유하게 말하고 있는 다니엘의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확신에 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한 바를 펴나가는 자세나 태도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여 결국 선한 의도마저도 이해받지 못하는 비극을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이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몇 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마지막 증언 모습을 비디오로 보았습니다. 그의 발언에 항의하는 사람의 메시지와 내용이 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그것을 겸손치 못한 자세로 피력했을 때 결국 그 메시지마저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의 결단력과 거룩함과 겸허, 이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삼위일체로 조화된 인격의 모습입니까? 미국 주일학교 노래 가운데에는“다니엘이 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다니엘이 되라 홀로 서라 굳게 목표를 정하라 그 목표를 알게 하라”소년 다니엘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당신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도전을 줍니까?
세속 사회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오늘 이 시대는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보다도 훨씬 더 세속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역사는 더욱더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니엘 시대 후로 바벨론 도성은 언제나 세속화된 도시의 한 전형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 이전에도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몇 차례 나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점차 물량주의적이 되고 쾌락과 죄악이 만연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면할 수가 없는 세속 도시의 상징으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다니엘 시대 이후입니다.
저 유명한 교부 성(聖)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시』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두 개의 도시를 제시합니다. 땅의 도시를 상징하는 바벨론과 하늘의 도시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이 그것입니다. 바벨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점입니다. 이기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끊임없이 오염시킬 것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점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의 삶의 최고 명제로 삼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비로소 새로운 예루살렘일 수 있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화된 도성에서 절망하지 않고 이 시대를 힘차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도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시』라는 책에서 어거스틴이 내린 유일한 결론입니다. 어거스틴도 그 당시 자기 조국이 서서히 망해 가고 있는 징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조국의 멸망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궁극적인 소망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지도자였던 느부갓네살은 세속 사회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의 한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4장28절 이하를 보십시오.“이 모든 일이 다 <나> 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28-30절). 이 짤막한 구절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나”입니다. 자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냥 왕이라고 말해도 좋을 터인데 꼭 “나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우리도“내가”라고 하면서 자꾸 자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추해 보입니다. 끝없는 이기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높이고 자기 왕국을 자랑하는 그 순간에 몰락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도성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로서 짓밟히는 연약한 민초들이었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그리고 지극히 적은 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도도하게 흐르는 세속화와 이기심의 물결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역사 속에 그분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고 떠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해 그들을 역사의 심판의 틀 안에 두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내일을 만들기 위해서,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이 지극히 적은 소수의 몇 사람들을 통해서 노예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드라마를 지켜 보십시오. 아니 이 짤막한 드라마를 통해서 세계 역사의 미래를 예언하는 다니엘의 위대한 비전을 만나 보십시오. 그 비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사용하실까요?
“하나님, 바벨론 왕국 못지않게 자기를 높히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혈안이 된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그리고 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주어진 짤막한 이 한 평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자기 만족을 위해서 허우적거리다가 의미 없이 쓰러지는 인생을 살지 않게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