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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해병대459기 박주은
해병대가 되다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한 가지 정도는 남에게 힘주어 자랑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해병대 출신들은 해병대를 제대 했다는 것을 단연 첫 번째로 자랑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해병대 생활과 해병대 제대를 제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 나가는데 많은 정신적 도움을 받고 있다고 자부한다.
때는 1992년 9월 8일 여름에 뜨거운 태양이 한풀 꺽 이고 초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에 서울역에서 진해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성대한 환영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홀로 계신 어머니 그리고 매형과 누나가 전부인 환영 식이였다.
많은 친구들이 이미 송별식을 해준 터라, 굳이 나올 필요 없다고 했기에 가족과 단촐 한 이별을 했던 것이다. 꼭 아들이 죽으러 가는 것 같이 마냥 울기만 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기야 집안에서 군대를 간 사람은 아버지 다음으로 내가 처음이고 그것도 해병대를 간다니 어머니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서서히 기차는 떠나갔고 가족과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아! 정말 이제 군대를 가는 군아.”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찹찹하기 만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날수록 더욱더 그랬고 다들 아는 일이지만 해병대는 지원병이라 안가면 그만이기 때문에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이미 현역 일급 입영대상 육군영장을 받아놓은 터라 해병대 안가도 육군으로 가야 하는 신세기에 그 생각은 금방 접어야만 했다.
얼마 만에 도착한 진해, 처음 와 보는 낮선 곳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오후에 “육 정 문” 이라는 진해에서 훈련을 받은 해병대라면 영원히 잊지 못할 곳에 도착했다. 정문 앞에 서있는 헌병들이 연신 어서 들어 오십시요. 하고 상냥하게 인도하는 것도 잠시 육중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닫히더니 처음 상냥했던 그런 모습은 어디 가고 그때부터 딩구는 것은 기본이고 별의 별 기압 다 받고 발로 차고 밖에서 와는 아주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아! 이것이 군대 군아!. 그렇게 해서 나는 해병대 생활이 시작 되었다. 가 입소 기간과 신검을 무사히 마치고 군복을 지급 받고 하니 정말 군인이 되었다는 생각과, 아! 대한민국 해병대가 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오 장 진” 선배를 소대장으로 만났다.
나에 소대는 아니지만 6개 소대 중 나는 1소대였고 “오 장 진” 선배님은 다른 소대 소대장 이였다. 훈련소 생활은 누구나 다시는 상기하고 싶지 않은 힘든 고통에 시절 이였지만 지금은 추억으로 남아서 가끔씩 회상에 젖어보기도 한다.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10월1일 국군의 날에 특식이 나왔다. 그리고 대통령이 준걸로 기억하는데 선물도 받았다. 선물 안에는 초코파이며 과자 등등 전부 먹을 것이 들어 있었고, 얼마나 반가운 선물 이였던지 두고두고 먹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나에 그런 생각은 잠시 후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식인 점심을 배불리 먹고 그날따라 식사 시간도 여유 있게 주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집합에 호로라기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선물 꾸러미를 들고 식당 안에 다시 집합 했는데 소대장님 왈 “지금부터 10분 안에 선물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다 먹는다. 실시” 하는 것 이였다. 처음엔 다 먹을 것만 같아 좋아 했는데 이미 특식으로 배불리 먹은 상태에 몇 개 먹으니 좀처럼 넘어가질 않았다.
호주머니에 숨길까도 해보았지만 교관들은 돌아다니며 먹으라고 재촉하고 숨기는 사람 있으면 가만 안 놔둔 다는 엄포에 무조건 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느낀 것이지만 굶는 것 보다 먹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걸 다 먹었는데 모두들 거동하기 조차 힘들었다.
모두들 다 먹었다고 생각한 교관들이 다시 호로라기를 불어대며 지금부터 연병장에 선착순 집합. 거동하기도 힘든데 선착순 집합이라니, 모두들 허둥대며 연병장에 집합했는데 동작 봐라 하면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다. 결론은 먹은 것을 다 토해 내기 위한 기압 이였던 것이다.
많은 동기들이 먹은 거 다 토해냈고 나도 토해내니 뱃속은 편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 많은 량을 다 먹을 수 있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훈련소에서의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며. 사제 살 다 빠지고 점점 군인이 되어 가는 나를 느끼게 되었고, 또한 요령도 생기면서 해병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제식훈련 각개전투 ,사격 12km무장구보 천 자 봉 행군 , 그뿐인가 기압은 또 얼마나 받았는가, 내가 받은 기압 만해도 원산폭격. 한강철교. 꼬라박아. 나 이 롱 취침. 동태 잡이. 침대 배치 붙어. 매미잡기. 쥐잡기. 오리걸음. 해병 쪼그려 뛰기. 오토바이타기 등등. 다들 격은 훈련과 기압이지만 지금도 한번쯤 다시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인가 춥다고 느껴진 밤, 느닷없이 팬티바람 완전 무장이다. 모두들 정신없이 일어나 팬티 바람에 완전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집합했다. 정신없이 돌고 또 돌고 했는데 탄띠가 없어 진 것이다. 군대에서 군장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꼭 죽음이라 생각했고, 그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탄띠 잃어버린 훈병 앞으로 나와” 하는 게 아닌가. 이젠 죽었다, 생각하고 앞으로 뛰어 나갔는데, 소대장이 그냥 공손하게 주었다. 죽도록 발길로 채이고 기압 받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사연 많았던 진해 훈련소 6주생활도 어느덧 마지막 주로 접어들었다. 특기병을 뽑는 시간 이였는데 다들 나름대로 특기들이 있었지만 나는 특기라고는 한 가지도 없었다. 공고 출신들은 기갑, 면허증 있는 사람은 운전, 통신, 등등 불려 나갔지만 나 같은 사람은 보병일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병들만 남은 자리에서 백지 한 장씩을 나누어 주며 국민교육헌장을 쓰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나는 쓰기 시작했고 반도 안 썼는데 제출하는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행정병을 선발하기 위한 테스트였던 것이다. 그해서 나는 동기들 중 25명과 함께 17-9 행정병과를 부여 받았다.
드디어 수료식 날. 우리 기수한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날 이다. 지금은 수료식 날 가족들을 불러 놓고 축제 분위기로 수료식을 하지만 우리 때는 가족이 온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때였다. 우리는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재 검열이 떨어졌다. 그 이름 하여 재 검열 기수다. 몹시도 연병장이 진흙 이였는데 우린 다시 재 검열을 받았고 간신히 수료하여 빨간 명찰을 받을 수 있었다.
ㅇㅇㅇㅇㅇ 포항 땅이다
6주의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우리 459기 동기들은 특과병은 특과 교육을 위해 각자 병과 별로 떠났지만, 보병병과는 다시 후반기 교육4주를 더 받기 위해 포항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 또한 보병행정이므로 군악대의 환영 연주를 뒤로 하고 밤늦게 포항에 도착했고 도착한곳이 포항 어디인지 모르지만 다시 트럭에 나누어 타고 포항 훈련 단에 도착했다. 그때가 너무 어두 어서 앞이 안보일 정도였는데 발마추어 걸어 갈 때마다 자갈 밝는 소리가 얼마나 살벌하게
느꼈던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포항 훈련소 생활은 진해보다는 좀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이미 좀 군대에 대한 적응이 되어서인지는 모르지만 훈련소 교관도 여유도 있고 배려도 하고 하는 것이다.
4주 동안 훈련은 진해에서 받은 훈련에 반복교육이 많았고 진해는 해군과 같이 받았지만 포항은 현역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모두가 다 해병대 지역이라 훈련보다는 해병대가 되었다는 그런 자부심을 심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난생처음 탱크 훈련(보전협도 훈련)도 받았고 우리 해병대에 상징이기도한 L V T 교육을 받았다. 포항생활에서 느낀 것은 진해와 달래 식사를 충분히 주지 않는다는 점 . 그리고 PX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시간은 정해졌지만)이 달랐다. 생각해 보건데 밥을 적게 준건 PX을 사용하게 하기 위한 작전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나만의 생각) 포항에서의 생각나는 것은 U D T 훈련을 받는 해군들이 있었는데 식사 시간이면 밥을 타러 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기수하고 어
느 날 싸움이 붙어 문제가 되었다. 밥을 타러 온 해군들과 시비가 붙어 우리기수가 집단 폭행한 것이다.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 간에 우리가 쪽수가 많으니 지들이 맞을 수밖에 없었고 훈련병이 현역을 때렸다고 문제가 된 것이다. 우리는 소대장으로부터 형식적인 기압을 받았지만 다음 날 부터는 기압들은 기수라고 많은 편의를 봐 주었다.
또 하나는 군대 가기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식성이 무척 까다로웠다. 생 계란도 못 먹는 식성 이였고 생선이라곤 김과 멸치가 전부였던 식성을 소유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식성을 360도 바꾸어 놓는 사건이 벌어졌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다. 소대장의 호각소리가 왠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우리들은 집합을 했다. 이유는 누군가 큰 것을 보고 물을 안 내린 것이다. 자수하라고 소대장이 말하는데 범인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기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 다음 한 줄로 서서 걸레 자루에 묻힌 그것을 얼굴에 발라야 했고, 그리고 식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또한 얼굴에 바른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이 안 들고 얼마나 배가 허기졌는지 밥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그 뒤로 나에겐 못 먹는 게 없다. 지금도 말이다. 단지 두 가지 못 먹는 게 있다면 없어서 못 먹고 안 줘서 못 먹고 ………
어느덧 4주라는 시간이 흘러 수료를 하게 되었고 동기들은 자대 배치가 되어 떠났으며 행정병과 동기 25명은 행정교육을 위해 다시 진해 종합학교로 갔다.
해군과의 동거
진해 해군종합학교의 생활은 우리 해병대 생활과는 엄청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에도 해군은 완전히 민주 군대였는데 원리원칙에 의거 모든 훈련과업을 진행 했던 것이다. 먹는 것은 물로 입는 것 까지 우리 해병대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느꼈기에 울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군인인데 이럴 수 있나. 교육 또한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교육만 마치면 나머지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외출 외박도 특별한 일 이 아니면 허락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 교육내용은 아침 8시에 교실에 들어가 5시면 어김없이 나왔고 나머지는 운동과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취침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동초라는 것을 섰다. 동초는 대게 해군 하사관 후부생과 해병대가 서는데 종종 둘이 싸움이 붙어 문제가 되곤 했다. 어느 날 나도 해군 하사관 후보생과 동초를 서게 되었는데 사전에 먼저 온 선임한테 충분한 교육을 받아다. 무조건 말을 트라는 것이다. 나와 같이 동초를 서게 된 해군 하사관 후보생
은 나보다 키가 훨씬 크고 등치도 좋았다. 서로가 무슨 말부터 해야 대화가 되겠는데 교육을 받은 데로 반말로 말을 해야 하지만 그리 쉽지 않았다. 한참 만에 내가 입을 열었다. 상대방도 해병대와 동초를 서는 것이 영 부담스러워 보였다. 점잖게 내가 말했다. "김 하사는 고향이 어디요" 하고 말했더니 “인천입니다.” 하고 말 하는 것이다. 우린 그 자리에서 나이도 같고 같은 인천이니 친구 하자고 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해병대 “곤 조 가”를 적어 달래서 적어주었다. 가끔 행정학교에서 마주 치면 우린 정말 친구처럼 반갑게 대했었는데 내가 먼저 수료해서 오는 바람에 연락이 끊어져 좀 아쉬웠던 그런 추억이 있었다. 아침엔 6시부터 7시까진 자율적인 조별 과업이 주어졌는데 삼삼오오 모여서 체조도 하고 공도차고 하는 그런 식이였다. 우리 기수 25명은 해병대라는 자부심으로 (당시 종합학교에서는 포항까지 다녀온 병과는 행정병과 밖에 없었음,그래서 같은 해병대라도 대단한 걸로 알았음) 6시에 기상을 해 웃옷을 벗고 연병장을 출발해 해군사관학교 정문까지 구보하며 곤조가를 불렀다. 처음엔 잘한다고 하더니 나중에 곤조가 부르는 것도 문제가 되었고, 윗옷을 벗는 것도 문제가 되어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같은 군대이면서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6주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6주 동안 잠깐이긴 했지만 외박을 나가 어머니도 뵙고 친구들도 만나는 그런 시간도 있었다.
드디어 우리25명은 별 탈 없이 수료했고 나 또한 우수한 성적 (25명중에 4등)으로 수료했다. 그리고 다들 이미 받아놓은 자대로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산역에서 서로 얼싸 않고 아쉬운 이별을 하고 백령도로 가기 위해 부산으로 가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백령도로 가는 동기는 모두 네 명인데, 그때가 12월31일 이였고 인천에 있는 도서 파견대엔 2일 날 저 녘까지 가야 하는데 동기 중 한 명이 하루 더 있다 들어가자는 것이다. 나는 물론 반대했다. 하루 더 있다 가자니 이건 탈 령 아닌가. 하지만 나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찬성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동참할 수밖에 없어 3일 날 만나는 걸로 하고 헤어졌다.
백령도 상륙
백령도로 가기 위해선 월미도에 있는 도서파견대로 가야만 한다. 우리는 도파대로 가기위해 인천역에서 만났다. 다행히 한사람도 안온 사람 없이 다 왔지만 이제 어찌하나 하루 미기인데 영창 가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도파대 문 앞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문 근무병이 “미기자” 왔다고 이리저리 전화하고 헌병 백차 부르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영창 가는 줄 알았는데 한참 기압도 받고 한 다음 내무실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리는 도파대 관리 선임 병으로
부터 "미기"라는 닉네임으로 배가 떠날 때까지 불리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만일 배가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떠났으면 우린 정말로 영창을 갔지만 다행이 기상악화로 배가 떠나지 못해 용서 받을 수 있었다 고 했다. 내무실에 가보니 우리보다 3기나 밑에 기수가 와 있었다. 같은 신병이면서 우리는 선임대접을 톡톡히 받았는데 그것도 잠시뿐 기상이 나빠 도파대에 일주일 정도 대기하고 있었는데 삼일정도 지나니 백령도에서 휴가를 나왔던 선임들이 귀대를 하기위해 도파대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 얼마나 시달렸는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 시절 만해도 백령도는 모두들 두려워하는 그런 지역 이였으며 꼭 죽으러 가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곳이다. 드디어 우리는 해군함정인 LST(탱고)에 승선하여 밤새 항해한 다음날 아침에 백령도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간이 해가 막 뜰 무렵 이였는데 내가 처음 대한 백령도는 정말로 환상 이였다. 배가 육지에 접안하기 위해 해상에서 대기한 상태였는데 해상에서 바라보는 해무가 자욱이 깔린 백령도 그 경치는 한 폭의 수묵담채화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내가 본 풍경 중에 제일 멋진 그런 풍경 이였다. 풍경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잠시뿐 다들 배치된 부대로 이동했지만 나는 63대대로 발령 받았기에 63대대 연락 반에서 3일간 대기하다 드디어 내가 근무할 대청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지리공부를 해보자. 우리가 흔히 뉴스 뒤에 기상 예보를 할 때 서해 5도 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서해 5도란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를 말하는데 모두 다 우리 해병대가 주둔한 섬이다.
백령도에 대하여
백령도는 면적이 45.83평방미터이고 인구는 4,329명(1999년도 기준)이다.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4키로 미터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섬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본래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으나 광복 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원래의 이름은 곡도인데,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날 으는 모습처럼 생겼다, 하여 백령도라 한다. 옹진반도와 이어져 있었으나 후빙기에 해면이 상승하면서 평원에 돌출되어 있던 부분이 수면 위에 남아 형성되었다. 한국에서 14번째로 큰 섬이었으나, 최근 화동
과 사곳 을 막는 간척지 매립으로 면적이 늘어나 8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진촌리 조개무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일찍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볼 수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며,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고 고려시대에 충신 이대기가 백령지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풍이라는 두무진과 세계에서 두 곳뿐이 사 곶 천연비행장으로 유명하다.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으며 1999년 10월에는 2층 규모의 심청 각 전시관이 준공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심청이의 효심을 배워가기도 한다. 까나리 액젓, 참 다래. 흙 염소 엑기스. 전복 해삼. 멸치. 약쑥. 가리비. 농어. 우럭. 놀래미. 등이 특산물이다.
관광코스는 백령도 선착장-사 곶 천연비행장- 심청각- 물개바위-담수호 관광 - 두무진 관광 - 콩돌 해안 - 백령도 선착장 순으로 관광하면 된다.
대청도 에 대하여
대청도 는 면적 12.63평방미터 해안선 길이는 24.7키로 이다. 최고점은 삼각산 (343미터),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202키로 ,옹진반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40키로 거리에 있으며 백령도/소청도와 함께 군사분계선에 근접해 있다. 황해도 장산곶과 불과 19키로 떨어진 국가안보상 전략적 요 층 지이다. 옛 문헌에 의하면 원래의 이름은 포 을 도였으나 고려 초기에 대청도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면,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1406년(태종6)옹진 현에 편입되었다가 16세기경 다시 장연 현에 소속되었다.
1793(정조17)주민의 입주와 경작이 허락되었으며 1799년(정조23) 대청도와 소청도를 수원부로 편입시키고 두 성에 각각 진을 설치하였다. 1894년 황해도 장연군에 속하였고 1928년 백령면에 예속되었다가 1974년 대청면으로 승격한 이후.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한 산지이며, 해안선은 대체로 단조롭다.
북쪽은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해수욕장으로 이용된다. 경지 율이 낮아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며, 일부 주민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업하는 전형적인 어촌지역으로 1980년대 말까지는 홍어 잡이가 성행하였다.
조선시대 문정왕후의 병을 완쾌시켰다는 상기생을 비롯하여 약초100여종이 자라고 있으며, 최북단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청도 동백나무 자생지가(천연기념물66) 있다 유물 유적으로는 중국 원나라로 말라 태자와 도우 첩 목아 가 귀양 왔을 때 살았다는 집터로서 거택기와 깨진 기와장이 남아 있다
소청도에 대하여
소청도는 면적 2.91평방미터이고 해안선길이는 13.1키로 미터이다 .인구는 117세대 265명(1999년기준)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인천항에서 북서쪽으로 223.키로 미터 떨어진 해상에 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 소암도라 하였으나, 그 후 대청도와 가까운 섬이라 하여 소청도라 불리어 지고 있다.
기암괴석이 발달하여 경관이 매우 뛰어 난데, 특히 스트로마톨라이트로 이루어진 남동쪽의 분 바위 해안은 바위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나의 안식처 대청도
63대대 본부중대에 배속된 나는 훈련소 입소에서부터 내가 근무할 63대대 작전 사무실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장장 사 개월이나 걸렸다. 작전 사무실은 OP내에 있었으며 지하 벙커였는데, 한 여름 한 달 정도만 난로를 안 피우고 계속 난로를 피워야 할 정도로 추운 곳 이였다. OP에는 통신과 대공 그리고 우리 참모부서 (상황실, 정보 .항공. 화학)내무실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참모 실에는 10명의 병과 작전하사(선임하사대우)가 사용하였고 바로 위 고참이 447기였으니 6개월 정도 차이가 난다. OP생활은 주로 고참은 각자 사무실에서 근무하지만 쫄 병은 오전에는 기름작업 물 작업이 주 업무다. 그 때만해도 문화 시설이라고 찾아 볼 수 없었다. 가장 기본적인 TV도 없었으니, 다른 것은 오족 했겠는가. 첫날부터 나는 바로 위 고참과 같이 CP로 물 작업을 가야 했다. 일종에 인수 인개인 샘이다. OP가 위치한 곳은 삼각산 보다 좀 낮은 곳에 있었으나 도보로 가면 30분정도 가야 CP가 나오고 그 옆에 가면 민가가 있는데, 민가 옆에 우물물이 우리가 가져가는 물이다. 물 작업은 일반 플라스틱 물통에 담아 멜빵을 해서 어깨에 지고 다시 한 통은 멜빵 위에 언 져 지고 모래언덕을 지나오는 작업이다. 오전에 두 번 작업하면 시간이 다 간다. 우리가 하루에 쓰는 물이 보통 작전 장교용 작전 보좌관용 작전하사용 그리고 선임들 용 인데 7 통에서 8 통정도 들어간다. 그러기에 쫄 병 들은 오전엔 물 작업이 주 임무가 된다. 하지만 물 작업이 힘든 것도 있지만 낙도 있다. 물 작업하는 우물 옆에는 팔 하나(주인아저씨가 팔이 하나 없어서 팔 하나 가게라고도 하고 81미리 소대가 옆에 있어서 팔 하나 가게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음)라는 구멍가게가 있는데 물 길러 가서 가게에 들르는 낙이 쫄 병들한테는 유일한 낙인 것이다. 그때 당시 초코파이 다이제스티가 과자로선 제일 인기였고 통닭 한마리가 5000원 그리고 소주 4홉 한 병이 1000원 이였는데 둘이서 먹기에 아주 적당한 가격과 양이기에 우리는 가끔씩 그것을 즐겼으며, 선임들도 많이만 안 먹으면 눈감아 주는 게 전통 이였다. 어느 덧 나도 항공병 쫄 병이 들어와 둘이 짝이 되어 물 작업을 했는데 막 우물가로 가는데 팔 하나 가게 딸이 부르는 것이다. 그때 딸은 고등학생 이였고 이름은 인자였다. 우리는 가게로 들어가니 가게 옆에는 간이 식탁이 놓여 있었고 거기엔 진수성찬 음식이 차려져 있지 않은가. 어서 먹으라 하기에 우리는 이유도 모르며 정말 배 터지게 먹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이 바로 주인아저씨 생일 이였던 것이다. 세상은 좁다고 했던 가 얼마 전에 우연히 그때 고등학생 이였던 그 집 딸 인자가 인천에서 식당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선후배들과 가서 옛 추억을 생각하며 홍어회에다 술 한잔한적 있었다. 작전 사무실에는 최고 어른이 작전장교(소령)이고 작전 보좌관(대위) 작전선임하사 그리고 병 둘이 근무를 한다. 작전 병에 역할은 타자 및 챠-트 가 주 임무다. 고참이 되면 부대 훈련계획도 작전 보좌관 대신 짜기도 한다.
병장정도 되면 신임 보좌관이나 신임 작전 선임하사 보다 업무에는 베테랑이 되기 때문에 많이 도움을 주는 것이다. 작전 병선임은 435기 선임 이였는데 타자는 별로지만 글씨를 잘 썼고 나는 글씨보다는 타자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일을 분담해서 작전 일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오전엔 작업 오후엔 사무실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 어느덧 고참 작전 선임 병이 제대를 하고 나는 작전사무실에서 고참이 되었고 내무 실 에서도 중고참이 되어 이제 기름작업 물 작업 면하는 케이스였는데 급수파이프가 OP까지 올라오는 공사가 시작되어 얼마 안 돼, 물이 오피까지 올라오는 게 아닌가. 아마도 해병대에서 물 작업 기름작업 마지막 기수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또한 물이 올라오기 전에는 일요일이면 빨래 작업이 졸병들에게 주어진다. 항공병과 나는 꼰 뽕에 가득담은 빨래를 하나씩 지고 마을 논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로 가서 빨래를 해야만 했다. 여름에는 목욕도 하고 좋은데 겨울엔 정말 고된 노동 이였다. 우리 기압들은 항공병과 나는 그래도 빨래작업 끝내고 논 옆에 미꾸리 사는 곳을 뒤져 미꾸리를 잡아와서 전기 곤 로에 미꾸리와 라면을 넣어 추어탕을 끓여 선임들께 상납하는 기압들은 행동과 상납정신으로 귀여움과 빠따를 별로 맞지 않았었다. 지금도 선임들과 먹던 추어 탕 맛 잊을 수가 없다.
졸병으로써 열심히 국방에 의무를 다하고 있던 83년도 어느 날 이였다. 휴가를 나간 선임이 귀대를 했는데 나를 부르는 것이다. (사실은 종로에 계신 형님한테 용돈 좀 타 오라는 부탁을 했었음) 선임한테 가보니 선데이 서울 한권을 나에게 주며 “이것이 네 친구라며.” 하는 게 아닌가. 책을 보니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대한 내용 이였다. 그런데 미스코리아 진이 임미숙 이였는데 이름이 낮 설지 않은 이름 이였으나, 그 친구가 나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선임에 설명은 형님을 만났는데 주은이 친구가 미스코리아가 되었는데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하시며 전해주라고 선데이 서울을 주었고 그 선임은 그 책을 나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 이후로 그 선임에 선전 덕에 주은이 친구가 미스코리아다. 라고 소문이 났고 나중에는 주은이 애인이 미스 코리아 라고 소문이나 선임들한테 불려 다니느라 즐거운 비명을 지른 일도 있었다.
언젠가 모임에서 만나 그 친구한테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다는 말을 했더니, 면회라도 갈걸 그랬나 하며 웃은 적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새로 부임한 중사가 작전장교한테 전입신고를 한다기에 기다렸는데 그 분이 바로 훈련소 소대장 이였던 오장진소대장 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대장님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현역에서 만났다. 오 장 진 소대장님은 예비대 3소대를 거쳐 유격장 사격장 선임하사를 끝으로 84년도에 제대를 했다.
어느 날 나는 작전장교 전령과 마을로 내려갔다. 그런데 군기순찰에 걸려 적발 된 것이다. 군기순찰은 다름 아닌 오 장 진 소대장 이였데, 그 때 당시 대대장 명령으로 특별한 일 없이 마을 출입을 금하며 특히 가게도 출입이 금지 된 상태였는데, 작전장교 전령이 빽 만 믿고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사다가 걸려 버린 것이다.
옛정을 생각해서 봐달라고 말하려다가 다가 나도 작전장교가 어찌해 주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작전장교가 노발대발 하였지만 어 쪄라 자기 부하라고 봐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작전 보좌관한테 알아서 처리 하라 명해 작전 병은 업무가 있으니 전령만 군기교육 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오장진 선배님이 제대하게 된 동기가 군기교육 잘못 보낸 여파로 제대하게 된 건지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 되겠다. 하지만 나는 훈련소 적을 생각해 작전장교 순찰 시는 미리 시간을 통보(군사 기밀에 저촉되는 범죄 행위 하지만 지금 공소시효 지났음) 해주는 기압들은 후배가 되었다. 대청도 생활은 타 지역 해병대 와 마찬가지로 훈련도 받고 근무도 서는 일이 반복되는 곳인데, 유일한 낙은 편지받는 일이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였다. 일주일에 배가 두 번 왔다 갔다 하는데 옹진호. 경기호다. 부대에서는 통상 옹진호는 옹마담 경기호는 경마담으로 불렸는데 바람이라도 불고 기상이 악화 되면 일주일 아니, 보름 만에도 들어오고 배가 들어오는 날은 섬 전체가 들썩인다.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생필품을 기다리고, 군인들은 유일한 낙 편지와 혹시나 가족이나 애인이 면회 오지 안나하는 생각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가족이나 애인이 면회 오면 갈 때까지 휴가가 주어지는데 당시만 해도 면회 온다는 것은 시간과 돈이 많이 소요되기에 면회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부대 내에서도 편지를 많이 받는 해병 중에 한 사람 이였다. 학창시절 남녀공학에다, 그것도 합반을 하였기에 여자 친구도 많아 편지를 자주 보내준 덕으로 편지를 받고 편지를 쓰는 낙으로 군 생활을 그나마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숙 순회 현순이 이 세 친구는 친구 이상으로 날 위해 많은 편지를 보내 주었기에 지금도 우리들은 가끔씩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추억을 말하곤 한다. 그리고 세 명의 여자와 펜팔을 했고, 제일 기억 남는 여자가 있었다. 인천 만수동에 살았던 김수진 이였는데 처음 펜팔을 시작할 때 대학생 이였고 내가 제대할 때 까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제대 후 딱 한번 만났었는데. 내가 방황하느라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제대하고3년 후인가 옛날 주소로 편지를 보냈었는데 한참 만에 답장이 왔었다. 잘살고 있으며 오빠도 행복하라고….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책으로도 한 권될 정도였고 제일 길게 써본 편지는5미터 50 이였다. 통신실에서 사용하는 티 티 용지에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무어라 썼는지 기억도 없지만 그림(후배가 그려줬음)도 그리고 제법 정성 들려 썼던 걸로 기억하며, 그 많았던 편지를 계속 보관해 오다가 결혼을 앞두고 소각해 버렸다. 내가 근무한 오피는 정말 경치하나는 끝내주는 곳 이였다. 오피에서 내려 다 보면 3소대 가 보이고 그 옆에 연병장이 있다. 바다에는 홍어 잡이 배가 떠있고 해군 PK는 간첩 잡는 다고 이리저리 물보라 치며 왔다 갔다 하고, 먼 바다에는 해경정 내지 해군 함정이 떠있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가끔 기상이 안 좋으면 공해상에서 고기 잡던 배들이 전부 대청도 앞바다로 피난 오면 많게는 200여척이 넘었고 밤에는 그 배들이 일제히 불을 켜면 진짜 얼마나 멋진 풍경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파시”는 구경 못했지만 파시의 경치가 이런 경치가 하닌 가 생각한다. 그리고 3소대에는 지금도 같이 근무하는 오장진 소대장님과 민두영 선배님 그리고 김득환 선배님이 거처간곳이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다를 바라보며 3소대를 향하여 찔러 총을 하고 중얼 거리며 암모니아수를 뿌려댔다. " 세월아 구보로, 청춘아 동작 그만" 00수는 불어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 고라고 외쳤다. 선배님들한테 정말 죄송하다고 이 자리를 빌 어 말씀 드리고 싶다. “세분 선배님! 뺑이 치는 곳을 향하여 저는 암모니아수를 매일 뿌려 댔습니다. 선배님들이 드신 물은 저에 암모니아 수였습니다. 아마 그 물 덕에 선배님들이 지금도 건강하신지는 모르지만, 사죄의 뜻으로 꼭 술 한 잔 사겠습니다.”
도서지방에서 근무하는 우리 해병대는 육지와 달리 휴가 가 일 년에 한번, 25일씩 주어진다. 지금은 연안부두 도착부터 25일 준다지만 그 때 당시는 휴가날짜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기상이 악화되어 탱고 출발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휴가를 까먹는다. 반대로 탱고가 사정상 예정된 출항날짜보다 일찍 떠나면 그만큼 휴가 날짜가 길 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찾아먹는 기수는 30일도 찾아먹고 적게 찾아 먹는 기수는 15일도 찾아먹는 것이다. 나에게도 휴가가 주어졌다. 일병 때 말이다. 다들 그랬지만 멋이란 멋은 다부리고 계급장도 상병으로 마이가리 하고 휴가를 나왔다(다 고참 선임들이 해 준 것 임). 사는 곳은 인천 이였지만 주로 고향인 당진에서 휴가를 보냈다. 처음으로 찾은 곳은 나에 고등학교 은사가 계신 나의 모교를 찾았다. 고등학교 때 은사님은 나에게 특별히 잘해주셨기에 퇴직을 하셨지만, 지금도 가끔씩 찾아뵙곤 한다. 학교까지는 버스정류장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야하지만 나는 걸어가기로 했다. 아카시아 가로수가 늘어진 신작로를 링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데 마침 학생들(나의 후배들)이 하교하는(일부러 그 시간에 맞추었음) 시간이라서 학생들이 많이 있었는데, 시골에서 해병대가 출현했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멋있겠는가. 많은 학생들, 후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가며 교무실에 도착, 교무실문을 열고 들어가 선생님께 "필승"인사를 올렸다. 선생님께서 반가와 하시면 나를 꼭 껴안아 주시며 교직 생활하는 동안 군인제자가 찾아오긴 처음이라며 반가와 하셨고 일일이 선생님들한테 인사를 시켜주셨다. 그리고 아직 퇴근시간도 아닌데 선생님은 나가자고 하시더니 학교 앞 선술집에서 선생님과 나는 처음으로 사제지간으로서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물론 술값은 선생님이 내셨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고향친구 집이다. 친구 보다 친구 어머니가 자식처럼 얼마나 반가와 하시던지 지금도 그 모습이 선하다. 친구 어머니는 몇 마리 안 되는 닭을 잡아 주셨고 우리는 그걸 안주 삼아 밤을 새가며 소주병을 비웠다. 가끔씩 너무 먹지마라는 어머니 말씀도 듣지 않고 많이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런 자리 다시 한 번 같고 싶지만 친구 어머니는 이제 고인이 되셨다. 병장 때 일이다. 작전장교 처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려진 영화배우지 만 당시에는 무명 배우였다. 그런데 형부 집 아니 언니 집에 온다고 왔는데 치아와 개를 데리고 와서 갈 때는 형부한테 두고 간 것이다. 전령과 나는 한동안 우리도 잘 못 먹는 고기를 구해다 먹이느라 힘들었던 일도 있었다.
어느 덧 정말 국방부 시계는 돌고 돌아 군 생활 28개월이 다가 오고 있었다. 처음 신병으로 와서 몇 칠 안 돼 실전 배치가 붙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북한전투기 세대가 백령도 상공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발칸포를 쏘아대면 실전배치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정말 죽는 줄 알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83년도인가 이웅평이 넘어 올 때도 그랬었다. 또 전술전기 경영대회에 본부중대 대표로 나가 천막 부문 우승을 차지해 돼지 한 마리를 수상 중대 파티를 열었던 보람 있었던 일도 있었다, 군.관.민 노래
자랑에 참가(작전 장교가 추진위원장 이였기에 예선 없이 참가했음) 했지만 입상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작전장교라는 직책은 중령 진급심사를 앞둔 시점이라 밤새는 것을 밥 먹듯이 한다. 훈련 계획이며 부대 내 모든 행사를 타부대보다 더 잘해야 되기 때문에 말이다. 더불어 우리 작전요원들도 밤새는 것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일주일 동안 두 시간씩 자고 밤을 샌 적도 있는데 얼마나 피곤하고 지겨웠으면 훈련받으러 간다고 도망 나갔을까. 또 지금 해병전우회 중앙회 총제이신 김명환 총제님은 내가 근무할 때 대대장님으로 근무하셨는데 인자한 성격이면서 눈매가 아주 날카로웠던 걸로 기억 된다. 작전장교님은 제주도 출신으로 일 할 때는 냉정하고 지독하게 시켰지만 정이 많아 가끔 집으로 초대해 삼겹살파티를 열어주었고, 그 자리에 김명환 대대장님(당시)도 오셔서 같이 드시며 월남 갔다 온 이야기도 들려 주셨다.
나를 기억은 못하겠지만 한 번 만나고 싶은데 너무 높은 분이라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추억 뒤로하고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던 군 생활을 접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후임들의 전역 파티가 끝나고 작전 보좌관님과 나 그리고 작전병 후임하고 마을로 내려와 술을 마셨다. 작전보좌관님에 전역 파티인 것이다. 나는 얼마나 마셨는지 그 자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 보좌관님과 후임은 없고 방안가득 맥주병만 있었다. 고맙고 미안했던 보좌관님을 얼마 전에 통화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령으로 진급해 김포에서 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시간 내서 꼭 만나 빚을 갚을 생각이다. 나는 보직 좋은 곳으로 보내 줄 테니 말뚝을 박으라는 인사 선임하사에 권유를 뿌리치고 백령도로 향했다. 당시 말뚝을 박으면 일시불 200만원을 주었는데 병으로 있다가 제대 말에 말뚝 박는 해병들이 종종 있었다.
백령도에서 2박3일 제대 교육을 받고 인천으로 가기 위해 부두로 나왔고, 동기 중 한명이 같이 제대를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 수송부에 있었던 동기인데 사고로 인하여 15일정도 늦게 제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부두까지 나와서 눈시울 젖 시며 손을 흔들던 그 동기가 생각나며 꼭 만나서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다. 드디어 탱고에 승선 하였고 백령도를 지나 대청도 소청도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만감이 교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밤새 항해한 배는 연안부두에 도착 제대증을 받았지만. 한명도 이탈 없이 다시 전철을 타고 용산역 광장에 집합 하여 주위에 슈퍼 소주가 다 떨어지도록 마셨다. 경찰 백차가 뜨고 난리를 피웠지만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모두들 많이 취했었는데 마지막으로 정렬을 한 다음 나가자 해병대가를 불렀다. 눈가엔 눈시울이 뜨겁게 흘러내렸고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얼싸안고 잘 먹고 잘살아라, 하고 외쳐댔다. 그리고 우리 동기들은 다들 고향 앞으로 헤어졌다.
나도 충남당진이 고향이지만 인천 부평에 어머니며 형제들이 살고 있기에 부평으로 향하는 것으로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마감했다.
새로운 시작
제대 후 나는 하무 런 준비도 없이 이것저것 해봤지만, 모든 게 쉽지만 않았다. 시험 본다고 공부도 해보고 공사판에도 가보고 정처 없이 어디론가 떠나 보기도하고. 인사 선임하사의 말뚝 박으란 말이 왜 그리 생각나던지.
이년을 그렇게 허성세월로 보내다가 나는 대우자동차에 취직하기로 하고 원서를 넣었다. 3일 동안 교육을 받고 합격자 발표가 있었는데 수석 합격인지는 모르지 첫 번으로 내 이름이 불리어 졌다. 그래서 나는 대우자동차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85년부터 시작된 민주화 바람으로 곳곳에서 노사분규가 시작되었는데 우리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사보인지 노보인지 기억은 없지만 해병동지 (당시는 해병동지회라 불렀음)모집 안내문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 알리는 이 "오장진", 어디서 들어본 이름 이였다. “그래 맞아 훈련소 소대장, 우리를 밤 낮 없이 훈련소에서 못살게 했던 분 하지만 우리를 훌륭한 해병으로 만들어 줬었지. 그리고 실무에서도 만났고, 작전장교 전령과 나를 군기순찰 때 적발했던 사람, 그래서 전령이 이를 갈았었지, 하지만 나는 훈련소 소대장이고 옛 정을 생각해서 작전장교 순찰시 시간을 미리 알려 주었었지. 그리고 서로 잘 있으란 말도 잘 가란 말도 못하고 헤어졌던 사람.” 그래 그 분이 여기 있었다. 멀리 못가고 여기 있었다. 22년이 지난 우리는 지금도 가끔 만나 쓴 소주잔 기울이며 말한다. 다음은 어디에서 만날 거냐고 . 나는 답한다. “양로원”
해병대를 제대 했지만 회사에선 해병전우회가 있어 영원한 해병대가 되어 산다. 아마 죽어야 만이 해병대를 제대하지 않을까? 아니 우린 죽어서 혼이라도 해병대라 하지 않았나.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말이다.
맺는 글
25년이 지난 지금 와서 지난 일들을 기억해 글을 쓴 다는 것이 쉽지만 안았고. 사실과 다르게 기억 할 수도 있으며 정말 써야 될 일들을 빠뜨릴 수 도 있다.
하지만 해병대! 과연 해병대란 무엇 인가!?
마약과도 같은 해병대!
그 많은 수식어들!. 귀신 잡는 해병, 무적 해병, 상승해병,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 전천후 해병, 정예 해병, 신화를 남기 해병, 해병대 선임은 하느님과 동기다, 해병대 1기 차이는 태권도 5단 차이, 선임에 가래침은 로 얄 젤리. 물에 빠져도 오 와 열. 삼보이상 구보. 안되면 될 때 까지, 누구나 해병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등등 때로는 우리를 괴롭히는 말들 이였지만 우리는 이런 수식어로 인해 강인한 해병대가 되었고, 살아 나가는데 에너지가 되어 산다.
항상 해병대 출신 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무기로 삼는 우리 해병들! 대를 이어 해병대를 만드는 것도 우리들이다. 언제나 해병정신 잊지 말고 어디서든지 해병대을 위해 살아나가는 그런 해병대가 되어 숨 쉬는 날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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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선배님!!
인연은 악연과 필연이 있다. 아마 주은이와 나는 필연인 것 같다. 언제 또 어데서 만나게 될지는 모른다. 우리 회사를 떠나 서로가 헤어진다고 가정을 해도 또 다시 만나게 될거라는 생각이든다. 아니 또 다시 만난다! 글 잘 읽었다. 시간이 허락하면 459기들을 만나 옛날을 회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빠른 시간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