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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倭)를 왜 열도(列島)에 있었다고 하는가? (NO. 2)
○ 반도(半島)와 그 북방【北方 : 현 중국의 동북삼성(東北三省)】일부에 조선【朝鮮 : 고조선으로부터 근대조선까지】 이 있었다고 하는 사관을 소위 “반도사관(半島史觀)”이라고 하며, 이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줄거리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줄거리와 너무도 닮았다. “짝퉁”이라고 해야 이해하기 쉽다.
○ 왜사(倭 史)는!!!!!!!! 우선 출발하는 것이 왜(倭)의 황기(皇 紀) 2,600 년이다. 거꾸로 계산해보면 주(周 : 東周)나라 시절의 BC 5세기말 경 진(晉)나라에서 한(韓)· 위(魏)· 조(趙)의 3씨【진(晉)과 한(韓)위(魏)조(趙)씨는 대부(大夫)로써 희(姬)성이었으며, 이 희(姬)성은 주(周)의 성씨다.】가 구요(苟 瑤)를 멸망시키고 국가를 3분했던 『한(韓)· 위(魏)· 조(趙)』의 세 나라 중에서 “위(魏)나라”【현 대륙 사에서는 B. C 403년 이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B. C 6세기경으로 해설하고 있다.】 로부터 【문 후 (文 侯)】 출발(出發)하는 것으로 본인은 생각한다.
○ 그러나 이 모든 왕조(王朝)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내에서 벌어졌던 사건이므로 조선사(朝鮮 史)속에 포함되는 것이며, 왜사(倭 史)는 조선사(朝鮮 史)의 일부분일 뿐이다. 대륙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역시 동이(東夷) 출신이기 때문이며, 여기서 말하는 동이(東夷)는 신강(新疆)의 곤륜(崑崙)의 중심에 있던 천주(天柱)로 부터 동쪽지방에 사는 “구이”【九夷 : 東 夷 九 種。畎 夷、于 夷、方 夷、黃 夷、白 夷、赤 夷、玄 夷、風 夷、陽 夷。又 有 藍 夷. 】를 모두 총칭, 동이(東夷)라 한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 왜(倭)가 현 열도(列島)에 있었는가?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이며, 대한민국 사학자들의 아킬레스건이다. 옛 역사서 원문(原文)속에 현 열도(列島)를 지칭하는 내용은 없으며, 터무니없이 대륙(大陸)의 남방(南方)이나 그 서남(西南)방지대의 열대 및 아열대 기후와 동식물, 지형, 지리를 설명하고 있다.
○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 역사서에는 옛 왜(倭)가 현 열도(列島)에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 선생님들은 핏대를 올리며, 가르치고 계시는 것일까? 현재의 역사서는 원전(原典)이 아닌 한글로 써진 “해설서(解 說 書)”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해설서”를 만든 장본인들은 일제 식민지시절 일본(日本)의 교수님에게서 전수(傳授)받은 내용, 그대로를 한글로 이해하기 쉽게 써 내려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식민사학자”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 그러면 무엇 때문에 조선(朝鮮)의 여러 국가들이 반도(半島)에 있었어야 했는가? 라는 의문은 당연시 되는데, 이것은 19세기 왜(倭)가 열도(列島)를 정복하고 이곳으로 통치세력들이 천도(遷都)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것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의 당시 패권세력들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진 것일 게다.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몇 조약으로 인한 반도(半島)를 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실행에 옮겨 반도(半島)를 취하고, 식민지화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영국의 여러 식민지, 미국의 식민지 등을 보면 그 과정을 알 수 있다.】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온 것이 역사 창조(創造)이다. 조선(朝鮮)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반도(半島)에 있어야 만, 열도(列島)의 2,600 년 유구한 천손(天孫)민족의 황기(皇紀)를 증거(證據)하고,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일본서기를 보면 황당하고, 신화적이며, 불가능한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는데, 역사서라 하기에 창피한 수준의 것임에도 반도(半島)의 학자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해설하는데 참고문헌으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 왜, 그들은(열도) 이렇게 엉터리 역사를 식민지 엘리트들에게 가르쳐, 역사를 창조한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반도(半島) 땅을 취하기 위한 작전 중의 하나였을 뿐입니다. 이미 미국. 영국 등의 당시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반도(半島) 땅을 취하는 것에 동의(同意)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반도의 문맹률 90% 이상, 통치와 착취를 위한 교육이 필요했으며, 그래서 소학교 시절부터 한글을 가르쳤고, 열등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역사적 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하늘의 자손(天孫)인 선택받은 일등 민족이요, 조선민족은 2등 민족으로 어쩔 수 없이 일등 민족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열등민족으로 자리매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식민지 땅의 신진 엘리트들이 동원되어 선봉장 역할을 했으며, 이들은 일본의 패망 이후, 새롭게 건국된 대한민국에서도 엘리트층으로, 민족주의자로, 반공주의자로, 친미세력으로 시시 때때로 옷을 갈아입고 각각의 중요한 위치에서 열심히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대단히 중요한 포지션에서 임무에 충실하고 계실 것입니다.
○ 원전(原典)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나, 이게 영 되지 않는 것이 『한글 전용으로 한글만 배우고, 쓰다 보니 무슨 글자인지,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고』, 『목구멍에 풀칠도 어렵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않고』, 『또 선배나 스승님의 논리나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 하면, 그날로 수십 년 공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데, 감히 반기(反旗)를 들 수 있을까?』
○ 역사라는 학문은 수많은 가설과 주장이 있어야 정상인데, 대한민국은 “표준방식”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주장이나, 가설, 기존 학계의 반발을 불러올 만한 주장은 매장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결코 보고서에 써질 수 없습니다. 괜한 소리 한 번 잘못해 학계에서 바보취급을 왜 당합니까?
○ <왜(倭)>가 반도(半島) 남쪽지방을 수세기 동안 “임나일본부”라는 행정편제를 가지고 지배했다는 것, 근거가 없으며, 또한 이러한 것을 증명하는 역사 기록자체도 없다. 역사서에 기록된 “왜(倭)”의 위치(位置)가 현 열도(列島)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도(半島) 남쪽지방을 지배하면서 “임나일본부”를 설치(設置), 운영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은 19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군국주의와 소위 말하는 “정한론(征韓論)”으로부터 찾아야 되는데, 문제는 “정조론(征 朝 論)”이라면 그나마 조선(朝鮮)을 정복하자는 논리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정한론(征韓論)”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말이다. 반도에 “조선(朝鮮)”이란 국가가 있었다고 하면서 “한국(韓國)”을 정벌하자는 말은 또 무엇일까? 당시에 <韓한>이란 국가名을 가진 나라는 없었다. 이것은 반도(半島)의 동남쪽 신라(新羅)가 열도의 왜사를 고증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반도(半島) 동남쪽에 있었던 신라(新羅)가 실제 이곳(반도)에 없었다면 현 열도(列島)의 옛 왜(倭)는 조작극이라는 것이 탄로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본(日本)은 어떡하든 반도(半島) 동남쪽에 옛 신라(新羅)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 맞아요. 그래서 본인 같은 소위 “재야(在野)”가 있는 것이 아닐까? 철저하게 옛 원전의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재야(在野)”는 노력한 만큼의 보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직업을 가져야 하고, 굶어 죽지 않으려면 직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눈칫밥 먹는 것은 피할 수가 없어요. 감수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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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내용은 <서울경제일보. 2009년 10월 24일자 칼럼 : “오늘의 경제소사(1532 정한론)”>에 대해 본인이 소개한 것인데, 새삼 이 내용이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 것 같다. 내용인 즉 ;
○ 【“불구대천의 적인 조선을 반드시 정벌해야 일본의 위신이 선다. 30개 대대를 동원하면 50일 안에 정복이 가능한 조선을 놓아두면 러시아나 프랑스에 기회를 빼앗길 수 있다.” 1869년 조선과 접촉했던 일본 외교관이 제출한 보고서의 골자다. 조선 <침공 론>이 나온 직접적인 원인은 “새로운 국교수립을 원하던 일본의 요구를 조선이 거절한 일, ➡ 『대원군 치하의 조선은 ‘왜왕이 황제라 칭하고 새로운 국새를 사용”한 점을 들어 일본국서의 접수조차 거부했다. 』당장 조선을 응징하자는 정조론(征 朝 論)이 들끓었다. 전쟁비용은 조선의 풍부한 곡물로 회수할 수 있고, 조선인을 끌어다 ’홋카이도(북해도)‘ 개발에 투입하자는 논의까지 나왔다. 정조론(征 朝 論)이 메이지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정한론(征韓論)으로 바뀐 논쟁은 일본의 권력집단은 두 패로 갈라놓았다. 근대화 개혁으로 특권을 상실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폭발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던 강경파는 조속한 조선 정벌을 주장한 반면 온건파는 정벌에는 찬성하지만 자칫 외채와 조세부담 증가가 불가피하기에 건전재정 확립과 수출 진흥, 불평등조약 개정에 먼저 힘쓰자고 맞섰다. 대만 정벌이 손쉽게 끝난 뒤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지루한 논쟁이 막을 내린 것은 1874년 10월 24일 일왕이 온건파의 손을 들어주고 강경파 대신 5명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논쟁은 끝났다. 패배한 강경파의 반란(서남전쟁)도 정부군은 어렵지 않게 눌렀다. 강경파의 몰락에도 정한론의 생명은 끊어지지 않고 일본은 결국 조선을 집어 삼켰다. 조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던 일본이 오늘날에는 달라졌을까. 정한론을 미화하는 극우교과서가 판친다. 그런데도 한국은 ‘과거보다 미래를 얘기하자’고 한다. 망각유전자의 확산이 겁난다. /권 홍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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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본인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일본(倭)은 대원군시절에 처음으로 천황(天皇) 또는 황제(皇帝)를 칭했다.』는 것 즉 『왜왕(倭王)이 황제(皇帝)라 칭하고 새로운 국새(國璽)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 제후 왕(諸侯 王)이었던 “왜국 왕(倭國 王)”이 황제(皇帝) 또는 천황(天皇)을 참칭(僭稱)하니, 조선황제(朝鮮皇帝)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중조(中朝)의 황제(皇帝)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뒤통수를 맞은 꼴인데, 당연히 국서(國書)나 사신(使臣)의 입국(入國)조차 허락했을 리 없는 일이다.
○ 본인이 여러 차례 주장한 것처럼 “천황(天皇)”이란 제도는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황기 2,600 년』이야기는 이렇게 급조되어 급속도로 전파된 것이다. 소위 소학교(小學校)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말이다.
○ 왜(일본)에서는 무엇 때문에 조선(朝鮮)에 대해 불구대천의 원수【不俱戴天 :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怨讐)】라고 하였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레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말이 그토록 사용되었을까. 현재(現在)의 역사 해설로 보면 반도(半島)와 열도(列島)에서, 열도(列島)는 천황(天皇)이었으며, 조선(朝鮮)은 일개 왕(王)이었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실정이며, 왜(倭)는 고대(古代)에도 조선(朝鮮)을 일시 경략(經略)하였다고 스스로 자국민들에게 가르쳐 오지 않았는가. 이러한 우월한 체제를 가지고 이어온 열도(列島)의 입장에서 볼 때 원수(怨讐)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또 1500년대 왜란(倭亂)을 기억해보면 당시 자신들이(왜가) 남의 나라(조선)를 쳐들어 온 것이지, 조선(朝鮮)에서 열도(列島)를 쳐들어간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반대로 <조선(朝鮮)의 입장에서 왜(倭)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 웃기는 얘기 아닌가!!!!!!!!!!!!!!!!!!!!!!!!!!!!!이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왜(倭)가 조선(朝鮮)에 대해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지칭했다면 그 상대방인 “조선(朝鮮)”은 반도에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왜(일본)역시 현 열도에 있을 수 없다.
○ 이는 곧 무능력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해체가 원인이며, 이것은 역사의 왜곡(歪曲)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조선(朝鮮)의 역사 왜곡(歪曲)에는 수천 년 변두리의 제후국(諸侯國)으로, 변방국(邊方 國)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였던 “중조(中朝)를 떠받들던 왜【倭 : 백제(百濟)와 왜(倭)는 혈연적으로 같다. 백제의 남쪽에서 백제와 함께 수백 년 흥망성쇠를 함께 했다. 불행하게도 신라(新羅)의 외세개입(外勢介入)으로 900년을 이어온 백제왕조가 문을 닫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 많은 백제(百濟)의 왕족(王族)과 대신(大臣)들과 백성(百姓)들은 왜국(倭國)으로 피신하였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백제문화의 꽃을 피웠다. 따라서 이들은 중조(中朝)로부터 단 한번이라도 대접다운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 반도(半島)와 열도(列島)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가 황제(皇帝)를 참칭하니 “조선” 즉 중앙조정(中朝) 입장에서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었다. 이러한 “조선(朝鮮) 조정(朝廷)”의 거부로 인한 왜(일본)입장에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벌어져 강경파(强硬派) 쪽에서 아예 정벌(征伐)해버리자는 『정 벌 론 (征 伐 論)』이 생긴 것 일게다. 어찌됐든 왜곡(歪曲)된 역사는 틀림없이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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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明史)를 보면 : ○ 말기(末期)에, 『北 虜 南 倭 (북 노 남 왜)』의 침탈(侵奪)로 인하여 국고(國庫)가 손실되고 나라가 위태로워져 결국 이자성(李自成)의 반란(反亂)과 후금(後金)의 발흥(發興)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데, 명(明)나라는 현 대륙의 『하 북 성 “북경”에 왕도(王都)를 두고 있었다.』고 하니 지리(地理)등을 설명할 때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할 것이며, 설명한다. 위의 “북 노 남 왜(北虜南倭)”란 말에서, ➊ 『북 노(北 虜)』는 북쪽의 오랑캐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엔 “후금(後金)” 전(前)의 여진(女眞)도 포함되며, 후금 역시 북 노(北虜)에 해당된다. ➋ 『남 왜(南倭)』란 남쪽지방의 “왜(倭)”를 지칭하는 것이다.
○ 위 ➋의 “남 왜 (南 倭)”란 말은, 명의 황도(明 皇都)가 북경(北京)이라 할 때 참으로 민망한 내용이다. 북경(北京)에서 남쪽지대가 어딜까. 왜(倭)의 본거지는 열도라고 했는데 말이다. 이곳 열도(列島)에서 배를 타고 수만(數萬) 명의 왜(倭)가 시도 때도 없이 대륙의 동남해안 및 내륙 지대를 종횡무진(縱橫無盡) 침략, 약탈했다면 당시 “왜(倭)”의 수군(水軍)은 지상최대(地上最大)의 규모와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과연 가능한 말인가?
○ 대륙의 역사서를 보면 ; 안타깝게도 열도(列島)에서 전함(戰艦)을 타고 동남해안 및 내륙지대를 침략, 약탈한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다보니 학자들은 “대륙에서 자생한 왜(倭)와 열도(列島)의 왜(倭)”를 구분하여, 별도로 취급하는 분들이 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요, 놀라운 아이디어다. 만약 그랬다면 명사(明史)를 편찬한 이들과 명나라의 왕과 대신,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시도 때도 없이 침탈, 약탈하는 왜구(倭寇)의 정체도 몰랐다는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이는 현대 학자들의 오만이요, 독선이요, 상상력일 뿐이다.
○ 대륙의 역사서에는 ; 왜(倭)의 근거지로 『대륙의 동남(東南)해안지대. 장강(長江)이남 지방과 도서(島嶼)지방. 해남도. 베트남지방.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반도. 필리핀지방 등의 열대지방과 아열대지방을 포함하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 무 (文 武)』란 자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헛소리인지, 아니면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논자』들의 식민지 통치시절을 그리워하는 헛소리인지? 자! 시대적으로 기록된 역사서의 설명을 찾아서 “왜(倭)” 영토와 그들의 본거지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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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서(後漢書 열전) ; <대 왜국>은 회계(會稽)지방의 東 冶(동야)의 동쪽지방으로 <복 건성 복주 시. 민 후 현이라고 한다. >
<建武中元二年,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倭國之極南界也,光武賜以印綬.安帝永初元年,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願請見。: 건무(建 武) 중원 2년, 왜노국(倭奴國)이 받들어 조공하고 하례하였다. 사신은 스스로 대부라 칭하였다. ➡왜국(倭國)은 가장 남쪽경계지역이다. 광무(光武)가 인수를 하사하였다. 안제(安 帝)영초 원년(元年), 왜국 왕 “수승 (帥 升)”등이 백성 백육 십 인을 헌상하고는 만나기를 청하였다.>
○ 대륙 중원(中原) 왕조(王朝)에서 『극 남계 (極 南 界)』는 열도가 아니라 대만(臺灣)이나 해남도 (海 南 島), 또는 현 베트남지방이 우선일 것이다. 열도(列島)는 방향, 지리, 지형적으로 해당사항이 될 수 없다. 왜국(倭國)이 현 열도(列島)를 말하지 않는 것이라면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3국은 반도(半島)에 존재할 근거가 없어진다. 이 말은 삼국(高句驪. 百濟. 新羅)은 “왜(倭)”국의 서북(西北)방향에 있었기 때문이며,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에서 동남쪽 12,000 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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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서(晋 書>는 ; 당시의 <왜>의 지역을 동야 (東 冶)의 동방지역이라 했으므로, 동야(東 冶) 의 동방지역은 복건省 및 그 주변의 동쪽지역 및 대만을 포함한 지역이며, 또한 왜(倭) 지역은 대방군(帶方 郡) 남쪽 12,000 리 지방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백제(百濟)는 북제(北齊) 및 수(隋)로부터 대방(帶方)군왕으로 봉해졌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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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오환선비동이전(일본 편) : (中略). 其 山 有 丹 ,其 木 有 柟 杼 、豫 樟 、楺 櫪 、投 橿、烏 號 、楓 香 ,其 竹 篠 簳 、 桃 支 。 有 薑 、 橘 、 椒 、➡蘘 荷, 不 知 以 為 滋 味 。 有 獮 猴 、 黑 雉 。 其 俗 舉 事 行 來 , 有 所 云 為 , 輒 灼 骨 而 卜 , 以 占 吉 凶 , 先 告 所 卜 , 其 辭 如 令 龜 法 , 視 火 坼 占 兆 。 其 會 同 坐 起 , 父 子 男 女 無 別 , 人 性 嗜 酒 。〔一〕 見 大 人 所 敬 , 但 搏 手 以 當 跪 拜 。 - 산에는 단(丹)이 있는데, 그 나무로는 남(柟 : 녹나무)· 저(杼 : 북 저 또는 상수리나무 서) ·예장(豫 樟 : 樟 / 홍자옥편예장나무 장. 열대지방에서 산출된다.) ·유력(楺 櫪 : 楺 : 나무 휠 유, 櫪 : 가죽나무 력) ·투강(投 橿 : 橿 : 박달나무 강) ·오호(烏 號 : 烏 號 弓 / 예전에, 중국에서 이름난 활의 하나.) ·풍향(楓 香 : 단풍나무 풍. / 백 교 향(白膠香 : 단풍나무 진)등이 있고, 대나무 삼태기(竹 篠 簳 / 蓧 : 삼태기 조. 簳 : 조릿대 간. 화살대). 화살대, 조지(桃 支)가 난다. 생강(薑)과 귤(橘), 산초나무(椒)와 양 하(蘘 荷 : 풀이름. “양 하” 양 / 양 하(蘘荷)는 열대 아시아 원산지의 여러 해살이 풀이다.)가 있지만, 맛을 보태는 것인 줄 알지 못한다. 원숭이(獼猴)와 검은 꿩이 있다. 그 풍속에 일이 있으면 이르는 곳이 있는데, 뼈를 불살라 점을 치는 것이다. 길흉을 점칠 때 먼저 점치는 곳에 고하는데 그 법이 거북점과 같다. 불이 터지는 것을 보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모임에서 앉아있을 때에는, 부자(夫子)와 남녀(男女)의 차이가 없다. 사람들 성품이 술을 즐긴다. 어른에게 공경을 보이는 것은, 단지 손을 잡고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 양 하(蘘 荷) : 풀이름. “양 하” 양 / 양 하(蘘 荷)는 열대 아시아 원산지의 여러 해살이 풀이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Zingiber mioga / 양 하 (Z. mioga)을 보면 : 특징 / 열대 아시아 원산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1m 내외이다. 잎은 2줄로 어긋난다. 잎 새는 30cm 정도의 긴 타원형으로 끝이 가늘고 뾰족하다. 잎 집 부분은 줄기를 감싸고, 겨울에 땅 윗부분은 마른다. (중략). 이용 / 꽃 이삭은 꽃 양하라고 하며 식용한다. 어린 줄기를 어두운 곳에서 연백 도장한 것을 양하 죽이라 하며 식용한다. 양하는 번식력이 강해 갈지 않아도 잘 자라는데 겨울에 겉겨 등을 깔아주면 추위에 상하지 않고 이듬해 봄에 일찍 발아한다. 양 하 죽을 얻을 때에는 발아 전에 50cm 정도 간격으로 심고 흙과 겉겨를 덮는다. 또한 그루터기를 캐어 온실에서 마찬가지로 덮고 연화 촉성시키는 것도 있다. 품종은 여름에 꽃이 피는 작은 여름 양 하와 가을에 피는 큰 가을 양 하가 있다.
○ 특정 기후대와 그곳에서 자라는 동, 식물은 기후가 크게 변하지 않는 한 그 특정 지방에서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 기록은 조선(朝鮮)의 삼국(三國)과 왜(倭)에 관해 깊은 내용을 수록한 역사서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왜(倭)”의 영토는 현재의 열도(列島)에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현 열도(列島)가 아시아 열대지방이라고 했을 때 반도(半島)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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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사(北史)를 보면 ; 왜국은 백제(百濟) 및 신라(新羅)에서 동남으로 수륙【水陸 : 강 , 하천 또는 땅으로】 3,000리에 있으며, 그 나라의 ➡지세(地勢)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 【현재 열도는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다. 즉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낙랑군(樂浪 郡)계의 대방(帶方)군에서 나란히 12,000 리이며, 회계【會稽 : 대륙의 동남부 복건省】의 동쪽 『“담이(儋耳)”와 가깝다.』고 하였다. 【“담이”는 광동省의 주해市에 있던 옛 지명이다.】 특히 왜(倭)에 대해 설명하기를 만이【蠻夷 : 양자강 이남에 살던 종족을 통칭】라 하였다.
○ <➡지세(地勢)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 : 열도(列島)의 지형, 지리는 기록과는 정반대로 되어있다. 실제 열도(列島)는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은 지형으로 되어 있으며,
○ 반도(半島)에서 열도(列島)까지 모두 바다(海)뿐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보면, 수륙(水陸) 곧 물(하천 또는 바다)과 땅(육지)을 지나 3,000 리라고 하였으므로, 반도(半島)와 열도(列島)를 지칭하는 것이 될 수 없다.
○ 만이(蠻夷)는 곧 “왜(倭)”이다. 만이(蠻夷)는 장강(長江)이남지방의 옛 종족을 모두 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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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사(南史)를 보면 ; 『왜(倭)는 백제(百濟)와 가까이 있다.』고 하였다.
○ 반도(半島)와 열도(列島)사이에서 쌍방 간의 가장 가까운 곳은 경상남도 해안지방이다. 백제(百濟)는 경남지방의 해안으로부터 수 백리를 더 서쪽으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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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양서(梁 書)를 보면 ; 왜(倭)는 대방(帶方)에서 12,000 리를 가야하며, 회계(會稽)의 동쪽이며, 한국(韓國)을 지나 바다, 물길로 가야 한다고 했고, 산물(産物)은 “담이(儋耳)”와 “주 애(朱崖)”와 같다고 하였다.
【주 애(朱崖)와 담이(儋耳)는 해남(海 南)도와 그 북쪽 광동(廣 東)성 해안에 있었다. 이곳이 대륙의 남해(南海)이며, 회계(會稽)의 위치는 광동(廣 東)성의 서쪽지대로 옮겨져야 한다. 이것은 전회에 설명한 “아! 백제”에서 설명한 내용 중에서 강좌(江左)와 강우(江右)의 문제이다. 대륙의 역사서에서 말하는 회계(會稽)의 동쪽에 『담이(儋耳)와 주 애(朱崖)가 있다』고 한다면 당시의 남조(南朝)국가들인 晉(진), 宋(송), 齊(제), 梁(양)등의 국가는 강우(江 右)지대인 안남지방과 사천 남부지방으로 옮겨져야 마땅하며, 그 동쪽지방에는 백제(百濟)가 있어야 올바른 역사가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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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 “그 나라의 경계(境界)는 동서남북(東西南北) 각 수천(數千) 리 이며, 서쪽 및 남쪽경계는 대해(大海)와 접하고, 동쪽과 북쪽의 경계는 대산(大 山)으로 한계(限界)가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지형, 지세로 보아 현재의 열도(列島)는 가당치 않은 설명이다.
○ 열도(列島)의 지형은 남북(南北)은 길고, 동서(東西)거리는 짧다. 동서남북(東西南北) 수 천리(數 千里)라는 말은 열도(列島)를 말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 『서쪽과 남쪽은 대해(大海)에 접해있고, 동쪽과 북쪽은 대산(큰 산)에 막혀있다.』는 이 지형을 생각하면 현 열도는 결코 옛 왜(倭)의 본거지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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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史記지명고> 조이(鳥 夷>편을 보면 ; 〔정의 : <注 “鳥” 或 作 “島” >. ➡ ➊괄지志에 의하면 백제 국 서남(西南)바다 가운데 큰 섬 15 개소가 있는데, 사람이 살고 있으며, 모두 부락을 설치하고 있는데 이 모두는 백제(百濟)에 속해 있다. ➡ ➋또 왜국(倭國) 서남(西南) 대해 중에 백여 소국이 섬에 거하고 있는데, 경(수도 : 장안)에서 남쪽으로 13,500 리이다. 안(안 황 보 밀을 말함)에 의하면 무후(武 后)가 왜국을 일본국으로 개명하였다.〕라고 하였다.
○ 위 ➊를 보면 ; 백제 서남지방 바다 가운데 큰 섬 15개가 있었으며, 이곳에 백제(百濟)의 행정관청이 설치되어 통치했다는 설명인데, 현 반도 충청, 전라 서남(西南)지방의 바다 가운데 큰 섬 15개가 존재할까? 손바닥만 한 섬은 많을 것이나 큰 섬이라고 표현할만한 곳은 존재치 않는다.
○ 위 ➋에서 ; 왜국의 서남(西南) 대해 가운데엔 수많은 섬이 있으나, 대부분 사람이 살수 없는 무인도(無人島)일 뿐, 100 여개 나라가 있을 만한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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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통전 변방전의 왜(倭) ;
〔 倭 自 後 漢 通 焉 ,在 帶 方 東 南 大 海 中 ,依 山島 為 居 ,凡 百 餘 國 。(중략). 其 王 理 邪 馬 臺 國 ,或 云 邪 摩 堆 。去 遼 東 萬 二 千 里 ,在 百 濟 、新 羅 東 南 ,其 國 界 東 西 五 月 行 ,南 北 三 月 行 ,各 至 於 海 ,大 較 在 會 稽 、閩 川 之 東 ,亦 與 朱 崖 、儋 耳 相 近. : 왜는 후한 때 통하였다. 왜는 대방 동남 대해中에 있으며, 산과 섬에 의지하며 살아가며, 모두 100여국이다. (중략). 그 나라의 왕은 있는 곳은 사마대국이다. 혹은 “사마 퇴”라 전한다. 요동에서 12,000리 떨어져 있으며, 백제 및 신라의 동남지역에 있다. 그 나라의 경계에서 동쪽, 서쪽으로 5월을 가고, 남쪽, 북쪽으로 3월을 가 각 바다에 이르는데, 이들이 있는 곳은 회계(會 稽) 및 민천(閩 川)의 동쪽이며【 閩 (민) : 복건 성 지역. 광동지방에 살던 옛 종족의 이름 】, 주 애(朱崖)이며 담 이(儋耳)와 가까이에 있다.【주 애(朱崖). 담이(儋耳)와 가까운 곳은 해남도와 현 베트남지방(임 읍 및 부남)과 필리핀지방이다.】〕
○ 여기서 <회계(會稽), 민천(閩 川), 주 애(朱崖), 담이(儋耳)>지역은 모두 대륙(大陸)의 최남단 해안과 가까운 지역을 말하며, 『절강(浙 江)성. 복건(福 建)성. 광동(廣 東)성. 광서(廣 西)성. 해남(海 南)성. 대만(臺灣). 안남(安南). 교지(交趾). 현 베트남지방【일남(日 南). 임 읍(林邑).】 과 필리핀군도. 말레이시아 반도』 등을 가리킨다.
중원【中原 : 천수. 부풍. 장안】의 동남(東南) 지역은 바로 대륙의 『절강(浙江)성. 복건(福建)성. 광동(廣東)성. 광서(廣西)성. 해남(海南)성. 대만(臺灣). 안남(安南). 교지(交趾). 현 베트남지방【일남(日南). 임 읍(林邑).】 과 필리핀군도. 말레이시아 반도 등을 가리킨다. 이곳은 “무이 산맥” 및 “남 령 山脈”등과 동정호(洞庭湖) 및 양자江등의 천연적인 지형으로, 남북(南北) 간에 왕래가 매우 어려웠던 지역이며, 또한 이곳은 “호남(湖南)”이라는 지명으로 불리 우기도 했으며, 북방왕조에서 밀려난 왕조들의 據 點 地 역할도 했으며, 북방의 조정에서 쫓겨 난 대신들의 유배처도 되었던 곳이다.
○ 또한 대방(帶方)은 대륙의 중원(中原) 곧 『감 숙성 천수로부터 부풍, 장안, 낙양으로 이어지는 위수(渭水)와 하(河)주위에 있었다.』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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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高 麗 史 / 忠 烈 王 5. 1301 : <耽 羅 接 于 倭 國>
(10) 高 麗 史 / 忠 肅 王 2. 1333 : <三 月 右 丞 相 燕 帖 木 兒 奏 于 皇 太 后 皇 太 子 曰 : 『 高 麗 隣 于 倭 境 』今 其 王 久 在 都 下 請 令 還 國." 制 可. : 3 월, 원나라의 우승상 <연 첩 목 아>가 황태후 및 황태자에게 아뢰기를 “고려는 왜(倭)와 경계를 인접하고 있는데, 지금 왕이 오래도록 도성에 있으니, 돌아가도록 해 주십시오”, 하여 그렇게 해 주었다.>
○ 위 원사 열전 기록에서 (9)의 <耽 羅 隣 于 倭 境> 과 (10)번에서는 <高 麗 接 于 倭 國>을 비교해보면 ; <隣은 이웃 린(인)이며, 接은 “連 也”이다. 즉 “연 이어져 있다.” 라는 뜻이다>. 바닷길 수 백리 또는 천리 길을 “이웃하고 있다거나, 연 이어져 있다. 접하고 있다.” 등으로 표현 할 수는 없다.
○ 홍자옥편에서 “接”을 찾아보면, 『連 也 : 연할 접』, 『付 也 : 접할 접』, 『近 也 :가 까 울 접』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隣”은 “鄰”과 같은 자로, 『近 也 : 이웃 린. 親 比 : 가까울 린. 連 接 : 맞붙을 린』등이다.
○ 탐라(耽羅)를 현 반도(半島)의 제주도(濟州道)라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왜(倭)의 경계와 가까이(이웃하고)있어야 하며, 또 고려(高麗) 땅과 왜(倭)의 땅이 접해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기록과는 상이(相異)한 지형, 지세로 이루어져 있다. 탐라(濟州)는 바다 가운데 있는 섬(島)이기 때문에 원사 열전 기록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 이 말은 곧 『탐라(耽羅)와 고려(高麗)와 왜국(倭國)은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의 반도(半島)와 열도(列島)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다.
【 원나라는 고려를 부마국(鮒馬國)으로 했다고 하며, 많은 사신들이 수없이 고려(高麗)를 드나들었으며, 원나라 군사와 고려군사가 v일본(日本 : 倭)국을 치러 왜(倭)의 영토로 상륙(上陸)까지 했다는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누구보다도 고려(高麗)나 왜(倭)의 영토에 대한 지형,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사(元史)의 기록을 뒤집을 만한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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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원사(元史) 열전 “탐라耽羅” 을 보면 ; <耽 羅 ,高 麗 與 國 也 。世 祖 既 臣 服 高 麗 ,以 耽 羅 為 南 宋 、日 本 衝 要 ,亦 注 意 焉 : 탐라(耽羅)는 고려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때 이미 고려를 복속시켜 신하로 하였다. 이 탐라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이 충돌하는 요충지이니, 이에 모두 주의(注意)해야 한다.>
○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 탐라(耽羅)가 아주 가깝게 근접(近接)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사이에 고려(高麗) 땅인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남송(南宋). 고려(高麗). 일본(日本)등의 3국은 근접(近接)해 있었으며, 고려(高麗) 땅인 탐라(耽羅)는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대목이다.
○ 당시에 원(元)이 탐라(耽羅)를 지배했다가 고려(高麗) 조정(朝廷)의 요청에 의해 다시 돌려받은 땅이다. 따라서 원사(元史)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 고려(高麗)가 함께 있었던 곳은 현재의 반도(半島)가 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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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사강목 / 임진년 충렬왕 18년 ; (본문) <저 왜(倭)라는 나라는 지형(地形)이 비파(琵琶)처럼 머리가 서쪽으로 뾰족하게 내밀고 있어서 왜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에는 유리하나, 남의 나라가 공격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중국의 강ㆍ절 (江. 浙) 지방이 가장 많은 피해를 받으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더구나 조그마한 나라로서야 문제가 되겠는가? 이는 원나라 황제의 잘못 생각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잘한 계책이 아니었었다. >
○ 현 열도(列島)에 왜(倭가) 있었다면 가장 많은 피해를 볼 지역이 어디일까? 유치원생들에게 물어봐도 “우리나라요”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위의 본문을 보면 ; 『중국의 강. 절(江. 浙)지방이 가장 많은 피해를 받으면서도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는 설명인데, 이러한 논리(論理)는 인간(人間)의 상식적인 사고를 벗어나는 이야기다. 당시 왜(倭)의 본거지는 현 열도(列島)가 아닌 대륙(大陸)의 동남(東南) 해안지방과 대만(臺灣), 주 산 군도(群島), 해남도, 광동, 광서 해안지방 및 주위 섬(島)지방을 중심(中心)으로 있었던 집단(集團)이었다는 말이 휠 씬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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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라 임나 모한 휴인 주호고 (加 羅 任 那 慕 韓 休 忍 州 胡 考) ;
휴 인 국 (休 忍 國)은 《일 통 지》에, “휴 인 (休 忍)”은 신라(新羅) 동쪽에 있으니, 또한 삼한(三韓)의 무리이다. 동진 때에는 연(燕)에 속했더니, 진(秦)이 연을 멸망하자 결국은 진(秦)에 속하였다. 부 낙 (苻 洛)이 반역할 때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휴인 등 여러 나라에서 군사를 징집했다.』 한다. 그 뒤에 휴 인(休 忍)은 백제(百濟)에 병합되었다.” 하였는데, 지금 자세히 상고할 수가 없다.】
○ <휴 인(休 忍)은 신라(新羅) 동쪽에 있으니 또한 삼한(三韓)의 무리이며, 백제(百濟)에 병합되었다>라는 글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 <동진 때는 이곳이 연(燕)의 강역에 속했고, 진(秦)이 연(燕)을 멸한 뒤에는 진(秦)의 땅이 되었다.>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 반도(半島) 땅 신라(新羅)는 당시 동남 모퉁이 조그만 땅을 갖고 있었다. 그곳의 동쪽은 대해(大海)에 막혀있으므로, 만약 “휴인(休忍)국”이 있었다면 섬나라였을 것이며, 울릉도(鬱陵島) 또는 독도(獨島)였을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鬱陵島) 또는 독도(獨島)일 수 없는 것이 이곳을 『백제(百濟)가 점령하여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과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휴인 등 여러 나라에서 군사를 징집했다.』 는 것이다.
○ 울릉도(鬱陵島) 또는 독도(獨島)는 땅이 좁아서 당시에 징집(徵集)을 할 정도의 백성(百姓)들이 살 수 없었으며, 백제(百濟)가 이 땅을 점령(占領)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의 형편으로 말이다. 가능성은 있다. 인간(人間)의 역사가 아닌 신(神)들의 이야기라면.......!!!!!!!!!!! 곧 삼한(三韓)이니, 삼국(三國)이니, 왜(倭)등의 나라는 현재의 지리적 구도가 아니었으며, 그 위치는 대륙에서 찾아야 정당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조 선 인(朝 鮮 人)”들의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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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명사(明史) 열전 / 일본(日本) : <由 是, 浙、閩大姓素為倭內主者,失利而怨.紈又數騰疏於朝,顯言大姓通倭狀,以故閩,浙人皆惡之,而閩尤甚.>.........본시부터 절강지방 및 민(閩)지방의 백의 대성(大姓)들은 내부에서 왜에게 협력하는 자들이며, 이를 잃어버리고 원망하는 자들이다. 조정에서 여러 번에 거쳐 통하게(알아듣게) 하여, 대성들을 통해 왜에게 문서를 보내 알아듣게 하였으나 민, 절인들 모두는 악인들이며, 또 민(閩)지방의 사람이 더욱 심했다. <三十二年三月,汪直勾諸倭大舉入寇,連艦數百,蔽海而至.浙東,西,江南,北,濱海數千里,同時告警.破昌國衛.>..........32년 3월, “왕 직구”와 여러 “왜”들이 대거 입구하였는데, 연달아 수백 척의 배(艦)로,(가릴 폐 : 蔽)바다를 가로 막고 절 동. 절서. 강남. 강북지방의 빈해(濱 海) 수천 里에 다다랐다. 이와 동시에 경계가 발령됐고, 이들을 “창 국 衛”를 무너뜨렸다.
○ 이러한 내용을 보고는, 대륙 자생 왜(倭)와 열도(列島)의 왜(倭)를 구분하여 이분법적인 논리(論理)로 역사(歷史)를 창조(創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역사는 결코 창조될 수 없다. 우리들의 미래는 창조적일 수 있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이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며, 역사서를 한참 더 보아야 할 사람들이다. 왜(倭)의 활동(活動)지역이나 본거지(本據地)를 기록한 대륙사서는 기원전이나 기원 후 16세기나 똑같다. 약간의 영역 축소, 확장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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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명사(明史) 열전. 조선(朝鮮) 편을 보자. :
<王 國 北 接 契 丹, 女 直, 而 南 接 倭, 備 御 之 道 : 그 왕국(王國)은 북(北으)로 글 란(契丹)과 女直(여직)과 맞닿아 있고(接), 또 남쪽으로는 “왜(倭)”와 맞닿아(接) 있어 나라를 방비하는 길이니 그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 이때는 명 태조(太祖) 즉위 때를 말함이니, 고려(高麗)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高麗)의 영토(領土)는, 북쪽으로 글란(契丹)과 여직(女直)과 『접하고(연하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하고(연하고)』...........있다는 기록은 고려(高麗)가 반도(半島)에 존재하고 싶어도 존재(存在)할 수 없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열도(列島)의 왜(倭) 역시 존재할 수 없는 당연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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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명사(明史) 열전. 조선(朝鮮) 편을 보자. :<初, 瓦 剌 密 令 女 直 諸 部 誘 朝 鮮, 使 背 中 國. 祹 拒 之, 白 其 事 於 朝. 帝 嘉 其 忠, 敕 獎 之, 並 賜 彩 幣。: 초에 (와)瓦랄의 密令(밀령)을 받은 여직(女直=女眞)제부는 朝鮮을 꾀어(誘) 중국을 배신하자고 하였으나, 그러나 조선(朝鮮)의 왕이었던 “祹(도)”가 거부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제(帝)는 그 충성심에 기뻐하여 칭찬하고, 함께 채색의 비단을 내렸다.>
○ 와랄(瓦剌)은 동 명사(明史)열전 편을 보면 ; 신강(新疆)성 천산북로(天山北路)지역에 있던 자들이다. 또 당시 여직(女直)은 백두산(白頭山) 동남(東南)지방에서 시원하며, 차츰 이들은 서북진하여 요동(遼東)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남쪽지방은 반도(半島) 땅이며, 조선(朝鮮)이 있었다고 한다.
○ “신강(新疆)지방”과 “반도(半島) 북방의 요동(遼東) 땅과 그 남쪽 조선(朝鮮)”과의 거리(距離)는 얼마나 될까. 『일 만 리(一 萬里)』라고 하여도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 여직(女直)에게 밀령(密令 : 비밀리에 내리는 명령)을 내려 “중국(中國)”을 배신하자고 꾀었다면, 여직(女直)과 조선(朝鮮)의 영토는 신강(新疆) 가까운 곳에서 “와랄(瓦剌)”과 국경을 맞대고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이야기다. 이러한 삼각(三脚) 또는 사각(四脚)구도는 조선(朝鮮)과 여직(女直)을 반도 또는 그 북방에 있었다고 하는 한, 불가능한 사건(事件)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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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명사 열전. 조선 편을 보자. : <行長紿曰:天朝幸按兵不動,我不久當還.以大同江為界,平壤以西盡屬朝鮮耳..........“소서 행장”이 말하기를, 천조(명나라 조정을 칭)의 군대는 움직이지 말기를 바란다. 我(왜를 칭)는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대동강(大同江)을 경계로 할 것이며, 평양(平壤)의 서쪽은 조선(朝鮮)에 속하고............>
○ 대동강(大同江)을 경계(境界)로, ➊『남쪽은 왜(倭)가 점령했으니 왜(倭)가 갖겠다.』는 것이고, ➋『북쪽의 땅은 명(明)나라 천조(황제)의 군대가 진주(進駐)하고 있으니, 명(明)나라가 갖아도 된다.』 또한 ➌『조선(朝鮮)은 평양(平壤)의 서쪽 땅이 있으니 되지 않겠는가.』하는 말이다.
○ 평양(平壤)의 서(西)쪽 지방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설마 평안도(平安道)나 심양(瀋陽)쪽을 가리켜 “서쪽”이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동강(大同江)의 남쪽지대가 있으니, 강 건너는 “북쪽지대”임이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면 그 서쪽지대는 분명하게도 바다(海)일 수밖에 없는 노릇일터!!!!!!!!!!!!!!!!!!!!!!!!!!! 대동강(大同江)물은 서해바다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말이다.
○ 평양(平壤) 서쪽 땅!!!!!!!!!!!!!!! 20세기에 편찬된 고금지명대사전에도 평양서쪽에 “녹주 (淥 州)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음에 비춰보면, 평양(平壤) 서쪽지방은 바다가 아닌 육지(陸地)였다는 것을 증명(證明)한다. 반도 평양(平壤)은 결국 짝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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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明史列傳 暹 羅(섬라)편에 ; <二 十 年,➡日 本 破 朝 鮮, 暹羅請潛師直搗日本,牽其後.中樞石星議從之,兩廣督臣蕭彥持不可,乃已.其後,奉貢不替.崇禎十六年猶入貢.其國,周千里,風俗勁悍,習於水戰.大將用聖鐵裹身,刀矢不能入 : 20년, 일본이 조선을 파했다. 잠사(潛 師:전문적으로 자맥질을 하는 사람)들을 일본에 직접 이끌고 가자고 섬라(태국)에서 청하였다. 중추(中樞) “석성”은 의논하여 따르자 하였으나 양광(兩 廣 : 광동과 광서)의 독신(督 臣)이었던 “소언지”가 반대하여 이에 그만 두었다. >
위의 섬라 편을 보자. 일본이 현 열도에 있었다고 했을 때 섬라(태국)에서 아무리 잠수를 잘하는 자들을 뽑아 보낸다고 해도 현 열도까지는 신(神)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말이다. 당시 이러한 말들이 오고 갈 수 있다는 말은 일본(日本) 즉 왜(倭)의 영토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섬라 즉 태국은 어디인가. 오늘날의 실정에도 가고 싶다하여 내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먼 곳이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朝鮮과 倭를 반도와 열도에 놓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도 없는 기록을 뭐 하러 힘들게, 돈을 없애 가며 이들은 기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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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명사 열전. 유구 편을 보자. : <四十年,日本果以勁兵三千入其國,擄其王,遷其宗器,大掠而去。浙江總兵官楊宗業以聞,乞嚴飭海上兵備,從之>........40년, 일본이 용감한 굳센 경병 3,000이 그 나라에 입구하여 그 나라 왕을 포로로 사로잡고는 (중략). 『절강 총 병관』 “양 종업”이 이러한 사실을 듣고, 해상방비를 엄하게 해야 한다고 청하자 제(帝)는 이에 따랐다. <四十四年,日本有取雞籠山之謀,其地名台灣,密邇福建,尚寧遣使以聞,詔海上警備>...........44년, 일본이 계 롱 산【福건성 민 후 현 서남에 있다】의 모의로 취하여 갖은, 그 땅의 이름이 대만(台 灣)이며, 복건에서 아주 가까워서 상념의 파견사가 듣고, 해상경비를 해야 한다고 고하였다.
○ 현 대만(臺灣=타이완)이 당초 “유구”였다가 이때 “대만(台 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열전 계속 : 유구는 동남대해 가운데 있는데 옛적에는 중국과 통하지 않았다. 원 세조 때 파견사를 보내 초청하려 했으나 그 사신이 도착하지 못했다. 홍무 초에 그 나라에는 세 왕이 있는데 왈, 중산 왕. 산남 왕. 산북 왕이다. (중략). 그 나라의 좌장사 “주복”은 본 강서(江 西성) 요주(饒 州)인으로 40 여년을 게으르지 않게 보신하였으니 금년에 80살입니다. 청하건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따랐다. 성화 5년, 그 공사 “채경”이 말하기를, 조부(할아버지)는 본시 복건의 남안 인입니다. 유구통사였는데, 그 전에 왜구가 절강을 침구하였으나 패하여 돌아갈 적에 유구 지경에 버렸습니다. 세자 “상원”이 병사들을 보내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모두 다 죽였다. 이때 중국인으로 납치 된 여섯 사람을 모두 송환하였다.
이미 다하여 방비책이 없어 습격 그 왕을 죽이고, 인민들을 내몰고, 이곳이 그들의 거점지가 되었다. 인하여 이름이 여송(呂 宋 : 필리핀 루손 섬)이다. 실은 “불랑기(포르투갈 또는 프랑스)”이다. 전에 민인(閩 : 복 건성 민 현)들이 그 지방이 가까워서 장차 풍요로움과 풍성함에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 수만 인이 그곳에 왕래하였는데, 왕왕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살아 손자 대에 이르렀다.
그 땅에는 대나무가 많고, 두발을 벌려 켜 안을 만큼 크며, 높이는 10 장이다. 가옥은 이 대나무 구조로 되어 있고, 지붕은 띠를 역어 만들었으며, 넓고 길어 가족 모두가 이곳에서 산다.
가정 말, 왜구가 민(閩 : 복건 민 현)지방을 어지럽힐 때 대장 “척 계 광”에게 패하여 왜가 숨고 살았는데 “당 림 도건”을 따랐다. “도건”이 두려워하여 왜구와 함께 했는데 또 관군이 추격하자 두려워서 배에 돛을 달아 바람을 타고 발니(浡 泥)로 가 그곳에 변 지대에 살았으며, 이름을 “도건”항이라 하였다.
○ 숭정 8 년, 급사중 “하 개진”이 “정 해(靖 海 之 策)지 책”으로 이르기를, “원 진. 이 충. 양 록. 양 책. 정 지룡. 이 괴기. 종무. 유 향” 등이 계속 서로 난을 일으켜 바다 위가 편안한 날이 없다. (중략). 대만(台 灣)이다. “대만”은 “팽 호 도”밖에 있으며, 장주(漳 州 :복건), 천주(泉 州 : 복건) 모두에서 양일(兩日) 야(夜)정도 떨어져 있으며, 땅은 넓고, 기름지다.
○ 이러한 일련의 기록은 <유구>는 현 대만(台 灣) 땅을 말하는 것이며, 이 台 灣(대만)은 또 다른 이름으로 유구(琉 球)=東 影(동영)=東瀛(동영)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특히 무협지에서 말하는 “동영의 무사”는 열도(列島) 왜(倭)의 무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만(臺灣) “왜(倭)”의 무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현 중국이나 일본, 반도에서는 동영(東瀛)을 현 열도(列島)로 해설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2010년 10월 02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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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천드립니다. 일본(왜)에 대한 상세한 설명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옛 왜는 결코 현 열도에 존재할 수 없는 대륙의 남쪽과 서남아시아의 세력입니다. 이들이 서양 열강들과 합작으로 강해진 국력으로 조선 해체에 일정 부분을 담당하고, 그 댓가로 조선반도를 양도받은 것은 이미 근대사에 다 알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반도의 정부나 관련 단체등에서는 가급적 이러한 내용에 대해 함구하려 합니다. 매국노가 독립군으로, 매국노단체가 독립군단체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역사의 진실이란 항상 표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정의가, 불의로, 불의가 정의로움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백성들의 생각과는 항상 별도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투명해야 하며, 정의로움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배자들이나 권력층들은 백성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꼭꼭 숨겨 놓고 계산을 확실하게 한 다음 꼭 쓸모가 있겠다 싶으면 공표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권력층들의 속성입니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습니다만, 조선사의 내막도 이와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