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장에서
내게는 여름만 되면 무더위와 장마를 무릅쓰고
영적 충전과 삶의 전환을 갖기 위해 준비했던
여름수련회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장소는 자연이 어우러진 시골이어야 했지만
지금처럼 콘도나 펜션도 없었고 참여하는 숫자는 많고
비용은 적었기에 대개 열악한 교회당이나
초등학교를 빌려서 흥부네 여름휴가처럼 계획을 세웠지요.
2박3일 동안 건강한 사람이라도 불편한
그 열악한 시설에서 중증장애를 가진 이들이
취사문제와 함께 식사에서부터 취침과 용변,
그리고 씻는 문제까지 봉사하는 이들과
땀을 섞으며 해결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장소에서 함께 은혜를 나누며
프로를 가질 수 있었다는 설레임과 기쁨만으로도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어쩌면 열악하게 생활했던
재가 장애인들의 수는 많았으며
이벤트는 적었던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순수한 열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어디론가 떠나지 않더라도
순간마다 삶의 질곡에서 넘어지고,
실패하고, 상처받고, 충격으로
고통을 겪는 과정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수련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도
그 막막했던 40년간의 광야기간이
하나님의 선민(選民)이 되는
수련(신8:2)이었던 것처럼...)
나는 지금 시내 ‘공간’ 한 켠
7월의 햇살과 바람이 늘 가득 넘실거리는
두 평도 채 안 되는 다락방에서
작은 왕골 돗자리와 원목탁자를 놓고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 시내 유원지 주변에
건강을 잃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그들에게서 듣게 되는 이야기처럼
어쩌면 인생이란 그렇게 허탈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내 것을 잃었다면
그것은 ‘내려놓기’ 수련으로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내려놓아야 하니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깨달음입니다.
의지했던 사람도, 명예도, 건강도
모두가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하는 사실은
우리가 늘 잘 안다고 착각하면서도
모르고 살아가는 까닭에
상실의 상처와 충격이야말로
소유의 허상에서 깨어나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훈련이 되는 것이지요.
근래에 시골의 넓은 공간과,
시내의 좁은 공간을 오가며 생활하면서 깨달은 것은
사람에게 있어 최소한의 생활공간은
그렇게 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모두가 소유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공간을 한없이 넓혀가는 것이지요.
인간관계 역시 가까운 사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내가 상대와 같아지려는 생각은 없으면서
상대는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욕망이요,
상대의 느낌과 생각까지도 손에 쥐려는 건
절망적인 소유욕이지요.
현악기처럼 함께이면서도 숨을 쉬며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는 만큼의 간격은
우리에게 늘 필요합니다.
서로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
당신과 나 사이에 초록바람이 일렁이게 한다면
7월의 더위 속에서도 땀에 찌든 열기 대신
산소를 숨 쉬게 될 것입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혼자이듯이.....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다’ <칼릴 지브란의 어록 중>
첫댓글 수련회, 그 때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올 여름도 행복하고 승리하세요.
지금은 편리한 시설이 많지만 옛날의 그 순수했던 열정은 없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도 은혜 안에서 행복한 여름되시기 바랍니다.
지나고 보면 그래도 그시절이 행복했지요. 수련회라는 이름도 없었지요/ 여름성경학교였던가요?
샘골님, 카페의 새 가족이 되심을 환영합니다.
댓글도 달아주셔서 더욱 감사하구요~
앞으로 많은 활동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