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소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박병규 옮김
반 위크 브루크스(Van Wyck Brooks)가 쓴 『뉴 잉글랜드의 개화』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은 점성술만이 설명할 수 있는 이상한 일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19세기 초엽 미국의 어느 조그마한 지방에서 천재들이 개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뉴 잉글랜드’를 ‘올드 잉글랜드’만큼 좋아한다. 이들의 이름을 열거하기란 쉽다. 에밀리 딕킨슨, 허만 멜빌, 도로우, 에머슨, 윌리암 제임스, 헨리 제임스, 그리고 에드가 앨란 포우를 들 수 있다.
포우는 보스톤에서 태어났다. 내 기억으로는 1809년이다. 알다시피 나는 숫자에 약하다. 탐정소설을 이야기하는 것은, 곧 그 장르의 창시자 에드가 앨란 포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장르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예비적으로 조그마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문학의 장르란 존재하느냐는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크로체는 그의 저서 『미학』에서 ―이는 대단한 책이다― 이렇게 말했다. “어떤 책을 소설이라거나 알레고리라거나 미학 논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 책이 노란 표지라거나 왼쪽에서 세 번째 선반을 보면 그 책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말해서, 장르를 부정하고 개개의 작품을 옹호한다. 이에 덧붙여, 개개의 작품들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정확하게 분류하는 것은 일반화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물론 나의 이러한 주장은 일반론이고, 따라서 이를 반듯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사고하는 것은 일반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적 원형이 쓸모가 있다. 그렇다면, 문학장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떨까? 내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인다면, 문학장르는 아마 작품 그 자체보다는 작품을 읽는 방법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미적 사실은 독자와 작품과 결합해야만 하며, 단지 그 때만이 존재한다. 한 권의 책이 책 이상의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독자가 책을 펼칠 때에 책은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때에만 미적 현상은 존재하는데, 이는 그 책이 태어났던 순간과도 유사하다.
탐정소설을 읽는 독자는 현대적인 유형의 독자이다. 에드가 앨란 포우가 이 독자를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 숫자는 수백만을 헤아린다― 탄생시켰다. 이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이것이 보다 재미있을 것 같다.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어떤 사람을 상상해보자. 그는 『돈키호테』가 탐정소설이라고 들었던 사람으로서 페르시아인일 수도 있고 말레이지아인이나 러시아인이나 어린아이일 수도 있다. 이 가상 인물은 탐정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제 『돈키호테』를 읽는다고 상상해보자. 그는 어떻게 읽을까?
“얼마 전, 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에 ―그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한 시골 양반이 살고 있었다......” 이 독자의 머리는 의심으로 가득찰 것이다. 왜냐하면 탐정소설의 독자는 불신과 의심쩍은 마음, 특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책을 읽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에......”를 읽고는 그 사건이 만차 지방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를 보고는, 왜 세르반테스는 생각하기 싫었을까? 틀림없이 세르반테스가 살인범이거나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어, “얼마 전......” 아마도 이미 발생한 사건은 미래의 사건만큼 공포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독자는 이런 식으로 읽을 것이다.
탐정소설은 특수한 유형의 독자를 만들어낸다. 포우의 작품을 평가할 때 우리는 흔히 이 점을 잊어버린다. 포우는 탐정소설을 만들어내고, 다음으로 탐정소설의 독자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탐정소설을 이해하려면 포우의 생애를 대강은 알아야 한다. 내 생각에 포우는 특출한 낭만주의 시인이었으며, 작품 몇 페이지 보다는 작품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특출한 작가이다. 그리고 운문보다는 산문에 더 재능을 보인 작가이다.
포우의 운문은 어떻한가? 에머슨이 포우에 대해 한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에머슨은 그를 ‘the jingleman’이라고, 다시 말해서 ‘딸랑딸랑거리는 사람’, ‘박자를 잘 맞추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포우는 비록 기억에 남는 싯구를 남기기는 했어도 테니슨만 못한 시인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우로부터 비롯하였는가?
이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현대문학이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 다 19세기의 미국인들이다. 월트 휘트먼과 ―우리가 민중시라고 부르는 것이 그로부터 나왔고, 네루다가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좋던 나쁘던 많은 것들이 그로부터 연유했다― 에드가 앨란 포우이다. 보들레르의 상징주의는 포우로부터 나왔다. 그는 포우의 제자였으며, 밤마다 그에게 기도를 했었다. 전혀 상관없이 보이지만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가지 것이 포우로부터 유래했다. 지적인 작업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개념과 탐정소설이 그것이다.
첫 번째 것 ―문학을 영혼의 작용이 아니라 지성의 작용으로 보는 것― 은 매우 중요하다. 두 번째 것은, 위대한 작가들 ―스티븐슨, 디킨즈, 그리고 가장 훌륭한 포우의 상속자인 체스터튼을 들 수 있다― 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하찮은 것이다. 이 문학(탐정소설)은 하급 문학처럼 보일 수 있으며, 실제로 쇠퇴하고 있다. 현재, 공상과학 소설이 탐정소설을 극복하거나 대체하고 있는데, 이 공상과학 소설 역시 포우가 낳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본론으로, 즉 시란 지성의 창조물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자. 이런 생각은 그 이전의 모든 전통과 상반된다. 전통적으로 시는 영혼의 작용이었다. 『성서』를 예로 들어보자. 『성서』는 다양한 작가가 다양한 시대에 매우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얘기한 일련의 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한 인물, 즉 성령에게로 돌려진다. 신성하고 무한히 지적인 성령이 다양한 시대, 다양한 국가에 사는 다양한 대필자들에게 다양한 작품을 구술해주었다고 한다. 예컨대, 이런 작품들이 형이상학적 대화인 ‘욥기’이고, 역사인 ‘열왕기’이고, 신통기인 ‘창세기’이며, 여러 예언자들의 예언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상이한 작가가 썼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읽는다.
우리가 범신론자라면, 우리들이 상이한 개인들이라는 사실을 지금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영속하는 신성의 상이한 기관(器官)들이다. 바꿔 말해서, 성령이 모든 책을 썼으며, 이 모든 책을 읽는 이도 성령이다.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성령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포우는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40세에 죽었는데, 술독에 빠져 있었고, 우울증과 신경증에 걸려 있었다. 그가 왜 자질구레한 신경증을 앓았는지 모른다. 단지 포우는 지독히도 불행한 사람이었으며, 숙명적으로 불행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만 염두에 두면 충분하다. 그는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어쩌면 과장하는― 일에 몰두했다. 포우는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천재적인 낭만주의 시인으로 여겨졌다. 특히, 운문이 아니라 산문으로 글을 쓸 때, 예컨대 『아르투르 고든 핌』의 경우가 그렇다. 여기서 색슨족의 이름인 아르투르(Arthur)는 에드가(Edgar)와, 스코틀랜드의 이름인 앨란(Allan)은 고든(Gordon)과 그리고 핌(Pym)은 포우(Poe)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스스로를 지적이라고 생각했으며, 핌 또한 자신은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뽐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아는 저 유명한 시, 「갈가마귀」를 썼다. 이 시를 너무 유명한 것 같다. 이 시를 잘 된 작품이라고 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보스턴에서 강연을 하면서 포우는 어떻게 이러한 주제를 잡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는 처음에 후렴의 효과를 생각했고, 이어 영어의 음운에 대해 생각했다. 영어 가운데 가장 기억하기 쉽고 효과적인 철자는 ‘o’ 와 ‘r’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nevermore’, 즉 ‘이젠 그만이야’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이상이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다. 이윽고 다른 문제가 생각났다. 즉, 구성상 이 단어를 시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사람이 매 연 끝에서 ‘nevermore’라고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기이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는 그것이 인간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말하는 새라는 착상이 떠올랐다. 그는 앵무새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앵무새는 시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갈가마귀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 순간에 찰스 디킨즈의 소설, 『바나비 러지』(Barnaby Rudge)를 읽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는 갈가마귀가 등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nevermore’라고 부르는 갈가마귀,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되풀이하는 갈가마귀를 떠올렸다. 이상이 포우가 처음에 구상한 것이다.
이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글로 남길만한 가장 우울한 일, 가장 슬픈 일은 어떤 것일까? 그 일은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이다. 누가 그 일을 가장 슬퍼하겠는가? 물론 죽은 여자의 애인이다. 그래서 그는 얼마전에 애인을 잃은 연인을 생각했다. 죽은 여자의 이름은 레오노어(Leonore)였는데, 이는 ‘nevermore’와 운을 맞추기 위해서다. 그 연인이 어디에 있다고 할까? 그 때 그는 갈가마귀가 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검정색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곳이 어디일까? 하얀색과 대비되면 두드러져 보인다. 그렇다면 하얀 흉상이 좋겠는데, 누구의 흉상일까? 그것은 아테네 여신의 흉상이다. 그러면 그 흉상은 어디에 있을까? 서재에 있다. 포우의 말을 빌면, 시의 통일성을 위해서 닫힌 공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미네르바의 흉상은 서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서재에는 책 속에 파묻힌 그 연인이 “그렇게도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홀로 있다. 이윽고 갈가마귀가 들어온다. 왜 갈가마귀가 들어왔을까? 그것은, 서재는 조용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를 불안한 것과 대조시켜야 한다. 그는 폭풍우를 상상한다. 갈가마귀가 서재로 들어왔던 폭풍우가 이는 밤을 상상한다.
그 연인이 누구냐고 묻자 갈가마귀는 ‘nevermore’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사내는 매조키즘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싶어 갈가마귀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갈가마귀는 ‘nevermore, nevermore, nevermore’, 즉 “이젠 그만이야”라고 대답한다. 그는 계속 같은 질문을 한다. 마침내 그는 시의 첫 행에 나오는 은유를 해독할 수 있는 얘기를 갈가마귀에게 한다. “나의 심장을 쪼던 네 부리도, 네 모습도 문에서 거두어가라” 갈가마귀는 ―이제 갈가마귀는 기억의, 불행스럽게도 불멸하는 기억의 표징일 뿐이다― ‘nevermore’라고 대답한다. 그는 여생 동안 갈가마귀와 이야기하면서, 그에게 항상 “이젠 그만이야”라고 대답하는 갈가마귀와 이야기하면서 환상적인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이다. 그는 갈가마귀의 대답을 알면서도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포우는 자신이 지적인 방식으로 그 시를 썼다고 믿게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줄거리를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거짓말임이 금방 드러난다.
포우는 비합리적인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갈가마귀가 아니라 바보, 술주정뱅이를 등장시켰다. 이리하여 그는 완전히 상이하고, 설명적인 요소가 줄어든 시를 쓰게 되었다. 내 생각에 포우는 자신이 지적인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자신을 등장인물로 만들었다. 이 이국적인 인물이 ―우리 모두가 아는 인물로, 비록 그는 이 인물을 우리의 친구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 바로 오귀스트 뒤팡 신사로 문학사상 첫 탐정이다. 뒤팡은 프랑스 신사이며, 찢어지게 가난한 프랑스 귀족이다. 그는 파리 교외의 어느 구역에서 친구와 함께 산다.
여기에서 또 다른 탐정소설의 전통이 생겨났다. 그것은 지적인 작업, 즉 지성을 이용해서 비밀을 파헤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지적인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의 이름은 뒤팡이고 셜록 홈즈이며, 나중에는 브라운 신부가 되고, 다른 이름, 수많은 유명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중 첫 번째이자, 모델이고 전형이 된 인물이 사를르 오귀스트 뒤팡이다.
뒤팡은 친구와 함께 사는데, 이 친구 또한 탐정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또한 전통의 일부가 된 것으로, 포우가 죽고 난 한참 후, 아일랜드의 작가 코난 도일이 채택했다. 코난 도일은 상이한 인물들 사이의 우정이라는, 그가 보기에 매력적인 주제를 취했다. 이는 어느면에서 돈키호테와 산초 사이의 우정이라는 ―결코 이들은 완벽한 상태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주제에서 나온 것이다. 이어 이는 어린 소년과 인도 사제 사이의 우정이라는 『킴』의 주제가 되었고, 소년과 소몰이꾼의 우정이라는 『돈세군도 솜브라』의 주제가 되었다. 이러한 주제는 아르헨티나 문학에 많이 나타난다. 구티에레스의 여러 작품에서도 우정이라는 주제를 볼 수 있다.
코난 도일은 아주 바보 같은 인물, 독자보다 지능이 조금 낮은 인물을 상정했다. 이 사람이 와트슨 박사이다. 또 한 사람은 조금은 희극적이고, 조금은 존경할 만한 사람인데, 이 인물이 셜록 홈즈이다. 친구 와트슨 박사는 셜록 홈즈의 지적인 작업을 이야기한다. 와트슨은 항상 외적인 것들만 보고 행동하며 연속 감탄한다. 홈즈는 자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자도록 내버려둔다.
이 모든 것이 포우가 한 장르를 만들어낸다는 의식 없이 썼던 최초의 탐정소설 「모르그가(街)의 살인사건」에 나온다. 포우는 탐정소설이 사실주의적인 장르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적인 장르 ―여러분들이 괜찮다면 환상적인 장르라고 부르고 싶다―, 하지만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라 지성에 의한 환상적인 장르가 되기를 원했다. 지적이면서 상상적이기를,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적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범인이나 탐정이 뉴욕에 산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독자들은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고, 뉴욕 경찰이 그런 식으로 사건을 풀어나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일이 파리에서,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생제르망의 어느 황량한 구역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한 포우의 생각은 안성맞춤이었다. 이 때문에 탐정소설의 최초의 탐정은 외국인이고, 문학 작품에 기록된 최초의 탐정은 프랑스인이다. 왜 하필이면 프랑스인인가? 그 작품을 쓴 사람이 미국인이어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등장인물들이 더욱 기이하게 보이도록 일반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들은 동이 트면 커튼을 닫고 촛불을 켜며, 날이 어두워지면, 포우의 말처럼, “끝없는 우울”을 찾아 파리의 황량한 거리를 돌아다닌다. 홀로 잠들어 있는 거대한 도시를 대면하면서 군중적인 것과 고독을 동시에 느낀다. 이것이 등장인물들의 사고를 자극한다.
나는 한밤중에 황량한 파리를 돌아다니며 이야기하는 두 친구를 상상하고 있다. 그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그들은 철학에 대해서, 지적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범죄를 목격하게 되는데, 이 범죄는 환상문학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범죄로 두 여인의 살해사건이다.
나는 모르그가의 범죄는 살인보다 더 흉악한 범죄라고 말하고 싶다. 그 사건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침입할 수 없는 방안에서 두 여인이 살해되었다. 이것이 포우가 처음으로 꾸며낸, 열쇠가 잠겨진 방의 미스터리이다. 그 중 한 여인은 교살되었고, 다른 여인은 칼로 목이 잘렸다. 4천 프랑이나 되는 많은 돈이 있었다. 그 돈은 바닥에 난장판으로 흩어져 있었다. 꼭 미치광이의 짓 같았다. 다시 말해서 야만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모두(冒頭)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해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은 우리에게는 해결이 아니다. 우리는 포우의 그 작품을 읽기 전에 이미 그 줄거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독자에게 커다란 힘이 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는 포우의 또 다른 제자, 스티븐슨의 독자들만이 알 수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의 이중성을 상정하는 것이다. 아무튼 오랑우탄, 즉 원숭이가 그 살인사건을 저질렀다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하나의 장치, 즉 범죄가 발각되기 전에 그 방에 들어갔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여 해결된다. 이들 증인은 프랑스인 남자 목소리 같은 걸걸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몇 마디의 말,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으며 외국인의 목소리 같았다고 했다. 스페인 사람이라면 독일어, 독일 사람이라면 네델란드어, 네델란드 사람이라면 이태리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원숭이의 목소리이다. 이윽고 범인이 밝혀진다. 밝혀지지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해결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포우의 작품이 나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그의 줄거리는 너무도 명백해서 박진감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들에게는, 그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탐정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 독자들은 우리와 같은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우리처럼 포우가 만들어낸 독자들이 아니다. 탐정소설을 읽을 때의 우리는 포우가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의 작품을 읽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으며, 후세의 사람들도 그랬다.
포우는 모범이 될 만한 다섯 개의 작품을 남겼다. 그 첫째는 「너가 그 사람이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섯 작품 가운데서 가장 미숙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후에 이스라엘 장윌(Israel Zangwill)이 『커다란 활의 살인』에서 모방했는데, 그것은 열쇠로 잠긴 방안에서 저질러진 범죄이다. 이 방에 등장인물, 즉 살인범이 있는데, 이는 후에 가스통 레루(Gastón Leroux)가 『노란 방의 비밀』에서 모방했다. 이 작품에서는 탐정이 살인범으로 밝혀진다. 전형이 되었던 다른 단편도 있다. 「도난당한 편지」와 「황금충」이다.
「도난당한 편지」의 줄거리는 너무 간단하다. 어느 장관이 편지를 훔쳤는데, 경찰은 그가 편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경찰은 길거리에서 두 번이나 그를 덮친다. 이어 집도 수색한다.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안을 이 잡듯이 뒤진다. 경찰은 현미경과 돋보기까지 준비를 해, 책장의 책을 하나하나 꺼내 갈피를 살피고, 마루바닥의 먼지까지 조사한다.
이윽고 뒤팡이 참견한다. 그는 경찰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경찰은 그 물건이 작기 때문에 은밀한 곳에 숨겨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뒤팡은 친구인 그 정치가를 찾아간다. 거기서 누구라도 볼 수 있는 탁자 위에 놓인 구겨진 편지봉투를 본다. 그는 그것이 모든 사람이 찾고 있는 편지라는 것을 알아챈다. 이는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무언가를 숨긴다는 착상이고, 너무도 잘 보여서 아무도 찾지 못한다는 발상이다. 게다가, 포우는 얼마만큼 지적인 방법으로 탐정소설을 썼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각 이야기의 첫 부분에 ‘분석’에 대한 정밀한 검토와 체스에 대한 토론이 온다. 그는 휘스트(Whist)가 낫다느니, 대임(dame)이 더 낫다느니하고 얘기를 한다.
포우는 다섯 편의 탐정소설을 남겼다. 이제 다른 작품, 「마리 로제 사건의 수수께끼」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그가 쓴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기이하지만 읽기에는 그다지 재미가 없는 소설이다. 이것은 뉴욕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마리 로제라는 소녀가 살해된다. 내 기억으로는 꽃파는 소녀이다. 포우는 신문 기사를 따왔을 뿐이다. 그 사건은 파리에서 일어나며, 소녀의 이름은 마리 로제이다. 이어 어떻게 해서 그 범죄가 저질러지게 되었는지를 암시한다. 실제로 수년 후에 그 사건은 밝혀졌는데, 포우가 썼던 것과 일치했다.
우리는 탐정소설을 지적인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완전히 허구적인 것에 기초한 장르이고, 사건은 밀고나 범인들의 부주의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추론에 의해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포우는 그가 하는 작업이 사실주의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무대를 파리로 설정했으며, 추론을 하는 사람도 경찰이 아니라 귀족이다. 즉, 포우는 지적인 천재를 창조했던 것이다. 포우가 죽은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내 기억으로 그는 1849년에 죽었다.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위대한 시인, 월트 휘트먼은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포우는 피아노의 저음부만을 칠 수 있었던 연주자였지, 미국의 민주주의를 대변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이는 포우가 상상도 못했던 말이다. 휘트먼은 포우를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했다. 에머슨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많은 비평가들은 그를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전반적으로 보아 포우는 천재적인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아르투르 고든 핌』을 제외한 그의 단편들이 미숙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들은 하나의 인물을, 그의 의해 창조된 인물들을 초월한 인물을, 사를르 오귀스트 뒤팡이나 사건들을 초월한 인물을, 이제 더 이상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미스터리를 초월한 인물을 만들어낸다.
영국의 ―이곳에서는 이 장르를 심리적 관점에서 본다― 탐정소설은 아주 훌륭하다. 윌키 콜린즈(Wilkie Collins)의 『백색의 부인』과 『월석(月石)』이 그렇다. 이어 체스터튼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포우의 위대한 상속자이다. 체스터튼 자신은 포우를 능가하는 작품을 쓰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포우를 능가한다. 포우는 순전히 환상적인 단편들을 썼다. 그 예로 「적사병(赤死病)의 가면」이나 「백포도주 병」 같은 작품은 순전히 환상적이다. 게다가, 다섯 개의 탐정소설은 논리적인 추론에 바탕한 소설이다. 그러나 체스터튼은 조금 다르다. 그는 환상소설적이면서 결국에는 탐정소설적인 해결을 갖는 단편들을 썼다. 나는 그 가운데 하나인 「보이지 않는 인간」을 얘기하려고 한다. 이 작품은 1905년인가 1908년인가 발표되었다.
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자동인형, 즉 가정부, 수위, 하녀 등의 자동인형을 만드는 사람이 런던의 눈 덮인 언덕 꼭대기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자기를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 ―이는 하찮은 일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를 받는다. 그는 인형들을 하인처럼 거느리고 혼자 살고 있는데, 이제는 이런 사실이 조금 으스스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모습을 띈 인형들에 둘러싸여 혼자 사는 사람이다.
마침내 한 장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거기에는 그날 오후에 그를 죽이겠다고 쓰여 있었다. 그는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친구들은 경찰을 부르러 가느라고 그를 인형들 사이에 홀로 남겨둔다. 떠나기 전에 친구들은 수위에게 누가 그 집에 들어가는지 지켜보라고 부탁한다. 청원 경찰관에게도, 군밤장수에게도 똑 같은 부탁을 한다. 이들 세 사람은 잘 지켜보겠다고 약속한다. 그들이 경찰과 함께 돌아와 보니 눈 속에 발자욱이 나 있었다. 그 발자욱은 집 근처에서는 희미했지만 멀어져 갈 수록 더 깊게 파여 있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들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집에 들어가보니 인형 만드는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벽난로에는 재가 남아 있었다. 여기가 이 단편에서 가장 강렬한 부분이다. 자동인형들이 그 사람을 삼켜버렸을 것이라는 의심이 생기는데, 이는 우리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것은 사건의 해결 보다 더 인상적이다.
범인은 그 집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군밤장수도, 청원 경찰관도, 수위도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범인임을 몰랐다. 매일 오후 같은 시각에 우체부가 오기 때문이다. 우체부는 그를 죽여서 우편 가방 속에 넣고 사라졌다. 우편물은 태워버렸던 것이다. 브라운 신부는 그를 만나 이야기하고, 마침내 자백을 받아내고는 그를 용서한다. 이처럼 체스터튼의 작품에서는 체포된 사람도 없으며, 폭력도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 미국의 탐정소설은 아주 타락했다. 탐정소설은 사실주의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폭력적인 섹스물이기도 하다. 어쨌든, 탐정소설은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탐정소설이 원래 지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아직도 지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영국의 탐정소설은 시골 마을을 무대로 아주 담담하게 전개된다. 모든 얘기가 지적이며 담담하다. 폭력이라든가 흥건한 핏방울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탐정소설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부하지는 않는다. 내 작품 속에는 상징적인 영역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이 작품은 「죽음과 나침판」이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와 공저한 탐정소설이 몇 편 있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작품이 내 작품보다 훨씬 뛰어나다. 아무튼, 이시드로 파로디(Isidro Parodi)는 감방에 구금되어 있으면서도 사건을 해결한다.
탐정소설을 변호하기 위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는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다. 즉 우리의 문학은 혼돈 상태를 띄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자유시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정형시보다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더 어렵다. 이 시대에, 너무나 혼돈스러운 이 시대에 변변찮으나마 고전적인 가치들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탐정소설이다. 탐정소설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없는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삼류 작가들이 쓴 것이다. 디킨즈나 스티븐슨, 특히 윌키 콜린즈와 같은 뛰어난 작가들이 쓴 작품들도 있다. 탐정소설을 옹호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탐정소설을 옹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다소 경멸감을 갖고 탐정소설을 읽을 때 이 소설은 무질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질서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가 탐정소설을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증거이며, 미스터리이다.◇
1978년 6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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