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마복음’이 묻혀있던
이집트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
지역 일대를 도올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가 탐사했다.
인근 마을의 주민과 함께
도올이 포즈를 취했다.
도마복음에 나오는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물어라”는
구절이 생각났다고 한다.
[통나무출판사 제공]
-------------------------
◆[도마복음 3권 완간]
‘도마복음’은 1945년 12월 이집트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 지역의 절벽 바위 밑에서 발견됐다.
이후 세계 신학계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전3권)는 이를 번역·해설한 책이다.
도올은 “대학시절 노자 『도덕경』을 접한 이후
가장 큰 충격을 도마복음에서 받았다”며
“상식적이면서 심오하고 건강한 모습의 ‘살아있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
도마복음의 발견과 성서형성의 배경약사(1~20)
일시 : 2010년 7월 26일 늦은 7시
장소 : 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실(불교회관 3층)
발제 : 안명준
들어가며
저자는 서문에서
‘지식과 신앙’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인간의 합리적 지식과 불합리한 신앙의 세계를
이원화 시키는 데서 중세교부철학은 자신의 존립가능성을 추구했을지 모르지만,
신앙과 지식이라는 인간의 영적 활동의 두 측면을 별개로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요, 인간의 복합적·유기적 기능을 말살시키는 것이요,
인간의 일상적 삶을 위선의 장으로 형해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참 신앙인은 참 지식인일 수밖에 없고,
참 지식인은 참 신앙인일 수밖에 없다면서 신앙과 지식이 따로 논다면
그 인간의 진실성과 도덕성을 과연 어디서 찾을 것인가? 라고 물어온다.
이를 위해 번지(樊遲)와 공자(孔子)의 대담인 “앎(知)이란 무엇인가?”의 내용으로
논의를 전개하면서, 공자의 “귀신을 공경(敬)하되 그것을 멀리(遠)할 수 있으면,
가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는 답에서, 인간의 지식은 종교적 세계를 공경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는 데서 성립한다며,
예수는 하느님을 경(敬)한 사람이기 보다는 원(遠)한 사람으로 하느님의 율법으로부터 인간을 원(遠)케 하려는 사람으로 보고, 경(敬)할 줄만 알고 원(遠)할 줄을 모르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직 백성들의 마땅한 바를
힘쓸지어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사람들이 모두 사람다운 삶을 향유토록 만드는,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좁은 공리적 정의가 아니라 동서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정의이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인간화”시킨다고 하며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며 반대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좁은 소견으로
하느님을 헤아린다면 과연 하느님을 신앙할 소이연1)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재 질문
하면서, 저자는 하느님은 하느님을 넘어서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살고 있다고 강변한다.
또한 그는 한국기독교의 성숙의 지표를 신앙인들은 겸손하게 자신을 반추하면서
성서에 쓰여진 하느님말씀의 본의에 관한 모든 해석의 가능성을 개방시킴에 있다고
내다보았다.
본 글은 이집트·이스라엘 초기기독교 성지순례기인 “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1”을
두 부분(1~20/21~39)으로 나눈 첫 번째 부분이며, 첫 번째 부분을 또 두 부분으로
나누어 ‘도마복음의 발견(1~2/16~20)’과 ‘성서형성의 배경약사(3~15)’로 정해 보았
다. 텍스트의 순서를 최대한 따르겠지만 내용 정리를 위해 순서보다는 저자의 의도(?)
를 따라 내용을 요약했음을 밝힌다.
1. 도마복음의 발견
1) 最古, 最高의 문명발상지 이집트 나일 강 - 도마복음의 잉태
저자는 새로운 성서 도마복음의 이해를 위해 직접 이집트 아라비아 사막과 시내
광야, 팔레스타인 사해, 요단강, 갈릴리 바다, 그리심, 헤르몬 성산 등지를 돌아보며
몸으로 체감한다.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이집트와 긴밀한 관계에서 살아왔기에
우리에겐 이집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문명이 형성되었다. 나일강은 적도 부근의 풍요로운
밀림지역의 극대의 강우량이, 강우량이 극소한 사막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문명의
젖줄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흘러가는 강물의 예측가능한 주기적 수위의 변화!
이것은 홍수가 아닌 이넌데이션(Inundation, 범람)이다.
극대치의 화와 극대치의 수가 만나는 풍요로운 평원, 그것이 나일 주변의 범람지역
이다. 이집트인들은 범람지역의 땅을 재기만 하면 되었다. 이처럼 나일 주변은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잉여가치 축적지였다.
6월에서 10월에 이르는 아케트(akhet)인 범람시기에는 전 국민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이 잉여를 모조리 문명의 건설에 투여하였다. 저자는 여기에서 이집트의 문명은
하나의 이념에 헌신한 공동체의 단합된 모습의 과시2)라 하였다.
2) ‘나그함마디’로 가는 길 - 잠에서 깨어난 도마복음
20세기는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고고학 발굴 성과의 시기였다.
그중 성서와 관련된 두 개의 발굴이 있다. 하나는 구약과 관련된 사해 부근의 쿰란
공동체 동굴 라이브러리 문서의 발견이고, 하나는 신약과 관련된 나일강 중류 나그함
마디 체노보스키온 문서의 발견이다.
후자의 문서는 외경으로 가볍게 처리될 그런 문서가 아니라 성서 자체의 이해를 풍요
롭게 만드는 진본일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위대한, 아니 가히 혁명적이라 말할 수 있는 문헌임이 밝혀지고 있다.
모든 종교나 진리는 형성 중에 있다. 완결은 죽음이다. 이제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집트 사막을 통과하는 나일강은 아스완을 지나 룩소르에 이르러 “왕들의 계곡”을
끼고 크게 휘돈다. 그 굽이가 끝나는 지역에 나그함마디라는 나일강 서안의 도시가
있다. 강 건너편에 엘 카스르라는 작은 농촌이 있는데 그곳을 체노보스키온
(Chenoboskion)이라고 부른다.
1945년 12월! 엘 카스르의 아이들이 떼지어 낙타를 타고 사바크3)를 캐러 원정을
떠났다. 12월은 경작기라서 비료를 줄 시기이다. 엘 카스르에서 3km정도 떨어진
게벨 알 타리프라는 기암절벽 산이 있다. 사바크를 캐는 중 공명소리가 나서 큰 바위
밑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니 거대한 붉은색 토기 항아리가 드러났다. 원정대 팀장인
무함마드 알리는 항아리를 산산조각 내니 파피루스 다발을 가죽으로 묶은 13개의
코우덱스(codex, 책형태의 고문서)가 드러났다.
알리는 집에 돌아와 등에 메고 온 파피루스 코우덱스를 쇠죽 쑤는 곳간 방에 내던져
버렸다. 1578년간 밀폐된 옹기의 고요한 암흑 속에서 빛이나 공기의 흐름에 노출된
적이 없는 유물이 갑자기 환경변화에 노출되면 변색·퇴색하거나 바스러지게 마련인데
다행스럽게도 파피루스 위에 쓰여진 물감은 용케 새 환경을 견뎌냈다.
이것은 사막이라는 건조한 풍토의 덕분일 것이다. 그날 밤 알리의 엄마가 화덕 오븐에
불을 지피기 위해 헛간의 파피루스를 보고 찢어서 불쏘시개로 썼다! 열여섯 세기의
이단 박해를 견디어낸 사막의 코우덱스가 일순간에 엘 카스르 농갓집 아궁이로 들어
가다니!!
알리도 이 코우덱스가 골동품이라는 정도는 알고 팔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질 않았다. 그래서 담배 몇 개비와 귤 몇 개와 바꿔치기하여 몇 개는 알리의 손을
빠져나갔다. 제3코우덱스의 경우, 알리는 그것을 동네 콥틱 크리스찬 교회로 가지고
갔다. 알리는 제3코우덱스를 안전하게 맡아달라고 교회에 부탁했다.
교회 사제는 중등교사인 알키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콥트어를 전공하는 게오르기
베이 소브히라는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베이 소브히는 이 코우덱스에 들어있는 요한
비서(The Apocryphon of John), 이집트인 복음서(The Gospel of the Egyptians),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The Sophia of Jesus Christ), 구세주의 대화(The Dialogue
of the Savior)등을 보고 경악했다.
베시 소브히는 즉각 이 문서를 당국에 신고했다. 당국은 이것을 콥틱 박물관에 조회
했고, 알키스는 이 문서를 콥틱 박물관으로 가지고 갔다. 박물관과 매매가 성립되었다.
1946년 10월 4일 카이로 콥틱 박물관의 관장 토고 미나에 의해서 이 문서가 인류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최초가 되었다.
1947년 9월 장 도레스(Jean Doresse)라는 프랑스인 대학원학생이 카이로에 도착한다.
도레스는 초기 콥틱기독교의 역사를 전공하는 콥틱어 전문가였다. 미나의 손에서 알키
스가 판 제3코우덱스를 넘겨받고 일별한 도레스는 이것이 3·4세기의 문헌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당시 미나는 또 하나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칸 칼릴 지역에 있는 벨기에 출신의
골동상 알버트 에이드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며칠 후 도레스와 미나는 에이드를
방문한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진리복음서(The Gospel of Truth)를 포함한 제1코우
덱스였다. 이제 제1코우덱스와 제3코우덱스는 확고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온 셈이다.
카이로의 대표적인 골동상으로서 키프로스섬 출신의 타노는 엘 카스르 출신의 농부
에게서 자기네 동네에서 옛 파피루스문헌이 떠돌고 있다는 정보를 듣는다. 타노는
곧 나그함마디 지역을 관장하는 케나 골동상 자키 바스타에게 전화하여 확인하라고
일러준다. 자키 바스타는 엘 카스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애꾸눈 깡패두목 바히즈
알리를 수배한다. 바히즈 알리는 두 개의 코우덱스를 무함마드 알리로부터 사서
자키 바스타와 함께 타노에게 큰돈을 받고 팔았다. 제2, 제7코우덱스였다.
바로 이 제2코우덱스 속에 도마복음서가 들어 있었다.
애꾸눈 바히즈 알리는 무함마드 알리를 찾아가 남아있던 코우덱스를 싹쓸이해 타노
에게 거액을 요구했다. 타노는 거부로 유명한 컬렉터 마리카 다타리 양을 접선했다.
다타리는 그 가치를 알고 구매하여 타노에게 맡겼다. 결국 대부분의 코우덱스는 타노
에게서 수집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코우덱스를 다타리-타노-코우덱스(the
Dattari-Tano Codices)라 명명케 되었다.
제1코우덱스를 가지고 있던 알버트 에이드는 세관원을 매수하여 밀반출한다.
미국에서 흥정을 했으나 못팔고 브뤼셀의 안전금고에 보관하고는 죽고 만다.
이 코우덱스의 소식을 들은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
1961)은 융 인스티튜트(the Jung Institute)의 마이어(C. A. Meier)에게 구입할 것을
권유한다.
마이어는 추적한 끝에 에이드의 부인 시모네 에이드가 새로운 소유주라는 것을 알고
미국인 독지가 페이지(George H. Page)에게 3만 5,000 스위스 프랑을 희사받아
1952년 5월 10일 브뤼셀의 어느 카페에서 매매가 성사되었다.
그러나 거금을 희사한 페이지는 이 문서가 불법적으로 유출된 사실을 알고
“이 문서는 충분한 학구적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제자리로 반환되는 것이 마땅하다.”
는 양심의 소치를 따라 1975년 카이로 콥틱박물관으로 돌아갔고 제1코우덱스를 융
코우덱스(The Jung Codex)라 부른다.
그러면 심리학자 융은 왜 이 문헌을 갈구했을까?
3) “나는 창조한다, 고로 존재한다.”- 도마복음 이해의 첩경
근대철학4)은 합리성과 이성을 기조로 한 과학주의였다. 20세기를 접어들면서 이성
주의적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프로이트5)이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억압된
리비도6)의 해방이 가치관이었다.
프로이트의 범색론에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한 창조적 심리학자가 카를 구스타프 융
이다. 융은 건강한 인간의 총체적 심리의 이해를 도모한 순수이론심리학을 건설하려
했으며 시대성과 무관한 보편적 인간학을 정립하려 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적 세계의 더 밑바닥보다 더 근원에 “신화를 창조하는 의식
의 기층”이 있다고 융은 보며 이 신화창조의 의식의 기층을 융은 집단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불렀다. 나는 신화를 창조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
한다는 것에서 나의 존재성은 “신화를 창조함”에 의해서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미트라스7)는 원래 조로아스터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란의 토착신이었다.
그러나 로마시대의 미트라스 종교는 기독교와 혼동될 정도로 유사한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었고, 이미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8) 사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융은 1906년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환자를 만난다. 그가 한 이야기가 몇 년 뒤 미트
라스 컬트(the cult of Mithras)에서 접하게 된다. 융은 그 희랍어 고문서에서 정신
분열증 환자가 이야기한 것과 동일한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융은 그 환자의 신화의
체계가 우리의 신화 체계와 다를 뿐 비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신화는 어떤 보편적 인간의 의식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영지주의 문서라고 애매하게 불러왔던 나그함마디 코우덱스의 세계로 진입하
게 되는 이론적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융의 ‘집단’은 사회적 집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집단’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집단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성격을 지칭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후천적인 습득형질이 아니라 선험적인 것
으로 매우 본원적인 인간인식의 조형이다. 어린 아기에게 ‘엄마’란 개념적 언어가 아니
다. 그것은 독특한 향이 있는 뭉클한 젖가슴, 그리고 빨면 흘러나오는 젖의 맛 등등
으로 “반복”되어 느끼는 그 무엇이다.
반복이 나에게 다양한 의식의 조형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반복되는 무의식의 패턴이
우리의 집단무의식의 아키타입(원형, 태고)을 형성하고, 이러한 아키타입이 곧 신화
의 언어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 수난의 드라마도 결국 이러한 인간의 조형성의 한 신화적
패턴일 뿐이라고 융은 생각한다. 인간의 고대사회가 모두 예외 없이 신화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화창조 충동이 인간에게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 신화적 세계관은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기독교 성서의 세계도 이러한 삶의 의미를 창출하는 신화의 한 유형이라고
융은 간주한다.
신의 실체성을 구성하는 모든 신화적 언어는 궁극적으로 나의 실존적 체험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아키타입이다. 따라서 신앙에 대하여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논하거나,
진가의 평점을 구한다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인간의 삶의 자리는 오로지 증오 아닌 사랑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구극적 메시지는 모든 종교제도의 교리체계를 통합하고 초극하는 것이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한자리로 돌아왔다. 다타리-티노 컬렉션은 나세르 대통령에 의하
여 국유화되었고, 융 코우덱스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콥틱박물관에 안치되기에 이르렀다.
유네스코와 뜻있는 기관의 협력으로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 전체가 정리되고 영역
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 말 나그함마디 코우덱스를 위한 국제협력기구가 결성되었고,
1977년에는 <영어로 읽는 나그함마디 도서>라는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원본 텍스트도 네덜란드 브릴 출판사에 의하여 전 12권으로 1972-84년에 완간되었다.
이 라이브러리는 52종의 성서를 포괄하고 있으며 그 중 제2코우덱스 두 번째 논문으로
도마복음서가 자리잡고 있다.
2. 성서형성의 배경약사
1) 이집트 중심의 수도원 운동 - 개인 수도승운동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초기기독교는 이집트지역에 엄청나게 광범위하게 분포
되며 절묘한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다. 다원주의적 신화세계의 원조 격인 풍요로운
이집트의 다신론 문화와, 율법주의적인 유일신론의 헤브라이즘과, 사랑의 복음인
기독교 문화의 자연스러운 혼융이 일어났다.
세월이 흘러 유대교는 쇠퇴하고 기독교가 이 지역의 주류로 부상하게 되는데
그들의 신앙적 삶의 형태는 수도원 중심으로 초기 수도승은 매우 개인적이었는데,
이러한 개인적 수도생활을 영위하는 자를 앵코라이트(anchorite)라고 부른다.
대표되는 인물은 이집트의 안토니 수도승을 꼽는다.
안토니의 전기를 쓴 아타나시우스 주교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끊임없이 악의 세력을
대변하는 악마의 형상들과 투쟁하면서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영적 순결성
의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항마성도(降魔成道)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2) 파코미우스와 파바우 수도원 - 집단 수도원운동
안토니의 수행을 본받은 움직임은 평신도운동이었으며, 개별적 수행운동이었다.
이러한 개인적 수행운동을 에레미티즘(eremitism)이라 부르는데 그 배경에는 로마
식민통치의 혈세에 시달린 농민 엘리트들의 반체제적인 각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AD4세기에 이르면 이미 기성의 교회들이 제식적 율법주의, 관습화 되어버린
형식적 예배, 그리고 겉치레의 봉사운동으로 이미 영성을 상실해갔다는 사실도 아울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개인단위의 독자적 수행방식은 나름대로 문제가 많았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는 방법은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수행의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수도승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효율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에레미티즘에 대비되는 집단주의적 수행방법인 세노비티즘(ecnobitism)
을 창시한 탁월한 수행자가 바로 파코미우스(Pachomius, 290-346)였다.
파코미우스는 공동체적 기독교 수도원의 첫 모델을 만든 사람이며 우리에게
도마복음서를 전해준 주역이기도 하다.
파코미우스는 나그함마디 지역 체노보스키온의 콥트어를 쓰는 집안에 태어났다.
콘스탄티누스의 북아프리카 로마군대의 병정 생활을 하던 중 콥틱 크리스찬을 발견
한다. 그들의 삶의 진지함과 신분 계급을 완전히 해탈해 버린 개방적인 이웃사랑
정신에 감명을 받고 제대 후 체노보스키온에 귀향하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그 후 팔라몬(Palamon)이란 은둔자를 만나 그의 영적 지도 아래 수도승의 삶을 실천
한다. 그는 덴데라(Dendera) 가까운 곳, 나일강 동편의 버려진 동네에 수도원을 짓고
담을 둘러쌓았다. 이곳을 타벤니스(Tabennis)라 불렀는데, 이것이 인류 사상 최초의
본격적으로 시도된 기독교 수도원이다.
파코미우스는 집단수도 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율을 문서로 남겼고, 그 문서가 탁월한
성서 번역자 제롬(Jerome, 347-420)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서양의 수도원
제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 수도원에는 수도승들의 영적 지도자인 헤구
멘(hegumen)이 있어 영적 스승일 뿐 아니라, 수도승들이 아무 생각 없이 수도생활에
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재정적 지원을 하는 책임을 감당했다.
파코미우스는 매우 유능한 헤구멘이었다.
파코미우스는 타베닌스의 수도원이 넘쳐나자 주변지역에 수도원을 개척했다.
그는 11개의 수도원을 관할하기 위해 근거지를 타벤니스에서 파바우(Pabau)로
옮겼다. AD346년에 열병이 휩쓸어 약 100여 명의 수도승이 희생되었는데
파코미우스도 346년 5월 9일 열병 속에 그들과 함께 영면했다.
3) 셉츄아진트와 콥틱기독교 - 기독교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는 희랍 로마세계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항구도시며
가장 선진문명을 자랑하는 문화도시였다. 프톨레미1세는 디미트리오스의 도움으로
전대미문의 위대한 도서관을 지었다.
당대까지 전해 내려온 모든 희랍, 유대,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 기타 모든 아시아 문명
권의 소중한 문헌을 50만 권이나 소장했다. 덕분에 위대한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성서
문헌학의 획기적 저술인 히브리 바이블의 희랍어역 셉츄아진트(Septuagint)가 성립
되었다.셉츄아진트는 보통 “70인역”이라 불리는데 로마숫자 LXX로 기호화한다.
셉츄아진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중요하다.
첫째, 유대교 경전들이 모두 한 책으로 집대성되었다는 사실은
문헌적으로 최초의 사건이며 그것이 히브리어가 아닌 희랍어로,
더구나 이집트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둘째, 알렉산드리아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교민집단)가 성립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얼마나 프톨레미 왕조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헬라화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셋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람들에 의하여 초기기독교의 원형이 성립했다고
이들은 희랍어를 말하는 헬라화된 개방적 전통의 사람들이었으며 협애한 율법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문화전통을 흡수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기독교화된 이집트 지식인들이 헬라어의 자모를 이두식으로 빌려 쓰는 최초의 어문
일치형의 이집트말 표기법, 콥트어를 만들었다.
넷째, 구약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념의 형성은 모두 헬라어 구약성서인 셉츄아진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인용되고 있는 구약성서의 구절은 거의
모두가 히브리성서에서 인용된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한 셉츄아진트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자체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인 디아스포라의
문화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 총체적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다섯째, 셉츄아진트의 성립과 그에 따른 기독교인들의 구약에 대한 이해방식의 특수성,
그리고 부수적인 곡해와 왜곡이 역으로 유대교 정통을 고집하는 보수주의적 학자들에
의한 히브리정경 편찬작업을 촉발시켰다.
초기기독교의 전승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콥틱기독교는 아직도 이집트에 엄청난
성세를 유지하고 있다. 로마교황청에 필적되는 콥틱본산교황청이 있으며 그 인구는
이집트 전체인구의 13%나 되는 1,000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마태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헤롯왕의 진노를 피해 예수 성가족의 피난생활로
부터 콥틱기독교의 시원을 잡는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저자 성 마가(St. Mark)도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포교를 했고, 그곳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믿고 있다.
예로부터 알렉산드리아는 그 항구 앞에 있었던 파로스(Pharos)라는 섬에 세워진
등대로 유명했다. 알렉산드리아를 지중해 물류의 중심항구로 만들기 위하여 프톨레미
1세는 파로스섬에 거대한 등대를 만들게 했다.
설계자는 소스트라투스로 12년의 공사를 거쳐 BC283년에 완공되었는데 그 높이가
135m에 이른다. 3단의 거대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4각형의 성채가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높은 타워가 있고 그 위에 원통형의 봉화대가 있는데 나선형 램프로 올라
가게 된 구조로 모든 등대의 원형이 되었다.
초기교회의 선교역사를 다룬 기행문인 사도행전 18장 23절의 내용은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 초기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 절을 보면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폴로라 하는 유대인”에 관한 묘사가 있는
데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를 정확히 전해준다.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는 헬레니즘계에 완벽하게 동화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지적 거성이
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소아시아 에베소에 와 “주의 길”을 선포하였는데 그가 선포한
“주”는 실상 예수가 아니라 세례요한이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AD50년경
에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세례요한의 종파가 성립해 있었다는 역사적
실제 정황을 추론할 수 있다.
결국 바울파 사람들은 그를 “예수의 길”로 인도하여 고린도교회로 파송한다.
바울 자신이 그의 고린도서한에서 아폴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아폴로는 결코 바울의 제자가 아니라 바울과 동급의 또 하나의 지적 거성이었다.
4) 알렉산드리아와 삼위일체 - 서방교회의 등극과 동방교회의 몰락
삼위일체는 기독교신앙 자체의 문제일 수 없으며
오로지 초대교회 조직의 역사인 교회사에서 생겨난 신앙외적 교리문제일 뿐이다.
초대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생각한 종교는 전통적 여호와신앙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새로운 말씀 즉 복음을 신앙하는 예수신앙 종교였다. 특히 초대교회를 형성한 유대인
그룹 속에서는 새로운 신앙의 대상으로 가슴에 모신 예수라는 역사적 존재,
그 존재를 구원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 생각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와 전통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가 매우 궁금한 문제로 부상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초대교회에
팽배한 긴박한 재림사상의 기대도 한 몫을 했다.
복음서의 입장은 매우 간결하다.
“아버지와 아들”, 즉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예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해소될 길이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하나라고 속 시원하게 해버리면 예수교의 특성이
사라지고, 아예 둘이라고 잘라 말해버리면 유일신교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더구나
요한복음에서는 재림을 시사하면서 “보혜사”(파라클레토스: 법정에서 변호사 역할을
맡은 사람)를 언급하였고, 그 보혜사가 의인화된 성령으로서 해석될 여지를 남겼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존재에 관한 문제는 초대교회의 골칫거리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AD313), 즉 로마제국을 위협하던
기독교라는 유일신 사상을 공인함으로써, 분열되어 가고 있던 로마사회에 새로운
응집력을 도입하고 유일황제신앙을 강화시켜 로마제국을 재건하려는 야심찬 반전을
시도했을 때, 기독교는 삼위일체 논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 논쟁의 센터가 알렉산
드리아였다.
분열된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려는데, 분열된 기독교를 가지고서는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종교회의를 열고 그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기독교계에 통일된 정론을 세우려 했다. 그의 목표는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이었다.
325 년 5월 20일 니케아에서 대규모 공의회가 열렸다. 종교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대부분은 동방에서 왔다. 서방에서 온 주교들은 6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 300
여 명에 이르는 참석자들은 모두 동방의 주교들이었다. 동방주교들은 대부분 아리우스
의 견해에 우호적이었다.
아리우스(Arius, 250-336)는 예수를 무조건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불행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예수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면, 인간 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의 가현에
불과한 허상이다.
예수를 인간으로 이해할 때만이 하나님의 유일절대성이 확보되며 다신론의 가능성을
봉쇄할 수 있게 된다. 예수가 인간이기에 오히려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확실히
보장된다고 보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유행하던 네오플라토니즘의 영향을 받아,
인간도 신과 합일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엑스타시스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예수를 단지 인간으로 보는 것은 모처럼 공인된 기독교
라는 국교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에게 완벽한 신적 권위를 부여해
야만 기존의 그레코 로망의 다신교적 다양한 종교형태를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절충안을 내놓는다.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이다.”(homoousion to Patri) 호모우시온(homoousion)이라는
말에서 “호모”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우시아”(ousia)는 감각적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는 본질, 실체라는 뜻으로 전통적 희랍철학의 흔한 개념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동체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위(位, hypostasis)
를 갖는다는 것이다. 황제에게는 종교적 판결문은 애매할수록 좋고,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좋다.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다양한 언설들을 황제의 권위 아래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니케아종교회의의 결정으로 아리우스는 실각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알렉산더 주교와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는 소수파였지만 득의
양양하게 개선했다.
알렉산더 주교가 죽고(328) 그를 계승한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아리우스파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종교회의의 원래
결정인 “호모우시온” 즉 동체론을 견고하게 정통으로 고집했으며 그로 인하여 아리
우스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계속 실각, 도바리 인생을 살아야 했다. 이러한 피신의 삶
때문에 오히려 이집트 콥틱 기독교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민중의 영웅으로 부상되었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에 대한 집요한 싸움은 신학적 논쟁이 아닌 다른 이유에서 유발되
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지정학적 위치가 차지하는 경제사적 문제를 돌아보자.
나일강의 대평원은 삼모작이 가능한 엄청난 곡창지대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살찐
로마 거인을 먹여살리는 암소”라고 불렸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의 정치적 안정은
로마의 하부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대결로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대결구도에 대해 황제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판세가
바뀌게 마련이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아리우스파는 동방중심이었고 아타나시우스는
서방중심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궁극적 승리는 기독교 세계가 서방 로마기독교 중심
으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마침내 아타나시우스는 도바리 인생을 끝내고 366년 2월 1일 화려한 입성을 한다.
다음해 부활절 메시지에서 27서 정경안을 권위롭게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는 기나긴
투쟁 끝에 실세를 장악하고 흩어진 성서문헌에 대한 정경화 작업을 수행했다.
그 정경의 목록에 들지 못하는 책들은 하루아침에 외경 신세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도마복음서는 이 정경목록에 편입되는 행운을 얻지 못했다.
5) 정경화 작업과 교권의 안정 - 유일신 이름으로 피의 역사는 시작되고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AD367년에 발표된
유명한 아타나시우스의 역사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외경적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책들을 가지고 근사하게 장난질을
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서와 혼동시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간증되고 우리에게 전승되어 온 정경속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7서를 보면 크게 5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전기문학인 4복음서, 역사문학
인 사도행전, 초대교회를 성립시킨 바울의 편지 14개, 그리고 교회와 관련된 사도들의
7개 편지, 그리고 계시록 하나이다.
아타나시우스가 27서 정경체제를 발표했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긴박한 재림
(파루시아)의 꿈이 깨져버리고 지상에서의 교회와 교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겨났다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4복음서는 이미 2세기 말에 시리아 에데사왕국 중심으로
활약한 타티안(Tatian, AD160-175활동)에 의해 디아테사론(Diatessaron)9)이라는
이름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27서 체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편지이다. 사도바울의 편지는 이미 2세기 중반에 이단으로 몰린 마르시온
10)(Marcion, ?-160)이 편집한 아포스톨리콘11)(Apostolikon)에 의하여 그 권위가
확립되어 있었다.
아타나시우스가 “외경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원어는 “아포크리팔”(apocryphal)
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아포크리파”(apocrypha)는 “숨겨진 것들”(things hidden
away)이라는 뜻인데, 우리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외경”보다는 “내경”의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아포크리파로 분류된 경서들이 결코 당시에 숨겨진 책이거나 비밀스러운 책들
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포크라파라는 말은 “신앙의 척도가 되기에는 부차적인 경전”
이라는 뜻으로 “듀터로캐노니칼”(deuterocanonical)이라고 불릴 정도의 의미맥락에서 쓰인 말이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증되고 전승되어 온 정경”이라는 표현에서 “정경”의
언어는 “캐논”(kanon)인데, 이카논이라는 말은 원래 “갈대” “지팡이” “막대기 자”라는
뜻으로 “기준”이나 “규범”의 의미를 지닌다. 카논은 정경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신앙의 잣대가 되는 경전”이라는 뜻이다.
대체적으로 카논을 규정하는 기준
(criteria of canonicity)으로서 다음의 세 항목을 꼽는다:
1) 사도저작성(apostolicity) 2) 신앙의 잣대(the rule of faith) 3) 교회 내의 의견일치(the consensus of the churches). 이 세 항목 중에서 첫째의 사도저작성은 온당한 기준이 되기 어렵다. 왜냐면 1세기로부터 4세기에 걸쳐 모든 경서의 저작자들이 사도의 저작을 가칭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신앙의 잣대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구현체이며 계시라는 것이다. 카논 저작자들의 주관적 의도가 적극적으로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빠진 개관적이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인간의 언어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초대교회에서 논증되고 있었기에 온당한 기준이 못된다. 결국 정경과 외경의 구분의 기준은 제3의 항목인 교회 내의 의견의 일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27서 정경을 만든 것이다. 정경은 바로 에클레시아에 속한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며 교회의 권위가 정경의 권위를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인간공동체인 이상 내분이 있고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싸움에서 절대적 기준을 찾기란 어렵다. 단지 “목소리 센 놈이 정통이다” 목소리 세다는 것은 목소리 약한 놈에 비해 지지자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정경과 외경의 실제적 기준이 된 것은 가톨릭이라는 로마교회의 의견이었다. 정통주의에 대한 집념은 2세기부터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나타난다. “정통”이란 실제적으로 “로마교회의 다수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기독교의 형태”를 말한다. 아타나시우스의 27서 정경목록도 4세기 로마교회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였지만 아리우스와의 대립으로 박해를 받는 과정에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한 로마통이었다.
기 독교의 공인 이후에 로마사회에서 벌어진 가장 참담한 결과는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대결이다. 유일신관을 신념의 기조로 삼는 기독교가 국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신관의 영향하에 “유일한 국교”가 될 수밖에 없다. 최초의 “공인”의 성격은 타 종교와 대등한 신앙의 대상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이었으나 결국 기독교는 유일국교의 지위를 보장받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유일국교가 되는 동시에 누천년의 전통을 지닌 다신교들이 모두 타도되어야 할 우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AD367년 부활절,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목록 발표는 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즉 정경의 성립으로 정경 외경의 구분이 존재할 수 없었던 시절의 방대한 교회문헌들이 단지 정경목록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아침에 모조리 외경으로 전락해버리는 수모를 겪게 된다.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목록 발표가 곧바로 27서 신약성경의 성립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록발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가 주석한 알렉산드리아교구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이집트 콥틱 크리스찬들에게 그 발표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었다. AD367년 3월 파바우 수도원에 아타나시우스의 서한이 전달된다. “외경적 텍스트들은 이단자들의 날조에 불과한 것들이다. 사도의 이름을 팔기도 하고, 마치 고문서인 것처럼 집필시기를 위장하기도 하여 순박한 영혼들을 타락시킨다. 이제 27서 이외의 문헌은 읽어서도 아니 되며 소장되어서도 아니 된다. 이제 정경과 외경을 확연히 구분하는 신중한 분별심을 가지고 외경을 없애버려야 한다.”
1) 소이연(所以然)/소당연(所當然) : 소이연과 소당연은 이(理)의 두 가지 측면이다. 이(理)에는 자연과학적 원리라는 의미와 윤리적 원리라는 두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에 따라 소이연을 이(理)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측면 가운데 자연적 원리를 담당하는 것으로, 소당연을 윤리적 원리를 담당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성리학자 주희(朱熹)는 "소당연을 통해 소이연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개념적 절차상 소당연은 소이연에 도달하기 위한 이전 단계인 셈이다.
2) 저자는 “이집트문명의 성과를 파라오의 독재 밑에서 신음하던 노예들의 잔인한 노역의 결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역사를 보는 입장은 ‘지배자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제3의 입장이 있다는 말인가? 역사를 해석하는 자의 입장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해석된 내용도 다르리라.
3) 사바크(sabakh)는 나일강 언저리의 척박한 사막고원 일대의 바위산 절벽 밑에서 캘 수 있는 비늘모양의 암석층으로 쉽게 부스러진다. 겉은 누르스름하지만 쇠 절구로 빻으면 하얀 석회처럼 고운 가루가 된다. 질소를 풍부히 함유한 천연비료다
4)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존재의 주체가 이성이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은 바로 이러한 이성을 주체로 하는 인간이다.
5) 프로이드는 인간존재의 주체를 ‘꼴림’으로 파악한다. 이성적이기에 인간이 아니라, 꼴리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이다. 꼴림이라는 성적 에너지야말로 나의 존재의 주체적 실상이라는 것이다.
6) 프로이트는 이성인 에고(Ego)의 가려진 근원에는 무의식의 바다인 이드(Id)가 있는데, 이는 인격의 근원이고 뿌리이다. 이 뿌리로부터 현실감각을 지닌 에고와 도덕적 가치관을 지닌 슈퍼에고가 분화된다. 이드를 지배하는 본능적 충동을 성적 에너지로 파악하고 이 성적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고 불렀다.
7) 지중해 미트라스와 인도/페르시아의 미트라 : 이 둘이 같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기원전 1-2세기 경,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거쳐 그리스와 로마로 유입되어 서기 3세기 아우레리누스 황제 때 '솔 인빅투스'신앙과 결합해 로마의 제국종교로 자리매김하는 그 '미트라(스)'교가, 인도 고대의 베다에서도 모습을 보이고 나중에 조로아스터교에 흡수된 미트라 신앙을 얼마나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하다.(sbs ‘신의길, 인간의 길’ 감상하길)
8)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의 창조신을 이르는 말. 우주의 창조신은 무질서로 해체되려는 성향을 지닌 물질을 원형인 이데아로 맞춰서 질서를 지닌 존재자로 만들어 낸다.(참조 : 영지주의에서는 인간을 신성을 소유하고 있는 영혼이, 불완전한 창조자에 의해 창조된, 불완전한 육체에 갇히게 되었다고 본다. 이 불완전한 창조자를 데미우르고스라 부르며, 대개는 기독교/유대교의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데미우르게는 악의 근원, 또는 단지 불완전한 존재라고 여긴다. 이 데미우르게는 또 다른 완전하며 선한 존재와 대비된다. 이러한 불완전한 육체의 세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그노시스적 앎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이러한 완전한 존재의 화신이며 영지를 이 세상에 전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한다.)
9) 디아(dia)는 "통하여"(through), 테사론(tessaron)은 "넷"(four)을 뜻한다. 디아테사론(diatessaron)은 원래 음악용어로 4개의 음이 합쳐서 하모니를 이룬다는 뜻이었다. 2세기에 영지주의자인 타니아노스가 4복음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편집한 가장 오래된 복음서이다.
10) AD 144년에 정통교회조직으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어 파문당함. 마르시온은 기독교는 구약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구약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 저주의 하나님, 잔인하고 화 잘내고 믿기 어려운 하나님 즉 폭군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믿음을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내는 새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1) 마르시온이 선택한 10개의 바울 서신을 아포스톨리콘이라 한다.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데살로카전서, 데살로니카후서, 에베소서, 골로세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그리고 그 앞에 누가복음 하나를 붙였다. 이 11개의 서신이 마르시온 교회의 최초의 정경이고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신약성서의 모습이다. AD150년 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