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진도읍 송현리의 생이(상여) 나가는 모십(모습)
이전 필름덜얼 뒤젝이다 봉께 1990년 봄에 찍에뒀던(찍어두었던)
우리동네(송현)서 생이(상여) 나가넌(나가는) 필름이 있길래(있기에)
역다가(여기에) 올릴라고(올리려고) 봉께(보니) 필름이 잔(좀) 변색이 댰(되었)어도
알어 볼만언(은) 하겄길래(하겠기에) 여러분하고 추억의 시간이로 잔 떠나 볼랍니다.
생이(상여) 속에 기신 분언(계신 분은) 울엄매하고 결의 자매럴 맺어가꼬(맺어서)
50년 넘게 찰로(정말로) 친 성지간(형제간) 같일로(처럼) 친하게 지내시던
이모님이신데 건강하게 사시다가 한 삼일 눠 기신년에(누워 계신 끝에)
아흔살얼 넹기신(넘기신) 납살로(나이로)
유채꽃, 똘갓꽃 만발한 그 해 봄에 돌아가셌싱께 호상(好喪)이라 하겄지라?
그란데 진도에넌 호상(好喪) 말고 발음이 같은
또 한 가지의 여자덜이 하넌 호상(護喪)이란 풍습이 있어가꼬
남정네덜이 생이도 미고(메고) 초상치루넌 일도 돕넌 상두지(상포계 喪布契) 말고,
여자덜 호상지(호상계 護喪契)도 따로 있었는데 여그 사진에도 보므넌(보면)
여자덜이 흐칸 소복얼(소복을) 하고 생이 앞에다가 흐간 베로 질게(길게) 묶어가꼬
양핀짝이로(양편으로) 줄줄이 서가꼬(서서) 생이럴 끗고(끌고) 가능거 만칠로
생이럴 호위하고 가넌 풍십얼(풍습을) 호상(護喪)이라 하고
그 흐간 천을 저승질(저승길)로 끗어주넌(끌어주는) 질베(길베)라고 하지라.
진도서넌 원래 망자가 사실 만쿰 사시다가 돌아가시믄 호상(好喪)이라 해가꼬
다시래기라넌 연극 같은 굿도하고 모도 질겁게(즐겁게) 춤치고(춤추고) 노래하고
그람시로(그러면서) 상갓집서 망즈막(마지막) 가시넌 질얼(길을) 흥겹게 보내디리지라.
아매도(아마) 요런 풍십언 삶과 죽움이 동전에 양면 만칠로(처럼) 한번 나믄 한번 죽고,
이승에 끝이 저승에 시작잉께(시작이니) 죽음이란 것얼 슬품(슬픔)이로만 여긴다믄
인생사 절반이 슬품 뿐이꺼싱께 슬품얼 한 차원 더 높우게(높게) 승화시케가꼬(승화시켜서)
기뿜(기쁨)이로 풀어 낸다넌(낸다는) 진도인덜의 슬기가 아니까 싶으지라.
어쨌든지 발인날 아적에 생이가 나가는디
진도군지(2007년판)에 나온
진도 상여의 행렬은 방장쇠, 만사, 명정, 공포, 횃불, 운아삽선, 영여, 사면육각, 길잡이, 무녀,
상두꾼, 여상자, 남상자, 여호상, 남호상, 조객의 순으로 나간다.
요케 써져있습디다만
여그 솔개동네 생이 나강거 보믄
질로 앞에 명정, 공포, 앵이(영여, 요여) 그라고 호상꾼덜이 흐칸 베럴(베를) 질게(길게) 끗고(끌고),
고 대미 깽멩이(꾕가리) 잡은 선소리꾼하고 장구럴 민(멘) 장단꾼이 앞소리에 장단 메기고,
그 뒤에 상두꾼덜이 민(멘) 꽃생이(꽃상여)가 나강구만이라.
그라고 생이 뒤로 상주하고 조객덜이 차리로(차례로) 따라 가고라.
이전에 보므는 생교(향교)나 문중에서 일을 하시등가 한학얼 하신 분덜이 돌아가시믄
생전 공덕이나 생을 시로 적은 만장덜이 무자게 많합(많습)디다 만.
생이가 나갈쩍에넌 몬차 서럽디 서런 앳소리(애哀소리)로 시작하지라.
선 소리꾼이 깽멩이 침시로(치면서) 선소리럴 하믄 상두꾼들이 받지라.
"애~~애~~ 애애애해애야~ 애 애~ 애~ 애 애애애야애~~"
"애~~애~~ 애애애해애야~ 애 애~ 애~ 애 애애애야애~~"
"어디럴 가꺼나~~ 어디럴 가꺼나 오날~ 가므는 못 오넌 질~얼"
"애~~애~~ 애애애해애야~애 애~ 애~ 애 애애애야애~~"......
함시로(하면서) 선 소리꾼언 망인께서 그간에 삼시로(살면서) 있었던 오만 궂인일,
서런일, 재미진일, 오진일......덜얼 모도 사설로 풀어내지라.
그라고 동네 입구서 노제럴(路祭를) 지내고 나믄(나면)
하적소리럴(하직소리를) 함시로 또 고케 생이럴 미고 끗고 선산이로 향해 갔지라.
생이도 이전에넌 낭구(나무)로 맨들어가꼬 생잇집에다가(상엿집에) 보관 했었는데
요때만 해도 낭구 생이넌(상여는) 읎고(없고) 쇠파이프로 맨든(만든) 틀 우게다가(위에)
곽얼(관을) 올레(올려)놓고 종우떼기(종이)로 맨(만)들어진 꼿생이럴(꽃상여를) 덮웅께(덮으니)
맨들기도 펜(편)하고 모냥(모양)도 새 것이라 이삐고 무겅(무거운)것도 덜 항께
이전에다가(예전에) 대믄(비하면) 워넌히(훨씬) 펜(편)해 졌구만이라.
그란데 요때 우리 이모님 생이가 나가든 날언 간간히 바램(바람)이 잔 불었구만이라.
그란데 이 호상(護喪)이란 풍습은
예부터 진도에 전해 내려오는 풍습으로 잘 못 알고 계신 향우님들이 많으신데,
사실 이 풍습은 1970년대 후반에 새로 생겨난 풍습이며 그 이전에는
진도에 없었던 풍습이랍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에 젊은 여자들이 별로 없어서 그나마 보기도 쉽지 않은 풍습이 되었지만...
※ 진도의 호상(護喪) 풍습에 관한 박병훈 전 진도 문화원장의
<진도의 상례와 여성호상 풍속의 실상>이라는 2005년 발표 논문 일부입니다.
(편의상 일부 내용을 간추린 점을 양해 바랍니다)
예부터 진도는 어느 지역보다 유교사상이 강한 곳으로 이는 관내에 300여 곳의 사당이
모셔져 있어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사우를 모시고 있는 곳이 우리 진도다.
그런 연유로 광복 직후까지도 남녀유별의 내외법이 강해서
여자들은 이른 아침에 남의 집에 함부로 가지 못했으며, 여자들이 장터에 다니게 된 것도
광복 후 많은 피난민이 들어오면서부터 생겨난 풍습이고, 여자들은 상에서 밥을 못 먹고
부엌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그러니 여자들이 상례를 행하는 상여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호상을 주도한다는 것은 70년대 중반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진도에 여성호상 풍속이 나타나게 된 것은 70년대에 ‘문화제’라는 제도가 생겨
‘민속경연대회’가 생겨나면서 1982년 여성호상 행렬을 창작하여 곁들인 <진도 만가>가
춘천에서 민요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고 1987년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관내에 급속히 유행되었다.
그리고 그 효시는 1970년 중반 정숙자(박병천 씨의 처, 진도 씻김굿 준문화재) 여사가
지산면 소포리에서 무용(한춤)을 가르쳤는데 교습이 끝나고 나서 그 기념으로
제자들과 함께 ‘여성호상계'를 조직하였으며 1974년 한남례(당시 무용 교습생) 씨의
시아버지 출상 때 여성호상계원들이 지금과 같은 호상을 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일부 외지의 학자들에 의해
- 고려 시대 때의 남녀 동격적 지위 제도가 조선 시대의 주자가례를 통한
유교적 제도에 의한 전통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미개한(비 유교적인)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는 - 왜곡된 논문과 보고서들이 나오고 있어
이를 하루바삐 바로 잡지 않으면 진도는 미개한 풍습이 남아 있는 곳으로
외지인들의 조소거리가 될 것
이라는 우려의 내용이 담겨 있기에
우리 향우님들도 여성호상이 진도의 오랜 전통의 풍습이 아닌
현대의 공연문화가 낳은 새로운 풍속임을 알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진도 송현 조병현>
첫댓글 좋은 자료와 사설 배우고 갑니다.
네! 관심에 감사디립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비 피해넌 읎고? 건강하시제?
안전하고 유익하게 여름 나시쇼!
송현오라버니 사진하고 글쓰시느라 수고하셨네요.....잘보았습니다..
고맙소!
비 피해넌 읎이 존 일만 많하기럴 빕니다.
고향의 상여 나가던 옛 모습을 접하며 숙연해 집니다. 조상님들의 지혜와 슬기를 다시한번 느껴봅니다. 감사합니다.
비피해넌 읎지라?
인자 그남둥 여성호상도 사램 없싱께 뵈기 에러라마넌...
아- 그때도 꽃상여였군요,,감회가 새롭습니다.
금메 고 전까장 무건 낭구로 맨든 거였는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