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정하는 고려군대가 백만병일세
[자료의 근거]
동문선II, 동문선 제19권, 362P, 고전국역총서 유숙지음. 이병도외 편집.
계묘동 송 북정 최원수 영= 계묘년 겨울에 북정하는 최(원수)영을 보내며...
눈보라치는 관서 길에,
곰과 호랑이 같은 백만병일세
장군의 출새하는 군악소리
이것이 이미 태평의 소식일세.
평.. 고려의 군대수가 이처럼 100만대군임이 밝혀졌다. 고려말 최영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이정도로 많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오랑캐를 토벌하러 갔었던 것이다. 조선에 군대가 10만명이 없어 임진왜란때 10만양병설이 필요하다고 낭설을 역사에 넣었던 일제사가들.. 사실, 그당시 조선도 100만 대군이 있었지만, 고려도 이와 마찬가지도 100만대군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백제가 강성할 시는 그 군대수가 100만명이었다는 말과도 연관이 있다. 이처럼 고려나 대조선은 지상에서 가장 큰 대국으로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 러브선
[작가의 내력]
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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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신
1324(충숙왕 11)~1368(공민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菴). 아버지는 태상경(太常卿) 성주(成柱)이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사록(安東司錄)으로 임명되었다. 1342~51년에 원나라에 가 있었던 강릉대군(江陵大君:공민왕)을 4년 동안 시종했다.
1348년 어머니 병환으로 고려에 왔다가 다시 원으로 가서 1351년 즉위하기 위해 돌아오는 공민왕과 함께 고려로 왔는데, 오는 도중 랴오양[遼陽]에서 좌부대언으로 임명되었다. 그뒤 우대언·좌사의 대부로 승진되어 국가기밀에 참여하다가, 친원세력으로 권세가이던 조일신(趙日新)에게 모함을 받았다.
1352년 6월 공민왕을 북경에서 수종했던 공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이 되었다.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고 주살당한 뒤에 다시 기용되어 대언·판전교·판도판서·전리판서 등을 거쳐 1358년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지추밀원사로서 1356년에 기철(奇轍)을 죽였던 공으로 인해 안사공신호와 철권을 받았다.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의 남행을 결정했고, 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동수국사를 지냈다. 홍건적의 난이 평정된 뒤에는 안우(安祐) 등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동경유수로 나갔다
얼마 뒤 다시 중앙으로 올라가 지도첨의로 임명되고 충근절의찬화공신호를 받고 평리로 승진했다. 그뒤 사퇴할 것을 청하여 서녕군(瑞寧君)으로 봉해졌다. 1363년 흥왕사의 난이 평정된 뒤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로 임명되었고, 홍건적의 난 때 호종했던 공으로 부시피난공신(扶侍避亂功臣) 1등이 되었다.
그뒤 첨의찬성사·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를 역임했다. 1365년 당시 정권을 잡은 신돈(辛旽)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그뒤에도 신돈의 미움을 받아 시골에 내려와 있다가, 결국 신돈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첫댓글 고려군이 30만이 최대인 것처럼 알았는데 백만대국이었군욧..
고려병이 백만명이라면 얼마나 큰 나라였을까요?
인구대비..그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