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덕향교 전경. |
유교이념을 치국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전국 330여 군·현에 일읍일교(一邑一校) 원칙으로 관학인 향교(鄕校)를 설치했으며, 다른 한편 고명한 선비가 중심이 되어 선현봉사와 교육을 하는 서원(書院)이 사학으로서의 기능을 함께 했다(2013.04.10. 도산서원 참조).
향교는 성현에 대한 제사와 후학에 대한 교육, 그리고 지역사회의 민풍교화(民風敎化)라는 3가지 기능을 가졌으며, '향교의 진흥'을 수령들의 중요한 평가항목으로 삼는 등 성리학의 보급과 장려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향교는 행정구역의 크기에 따라서 학생의 정원에 차등을 두었는데, 부(府)·대도호부·목에는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그리고 현에는 30명이었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주·부·목에는 종6품인 교수 1인이, 500호 이상의 백성이 사는 군·현에는 종9품의 훈도 1인을 두고 관찰사가 감독했으며, 또 500호 미만의 작은 고을에는 학장을 두었다.
그밖에 향교마다 교장, 제장, 장의, 색장, 유사, 재임과 교노, 방자를 두고, 향교의 재정 운영을 위하여 학전(學田) 5∼7결을 지급하여 그 수세로써 비용에 충당케 했다.
향교에서 공부한 뒤 1차 과거에 합격하면 벼슬이 아니라 생원·진사의 호칭을 받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으며, 성균관 유생이 된 후에는 문과에 응시하여 고급관리에 오를 수 있었다.
향교는 성현들의 훌륭한 덕을 기리기 위한 제사공간인 대성전(大成殿)과 기본적인 교육을 위한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필수적인 요소인데,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역대 유현과 조선의 선현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음력 2월, 8월의 상정일에 석전제를 지내고 또 매달 삭망제를 올렸다.
향교에서 제사공간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거행한 것은 배우는 학생들에게 선현들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고,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으며, 명륜당의 사방 벽에는 교육지침이나 향교의 연혁 및 중수기 등을 적은 글들을 걸어서 면학분위기를 장려했다.
20세기 초 경부선 철도 대전역을 만들면서 태어난 신도시 대전시는 옛 회덕현과 진잠현, 유성현을 아우르고 있지만, 각 감영과 군·현마다 설치했던 향교는 대전시 전체적으로도 회덕향교와 진잠향교 2개소뿐이다. 대덕구와 동구 일원 및 유성구 일부를 관할로 삼았던 회덕현은 지금의 대덕구 읍내동이 당시 회덕현의 행정중심지였는데, 읍내동에는 수령의 행정청인 회덕 관아는 물론, 향교와 객사, 사창, 향사당 등이 있다. 그중 회덕향교는 읍내동 옛 관아 터(읍내동 회덕1동사무소 옆 공터)에서 북쪽으로 400m 남짓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대부분의 향교가 조선 초기에 건립되어서 회덕향교도 조선 초기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데, 그나마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3년(1600)에 중건했으며, 그 후 순조 12년(1812)에 다시 크게 중수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이때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도 1969년 향교의 전반적인 보수를 했고, 1989년에는 외삼문을 고쳤다. 향교건물 중 대성전만 대전시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회덕향교에서 선전대제를 드리는 모습. |
읍내동 현대아파트단지가 있는 삼거리에서 경부선철도 지하 건널목을 지나기 직전 왼편에 회덕향교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이 길로 약 900m쯤 들어가면 남향 양지바른 곳에 회덕향교가 있다. 향교를 찾아가는 길은 좁은 콘크리트 포장길인데다가 작은 골목이 여럿이어서 초행자에게는 혼란스러워서 안내판이 좀 자세히 설치되었으면 싶다.
낮은 야산의 비탈진 경사면에 2단으로 축대를 쌓아 터를 닦은 회덕향교는 홍살문을 지나면 솟을대문의 외삼문이 있는데, 외삼문에 들어서면 행랑채처럼 긴 건물이 입덕문(入德門)이고, 우측에 서재(書齋), 좌편에 제사준비를 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온돌방이다. 또, 학생들이 공부하며 기거하던 동·서재는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좌우로 배치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명륜당을 돌아가면 넓은 마당이 있는 공간이 학생들이 공부하던 동서재가 있던 터라고 한다. 아마도 당시 전국에서도 가장 작은 고을에 속했던 회덕현의 학생 숫자가 적어서 명륜당 양 측면에 붙어있는 온돌방이 동·서재의 역할을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2013. 05.15. 계족산 황톳길 참조)
회덕향교 명륜당. |
명륜당을 지나서 다시 10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담장과 내삼문으로 구분된 가장 높은 지대에 대성전이 있는데, 대성전이란 공자의 작호인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의 앞 글자를 따서 대성전이라고 한다. 정면 3칸·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인 대성전 내부의 바닥에는 나무마루를 깔았다.
대성전에서 배향인물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현 9현은 어느 향교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밖에 유학이 한반도에 들어온 신라 이후 조선말까지의 우리나라의 유현을 모시는 것은 각 향교마다 차이가 있다.
국내 18현 등 모두 27현을 모시고 있는 회덕향교는 중국 5성(五聖 :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의 위패를 중앙에, 송대의 4현(宋朝四賢 : 주돈이·정호·정이·주희)과 한국의 18현(설총·안유·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송준길·최치원·정몽주·조헌·송시열 등)의 위패를 동서 양쪽 벽에 배향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배향인물의 구성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향교의 배향기준과는 크게 다르다고 한다.
한편, 회덕향교에서는 판본 18종 25책, 사본 20종 24책을 보존하고 있는데, 그중 동재안(東齋案)·조선시대 과거합격자들 명단인 청금록(靑衿錄)·향교청금록구안(鄕校靑衿錄舊案)·회덕향안(懷德鄕案)·향원록(鄕員錄) 등은 대전지방의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회덕향교 대성전. |
건국이후 500년 동안 조선사회 버팀목이 되어 성리학을 보급하던 향교와 서원은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서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기능만 이어오고 있는데, 이것을 석전이라고 한다. 회덕향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길일을 택해서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선현에게 제례를 올리는데, 대부분의 향교가 마찬가지이지만 단체방문이나 실습의 경우가 아니면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뜻있는 사람들이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전통문화시민강좌와 여름충효교실, 숭모제례 등 다양한 전통문화행사를 주관하고 있으나 화재와 도난 등의 염려에 대비한 것이겠지만, 이런 관리방식은 거의 대부분 닫힌 시간만큼 시민들에게 멀어진 공간으로서 잊힌 역사의 유물로 남게 될 것이다. 대전시는 초헌관으로 형식적인 참석보다는 학생들이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현장으로서 견학하고 실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또 템플스테이며 민박 등을 통한 한국의 실상을 알려고 하는 내외국인들을 위한 실습장소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안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의 하나로 우리 역사에서 향교가 맡았던 역할은 물론 대전 지역에서 배출한 인물들의 자료를 많이 만들어서 전시하고, 잊힌 공간이 아닌 누구든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향교가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