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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私信)의 형식으로 쓴 <설향>의 독법
-정소성 형에게
권영민(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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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형!
신작소설 <설향>의 원고를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젊었던 시절 형의 화제작 <천년을 내라는 눈> <슬픈 귀국> <아테네 가는 배> 등을 읽었던 당시의 긴장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에 대한 형의 믿음이 변함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장편소설 <설향>은 젊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좀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 젊음이란 단순한 세대적 감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도 쉽게 알아차리겠지만 이 소설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남녀 주인들의 제 길 찾기의 과정을 서사의 주축으로 삼고 있어요. 물론 형은 소설적 기법을 최대한 살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연애의 욕망을 이 서사의 과정에 교묘하게 교차시키면서 이야기의 긴장을 이어갑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해야 하는 마음의 행로를 여기서 제외할 수 없을 듯합니다. 새로운 예술을 향한 도전에는 좌절도 있고 실패도 있지만 자기 욕망을 따라가고자 하는 힘이 그 저변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이야기 자체가 보여주는 젊음의 감각이라고 내세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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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란 아름답지만 늘 충동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소설 <설향>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자기 파괴적이라고 할 정도로 격정적이면서도 때로는 거기에 망설임이 또한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그려내고 있듯이 젊음이란 거기에 포함되는 가장 격렬한 여러 가지 파격의 장면들을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열 한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의 이야기에서 서사의 진행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일인칭 시점인물로 내세워 놓고 있는 ‘현우’라는 인물이다. 모든 삽화들은 현우(나)의 관점에서 묘사되고 그 전후관계가 설명된다. ‘나’는 미술대학 시절의 친구인 ‘혜란’을 상대역으로 내세우면서 그 중심서사의 주변에 ‘태현’과 ‘미라’라는 남녀를 병치시켜 놓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네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화가를 꿈꾸는 네 사람의 젊은이들은 모두가 특이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현우는 사려깊은 모범생처럼 그려진다. 예술이라든지 생이라든지 하는 것에 대한 진지성이 이 인물에게서 느껴진다. 현우는 자기 욕망을 적절하게 자제하고 자연스럽게 친구인 혜란과 가까워진다. 즉흥적인 행동보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그에게 싹트는 사랑의 감정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현우의 삶은 어떤 면에서 매우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인 태현을 위한 배려와 깊은 우정도 그렇고 군대를 제대한 후에 그가 선택한 미술교사의 길도 평범한 자기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내면 깊이 삶과 예술에 대한 진정성을 키워나간다. 젊은 독자들에게는 불만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삶의 진정성이 그의 행동에 균형을 부여하고 있다. 혜란의 경우는 이같은 현우의 성격과 그런 대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혜란에 대한 현우의 태도는 친구로서 또는 미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술적 동반자로서 가질 수 있는 감정을 넘어선다. 혜란은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현우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혜란은 현우가 군대생활을 거치는 동안 다른 남성과 결혼하기도 했고, 남편과 사별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파리로 떠나 미술의 세계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두 사람의 결합은 너무 늦어 보이지만 결코 그 선택 자체가 이미 운명적으로 예정되었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나는 사실 이런 식의 이야기의 귀결에 불만이다. 너무 짜 맞춰진 것처럼 그렇게 결말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우와 혜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젊음과 그 충동은 삶의 현실에서 요구되는 여러 가지 요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현과 미라의 경우에는 이와 다른 변수들이 작용한다. 태현은 정치를 꿈꾸는 장교 출신 아버지와는 다른 섬약한 예술가 지망생이다. 태현은 미술공부를 하면서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기도 하지만, 내성적이면서도 자유롭고, 충동적이면서도 진취적인 특징도 함께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기질은 미라의 경우와 상통한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일탈된 행동과 기질이야말로 현우와 혜란에 비해 훨씬 예술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태현의 부친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막대한 선거 비용으로 재산을 날리고 파산지경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태현은 이같은 현실적 고통을 스스로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외부 세계와 단절한 채로 칩거한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 밀려드는 시련을 오직 예술적 욕망을 불태우면서 감내하고자 한다. 미라의 경우는 대학시절 파리로 연수를 떠났다가 거기서 만난 프랑스 남성과 동거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다. 미라는 그 자유분방함 자체를 자신의 미술에 대한 예술적 욕망으로 바꿈으로써, 결국 대학시절의 친구인 태현에게 새로운 예술가의 길을 열어주고 현우와 혜란에게도 파리에서의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소설 <설향>의 이야기 자체는 이 젊은이들의 육체적 욕망과 사랑, 예술적인 야망과 성취 사이에 역동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물론 이야기의 배경 자체가 당대적 상황과는 일정한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이긴 하지만 서사의 진행 자체가 완만하고 차분하다는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정적(靜的)이라고 할 만큼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들의 행동은 지나치게 정직하다.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요즘의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일탈과 파격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속에 무게를 더해주는 삶에 대한 진정성이 담겨져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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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설향>의 독법 가운데 가장 힘들여야 할 것이 사랑과 예술의 의미를 결합시켜 가는 일종의 ‘성장소설’로서의 속성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주인공인 현우의 경우를 중심으로 할 경우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 삶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하나는 대학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생활이다. 이 두 단계의 과정은 소설 속의 이야기에서도 전반부와 후반부의 중심 내용을 각각 차지한다. 그 상황이 집단적인 것이면서도 전혀 다른 조건들로 채워진다.
이 소설에서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대학생활은 사랑의 의미와 예술의 정신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충동을 보여주는 시기이다. 이 단계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의 갈등과 방황은 대체로 그 원인이 외부적 현실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내면의 욕망과 그 충동에서 찾아진다. 이들은 사랑에 대해서도 어떤 확신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운 예술에 대한 갈망도 막연한 동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들의 행동 속에서 간간히 드러나는 일탈은 개인적 충동의 결과이긴 하지만 젊음의 시대에 겪게 되는 하나의 고통과 시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젊음의 시대는 언제라도 이념과 현실의 간격, 개인적 욕망과 그 좌절 등으로 점철되며, 그 갈등이 충동 속에서 더욱 격렬해지고 방황의 몸부림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소설 <설향>은 젊음의 이야기답게 연애의 서사를 중시한다. 이 소설을 젊은 미술학도들의 자잘한 연애담으로 읽어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연애는 자신의 상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사랑의 배반이라든지 갈등과 같은 극적인 요소가 드러나지 않는다. 시점인물인 현우에게 처음부터 그 상대역으로 혜란이라는 여성이 노출되어 있으며 태현과 미라 역시 비슷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소설의 결말에서 그 결합이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그렇게 한데 만나게 된다. 그러나 현우와 혜란, 태현과 미라의 결합은 서로의 사랑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곡절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시점 인물인 현우의 경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거기서 비롯되는 고통과 시련을 견디면서 끊임없이 자기 확인의 노력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는 고통을 내면화하고 갈등을 넘어서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주어진 상황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모든 조건을 감내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삶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단계에 올라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우라는 특이한 개성을 통해 차분하게 전개되는 자기의 발견,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추구, 삶의 가치에 대한 인식은 이 소설의 핵심에 해당된다.
소설 <설향>의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삶의 과정은 곧 개인적인 자기 성장의 단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발견되는 운명적 개별성이 사실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의미있는 삶의 과정으로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자신의 운명의 막바지까지 달려갈 수 있는 인간이란 현실 속에서는 그리 많지 않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에 소설 <설향>이 보여주는 젊음의 방황과 그 의미를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참된 의미의 성장이란 끊임없는 자기 탐색의 과정과 통한다. 여기서 말하는 탐색이란 잃어버린 옷깃의 단추를 찾는 것과 같은 일은 아니다. 탐색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아직껏 경험하지 못한 어떤 대상에 대한 추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설향>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은 결코 자신들이 겪었던 과거의 체험을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것이 어떤 우연의 법칙에 의해 그런 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모든 일들은 항상 변화를 보이게 마련이다. 작가 정소성은 <설향>을 통해 끝없이 열려 있는 예술적 신념에 매달려 자기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젊음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젊음의 도전은 미지의 세계로 뻗쳐 있는 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비록 목적지가 보이지 않더라도 언제나 그 자체로서 확실한 방향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소설 <설향>의 이야기는 비록 고통스런 방황의 과정이긴 하지만 더 큰 것을 향한 탐색의 길과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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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형!
형의 신작 장편소설 <설향>을 읽는 독자들에게 나는 형의 소설 <천년을 내리는 눈> <슬픈 귀국> <아테네 가는 배> 등을 한번 펼쳐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들을 발표하던 시절 형의 어눌한 음성과 진지한 눈빛은 온통 문학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용케도 거기서 현실에 대한 환멸이 그 가운데에 깔려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사건의 인과적 해석을 거부하고 플롯의 원칙을 파괴하는 데에서 새로운 소설 미학의 가능성을 제시해 놓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형은 언제나 예정된 해석을 뒤로한 채, 해석되지 않는 인간적 진실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같은 형의 작가적 노력이 소설적 세계의 새로운 차원을 넘나들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형의 소설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설향>을 읽으면서 군데군데 <천년을 내리는 눈>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고, <슬픈 귀국>과 <아테네 가는 배>에서 소설구조의 추상성을 구체적 현실로 형상화하고 있는 ‘길’을 찾기도 했습니다. 형은 언제나 소설이야말로 인간의 삶의 ‘길’이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설향>에서도 그 ‘길’은 현실이며 삶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소설의 내적 형식으로서 그 구조를 드러내는 골격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운명의 ‘길’에 해당합니다. <설향>의 이야기 속에는 주인공들이 도달해야만 하는 귀착점도 암시되어 있으며, 출발점의 의미도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명의 ‘길’은 어떤 가능성의 의미만을 어렴풋하게 드러낼 뿐, 결코 명확한 도정과 그 귀착점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가야만 하는 ‘길’이지만, 그 ‘길’에서 맞닿는 목표란 막연한 가능성의 상태로 암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소설의 주인공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운명적인 삶이 더 복잡하게 전개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좀더 사려깊은 독자라면 그 운명적인 길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소성 형!
형은 소설이라는 것이 이미 확정되어 있는 세계, 체험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만족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 독자들에게 늘 강조해 왔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미지의 세계를 조심스럽게 밟아가는 것처럼, 소설의 세계도 그렇게 체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형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울립니다. 나는 그것이 바로 소설을 통한 생의 창조이며, 발견을 뜻하는 것이라는 점에 지금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제 초로(初老)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내가 형과 함께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독자들 앞에 서 있어야 하는 이유도 <설향>을 통해 다시 절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