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일상을 박차고 도심까지 진군한 가을을 맞으러 어제 집을 나섰다.
가을 속엔 가을만이 가진 가을의 빛깔과 향기가 있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만나러 박차고 나간다.
아내는 나를 럭비공이라 오늘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심 궁금해 하지만 발길 닿는대로
인근 고향 산길로 치닫는다.
고향이야기는 언제 해도 흉허물이 없다고 한다. 만산홍엽이다. 산이 벌겋게 취해 있다.
가을은 머무는 자들을 떠나게 한다. 스멀거리는 가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까이 산을 껴안는다.
오랜만에 선산도 찾아 머리를 조아렸다.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소문 때문인지 여기저기 흔적들이
후손에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일년새 돋아 눈치보는 잡초들 멱살을 잡아 아웃시키고 두 번 절한다.
생전에 모친께서 힘을 써야 힘이 생긴다고 나에게 일깨우시던 목소리를 불러온다.
어머니 가신지 백여년-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실까?
그래 누군가 우리는 어머니를 잃고 어머님을 찾아 그 곁으로 간다고 했다.
두루 앞 뒷산을 살펴본다. 물감을 풀어 한창 캔버스에 그려놓은 수채화-. 제목은 가을 산이다.
인근 뒷산을 오른다. 한쪽은 청산이요, 다른 한쪽은 노란 낙엽으로 살쪄있다.
며칠 전에 무서리가 내린 산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다른 가지를 억누르고 기어 오르기만 하던 칡순이
후줄그레하게 추한 모습으로 떨고있다. 일순간의 명예와 권력으로 주름잡던 정치인들과 무엇이 다른가!
눈보다 차가운 서리가 내린 가을 산길을 걷는다. 이슬 털어주던 새벽 어머니-. 그 길에 풀들이
마음껏 자라 억새풀로 무성하다. 유년기 때 이 길을 통해 시루버덩으로 얼마나 다녔던가!
알밤 줍던 밤나무도 모두 잎져 내리고 까만 알몸을 보이며 절규를 시작하고 있다.
빨간 열매들이 겨울 짐승들을 위해 저장되어 꽃처럼 반긴다. 예전 그 아래 샘물이 흘렀는데 확인
하니 세월이 흘러도 아직 청산 골짜기에 퐁퐁 솟는다.
가을 고향 산 나들이-. 풋풋한 계절 푸다닥하며 갑자기 귀여운 고라니가 겅중정중 산비탈을 오른다.
가슴을 진정 시킨다. 하얀 겨울 그는 무엇을 먹고 동절기를 이겨낼 것인가? 가엾다.
그리고 넘나들던 고갯길이 마치 역사관에 전시한 것처럼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예전 저 덤부사리는 밤길 귀신이 숨어있다고 해서 꺼리던 곳이 아닌가?
산은 이제 잎져 내리는 나무들을 모두 받아준다. 분주하다. 세월가는 소리 바람에 스친다.
하얀 계절에 동식물들의 현명한 겨울나기들-. 놀란다.
도토리 구르는 소리-. 다람쥐가 물고 간다. 겨울을 나지 않은 햇다람쥐도 도토리를 모아 겨울을 준비한다니
그 누가 미물이라 할까? 묵정밭이 안타깝게 마른 잡풀들로 무성하다.
작년만 해도 이 밭은 가까운 곳 용희라는 분이 서울 사람이 산 밭을 붙였는데, 연로하시어 이젠 내쳤단다.일년내내 묵정밭으로 잡초들의 공원이었지-.
진병산도 굽어보며 나처럼 안타까워하고 있다. 낙엽이 딩군다. 흩날린다. 집집마다. 김장준비에 바쁘다. 럭비공같은 남편 어디갔느냐고 문자가 답지한다. 만산홍엽(滿山紅葉)-. 마음이 일렁인다. 우리는 하얀겨울을 위해 무엇부터 예비할 것인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유년기 고향의 산을 돌아보며 세월의 흐름을 간음해 보는 것이 내겐 최상의 일과가 아닐까? 흩날리는 낙엽은 포근히 이불처럼 대지를 덮고 그 위에 흰눈은 예전처럼 펄펄 내려 쌓이겠지.
그래-, 우리 모두 남성의 계절, 낙엽을 밟으며 영혼을 달래보자.11/1 德田 이응철(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