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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듣는가? (비유 1)
마가복음 4:33~34 / 고신일 목사 / 2010-09-05 / 주일 낮 4부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
사람들은 때에 따라 / 상황에 따라 …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다릅니다.
무기력함이 느껴질 때,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는
힘이 되고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듣기 원합니다.
마음에 상처가 남아 있을 때는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하고
외롭고 쓸쓸할 때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한 마디를 듣기 원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일치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싫어합니다.
심지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자기 마음에 들’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오늘은 내 마음에 드는 설교를 하려나?’하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설교는 내 마음에 듣고 싶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를 싫어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 폭정과 각종 세금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지배하는 영토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지역마다 통치하는 왕을 두었습니다.
그런 왕을 가리켜 분봉왕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은 헤롯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는커녕
핍박과 세금 징수에 앞장섰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위로를 받기는커녕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신순철, 『최고 마케터 예수』(서울; 이코북, 2007). p. 24. 참조>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갈망했던 메시지는
로마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시켜준다거나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주는 내용의 설교를,
메시지를 듣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을 보면
그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셨던 메시지는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듣고 싶어했던 설교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유대인들에게
첫 번째로 전하셨던 말씀은
‘회개하라’(마 4:17, 막 1:15)는 메시지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너희는 해방 될 것이다’라는
메시아적 선포가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배국 로마를 배척하고 거부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바램과는 반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마 22:21, 막 12:17, 눅 20:25)
예수님의 가르침은 압제 당하던 상황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열렬히 반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마 4:25, 8:1, 13:2, 14:13, 19:2, 20:29, 막 2:4, 2:13, 3:7, 3:20, 4:1, 5:21, 6:34, 8:1,
10:1, 10:46, 눅 5:1, 5:15, 7:11, 8:4, 8:19, 9:37, 12:1, 14:25, 요 6:5, 12:12)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여자와 어린이를 빼고도 5천 명을 먹여야 하셨을 만큼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랐습니다.
그렇게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탁월한 가르침에 놀라워했습니다.
(마 7:28, 13:54, 22:33, 막 1:22, 6:2, 11:18, 눅 4:32)
사실 무엇인가를 이야기 할 때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하고 / 놀라게 하고 /
알아듣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요즘에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월요일이면 학교마다 조회 시간이 있어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야 했습니다.
조회 시간은 날씨가 좋을 때는 모르지만
한 여름이나 추울 때는 참 지루하고 힘든 시간입니다.
조회 때면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고 / 애국가도 부르고 /
이런 저런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하지만 제일 싫어했던 순서가
<교장 선생님의 훈화>였습니다.
교장선생님들의 훈화는 대체적으로 길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끝으로, 그리하여, 또한, 그러므로,
한 가지만 더 …’라고 하시는데 언제 끝날지 참 지루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발로 운동장 바닥에 글씨를 쓰고,
뒷짐 진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고 … 잘 듣지 않았습니다.
좋은 얘기이고 옳은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지루하고 재미가 없으면 잘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요즘 학생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조회 때 딴청 피우는 학생들에게
연예인 얘기, 컴퓨터 게임 얘기, 드라마 얘기 … 등을 해주면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잘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학생들이 흥미 있게 듣는 그런 연예인 이야기들은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듣기 싫고, 지루해도 교장선생님이 해주시는 말씀 속에
우리들의 삶에 기준이 되는 좋은 말씀이 들어 있음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하는 설교, 내가 준비하는 설교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잘 전할 수 있어야 하는데 …
기억나게 해야 되고 … 생활 속에 실천하게 해야 하는데 …’
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성경을 읽고, 바른 해석을 하기 위하여 깊이 연구하고
설교를 만들어 고치고 … 또 고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준비한 설교가 나중에 재미와 흥미만 남고
예를 들어 했던 우스운 얘기만 기억하고
정말 들어야 되고, 기억해야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신 예수님도
- 좋은 이야기이지만 지루한 이야기 …
- 혹은 재미는 있지만 남는 것은 없는 이야기 …
이 둘의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헬라어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ή)’,
영어로 ‘패러블(parable)’이라고 하는데 …
예수님께서 깊은 영적 진리,
즉 하늘나라의 세계를 설명하려 하실 때
그 당시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알 수 있는 얘기,
재미있는 얘기를 가지고 비유를 들어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랍비’(선생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시에 다른 랍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권세와 능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두란노 HOW 주석 34)』
(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07). pp. 263~264. 참조>
비유 - 이해하기 쉬운 가르침
오늘 본문 말씀의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호숫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였습니다.(막 4:1)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주목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잘 볼 수 있도록 배에 오르신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겨자씨 비유 … 등
다양한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 (막 4:2)
그리고 본문 33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막 4:3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쉬운 성경),
영어 성경‘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의 번역을 따르면
말씀 듣는 자들의 “경험과 성숙함의 수준에 맞추어서”,
(“fitting the stories to their experience and maturity - The Message”)
그들이 이해할 만한 이야기를 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전한 하늘의 복음이
하늘나라의 이상한 말이 아닌
그 당시에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쓰는 말로,
잘 아는 얘기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말씀, 곧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글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명령하시거나, 축복하고 벌을 주실 때에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도
글로 기록된 성경말씀, 곧 언어를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위해 / 죄를 고백하기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도 우리의‘언어’를 사용합니다.
기도할 때 특별히 하늘나라의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찬양할 때도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똑같은 언어를 가지고
사람을 사귀고, 물건을 사고팔고, 편지를 쓰고, 책을 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기도할 때 쓰는 말도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쉽게 예를 들어“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는 말은
점잖고 거룩해 보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쉽게 “오늘 밥 먹을 것 좀 주세요. 엄마 밥줘.’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의미는 깊은 뜻이 있기도 하지만
언어는 하나님께 하는 언어나 사람들에게 하는 언어나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똑같습니다.
지금도 교수로 계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의 훌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교수
‘죠지 레드(George Ladd)’는
“성경은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말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The Bible is the Word of God given in the words of people in history.)
(Gordon D. Fee & Douglas Stuart,
HOW TO READ THE BIBLE FOR ALL ITS WORTH,
Grand Rapids: The Zondervan Corporation, 1982, P. 19.)
죠지 레드 말에 의하면
- 성경은‘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기 때문에
절대적인‘영원한 타당성’(eternal relevance)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타당성(적합성)’이 있는
고칠 것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절대 순종(We must listen and obey)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흘러가는 역사, 지나가는 세월 중에
그 시대에 그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그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바르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역사적인 특수성(historical particularity)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번역할 때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번역을 하다보면 정확하게 번역으로 옮기기 어려워서
그냥 옮겨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르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번 가을에
속회별로 교구담당 교역자들이 심방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심방 가기 전에 성경을 읽고 준비하다가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벧전5:14)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살전5:26)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 보면 ‘입맞춤으로’라는 말이 ‘kiss’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교구담당목사님들이 심방 가서 성경말씀대로 한다고
'kiss, 뽀뽀’를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그들 방식으로 인사하며 문안하라는 말씀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사람을 만나면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 인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성경에는 ‘입맞춤’이라는 표현이
‘얼굴에 침을 뱉고’라는 말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절대로 믿고 순종해야 하지만
흘러가는 역사 속에 사람의 말로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는 긴장(tension)과 갈등(conflict)이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사로이 풀 수 없는 것이며(벧후 1:20)
함부로 더하거나 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갈 3:15)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받아들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 중에 하나가
빛과 소금으로 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 빛이라”, “너희는 … 소금이라.”>입니까?
우리가 그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마 5:13)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홀로 있는 빛으로 존재할 때는 가치가 없습니다.
빛은 세상의 빛으로 비춰야 가치있는 것입니다.
소금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소금이 녹아져 짠 맛을 내어 세상에 영향을 줄 때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함부로 빼거나 더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2천 여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지금/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니 바로 ‘나’에게
‘지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뜻,
목회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
눈으로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책으로, 인터넷으로 …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을 접할 기회가 있다할지라도,
그때마다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요 14:26)
때를 따라 필요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유 - 이해하기 힘든 가르침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본래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우스운 얘기로 치부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비유를 말하는 사람이 목적으로 삼은 이야기 본래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비유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사람이‘이솝(Aesop, ?~?)’입니다.
기원전 6세기 경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작가로
‘아이소포스’(Aisopos) 라고도 불리는 이솝은
우리가 잘 아는‘토끼와 거북이’,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 등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까마귀와 여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까마귀 한마리가 맛있는 치즈를 물고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나무 아래를 지나던 여우는
까마귀가 물고 있는 치즈가 탐이 나서 꾀를 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까마귀님이 앉아 있는 모습은 왕의 자태입니다.
왕의 목소리로 노래 한곡 불러 주시죠.”
여우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까마귀가 노래를 시작하자
물고 있던 치즈는 땅에 떨어졌고 결국 여우의 차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그 까마귀 참 바보 같네.’,‘역시 여우는 똘똘한 동물이라니까.’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우화 속의 까마귀만큼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얘기를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거짓말 같은 지나친 칭찬을 조심해서 들어야겠구나.’
‘언제든 겸손하게 살아야겠구나.’
‘사람들이 지나치게 나를 띄우고 올린다고
속아 넘어가면 안되겠구나’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자기 삶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4장 10절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이 비유에 대하여 질문을 했습니다.
… 함께 한 사람들이 …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막 4:1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처럼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 4:34)
여러분, 교회에서 설교할 때
어려운 단어를 쓰고, 어렵게 신학적으로/학문적으로 말해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으십니까?
멋있는 말로, 어려운 말로,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말로 유창하게 하는 설교에만 은혜를 받으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알아듣는다’는 말은
내가 받아들이고, 내 삶에 실천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하시는데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 4:23)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변화를 일으키고 축복을 가져오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귀가 닫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경은 평범한 한 권의 책이고
오래 전 먼 땅에서 있었던 흘러간 옛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비유 속의 인물 -‘나’의 모습을 보는 거울
본문 말씀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다음 주일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비유 중
한 가지씩을 본문으로 택해 시리즈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삶은 매 순간순간이 힘들고 어렵고 즐겁더라도
그 모든 순간순간들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은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쓴 동화다.”라고 했습니다.
(Every man's life is a fairy tale written by God's fingers.)
아마 여러분의 삶도 어느 부분을 옮겨 드라마로 만들어도
진짜 멋있는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얘깃거리가 많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를 만나 제가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면 재밌는 드라마가 나올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중에 제 이름을 밝히고는 말할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순간순간 동화 같은 사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제가 초등학교 4,5학년 때 학교 갔다 오면
늘 어떤 여자아이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백설애’라는 여자아이입니다.
TV에서 친구 찾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저도 그 친구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 아이는 이름 그대로 백설공주 같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강원도 철원에서 자랐습니다.
언덕위에 올라가면 교회가 있고 그 양옆이 다 과수원이었습니다.
과수원을 하시던 부자 장로님이 과수원 가운데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땅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려면 과수원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 교회에 갈 때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달콤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여름에 먹는 아이스케키와 겨울에 먹는 엿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갈 때마다 장로님네 과수원을 지나다니는 것이
얼마나 참기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제 친구들이 서리를 하자고 하고 과수원에 들어갔습니다.
교회에서 과수원으로 들어가려면 철조망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철조망 아래쪽에 움푹 파인 곳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무엇을 땄는지, 얼마나 먹었는지 기억도 안납니다.
그런데 서리하는 장면을 장로님이 보셨습니다.
장로님이‘이놈들~’하시는데 함께 서리하던 모든 친구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열심히 도망가기 위해 뛰었습니다.
왜냐하면 장로님께서 제 얼굴을 보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 아들이 장로님네 과수원에 서리하러 갔다고 하면 큰일 아닙니까.
그런데 얼마나 급하게 도망 나왔는지
철조망을 통과하다가 걸려 등이 찢어졌습니다.
그때 난 상처가 아직도 제 등에 남아있습니다.
‘설마 장로님이 못 보셨겠지’하면서 집에 있는데
저녁때 그 장로님이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저는 장로님 목소리에 놀라서 숨어 가만히 살펴보니
장로님 손에 바구니가 들려 있었는데 제 어머니께
“사모님, 아직 과일이 채 익지 않았는데 그래도 먹을만 합니다.
좀 따왔습니다. 신일이 많이 주세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순간순간 동화 같은 재미있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에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여러분의 삶의 동화가, 여러분의 삶의 드라마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아름답고 재미있게 써 가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 마음에 드는 글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왜 성경신학원(PBA)을 열고 여러분에게 성경공부 하라고 합니까?
하나님 마음에 드는 작품의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말씀을 통해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신 것을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 지키며 사시기 바랍니다.
화평케 하며 살고, 무례하지 않고, 먼저 용서하며 …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높이 들고 고백했던 것처럼
매 주일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에 (딤후 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시 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 (고후 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마 5:16).
그런 복된 삶의 주인공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는 삶이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거룩한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받을 때에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시며(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마5:16) 주인공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면서 땀흘려 애써 모은 물질을 구별하여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 받으시고
저들의 삶속에 물질 때문에 어려움 겪지 않게 하시고
죄와 타협하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0년 9월 5일 주일낮4부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