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모든 도구가 그러하였듯이 발생초기에는 기능적인 것을 해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점점 기능적인 내용은 줄어들고 의미론적인 요소가 부가되어간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유물을 보고 기능적인 면은 도외시하고 의미론적으로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도구가 만들어진 기본 목적은 기능이기 때문에 기능을 무시하고 의미론으로만 이야기한다면 기본을 무시한 것과 다름이 아니다. 집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자연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지던 것이 보호의 목적이 달성된 후에는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른 목적의 집을 짓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궁궐은 자연환경으로부터 왕을 보호하려는 목적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궁궐은 궁궐 나름대로 필요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집이다. 궁궐은 왕이 먹고 자는 생활을 위하여 만들어진 집이지만 왕의 생활의 생활 공간을 만든다는 기본 목적뿐만 아니라 사회적 목적도 있다. 왕이라는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목적도 집을 짓는데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구조에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한 껏 보여줄 수 있는 장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도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집을 짓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집을 짓는 행위나 형태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통치를 한다는 왕의 행위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서도 의미를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집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이 부여된다. 콘크리트와 철골구조가 발명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집의 구조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방의 넓이를 결정하는 경간(徑間:span-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은 극히 제한적 일 수밖에 없었다. 고대 이집트의 신전이나 궁전 그리고 페르시아의 고대 궁전의 유적을 보면 많은 기둥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평면을 보면 어떻게 사람이 살았을까 할 정도로 기둥으로 빼곡이 들어차 있다. 이러한 평면에서는 자기의 임의대로 집에 기능을 부가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아치(arch)나 볼트(vault)구조이다. 볼트 구조를 우리 나라에서는 홍예(虹霓)라고 한다. 이러한 구조 방식은 이론적으로는 무한대의 공간을 만들 수 있지만 넓으면 넓을수록 재료, 인력, 장비의 문제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19세기 들어서 발명된 재료인 철골과 콘크리트이다. 철골과 콘크리트 재료가 발명되고 철골과 콘크리트에 대한 역학 이론이 뒷받침된 후부터 건축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되었다. 철골과 콘크리트의 발명은 미래의 건축물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혀놓았다. 이러한 발전을 바탕으로 근대건축사에서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르꼬르뷔지에라는 건축가는 1914년 근대 건축의 전범이 된 도미노(domino)시스템을 발표하게 되었다. 도미노시스템은 외벽의 독립, 자유로운 실내공간의 구성, 무한한 적층구조를 요체로 한다. 도미노 시스템은 당대에 개발된 재료와 기술로 가능한 건축을 간단한 그림으로 함축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완성은 재료와 기술의 발전 없이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기술은 집을 다양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기술 발전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여러 가지 가능성을 넓게 열어 놓는다. 요사이 지어지는 집들이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많은 부분 기술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앞서 말한 구조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종 재료의 발전은 집의 여러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의 집과 현재의 집을 비교하여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이전의 집은 대부분 현장에서 기능공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집이 잘되고 못됨은 현장의 기능인의 솜씨에 의하여 거의 결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생산한 재료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재의 집은 현장에서 작업하는 기능인의 솜씨가 과거보다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전통한옥을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공장생산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와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재료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가공되어 시공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사이 지어지는 집을 보면 현장에서 가공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콘크리트 타설을 위한 거푸집이 현장에서 제작 조립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지만 요사이는 대형건물뿐만 아니라 소형 건물까지도 공장에서 제작된 거푸집을 조립하는 정도의 작업만을 하고 있다. 근·현대에 와서 공장에서 생산된 재료가 주로 사용되는 이유 중 하나는 집의 대량생산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인구의 도시집중과 1,2차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파괴된 집을 단시일 내에 공급하기 위하여 건물의 대량생산화는 필수적이었다. 그에 따라 과거와 같은 수공업적 방법으로는 이러한 수요에 대응할 수 없어 결국 공장 생산의 대량화가 대세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역시 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건축시스템을 촉발하게 되었다. 설계와 시공이 점점 세밀하게 분리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요인에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옥에서 설계라는 부분의 발전이 거의 없었던 것은 삶의 형태가 다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집을 만들려는 대한 요구가 없었고, 집을 짓는데 있어 재료와 공법이 거의 결정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현장의 기능인의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량생산으로의 변화는 사회적 요구의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건축문화환경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공장제 재료의 적극적인 활용은 결국 미감의 변화까지를 이루어 낸다. 공장에서 만드는 자재는 생산의 효율성 때문에 모듈화가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직선이 많이 이용될 수밖에 없다. 직선의 사용이 증가하는 것은 직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킨다. 직선이 눈에 익어짐에 따라 직선이 새로운 미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과거처럼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차가운 직선이 새로운 미감으로 대두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기계류의 발전은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 문제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실내·외의 환경이 인공적으로 조성될 수 있어 집의 발생의 기본적 명제인 자연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문제가 집의 구조를 결정하는 우선순위에서 뒤쳐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을 보는 눈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사조를 탄생하는 모태가 된다. 이러한 사조는 근대건축에서 국제주의양식(國際主義樣式: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전제하에 공통분모의 미감과 삶의 방식을 찾아내어 어느 곳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집의 형태를 설계하려는 사조)의 탄생을 촉발하게 된다.
이처럼 집이란 여러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로 인하여 다른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여러 문화요소 중 하나만을 가지고 집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방법이다. 집이라는 것은 하나의 문화적 요소만이 아닌 모든 문화 요소가 어우러져 나타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담고 있는 도구이기 때문에 삶의 다양함만큼이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과거의 한옥이 현재의 집만큼 다양한 형태를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 시대의 삶이 지금보다는 단순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현재의 우리의 집이 다양한 형태와 내용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집은 문화의 여러 속성들의 서로 영향을 주며 변화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는 집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분류하여 어떻게 집에 반영되었는지를 한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