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서 지역유명인사와 종친들이 참여한 가운데 함평이씨퇴로서당 기적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기적비는 1781년 이곳에 거주하신 함평이씨 21世 의인(宜仁) 할아버지께서 ‘집안을 일으키려면 자제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자신의 전답과 산을 희사하면서 후손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서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시고 서당의 계속적인 유지를 위해 형제숙질간인 중인, 경인, 찬운, 환운 祖께서 서당계를 조직하여 돈을 모으고 힘써 1781년 학당을 신축하고 주변에 나무와 풀을 기르는 등 서당의 초석을 다져 관내에서 가장 큰 서당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분들의 장남과 장손이신 능운, 승운, 유빈, 유철, 유량 祖 등께서 代 를 이어 계원이 되어 1800년에서 1806년 사이 서당 뒷산에 나무와 풀을 베어 팔고 심지어 기와를 구워 팔아 농지를 구입하여 소작료를 받아 서당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서당을 창설한지 13년이 지난 1794년 승운祖께서 이 서당출신으로는 최초로 무과에 급제하는 등 설립 이후 100여년 동안 과거합격자가 13분을 배출하여 이중 6분이 당상관이 되셨으며 그 외에도 많은 문인과 유학자. 효행자와 독립의사 및 관료들이 배출되었다. 집안에서 공동으로 서당을 설립 운영하여 후손을 교육시켜 이와같이 성공한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드문 경우이다.
이에 후손들은 선조님의 높은 뜻을 오래 기리기 위하여 퇴로서당기적비수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에 제막식을 거행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우리 함평이씨가 이곳 퇴로리에 자리를 잡게 된 유래를 기록한 입촌 유래비도 함께 건립하였습니다.
이곳에 거주하시는 우리 종친들은 전남 나주에서 출생하시고 병조참판을 역임하신 11世祖이신 참판공파조 종수(從遂) 할아버지의 후손이십니다.
명종 16년 문과에 급제 후 대구부사를 역임하신 증손 14世 죽담공 유근(惟謹) 할아버지의 둘째아드님이신 15世 지경(止敬) 할아버지께서 장씨할머니와 결혼하시어 서울 사대문안에 거주하시다 일찍 돌아가시자 고향인 나주 선영에 모시고 일년 후 할머니께서 두 살된 아들 선지(先智)를 업고 친향(親鄕)인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로 거쳐를 옮겨 함평이씨가 밀양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15世 휘 선지(先智) 祖는 武科(무과) 급제 후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당시 西宮(서궁)의 丕變(비변)인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비 논란에 忠憤(충분)을 금치 못하여 1614년 國母(국모) 없는 나라의 녹을 먹느니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리라 하면서 사직하고 귀향 후 여러 번의 出仕(출사) 요청에도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老母(노모)를 봉양하며 부북면 월래(月來)에 사셨다. 護軍公께서는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조롱산 어머님 산소 아래에서 시묘를 하다가 일생을 마치니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이시다. 후세 사람들은 公의 효행을 기리어 마을 이름을 月來(월래)에서 五禮(오례)로 바꾸어 불렀다.
公의 長子(장자) 통덕랑公 휘 珀(박) 祖는 밀양 부북 오례리에, 次子(차자) 통덕랑公 휘 琥(호) 祖는 밀양 부북 퇴로리에, 三子(삼자) 찰방公 휘 琦(기) 祖는 창녕 계성 서리 달촌과 밀양 부북 월산에 터를 잡은 이래 그 後孫(후손)들이 지금도 그곳에 대대로 살고 있다.
함평이씨가 처음 퇴로에 入村(입촌)한 때는 1620년이며 入村祖(입촌조)는 17世 通德郞公(통덕랑공) 휘 琥 祖이시다. 부북면 오례리에 살던 公은 위양리 도방동 거주 直長公(직장공) 權錙(권치)의 따님과 혼인 후 이 마을에 옮겨 터를 잡으셨다. 당시 이 마을은 行舟形(행주형)에 속하여 퇴로라는 지명은 없었으며 언제부터인가 公의 堂號(당호)인 退老堂(퇴로당)의 퇴로가 자연스럽게 마을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함평이씨퇴로서당기적비 수비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