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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과 휴전선의 역사
안홍순 엮음
1. 3.8(휴전)선의 사연?
오늘날 우리의 분단이 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서 미·소 냉전의 산물로 분단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한반도 분할을 국제적으로 논의한 것은 4백여 년이 넘는 사연(정한론-임란)의 뿌리가 있다.
가. 1593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6월 서울을 점령한 왜의 도요토 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에 보낸 국서에 제시한 7개 항의 조건 중 조선의 8도를 이북의 4개도와 이남의 4개도로 분할 남쪽을 일본이 갖겠다는 협정을 명이 거절 무산되자 정유재란(이순신) 재침하려 했으 나 국내 사정 등으로 물러났다.
나. 1894년 7월, 청·일 전쟁 발발 직전에 나온 영국외상 킴벌리 (Kimberley)의 안, 당시 조선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해 있던 일본과 청 나라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청· 일 두 나라가 분할점령하라는 내용을 청이 거절했다.
다. 1896년 6월, 당시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 외 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러시아 외상 로마노프(Romanov)와 의 회담에서 일본외상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하여 러 시아와 일본이 남· 북을 나누어 갖자는 제의에 러시아가 거절.
다. 1903년 9월, 당시 주일본 러시아 공사 로오센이 일본 측에 제시 한 한반도 분할 39도선 안을 일본이 거절했던 과거사.
이 같은 논의와 시도를 보면 우리의 외교적 노력이나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국토를 조정이나 정부가 철저히 배제된 채 강대국만의 논의와 협상으로 오늘날의 휴전선은 시사하는 바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원인은 역사적 맥락과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교량 지형으로 대륙세력이 되면 일본(오늘날에도 미국)이 불안하고,- 해양세력이 되면 중국과 러시아의 불안의 요인으로....
라. 1904~5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미국 T,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노벨평화상 수상)안이 미의 테프트와 일의 카쓰라의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을사늑약(1905.11.17.)에서 경술국치로 36년을 지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미국은 22년의 한.미 동맹우호조약(철도 부설권을 비롯 운산의 금광 채굴권 등)도 묵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국제정세는 항상 늘 냉혹했던 것이다.
2. 일본의 항복과 미-소의 38선 정책
가.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회담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주의 해군이 진주만에 기습 공격을 가했던 일제에 한반도 강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합국의 승리가 임박하면서 연합국 간에 약소국의 독립이 논의됐기 때문이다. 대표들이 카이로와 얄타·포츠담에서 모였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은 요원했다.
1943년 11월 23일 루스벨트와 처칠, 장제스가 카이로에서 만났다. 12월 1일 3국 정상은 기본방침을 발표했다. ‘카이로 선언’은 전후 일본 영토를 규정한 연합국의 첫 성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를 완벽히 박탈하는 것이었다. 만주와 타이완, 펑후(澎湖) 군도는 중국에 반환돼야 하고, 그 밖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 세력은 구축(驅逐)돼야 했다.
한반도에 관한 논의도 있었다. 특별 조항에 삽입된 한반도 문제는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에 따라 한국을 독립국으로 할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한국독립에 대한 첫 언급이 이뤄졌다.
카이로 회담 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스탈린과 테헤란에서 만났다. 비공식적인 만남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발언이다. 한반도에 약 40년의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2월 열린 얄타회담에서는 독일의 분할 점령을 논의했을 뿐 한국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결국, 카이로 회담에서 시작한 전후처리 논의는 1945년 8월 초 포츠담까지 이어졌다. 독일은 항복하고 전선에서는 일본의 끈질긴 저항이 계속됐다. 중부 독일의 조그만 도시 포츠담에 미·영·소 대표가 다시 모인다.
처칠과 스탈린, 그리고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새로이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이 만났다. 도중에 총선에 패한 처칠은 애틀리 수상으로 교체됐다. 7월 17일 시작한 회담이 8월 2일에 끝난 회의는 오직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처칠은 스탈린의 속셈을 의심한 회담의 결과는 포츠담 선언(7월 26일)에서 ‘적절한 절차에 의한 한국독립’을 시킨다 했다.
3.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종래 소련과 일본은 일·소 중립조약(1941)을 체결한 상태였다. 얄타회담(1945년 2월 4일∼11일)에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종용으로 소련이 대일전에 뛰어든다.
소련군 제25군은 만주와 국경을 넘어 곧바로 한국 영내로 진공 나진항 폭격으로 관동군의 물자창고가 전소되고 소련군은 웅기·나진을 거쳐 경흥과 청진을 거쳐 파죽지세로 한반도에 진입한다.
전세가 급변하자 일본이 8월 10일 항복의사를 표시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데다 소련군까지 가세하자 일본이 두 손을 든 것이다.
일본의 항복이 일렀을까? 미국은 당황(‘46. 5월) 했다. 점령과 무장해제 사이에서 결단이 필요했다. 폴리(E. W. Pauley) 모스크바 주재 특사와 해리만(A. harriman) 대사가 한반도 전역과 만주 공업지대를 미군이 점령하려고 했으나 트루먼은 거절했다. “이 시점에서 장기간의 전쟁을 끝내자” 하는 미국은 소련군의 남하가 문제가 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38선 절충안을 제시한다.
4. 분할되는 한반도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에 진입(‘45.8.24 평양 입성)했지만, 미군은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와 주력군은 필리핀에 있었다.
소련군의 남하를 한반도 북쪽에서 저지해야만 했다. 이때 3부 조정위원회(SWNCC)가 제시한 절충안이 바로 38도선이었다. 러스크(D. Rusk)의 회고대로 포츠담 회담에서 미·소 실무자 간에 묵시적인 몇 차례 회의 끝에 최종적으로 정해져 8.15일 38도선 분할 안은 태평양 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하달하는 ‘일반명령 1호(General Order No.1)’의 초안에 포함됐다. 일반명령 1호는 트루먼의 결재 즉시 맥아더와 스탈린에게 보내졌다. 스탈린은 미국 측의 우려를 불식하듯이 신속하게 16일 동의의 회신을 보내오자 한반도가 미·소 간의 분계선인 38도선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9월 2일 일본이 도쿄만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 (BB-63) 선상에서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일본이 전쟁 주범인데 엉뚱하게) 이날 맥아더는한반도에 38도선 분계를 선포 “38선 이북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미군이 접수한다.”
주: 국난 극복사 <97>한반도의 38도선 분할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그리고 “9월 8일에야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공포된 맥아더 포고 “제1호 남한에 군정을 실시할 것을 천명함과 동시에 정부 공공단체에 종사하는 자, 즉 일제의 행정기관원(일인 및 친일 한인)의 계속집무를 명령했다.” 이렇듯 미군은 일제의 식민통치 기구를 합법적 통치기구로 인정하면서 오히려 3•1독립선언 이래 사실상 망명정부의 역할을 수행해 온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또는 미군진주 이틀 전에 친 좌 세력이 명명한 건국준비위원회도 인정하지 않았다. 한민당 등 이승만, 김구 등 임정세력 사이의 좌우합작, 미군정협조, 부일협력자 (프랑스는 3년간 나치에 협력한 지배층을 중심으로 6,700여명 사형을 처하고 시효가 없으며,/ 한국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 제정 1년도 안돼 무산 단 한 명의 처형도 없었음) 처리문제 등 이견으로 정국의 혼란 속에 소련군은 “철도, 전기, 전화, 우편교류의 단절로 38도선이 고정된다.”
주: 김학준,해방전후의 인식.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 78~80쪽에서
이상과 같이 주변 열강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한반도의 독점적인 지배가 가능할 때에는 단독 점령을 시도하고, 독점 지배가 어려울 때는 분할 지배를 획책하여 왔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반도에 38도선을 그어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이 주둔(신탁통치 40), 전쟁주범인 일본의 간교에 엉뚱한 한국이 일본의 전범 범죄를 덮어쓴 그 산물은 6.25 동란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겪어야 했고 휴전선이 조인 될 때에도 북한, 유엔 그리고 미국 대표의 협상으로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이 겨레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오늘의 현실이다.
※ 참고자료(독립운동사 및 통일의 방향)
『아리랑』 kbs 인문학 강의에서 조정래
작가는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00여만! 2백자 원고지 2만 매 12권('한국일보90.12~'95.7월,광복 50주년 탈고)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인가?(400여만자가 안 됨)
다 깨어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을 알 리 알까 하노라. (최남선 작)
나는 작가가 되어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면서 친일파의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나는 그런 태도를 속으로 강화해 가면서 식민지시대를 꼭 소설로 써야 한다는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한 새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라서 취직이 안되고, 일제의 고등계 형사질을 하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자들이 새 나라의 경찰로 둔갑해서 똑같은 지하실에서 다시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하고, 친일파들에 대한 연구를 하던 젊은 학자가 사회진출이 완전 차단되어 버린 사실 같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가면서 나는 끝없이 괴로워했고 아픔을 겪었고 밤잠을 설쳤다. 그러면서 반역의 역사에 대한 나의 분노는 이성화되었고, 증오는 논리화되어 갔다. 그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욕구와 열정으로 변모했다. (중략)
나는 <아리랑>을 시작하면서 나 자신의 의지를 어느 부분 믿을 수가 없어서 써붙인 글이 있다.
군산에서 출발 일본, 중국(만주), 연해주, 미국 등 지구 3바퀴 반의 취재역정을 통하여 잃어버린 조국을 찾고자 몸부림쳤던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했던 활동과 반민족행위자들이 가한 동포들의 한 많은 설움과 희생이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근. 현대사 아리랑.
나는 <아리랑>을 쓰면서, 쓰는 일 자체에서 오는 지겨움과 괴로움에 부딪칠 때마다 그 시대를 처절한 고통 속에서 위대하게 싸우다 죽어간 많은 분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나를 추스르고는 했다. (중략)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체질화되어 있는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 전문가들은 돈이 절대권능을 발휘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천민자본주의가 주범 이라고 진단한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횡행한 이 사회의 40년과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들이 누구인가?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 파렴치한의 표본이 아닌가. 그들이 저 대통령에서부터 사회 구석구석의 기득권을 장악한 채 40년을 지배한 이 땅에 어찌 정의가 있고 양심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천민자본주의도 바로 그자들에 의해서 잉태되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아리랑>을 통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도 소상히 쓰려고 노력했고, 그들이 왜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이제 우리는 광복 50주년을 맞았다. 이 시점을 계기로 우리가 해야 될 두 가지 중대한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민족통일에 대한 남북의 진정하고 진실 된 태도 확립이다.
둘째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만연시킨 사회적 병폐를 일소시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반민족행위자 특별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 말에 나를 시대착오적인 미친놈이라고
비웃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근거는 우리와 똑같은 비극을 겪은 이스라엘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그들은 민족의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라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영원히 처단하는 단호성을 보이고 있다. 그 단호성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프랑스 에서 배운 바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기부터 해방기까지 한민족의 끈질긴 생존과 투쟁, 이민사를 다룬 민족의 대서사시다. 《한국일보》에 원고지 2만 매의 분량으로 연재된 원고는 제1부 〈아, 한반도〉, 제2부 〈민족혼〉, 제3부 〈어둠의 산하〉, 제4부 〈동트는 광야〉의 전체 4부로 구성되었다.
『아리랑』은 군산과 김제를 비롯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도는 수많은 취재여행과 자료조사를 거치며 ‘발로 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만주·중앙아시아·하와이에 이르는 민족이동의 길고긴 발자취를 따라가며, 일제 수탈기 소작농과 머슴, 아나키스트 지식인의 처절한 삶과 투쟁을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아리랑』은 하나의 역사적 연대기이면서도 각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심리, 일상들을 세밀하게 엮어낸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민중들의 행위 하나하나가 역사의 진행 방향에 어떻게 작용하고, 역사적 진실을 일궈내는가를 자세히 보여준다.
특히 지난 1996년 프랑스 아르마땅 출판사와 전12권 출판계약을 맺고 1998년 1부 3권이 나온 데 이어, 2003년 5월 전권이 완간되었다. 이는 유럽에서 한국의 대하소설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또한 작품의 무대인 전북 김제에 아리랑문학관이 건립되어 뜨거운 작가정신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문화체험과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아리랑』은 일제의 폭압에 맞서는 우리 민족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승리의 역사를 부각시켜 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는 민족문학의 기념비라 할 수 있다.
책속으로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 민족통일이 성취해 낸 통일조국 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소설 『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 그건 감히 민족통일의 역사 위에서 식민지시대의 민족수난과 투쟁을 직시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시대를 전설적으로 멀리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경향시론]100여년 전의 경험과 ‘균형외교’신주백|연세대 HK 교수
오늘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파탄 났던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복원된 날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사실상 독점은 110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 때부터였다. 그 시점에서 어떤 열강도 한반도에서 일본의 독점을 반대하지 않았다. 110년 전 일본이 만든 단독 찬스는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연이은 승전을 외교로 굳히고, 국제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받았다. 2개월도 안된 사이에 미국, 영국, 러시아와 카쓰라 태프트밀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은 고종의 중립화 정책이 파탄 났음을 의미한다. 고종은 1900년 특명전권공사를 일본에 파견해 한반도 중립화를 제안했다. 일본은 공방(攻防)동맹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했다. 이후에도 고종은 유럽 열강의 지지를 얻고자 특명전권공사들을 파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 사이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자 만주와 한국이 일체라는 외교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의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는 만주의 조차지와 군대를 기반으로 한반도의 중립화를 내세우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타협하지 않고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들만큼 만주와 한반도에 적극 관심을 표한 나라는 없었다. 다른 열강은 동북아의 특정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보다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1901년 의화단운동을 진압한 열강들이 청 정부를 상대로 체결한 베이징의정서는 이를 보장한 조약이었다. 베이징의정서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땅에 대해 열강 사이의 협조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자적 질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제국지배공조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획득 경쟁을 벌이고, 발칸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열강의 움직임과 전혀 다른 양상이다.
더구나 열강의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벌여야 할 만큼 대한제국에 경제적 이권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실리외교로 중립화를 보장할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열강의 동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대한제국의 정치적 풍향이 중요하지도 않았다. 열강의 동아시아 정책은 중국이 중심이었다. 열강은 대한제국에서 자국민의 이권만 보호받으면 되었다.
중립화 정책이 실패한 데는 지배층의 문제도 있었다. 고종은 미래의 비전과 통합의 지도력을 발휘해 관료와 지식인 집단을 하나로 묶기보다 측근 중심의 궁중정치를 폈다. 황제권의 독주에 실망한 관료와 지식인 가운데 중립화보다 한·일 동맹을 지지하는 사람이 유독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명확한 시국관을 갖고 한·일 동맹을 주장하기보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쪽에 더 관심을 두었다. 100년 전의 중립화란 용어를 세력균형이란 측면의 현재적 버전으로 말하면 ‘균형외교’일 것이다. 이 말은 최근 들어 유독 많이 회자됐다. 작년에는 중국의 적극적인 역사공조 움직임에 한국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올해 들어서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의 가입,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문제와 맞물려 큰 논란이 있었다.
비슷한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100여년 전처럼 그냥 계속 중립을 취해야 할까. 아니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까. 이것도 아니면 새로운 무엇인가를 제시하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까. 분명한 현실은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한반도 분단을 최상의 시나리오로 간주하고 있으며, 한국과의 원만한 관계도 차선의 동아시아 정책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분단을 극복하는 1차적 힘은 지역주의, 이념갈등, 경제 격차를 넘어서며 사회적 합의를 달성하는 우리 내부에서 끌어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주변 강국들의 경쟁적 협력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 미래가치를 함께 공유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