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 마이클 샌들(Michael J. Sandel) 강연 후기 2010.09.18 12:38 | 경제 | Kremlin http://kr.blog.yahoo.com/scott0120/3124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 마이클 샌들(Michael J. Sandel) 강연 후기 글쓴이 이충한(전북대 철학과) [2005년10월호] 조회 : 732
(미국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들 교수)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들 전주에 오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학계에서는 이미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로 잘 알려진 샌들교수가 서울, 대구 강연을 거쳐 마지막 일정으로 지난 9월 9일(금) 전북대를 방문했다. 한국철학회 다산기념철학강좌의 일환으로 열리게 된 이번 강연에서 샌들교수는 ‘세계화시대의 정치적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3시간에 걸쳐 강연을 진행했다.
샌들교수는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미국 대통령 생명윤리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7세의 나이에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다는 그의 이력이 눈길을 끈다. 정의를 주제로 한 그의 학부 강의에는 1만여 명이 수강하여 하버드 칼리지 교수의 타이틀을 부여받기도 했다. 그의 강의실을 가득 메운 수백 명의 학생들은 매번 그의 강연이 끝날 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기립박수를 친다고 하니 세계적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능력 있는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공동체주의적 입장
샌들교수는 1982년 출간된『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를 통해 롤즈의 자유주의를 비판하게 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는 1980년대 정치이론의 중심이 된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때문에 그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쳐 등으로 거론되는 공동체주의 진영 안에서도 선봉에 서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샌들교수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로 자유주의입장의 토대로 작용하고 있는 ‘무연고적 자아’(the Unencumbered self)와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문제’에 향해있다. 두 가지 모두 절차의 공정성과 관련이 있다.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은 공정한 절차를 중요시한다. 공정하지 못한 절차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정당하지 않은 차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절차에 참여하는 의사결정자들이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도덕적 배경을 마치 없는 것처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주된 입장이다. 그것은 공정한 절차를 방해하는 장애물인 까닭이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대한 차별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공적영역에 있어서 어떤 선택이 정당한 차별을 결과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의 사적영역(종교적 신념 내지는 도덕적 배경)이라고 평가하는 것들을 우선 한쪽으로 제쳐놓아야 한다. 하지만 샌들교수는 그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인의 선관념은 공동체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역사와 전통의 기반위에서 형성되는 개인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 공동체의 선택과 결정은 공동체의 진정한 목적과 유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샌들교수는 강연에서 바로 이것이 절차를 중요시하는 절차적 자유주의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절차의 공정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우리에게 먼저 깊이 숙고되어야 하고 다루어져야 될 공동체의 목적과 공공선을 간과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가 ‘좋음’(the good)에 대한 숙고를 중요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에 대해 불공정성의 책임을 묻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특정 정체성이라는 것이 불공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특정성을 무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너무 성급한 태도”라고 답변했다. 한 예로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을 뽑는 상황을 들었는데,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기준에 부합한다고 해서 우리는 외국사람을 외교관으로 뽑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이것은 정당한 차별이다. 왜냐하면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공동체 안에서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좋음의 목표와 목적을 숙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샌들교수의 기본입장은 공동체주의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주의자라는 딱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주의자라는 이름은 내가 제안한 것도 아니며, 자칫 내 입장이 전통이나 관습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태도로 비춰지는 것이 불편하게 생각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했다. 또한 자유주의의 미덕인 보편적 인권과 관용 그리고 존중이라는 가치들을 인정하긴 하지만 그것이 공동체의 언어, 문화, 역사, 전통에 담긴 특수한 정체성을 부정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공동체주의와 한국사회의 현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의 공동체주의자들 보다 더 공동체주의적 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샌들교수의 공동체주의적 입장은 사회적 연대감의 약화, 정치참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나타난 서구사회의 파편화 현상에 대한 처방으로 제시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한국사회는 미국사회와는 달리 지역주의, 연고주의, 지난날 독재사회의 경험 등을 통해 자유주의에 대한 욕구가 더 큰 상태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외국의 사상을 수용할 때 보다 신중한 태도를 요구하게 만든다. 지역주의 청산을 위해 대 연정을 제안한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가 잠시 멈춰선 상황에선 샌들교수의 연고적 공동체주의 입장은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그는 “자유주의는 넓게 이해했을 때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형태의 정치철학을 말한다.”면서 “이러한 형태의 자유주의가 한국사회의 배경(독재정부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립한)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미국의 사회적 맥락과 한국의 사회적 맥락이 다름을 인정하면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연고적 공동체주의 모두가 사회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한 사회의 지배적 경향에 대해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단, 앞서 그가 주장했듯이 권리나 자유를 이해할 때 그에 우선하는 특정한 정체성이나 선관념을 없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의 입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를 표시했다. 이렇게 볼 때 샌들교수의 입장은 자유주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공동체주의적 비판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화주의와 시민적 덕성의 배양
샌들교수의 기본 입장이 되고 있는 공동체주의는(전통이나 관습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공화주의로 이어진다. 공화주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유로운 시민세력의 자발적 연합에 의한 참여자치라고 말할 수 있다. 자발적인 참여는 단순한 개인의 결사체가 아닌 공동의 목적의식을 통해 깊이 연대하고 있는 공동체의 바탕위에서 가능하다. 그는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의 연관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 “공화주의는 좋음(선)에서 시작해서 옳음의 문제를 도출해내는 이론의 한 형태”라고 답했다. 그리고 공화주의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선관념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자치의 이념이며 바로 여기에 공동체주의의 한 유형으로서의 공화주의가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공화주의 역시 어떤 일정한 형태의 공적인 생활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샌들교수는 이 문제를 ‘시민적 덕성의 배양’ (the cultivation of civic virtue)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민적 덕성의 배양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절차적 민주주의 또는 절차적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원자적 개인주의와 사회적 파편화 문제를 예방하거나 개선해 나가는 역할이다. 이것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자치의 부재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으로 보인다. 다른 한 가지는 공화주의가 정치적 의사결정에 있어 관습주의나 근본주의로 빠져드는 것을 예방하는 역할이다. 전통과 관습에 무비판적인 태도로 이어지는 것은 건강한 정치공동체를 병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입장은 이러한 기획이 일련의 강제성을 띠거나 공적인 영역이 의견의 다양성을 잃고 전체로 용해되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한다. 하지만 샌들교수는 개인들 사이의 공간을 와해시키는 대신에 그 공간을 다양한 자격의 사람들과 기구들로 채우는 토크빌의 공화주의를 긍정하면서 “공화주의가 정치적 논쟁을 초월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을 제공 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연대감에 의해 강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도 민주주의적이고 다원론적인 표현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공화주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번 강연에서 현대사회에 있어 시민적 덕성의 배양의 방법으로 시민의 심성을 조용하고 느리게 개선시켜가는 형성적 계획안을 제시했다. 샌들교수는 이러한 계획안이 한 사회 안에서 보다 수준 높은 시민적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이끌어 주려는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교육, 환경, 인권, 언론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시민들의 의식을 환기시키고 향상시키려는 시민단체나 작은 공동체들의 노력은 시민적 덕성의 배양활동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 시대의 정치적 정체성
샌들교수는 강연 후반에 접어들어 미국과 우리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관련하여 질문을 받았다. 한 학생은 세계화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모든 것을 경쟁과 경제적 효율성의 잣대로만 파악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우리가 세계화 시대의 정치적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시키고 변화시켜가야 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샌들교수는 “ 신자유주의 형태의 세계화를 반대하며, 시장만이 세계사회의 충분한 바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답하면서, 문제는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체계를 어떻게 더 민주적으로 만들어 낼 것이냐 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 방법은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운동(인권, 여성, 환경 등)에 대해서 우리들의 관심을 촉진시키고 자기의 국가적 관심을 넘어서는 비판적 시민권을 발전시키고 확대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국은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 국내적으로는 복지를 통한 공공정책을 강화시켜 사회적 연대감을 형성해나가는데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계를 하나로 생각하는 세계주의는 비판했으며, 국민국가(지역, 공동체)주의는 옹호했다.
이러한 샌들교수의 입장에 대해 김의수 교수는 “세계주의와 특수주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강조점의 차이의 문제이며, 샌들교수가 세계시민적 인류애나 덕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동안에 세계기후협약(도교의정서)에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미국이고, 인권협약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도 미국”이라면서 “미국이 초강대국이라면 오히려 이런 문제에 후진국보다 더 철저하고 성실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미국의 학자로서 자국에 대한 비판을 선행하지 않고 세계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임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미국이 굉장히 강대국이고 이 세계와 관련해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데, 이런 점에서 미국은 이 시대에 있어서 특별히 어떤 겸손을 보여야 하는 상태에 처해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세계주의와 특수주의가 양 측면을 조정해야 하는 강조점의 차이의 문제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샌들이 말하기를 맹자(孟子) 가라사대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 (孟子 -梁惠王章句 下 三章)
강연의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자 샌들교수는 전 날 유학을 연구하는 한 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듣게 된 맹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작은 국가는 큰 국가를 존중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고 자기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다. 그런데 맹자가 말하기를 큰 국가가 작은 국가를 존중하면 보다 깊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면서 이를 당일 강좌의 맺음말로 대신했다.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논의는 특수주의와 보편주의의 논의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정체성의 논의에 있어서는 개별적 정체성과 보편적 정체성의 문제로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 맥락과 다양한 사태의 경우에 따라 그 강조점을 달리할 수 있는 보완적 관계에 있음을 아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샌들교수 자신도 인정했듯이 공화주의는 모험의 정치이고 보증이 없는 정치이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미국사회의 정치현실에서 그는 공화주의라는 청량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청량제는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