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문협 워크숍 강연 원고 2008년 6월 13일 덕적도/200자 41매
황해 공간 소설 쓰기
이 원 규/소설가. 동국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1.소설과 공간배경
인천의 문인 동지 여러분과 이곳 덕적도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가 주최 측으로부터 받은 요청은 장편소설 황해 등 인천과 인천 앞바다를 배경으로 소설을 쓴 경험을 소설창작방법론과 연계해 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장편 황해를 쓰고 꼭 20년 만에 덕적도에 다시 왔습니다.
생각해보면 60년대 학번 작가라고 다 그런 건 아닌데 저는 리얼리티의 확보가 소설 쓰기의 제일 중요한 열쇠라고 여겼었습니다. 그래서 공간 배경을 중시했고 그래서 '발로 뛰는 작가'라는 말을 들은 듯합니다.
소설에서 공간배경이란 소설 내의 사건, 행동, 인물에게 부여된 장소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문학사를 더듬어보면 근대 이전은 이것이 별로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근대에 들어 환경 결정론이 등장하면서 소설도 사람이 살아가는 현장의 문제를 주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에서 다룬 그 현장이 중요한 탐구대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브룩스와 워렌은 소설 수업의 최고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소설의 분석에서 '공간은 인물의 행동과 심리와 삶의 양식을 구체화하며, 리얼리티를 보증하고, 작품 주제의 신빙성과 필연성을 높여준다'고 말했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도 공간의 시학에서 ‘우리는 때때로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안정되게 자리잡은 공간들 가운데서 일련의 정착점들을 알아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결국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며 공간의 의미가 개인적 인식과정 가운데 시간의 의미를 넘어 우세하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작가가 공간배경을 작품 속에 어떻게 재현하느냐에 따라 소설미학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만들어집니다. 1930년대 작가들의 예를 들면, 김유정은 마을과 거리와 주택 등의 묘사는 객관적으로 대충 하고 자연배경인 산과 강 따위 묘사는 주관적 감정을 잔뜩 묻혔습니다. 이상은 건축기사 출신답게「날개」에서 공간의 구성이 도형으로 그려질 수 있도록 대칭과 대립의 윤곽을 뚜렷하게 했습니다. 이태준은 이상과 같은 구인회 멤버이지만 눈으로 파악한 공간이 아니라 감정으로 파악된, 전설과 신화로 암시된 공간, 상징으로 가득한 공간을 그리려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채만식은 철저한 리얼리즘 작가로서 객관적으로 그림 그리듯, 사진 찍듯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장편「탁류」를 보면 전라도 군산 빈민들의 달동네, 그 중 꼭대기에 위치한 낡고 협소한 토담집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제가 소설공부를 할 당시는 국문과 선배들이 리얼리티를 끊임없이 강조했고 그들 틈바구니에서 공부하면서 채만식에 경도되었었습니다. 조정래와 황석영 같은 리얼리즘 성향의 작가를 배출한 동국대의 학풍과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문단에 활발하게 작품을 내놓은 80년대에 한국 소설이 거대담론에 치중하며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아무튼 줄곧 저는 공간이 리얼리티 획득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고, 아울러 그것이 소설구조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 자기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곳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서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등단 직후에는 고향 인천과 베트남 전장을 중심배경으로 잡아 인간존재의 근원을 파헤치는 소설들을 썼는데 서서히 분단을 주제로 삼고 인천과 황해 연안 섬들을 중심무대로 잡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천 배경의 분단소설로 방향을 바꾼 계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80년대 소설을 지배하던 분단문제의 거대담론, 하나는 조정래 선생과의 친교 때문이었습니다. 등단 직후 매달렸던 인간존재의 근원 추구는 소설의 본령이나 다름없는데 비평가들은 분단소설에 온통 열중해 있어서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월간문학 정도의 잡지에서 신인상을 받았다고 해서 메이저급 문예지들이 원고청탁을 해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의기소침해 있는데 조정래 선생이 국문과 후배인 저에게 '어서 분단소설로 넘어와서 문단의 주목을 받을 것'을 권했습니다. 저는 인천이 해방공간에 공장 노동자가 많아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고 서청 세력이 강해 좌우익 투쟁이 맹렬했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이 작가를 배출하지 않아 그것들을 제대로 소설로 형상화하지 못했음을 생각하며 '분단소설의 지평을 항구와 바다로 확대하자'는 책략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책략을 바로 실현하지는 못했습니다. 베트남 참전 경험을 살린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정래 선생은 부르스 커밍스의『한국전쟁의 기원』에 심취한 수정주의자가 되어 있었고 분단의 내인론(內因論)을 바탕으로 한 대하소설「태백산맥」을『현대문학』에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해방 전후사의 인식』따위 책을 읽으며 조선생과 많은 토론을 했지만 내인론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덜컥 장편「훈장과 굴레」가『현대문학』창간 30주년 기념 장편공모에 당선돼 버렸습니다. 그 작품의 연재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예지에서 원고청탁이 밀려 왔습니다.
저는 미친 듯이 덕적도와 대부도, 무의도, 그리고 소래포구를 찾아다니며 어부들과 어울렸고 황해 배경 분단소설의 첫 작품인「바람과 섬」이라는 단편을 내놓았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소설이 좋아서라기보다는『현대문학』장편공모 당선작가라는 프리미엄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포구의 황혼」, 「겨울새」, 「침묵의 섬」, 「달무리」까지 1987년 한 해 동안 5편의 분단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을 휩쓸고 있던 분단문학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뒤에도 인천과 황해를 배경으로 한 분단소설들을 10여 편 썼지만 그 정점에 있던 작품은 이곳 덕적도를 배경으로 잡은 장편 「황해」와 먹염[墨島]을 배경으로 잡은 단편 「침묵의 섬」이었습니다.
2. 덕적도와 먹염
그 무렵 저는 분단모순에 의한 편협된 시각을 거의 회복해 놓고 있었습니다.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이 리플렛으로 읽는 이론들을 원전을 찾아가며 독파했고 해방공간에 나온 좌파의 신문 잡지 등 1차 자료들 읽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덕적도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덕적도는 200척 이상의 조기잡이 어선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40명 정도의 선주들이 부 를 쌓았으며 150명 정도의 동사(하급선원)들이 고용되고 신분은 세습되었다. 인구 비례당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이 서울보다 많았으며, 인도주의 정신이 강한 한 선주가 유약한 자 기 아들을 돌보게 하기 위해 총명하고 강인한 도사공의 아들을 함께 인천과 서울로 유학 시켰다. 그 도사공의 아들이 서울대 사대를 나와 고향의 계급 구조를 뒤엎는 봉기를 주도 했고, 한국전쟁 중 인공 치하에서 선주들을 처단했다. 미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앞서 플라 잉 피시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덕적도를 점령해 공산당원들을 제압해 처단했 다.
그런 덕적도의 역사를 알려준 것은 저와 함께 대건고교에 근무하신 송문호 교감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눈을 번쩍 뜨며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준비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우선 소래의 선주로 있는 중고등학교 동기생을 통해 선장들이 갖는, 어장과 해로가 표시된 해도를 확보하고, 10명 이상의 동사 출신 노인들, 3명의 선주 출신 노인들, 그리고 유진 클라크 공작대에 속해 첩보활동을 했던 해군 첩보대원들, 인천의 우익과 좌익 인사 들을 만나는 일에 석 달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냉전시대여서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험했습니다.
그때 덕적도에 세 번 왔는데 진리에 사시는 저의 고등학교 선배님(인천고교의 전신인 인천상업중학교 출신)이시기도 한 송문호 선생님의 숙부께서 먹여주고 재워 주셨습니다. 송문호 선생님댁도, 숙부댁도 지난날 조깃배를 부린 선주 집안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하나 내 주셔서 그걸 타고 진리와 서포리, 밭지름 등을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날은 송선배님이 배를 빌어 인천의 보도연맹원들을 끌어다 처형한 먹염에 데리고 가셨고, 그 섬 골짜기에서 유골 몇 점을 보았습니다.
"경찰 경비정이 통통 소리를 내며 먹염에 닿는 게 덕적에서 멀리 보였지. 그리고 콩 볶듯이 총성이 들려 왔어. 빨갱이들을 처단한 거라고 짐작했지. 덕적도에 까마귀가 수백 마리 있었는데 전쟁 중이라 어로를 못해 생선 찌꺼기가 없으니 그놈들도 굶었지. 글쎄 어떻게 알았는지 다음날 그놈들이 새까맣게 떼를 지어 한꺼번에 먹염으로 날아갔어. 며칠 뒤 호기심 많은 몇이 배를 몰고 이 섬에 와 봤지. 까마귀들이 이 골짜기에서 시체들을 뜯어먹고 있었어."
송선배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일 년 뒤「침묵의 섬」이라는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인천의 가장 큰 자동차 정비회사 사장인 1인칭 화자 ‘나’는 어느 날 고교 동창 회 이 사들과 바다낚시를 나간다. 새로 이사로 위촉된 나를 환영하는 모임이다. 나는 먹기 살기 바빠 한 번도 놀러 나온 적이 없다. 인천 앞바다에서 뼈가 굵어, 바닷속을 손금 보듯 들 여다본다는 늙은 낚싯배 선장이 물때가 좋아 우럭이 많이 잡힐 거라고 장담하며 배를 몰 고 간다. 그때 갈매기 몇 마리가 배를 따라오며 머리 위를 선회한다. 내가 주목하는 순간 그 것들은 곧장 저만치 보이는 검은 형상의 섬을 향해 날아간다. 늙은 선장이 자신만만하 게 배를 댄 수역, 단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다. 그 검은 섬이 다시 내 눈에 들어오고, 나 는 그 쪽으로 가자고 말한다. 선장은 얼굴이 굳어진다. 옛날에 빨갱이들을 끌어다 쏴 죽 인 뒤 주변에서 해난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 그러나 내 요구에 응해 배는 그 쪽으로 가고, 나와 동창들은 그 섬 앞에서 수백 마리의 우럭을 낚는다. 나는 문득 좌익 활동을 하다가 월북해 나를 연좌제의 굴레로 묶어버린 아버지를 생각한다.
며칠 뒤, 옛날 아버지가 갇혔던 인천경찰서 앞을 지나게 되고, 나는 아버지에 관한 비 밀기록을 열람하려 애쓴다. 그리고 확인한다. 아버지는 월북한 게 아니라 다시 체포돼 바 로 그 섬에서 처형되었음을. 그리하여 어머니와 아우를 데리고 다시 그 섬으로 가서 유골 들을 거둬 무덤을 만든다.
이것이 제가 만든 그 소설의 서사구조였습니다. 정통적인 소설 기법에 맞춰 쓴 것이고 분단소설의 전형에 갇힌 소설이라 아쉬움이 남는데 김동리 선생이 좋게 봐 줘서 1988년에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장편「황해」는 끈질긴 저 자신과의 싸움 속에 차근차근 준비되었습니다. 인천시립도서관에서 대중일보을 관외대출 받아 샅샅이 훑으며 메모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물론 인민일보와 해방일보등 좌익계 신문까지 통독했습니다. 당시 집 하나하나 위치마다 표시된 덕적도의 지도를 만들었고 등장인물들의 집을 그려 넣었습니다. 인물들의 이력서를 만들었고, 인천 시내 지도도 만들고 주인공들의 집, 서청 등 우익 청년단 본부, 좌익인사들의 비트, 인공 치하 중 인민군의 주둔지와 정치보위부의 위치까지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인천의 현대사 연표를 만들었습니다. 이 연표는 많은 분들이 빌려다보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조정래 선생이 한국문학을 이근배 선생에게서 인수해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파격적으로 지면을 열어 주었습니다. 한 번에 원고지 5백매씩 석 달에 걸쳐 연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나 한국문학사에게나 무리한 일이었는데, 우선 저는 인문고교 교사 노릇을 하고 있었고, 당시 원고료가 200자당 3천원으로 문예진흥기금으로 2천원을 받고, 잡지 운영자가 1천원을 충당하게 되어 있어서 마치 문예지가 개인 소유가 아니라 공기(公器)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 작가에게 5백매를 주면 다른 작가들은 기회가 줄어듦으로 조정래 선생은 온갖 욕을 먹으면서 기회를 주었고, 저는 죽을힘을 다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인물도 다수 등장시켰습니다. 죽산 조봉암, 이승엽 등 유명한 사람들은 물론 유두희, 이보운, 박남칠 등 생소한 좌익 인사들과, 이름을 들으면 금방 알만한 우익 인사들을 기록과 증언에 가깝게 그렸습니다. 집필하는 중에도 무수히 많은 분들을 만나 증언을 들으며 8 ․ 15 광복 직전부터 인천 상륙작전까지의 인천과 덕적도의 일들을 총체적으로 담으려 했습니다. 정미공장의 지하투쟁은 물론 조기 어장의 어로작업까지 그대로 그려내려 했습니다.
3. 다른 눈으로 공간의 매력 바라보기
장편「황해」뒤에도 저는 십여 편의 인천과 황해 배경 중단편 소설들을 썼고 처음에 생각한 대로 분단문학의 공간 지평을 항구와 바다로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치열한 작업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설에서의 공간배경에 대한 생각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리얼리티에 매달렸던 채만식보다 이태준의 소설이 더 좋고, 이태준 등 비(非)리얼리즘 작가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공간에 매력을 느낍니다. 특히 공간 배경에서 빛과 열, 쾌적함과 눅눅함, 화려함과 소박함, 감각과 관념, 폐쇄와 개방, 죽음과 삶, 의심과 이해 등의 의미를 함유하는 상징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고 감동합니다.
김윤식 문협회장으로부터 워크숍 강연 요청을 받고 원고를 준비하다가 문득 마르셀 푸르스트의 문장을 기억하고 찾았습니다.
우리가 안 지 오래된 곳들은 지금은 다만 우리가 편의상 만들어낸 작은 공간에 속해 있을 뿐이다. 그들 중 어느 곳도 그때 우리의 삶을 구성하던 밀접한 인상들 사이에 끼여 있는 얇은 조각에 불과했다. 특정형태에 대한 기억은 곧 특정 순간에 대한 회한일 뿐이 다. 집, 길, 거리들은 아! 세월만큼이나 쉽게 사라져가는구나.'
세월이 지나면 인간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공간도 변합니다. 그리하여 소설도 변합니다. 덕적도도 그렇습니다. 덕적도는 저에게 고스란히 20년 전의 인상으로 남아 있었는데 와 보니 산천은 의구하지 않습니다.
소설에 대한 저의 마지막 욕망은 해방 공간을 배경으로「황해」를 썼으므로 그 앞의 시대, 즉 개항에서 8․15 해방까지 2권, 그리고 장편「황해」이후 70년대까지 2권, 그렇게 하여 인천의 근대사를 총5권의 대하소설로 쓰는 것입니다. 공간을 리얼리티의 담보만이 아닌, 더욱 함축된 것으로 넣고 싶습니다. 카잔 차키스가 자기 고향 그리스의 크레타 섬을「희랍인 조르바」에서 그린 것처럼 말입니다. 바뀐 문학의 지평을 맹목으로 따라가겠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못해 보았기 때문에 갖는 욕망입니다.
제 이야기가 인천과 황해를 중심 배경으로 삼아 시나 소설을 쓸 후배 문인들께 작은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