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 별채 육간 대청 휑하니 넓은 집에
가믄 날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손주 녀석
어렸을 적 애비 모습 그린 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 어미를 탁했는지
곶감 대추 유과 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 주어볼 틈도 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명절이나 큰 일 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어린 것들 앞 세우고 하나 둘씩 모여들면
절간 같던 집안에서 웃음 꽃이 살아나고
하루 이틀 묵었다가 제 집으로 돌아갈 땐
푸성귀에 마른 나물, 간장, 된장, 양념까지
있는 대로 퍼 주어도 더 못 주어 한이로다
손톱 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허리 굽고 늙어지면 효도 보려한 거드냐?
속절없는 내 한평생 영화 보려한 거드냐?
꿈에라도 그런 것은 상상조차 아니 했고,
고목 나무 껍질 같은 두 손 모아 비는 것이
내 신세는 접어두고 자식 걱정 때문일세.
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 채비 늦기 전에 해두려고
때깔 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 든 해 손 없는 날 대청 위에 펼쳐 놓고
도포 원삼 과두 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 늙은이 수의 일습 내 손으로 지었네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 자식은 중늙은이 되어 가고
까탈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제발 덕분 비는 것은 내가 오래 사는 거라
내 살 같은 자식들아 나 죽거든 울지 마라!
인생이란 허무한 것 이렇게 늙는 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
첫댓글 해송님 잘 음미했습니다 마치 제 노모의 일생을 회상하는듯 합니다 좋은글 거듭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