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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고찰순례에 동참하여 해설을 해주시는 임상렬 전 교장선생님의 제안으로 송광사 순례전에 예정에 없던 귀신사를 순례키로 하였다.
귀신사(歸信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676년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기도 한다. 신라 말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명(圓明)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 춘봉 (春峯)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영산전,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고, 주요문화재로 귀신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62), 귀신사부도(지방유형문화재 63), 귀신사석수(지방유형문화재 64) 등이 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곳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편찬하였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제826호 /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17세기 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칸인 퇴칸은 벽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제1516호 /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약사불(向右)과 아미타불(向左)을 배치한 삼불형식 으로, 흙으로 제작한 소조상이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대형의 소조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삼불좌상은 보물 제1360호 법주사 소조삼불좌상(玄眞 作, 1626년), 보물 제1274호 완주 송광사 소조삼불좌상(淸憲 作, 1641년) 등과 더불어 이러한 양상을 입증하여 주는 좋은 예이다. 이 삼불좌상은 규모가 매우 커서 보는 이를 압도하게 하는데, 인자하고 부드러운 얼굴표현과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의 불신(佛身)은 매우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불격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마디 쪽으로 뻗은 지권인의 표현은 명대 비로자나불에서 나타나는 수인(手印)이며 허리가 긴 장신형의 불상비례 역시 명초에 유행하던 표현이어서 명대 조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 삼불좌상은 조선시대 1633년에 작성된 귀신사 나한전낙성문에 1633년 이전에 삼불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자수(子秀) 무경(無竟)의 <전주모악산귀신사 사적사인(全州母岳山歸信寺事蹟詞引)>에 의하면 절의 중건이 1624년이라고 하므로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삼불좌상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신사 비로자나 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 명대의 조각양식을 수용하면서 이를 조선불상에 정착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 내고자 하였던 일면을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거대한 규모와 소조불상 조각의 뛰어난 기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귀신사부도와 석수가 있는 절 뒤 약간 높은 터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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