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눌재 양성지와 중국의 ‘동북공정’ | ||||||||||||||||||||||||
이미 500년전 동북공정 예견했다 | ||||||||||||||||||||||||
| ||||||||||||||||||||||||
편집국 mr@gimpo.com | ||||||||||||||||||||||||
| ||||||||||||||||||||||||
이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티베트, 몽골에 대한 서남공정, 2002년부터 동북공정과 함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역사에 대한 서북공정이 추진되었다. 이들 공정은 그 역사에 대한 중국 역사 흡수 책략이다. 동북공정은 우리나라 역사의 시원인 고대사를 뿌리째 흔들어 뽑으려 하고 있는 것으로 한민족으로 태어난 이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역사 침략행위이다. 이미 중국은 2004년 7월에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을 중국의 문화재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이 등재로 고구려사는 전 세계에 중국사의 일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 동북공정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민족사의 발상지인 백두산에서 우리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떼어내려는 중국 정부의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공정’이 최근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부터 백두산 개발에 힘을 쏟기 시작, 백두산에서 ‘한민족 지우기’를 노골화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전 오늘날 중국의 동복공정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에 대비한 주장을 한 이가 있다. 눌재 양성지 선생(조선 태종15년-성종13년, 1415-1482)이다. 선생은 “우리나라는 넓이가 몇 만리(里)이고, 호수(戶數)가 수백 만이며(戶數百萬), 군사가 1백 만으로,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주(周)나라에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나라(元)와 위(魏)나라와는 (우방으로) 통호(通好)하였으며, 연(燕)나라에는 한때 의지하였으나, 수(隋)나라는 6개 사단(六師)이 (우리나라에) 대패(大敗)하였고, 당(唐)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요(遼)나라의 침략군은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송(宋)나라는 우리가 섬겼고, 금(金)나라는 우리를 부모(父母)의 고향이라고 일컬었으며, 원(元)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명(明)나라 태조도 또한 삼한(三韓)이라 이르고 구하(九下 : 중국의 주변에 있는 9개의 독립국)의 나라라고 하며 요동(遼東)의 동쪽 1백 80리에 연속된 산맥(連山)을 경계로 하여 갈라놓았습니다(把截)”(예종실록 예종 1년 6월 29일조)고 하여 우리나라의 영토를 요하 동쪽 만리萬里)의 나라라 하였고,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의 역사 즉, 오늘날 중국지역까지를 우리나라 역사의 장이라 하였다. 중국에 대한 사대를 조선조 3대 정책의 하나로 채택하였던 당시에 민족적 자부심을 잃지 말 것을 강조하여 “당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군자의 나라’라 하고, 송나라에서는 ‘예의의 나라’라고 불렀으며, 문물의 아름다움은 중화와 짝이 된다”고 하였다(세조실록 세조 2년 3월 28일조). 우리나라의 대외사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중국과 싸워 ‘십전이칠승(十戰而七勝)(열번 싸워 일곱번 이김)’, 북방민족과는 ‘십전이오승(十戰而五勝)(열번 싸워 다섯 번 이김)’의 기록을 거두었다(세조실록 권34 세조10년 8월 1일조). 그러므로 金나라는 우리나라를 ‘부모의 나’라 불렀고(세조실록 세조 1년 7월 5일조).“전조의 태조(太祖,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하나로 통일하고 개원(改元)하여서 종실(宗室)을 칭하였고, 금(金)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황제(皇帝)로 삼았고,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는 스스로 성교(聲敎)가 있다고 하게 하였다(예종실록 예종 1년 6월 29일조). 우리나라는 과거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조선)세조 당시에도 우리나라는 미증유의 융성을 이루어 일본 여진의 사신이 항상 수백명씩 내조(來朝)하여 궐정(闕廷)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성황을 이루고 있으며(세조실록 세조 2년 3월 28일조), 중국의 사신이 우리나라를‘벼슬하고 싶은 나라’또는‘천당(天堂)’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2년 10월 17일조). 눌재 선생은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한 사대로 중국에 동화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선생은 동화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주성을 유지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 동방은 대대로 요하 동쪽에 살면서 만리(萬里)의 나라라 불렸으며, 삼면은 바다로 막히고 한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구역이 스스로 나뉘어졌으며 풍기(風氣)도 또한 다릅니다. 단군 이래로 관을 설치하고 주(州)를 두어 따로 문화가 있습니다. 전조(前朝)(고려) 태조도 훈서(訓書)를 지어 온 나라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의관과 언어를 모두 본속(本俗, 본래의 풍속)에 따르게 하였으니, 만일 의관과 언어를 중국과 다르지 않게 한다면 민심에 정함이 없이 (중국의 제후국가인)제(齊)나라로도 가고 노(魯)나라로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조와 몽고 사이에 있어 전조에 불평이 있는 무리들이 서로 이어 투화(投化)하여 국가가 심히 편하지 못하였으니, 비옵건대, 의관은 조복(朝服) 이외에는 반드시 중국제도를 다 따르지 못하게 하고, 언어는 사신을 통하는 이외엔 반드시 (우리 고유의) 옛 풍속을 변경하려 하지 마십시오. 비록 연등놀이나 돌던지기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옛 풍속에 따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세조실록 세조 1년 7월 5일조). “(우리)동방의 사람들은 중국의 부성(富盛)한 일은 잘 알면서도 우리나라의 일들은 상고하지 않으니, 아주 옳지 못합니다”(세조실록 세조 1년 7월 5일조). 눌재 양성지 선생은 동국지도라는 우리나라의 지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그 지도에는 요하 동쪽의 오늘날 중국의 영토와 울릉도와 독도 및 대마도까지 우리나라의 영토로 표시하였다(세조실록 세조9년 11월 12일조). ● 문양공(文襄公)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 선생은 조선 태종 15년(1415) - 성종 13년(1482), 성은 양(梁), 본관은 남원(南原), 휘(諱) 성지(誠之), 호 눌재(訥齋), 시호 문양(文襄), 관직 은퇴 후 김포 대포리에 사셨다. 선생의 사당과 산소 및 신도비가 양촌면 대포리에 있다. 세종 23년(1441)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를 시작으로 성종조까지 6왕조(王朝)를 섬기면서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 공조판서(工曹判書) 2회.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2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악학도감 제조(樂學都監 提調)도 겸직한 바 있는 당대 최고의 문사였다. 눌재사상연구소 김기열 | ||||||||||||||||||||||||
|
||||||||||||||||||||||||
2007년 01월 15일 편집국의 다른기사 보기 | ||||||||||||||||||||||||
자랑스런 김포의 선조 ‘눌재’ | ||||||
눌재 양성지 선생 사료전시회 | ||||||
| ||||||
유인봉 dk@gimpo.com | ||||||
| ||||||
지난 12일부터 사흘간 시민회관 다목적홀에서 열린 눌재 양성지 선생 사료전시회에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당시의 족보나 역사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 되어있어 문화축제기간동안 뜻있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동안 양성지 선생의 선양 사업을 이끌어온 양재동 회장을 비롯, 김기열 박사와 양희성 사무국장 양기석 이사 등 양씨문중의 임원들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열정어린 모습으로 전시기간동안 자리를 지키며 선양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안내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400여년전 양성지 선생이 공직에 있으면서 아들 넷을 김포에 내려보내 정착하게 한 후 본인이 퇴직해 김포에서 살았던 김포사람이며 그 직계종손이 아직도 대포리에 살고 있다”며 양재동회장은 일일이 전시회장을 찾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안내했다. 이 전시회는 그동안의 양씨문중이 수안사 사당을 신축하고 대포서원을 재건하면서 노력해온 활동사항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었고 지당 이화자 선생이 직접 쓰고 제작한 “어제서문”과 “녹훈교서”가 3미터 24폭에 담겨져 양성지 선생이 당시에 세웠던 공적들에 대해 소개함으로써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행사보다는 많은 김포시민이나 김포시의 관계자들의 발길이 없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