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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시조집 |
출판사 |
수록지면 |
윤금초 |
『주몽의 하늘』 |
문학수첩, 2004 |
2013년 여름호 |
이우걸 |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발자국이여』 |
천년의 시작, 2009 |
2013년 가을호 |
유재영 |
『절반의 고요』 |
동학사, 2009 |
2013년 겨울호 |
이승은 |
『환한 적막』 |
동학사, 2007 |
2014년 봄호 |
박기섭 |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
만인사, 2003 |
2014년 여름호 |
이지엽 |
『북으로 가는 길』 |
고요아침, 2006 |
2014년 가을호 |
정수자 |
『허공우물』 |
천년의 시작, 2009 |
2014년 겨울호 |
고정국 |
『서울은 가짜다』 |
리토피아, 2003 |
2015년 봄호 |
박권숙 |
『홀씨들의 먼길』 |
고요아침, 2005 |
2015년 여름호 |
이종문 |
『봄날도 환한 봄날』 |
만인사, 2005 |
2015년 가을호 |
☐ 설문참여 시인 (등단 순)
정용국, 박희정, 유종인, 선안영, 손영희, 이송희, 이승현, 정혜숙, 이원식, 조성문, 김동인, 김남규, 김보람, 임채성, 박성민, 배우식, 변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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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출간 대표시조집 ⑤ 박기섭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억새꽃 자지러지고, 피멍도 꽃밭이 되는
- 박기섭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정용국
1.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에도 이 땅의 사람들은 여전히 지금과 흡사한 말을 구사하며 모든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자는 한자를 빌려다가 표기하였으므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의 말씀대로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맞지 않는다’는 뜻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문자가 창제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말 부림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어서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음보는 그야말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아마 라틴어 계열의 구조원리에 능통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자음과 모음의 원리를 창제에 반영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대부분 유럽어의 모어가 되는 라틴어의 핵심이 바로 자음과 모음의 운용에 있다는 것인데 훈민정음의 구조와 흡사한 합성원리를 공유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지구상의 제 언어들을 분류할 때 가장 상위에 속하는 언어는 자모를 가진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어는 언어학적 분류에서 ‘고립어’에 속한다. 그런데 한국어가 한자를 수용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중국어에 가깝다는 혹자들의 주장은 한국어의 원리를 모르고 하는 어불성설이고 주변어와의 상관관계는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한국과 유럽의 지정학적 위치나 교류와 소통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구조학적으로 영어와 가장 흡사한 자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자음과 모음의 숫자나, 양성 또는 음성모음끼리 어울리는 중모음의 부림 등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참으로 신비롭다. 언어가 자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장 적은 기호로 가장 많은 문자를 조립하여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와 한국어가 단 이십 여개의 자모음으로 인간이 구강으로 내는 무한대의 소리를 기호화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언어의 매력인가. 이렇듯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성을 갖춘 언어를 700년 가까이 운용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어를 창제한 동기와 목적은 물론이요, 창제자와 시기, 창제 원리와 운용례까지 세밀하고도 자상하게 기록된 세계 유일의 문자를 누리는 눈물겨운 호사에 재삼 감사해야 한다.
이러한 한국어의 제반 특징들이 유구한 세월을 이어지며 지금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구사하는 음보가 바로 시조의 율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설을 늘어놓은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특히 박기섭의 시조를 읽다 보면 우리 입말의 감칠맛이 스며들어 숨이 꼴깍 넘어갈 지경과 만날 때가 있다. 그가 삼십 년 넘게 가꿔 낸 시조 밭은 한국어의 여러 가지 특징과 효율은 물론이려니와 작은 토씨 하나에 숨어있는 섬세한 감정들의 흔들림과 차이들에 대해서도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박기섭 시의 형식이라면 아래 글은 그의 시 정신의 요체이다.
시인은 ‘칼’과 ‘물’과 ‘붓’을 늘 손닿는 곳에 두고 사는 사람이다. ‘칼’은 시의 대사회적 기능을 말한다. 이른바 시대정신과 저항의지다. 칼은 언제나 자아와 세계의 모순을 겨냥한다. 냉철한 비판의식만이 혼연히 그 자루를 잡을 수 있다. ‘물’은 화해와 사랑의 표상이다. 칼날에 묻은 피를 혀끝으로 씻고, 만나면 스스럼없이 몸을 섞는 물. 그런 흐름의 순리로 자아와 세계의 상처를 아우르며, 시 형식 자체의 자연스런 운동을 꾀한다. ‘붓’은 창조와 자유의지를 대변한다. 곧바로 섰을 때 붓은 붓으로서 온전히 구실하는 것. 굽힐 줄 모르는 직립의 꿈은 창조의 열망이자 자유의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칼’과 ‘물’이 길항하는 가운데 화해의 ‘물’이 쉬임없이 흐르는 --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시의 표정이다
-「시인의 산문」중에서 -
2.
한 시인이 갈구하는 작품의 맥을 짚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박기섭의 시조는 쉽게 독자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에둘러 말하기 일쑤이고 일부러 변죽을 두드려 놓고 공명통의 가운데를 찾아보라며 짐짓 뒷짐을 지고 먼 곳을 쳐다본다.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운율만 따라가며 흥에 겨워하다간 시인의 속내를 따라잡지 못하기 십상이다. 고민 끝에 그의 전편을 쑤석이다가 『묵언집』에서 두 편을 골라와 장작불을 마련할 관솔 불쏘시개로 쓰기로 작정하였다. 「묵언집」과 「연가」인데 「묵언집」은 네 수로 펼쳐지는 유장한 사설시조 안에 그는 작심이라도 하듯 자신의 고백을 펼쳐 놓았다. 한 줄로 숨이 차게 이어 쓴 「연가」 또한 그의 복심으로 읽힌다. 그는 자신의 많은 작품에 ‘그대’ 또는 ‘너’라는 시어를 숨겨두었는데 그것을 ‘연인’으로 보거나 아니면 ‘시조’로 보아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처음엔 너를 부를 이름을 몰라 이름을 몰라 너 있는 곳 가차이 설레이던 바람 그 바람에 하염없이 일렁이던 물무늬
말로는 못하고 차마 벙글어 맺히기만 하는, 마침내는 목련이 목련 나름의 생각으로 가지 끝에 연신 꽃을 물어 올리듯
유백색(乳白色) 향기로 은은한 꽃을 물어 올리듯
2
때로 너는 지고한 산정의 적설처럼 앉아 그 아슬한 기슭에 자빠지고 곤두박히며 온몸으로 피 흘려도 나는 오르지 못하고
가도가도 아득한 봄날, 더는 어쩌지 못하게 간절한 마음 일 때 그제서야 너는 내게로 온다 내게로 와 물이 된다
그 오랜 결빙을 풀고는 내게로 와 물이 된다
3
참말이다 너를 생각하는 날은 내 눈썹에 푸른 대밭이 일어선다 네 사랑의 굵은 장대비를 맞으며 푸른 대밭이 일어선다
그 대밭 그 몸서리칠 장대비 다 그친 뒤 어느새 내 늑골엔 피리 구멍 하나 뚫려 낱낱의 그 실핏줄이 죄다 풀려 나가듯
네 앞에 환한 목숨이 죄다 풀려 나가듯
4
눈부셔 눈 못 뜨도록 참 가당찮은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이지만 타는 불방망이로 네 울음의 종신(鐘身)을 때리느니 종신을 때리느니
이제 그 울음의 못물 가득 가슴에 실어 더러는 연잎 띄워 그 연잎에 눈을 씻고 가다간 서늘한 물그늘 연밥 앉혀 살 삭이며
아아 저 광대무변에 번지는 내 사랑은 수묵(水墨)
-「묵언집(默言集)」전문
나의 뇌수에 박힌 느닷없는 탄환 한 발 놀랍게도 그것에는 너의 피가 묻어 있다. 천리를 휘달려 온 그 피의, 그 가공할 살의!
-「연가」전문
지극한 사랑이다. 두 편이 다 사랑하는 이에게 흠뻑 빠져 있어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이글대며 상대를 갈구하는 연모가 가득 담겨 있다. 네 수의 사설은 점층법의 구조를 가지고 자못 자신의 신열에 들뜬 박수무당의 주문처럼 타는 목마름과 애틋함으로 ‘광대무변에 번지는 수묵’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한다. 마치 강점기의 시인 이상화가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라고 애타게 읊조렸던 「나의 침실로」가 겹쳐질 만도 하다. 그러나 박기섭의 사랑은 그렇게 감성적이지만은 않다. 네 수 마지막 종장에 이르러서야 ‘내 사랑은’이라는 절박한 한 마디가 등장할 뿐 철저하게 깊은 사유의 저변이 도도하고 유장하게 흐른다. 너는 ‘말로는 못하고’ ‘가지 끝에 연신 꽃을 물어 올리듯’ 꽃을 피우고, 너는 ‘지고한 산정의 적설처럼 앉아’ ‘더는 어쩌지 못하게 간절한 마음일 때’ ‘내게로 와 물이 된다’, 너는 ‘그 대밭 그 몸서리칠 장대비 다 그친 뒤 어느새 내 늑골엔 피리 구멍 하나 뚫려 낱낱의 그 실핏줄이 죄다 풀려 나가듯’ 하고, 너는 ‘네 울음의 종신을 때리’다가 ‘그 울음의 못물 가득 가슴에’ 삭이게 하는 시인의 사랑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렇게 깊고 도저한 사랑의 말씀조차 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黙言) 절대자의 모습이다.
지독(舐犢)한 사랑이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그 무량한 사랑이다. ‘천리를 휘달려 온 그 피의’ 출발지는 ‘나의 뇌수’에서 나가 되돌아 온 사랑의 근원이어서 종당에는 감싸 안을 수밖에 없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결국 박기섭의 문학이요, 절절하게 모시는 그의 시조로 환치(換置)해도 무방하겠다. 결국 「묵언집」과 「연가」 이 두 작품은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를 잉태한 커다란 박기섭의 유산이고 산맥이다. 이제 그 거대한 산맥이 이어져 또 하나의 혈을 이룬 작품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3.
1
그대 꽃집에 와 꽃을 고르실 때면
나는 그저 벙그는 열망에 불붙는 그러면서 활짝 피지는 않고 힘주어 막 피어나려는 순간에 멎은,
그대 눈 침침할 때면 그제사 폭싹 재가 되는,
2
그대 내 생각의 저 안켠 대숲그늘 서늘한 한 채 절간이라면
내 그리움은 글쎄 그 절간 들목 어디 억새꽃 자지러진 산자락쯤 되랴
그것도 단청이 낡은 채 기웃대던 하늘가에
3
내가 끝내 한 개 그릇으로, 그릇이래도 이 빠진 질그릇으로나 와 앉기까지
가을은 또 몇 번씩의 천식을 앓으며 저 샐비어 꽃밭에 불이나 지피다 가고
더러는 투정조로 울며 투정조로 달라붙고,
-「꽃과 질그릇」전문
그 굳건한 금석의 맹서에 금이라도 간 것일까. 그만큼 앓고 속을 끓였으면 되었을 법도한데 시인은 다시 근본을 되묻고 ‘그대’의 안위에 걱정이 태산이다. 수식어만 가득하고 서술어가 빠진 첫 수는 노심초사의 한 가운데 서있다. ‘그대 꽃집에 와 꽃을 고르실 때면’ 목련으로든 샐비어로든 피어나든지 한 아름 선물로 올려야 할 일인데 주인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활짝 피지도 않고’ 멎어 있는 꽃집은 처연하기만 하다. 더구나 종장의 ‘폭싹 재가 되는’ 심연의 한 자락은 앙탈이라도 과하지 않은가. 그대를 위해 나를 다 소진하고 그 앞에 재가 되겠다는 다짐은 얼마나 더 깊어진 사랑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시인은 ‘그대’를 고즈넉하고 높은 대상으로 두고 자신은 한없이 낮고 보잘 것 없는 객체로 낮추고 있다. 그대를 ‘대숲그늘 서늘한 한 채 절간’으로 모셔두고 ‘내 그리움은’ 그저 ‘억새꽃 자지러진 산자락쯤’으로 놓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고 격조 높은 한 폭 수묵의 명장면으로 비견된다. ‘내가 끝내 한 개 그릇으로, 그릇이래도 이 빠진 질그릇으로나 와 앉기까지’ 라고 겸손의 겸손을 더하며 무릎을 꿇는다. 그러는 사이 ‘그대’의 사랑 깊어져도 내가 받아들이고 헤아리는 사랑의 깜냥은 늘 그 자리에서 맴을 돌 뿐 스스로 보고 느끼기에도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끝내 ‘더러는 투정조로 울며 투정조로 달라붙고,’라 투덜거리며 모자라는 내 애증의 일면을 슬쩍 털어놓고 만다. 이제 시집의 표제작이며 박기섭 시정신의 정수리로 보이는 한 작품을 더 돌아보기로 한다.
사람 사는 세상, 살 비린 이 푸줏간에
저마다 몇 근씩의 생육을 찢어 놓고
느긋이 피를 말리는, 오오 눈부신 참형의 시간
그래, 그런 날은 갓 맑은 저 하늘에
성긴 모시올 같은 밑줄이나 긋고 살지
뒤척여 몸서리치는 피멍서껀 삭이면서
이 가을 내 공양은 식은 차 한 잔뿐
해묵은 뉘 안부를 마른 나무에나 묻고
사무쳐 옹근 마음도 이냥 헐고 말겠네
이제 이 지상의 노래는 식어 숯이 되고
끓는 불잉걸로도 어쩌지 못할 오한만이
온 산천 시퍼런 적막을 대지르고 있으니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전문
‘사람 사는 세상’이 살벌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런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인의 대처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칼을 벼려서 썩은 세상을 도려내고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부분은 잘라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저 하늘에/ 성긴 모시올 같은 밑줄이나’ 그어서 ‘참형의 시간’을 어찌 이겨내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몸서리치는 피멍’을 삭이려면 많은 인고의 시간들이 필요할 것이다. 앞 두 수가 현실상황이라면 뒤의 두 수는 초월인식으로 대응하며 각기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시의 튼튼한 골격을 이룬다.
피비린내 나는 세상을 그냥 밑줄이나 긋고 살자는 생각은 대단한 용기이며 배짱이다. 시인은 서두르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대승적인 자세로 현실에 대응한다. ‘사무쳐 옹근 마음도 이냥 헐고’ ‘끓는 불잉걸로도 어쩌지 못할 오한’도 초극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발산하고 있다. 재와 숯은 엄연하게 다르다. 재가 다 타고 남은 것이라면 숯은 더 잘 타게 하기 위해서 잠시 산화를 멈추고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버텨내기 힘들고 ‘어쩌지 못할 오한’이 산더미처럼 밀려와도 숯이 된 ‘지상의 노래는’ 오래도록 시인과 시를 견디게 해줄 것이리라 믿는다.
4.
이제는 박기섭 시조가 보여주는 운율의 감칠맛에 대해 시집을 통해 접근해 보기로 한다. 대구(對句)와 반복의 조화로움이 주조가 되고 때로는 구어체와 사투리까지도 그의 시조에서는 유난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피거나 말거나 흥, 아무도 눈 주지 않네
개복사꽃 이운 자리 서너너덧 개복숭아
달기는 고 망할 것이 달기는 또, 고로코롬
-「개복숭아」전문
짧은 단수를 예로 들었지만 이 단수 속에는 많은 말들이 흥미롭게 전개되고 어울리는 운율을 지키고 있다. ‘흥’이라는 콧방귀가 들어있는 초장 첫 구절은 (피거나/ 말거나 흥,)이 아니라 (피거나 말거나/ 흥,)으로 읽어야 좋고 제격이다. 감탄사 한 글자가 가져다주는 말의 묘미란 참으로 대단하다는 느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개복사꽃-개복숭아)도 자연스런 반복으로 훌륭한 대구를 이끌어 내고 있다. (달기는-달기는 또,)로 확장된 반복도 큰 효과로 분위기를 돋구고 있다. 그리고 시집 전체에 몇 차례 눈에 띄는 ‘고로코롬’ 투의 사투리도 시의 운율에 공헌하는 바가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고 망할 것이’ 숨기고 있다가 내비치는 맛은 또 어떤가. ‘그’ 보다 훨씬 정감이 가고 구체성을 띠며 예쁜 ‘고’도 비장의 무기로 활약하고 있다.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대구는 자칫 식상하고 지루한 법이어서 동일어 반복을 의식적으로 피해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하여 박기섭의 그것은 대단한 장단을 구사하고 흥겹게 오밀조밀 앞장서서 운율을 이끌고 있는 모습들은 장관이라 하겠다.
저 넓으나 넓은 들에 모는 누가 내노 왜가리가 내지 뒤뚱뒤뚱 왜가리가 내지
저 깊으나 깊은 못에 연은 누가 따노 물총새가 따지 포롱포롱 물총새가 따지 (「연밥」부분)
입동에 강을 건너는 한 가인이 있었네
맨발로 강을 건너는 한 가인이 있었네
서둘러 강을 건너는 한 가인이 있었네 (「歌人」부분)
하나씩의 울음이 삭아 꽃밭 된 것 보는가
울음도 큰 울음의 꽃밭 된 것 보는가
울음이 울음을 달래 꽃밭 된 거 보는가 (「울음의 꽃밭」부분)
黃梅山/ 가다가 본다/ 개오동나무 개오동꽃을
개오동나무 개오동꽃을/ 황매산/ 가다가 본다 (「개오동꽃」부분)
글쎄, 바람기라면 참 기막힌 바람기랄까
우리나라 오월쯤의 못 견딜 그 햇볕 속에
서늘한 버들빛 같은, 그런 기찬 바람기랄까 (「잦은 난봉가」부분)
보아라, 경주나 남산 그 햇살의 여울터 (「4월 햇볕」부분)
위에 소개한 시구들 안에 있는 반복, 사투리, 구어체 등의 표현법은 일일이 그 효과와 맛을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음식의 ‘갖은양념’의 역할을 하며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기막힌 묘미를 배가해 주고 있다. 이는 시인의 타고난 재주라기보다는 늘 사전을 뒤지고 수없이 탁마하며 얻어낸 오랜 시간과 공력의 덕분이라고 해야겠다. 「4월 햇볕」의 ‘경주나 남산’에는 소유격 조사 대신 나열형 조사 ‘나’를 대신 놓음으로서 신통하게도 경쾌하면서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음보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러한 여러 장치와 시도는 정형률을 지키는 가운데 자유미를 추구하는 시인의 끝없는 갈구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리라.
5.
시인의 말에서 그는 지천명을 맞아 청도 각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뜰에 내리는 흰 이슬과 가을 구절초 아홉 마디에 스미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지만 ‘세속도시에 끼친 인업의 무게를 내려 놓는다’는 말이 무겁게 와 닿는다. 그러고 보니 시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별의 안위에도 상당한 관심과 우려를 금치 못하는 시인의 마음이 눈물겹다.
강은 세속도시의 종말처리장을 휘감아 돌고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로 가는 먼 길이
길게 휜, 수로를 따라
다급하게 풀린다
용케 추슬러 낸 몇 소절 노래도 삭아
더는 흐르지 못할 끈적한 욕망의 진창
또 어떤 격렬함으로 강은 저리 부푸는가
잡풀들의 아랫도리가 툭, 툭 부러지면서
익명의 새떼들만 취수탑 근처를 날고
마침내 뻘물 아래 아득히
혓바닥을 묻는 강
-「그리운 강」전문
비닐 빵을 굽고, 진흙 튀김을 하고,
질척한 수챗구멍 속 개숫물을 따끈히 끓여
천연히 차로 마시는, 오오 눈부신 신생의 봄
-「新生」부분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목 중 하나가 자연 파괴일 것이다. 오로지 효율과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한 인간의 욕심이 극대화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종말처리장’ ‘뻘물’ 등의 시어로 볼 때 강은 하구에서 바다로 스며드는 모양새로 보인다.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라니 아마 간척사업을 위해 마을이 통째로 이주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시인이 ‘용케 추슬러 낸 몇 소절 노래’도 ‘욕망의 진창’을 만나 거덜 나게 되었다. 시제가 ‘그리운 강’으로 되어 있으니 아름답고 좋은 풍광들은 이제 다 사라졌다는 말과 같다. 「신생」의 분위기는 더욱 나쁘다. ‘비닐 빵’ ‘진흙 튀김’ ‘개숫물을 따끈히 끓’인 차는 이미 자연이 완전히 파괴되고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듯한 이미지가 확연하다. 이를 역설적이게도 ‘신생’이라 표현한 뜻에는 강력한 반대 의사가 담겨 있다. 인간은 이렇게 지구가 학살당하여 회복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새도 살 수 없을 경우엔 결국 사람도 지구상에서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오오 눈부신 신생의 봄’이란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자는 신음이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들린다.
6.
박기섭 시인의 시집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를 통하여 시인의 올곧은 정신의 준령들과 만날 수 있었다. 산문에 깃든 시의 본령과 시인의 자세는 우리가 다시 겸손하게 받아들어야 할 덕목이라 하겠다. 늘 시조의 넓이보다 깊이에 천착하고, 정형률 앞에 인간률을 강조하는 그의 눈높이를 곰곰 되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끊임없는 열정을 통하여 혼을 다한 운율들이 보여준 맛깔 나는 시조의 율격은 두고두고 새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 ‘억새꽃 자지러지고, 피멍도 꽃밭이 되는’ 아름다운 격과 혼을 보여준 시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정용국
경기 양주 생. 2001년 계간 『시조세계』로 등단. 이호우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집 『명왕성은 있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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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출간 대표시조집 ⑤ 박기섭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知天命, 그 강의 차안과 피안
-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박진임
2003년에 발간된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는 박기섭 시인의 통과의례의 기록으로 읽힌다. 삶의 한 강물을 건너 지천명의 시간대로 건너가는 변화를 보여주는 시편들이 눈에 띈다. 그래서 계절 중에서는 가을의 이미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연꽃의 개화, 차 한 잔, 나락 익는 황금 들판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여름이라는 시간대에 적절히 어울릴 듯한 강렬함과 열정 대신에 익고, 식고, 수그러들고, 기울고, 비어가는 것들의 상징이 주도적이다. 이 시집을 50대를 시작하는 자신에게 헌정하는 선물이요 자신을 향한 각오로 읽는 것은 단지 서문의 시인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시인의 말에서 박기섭 시인은 이렇게 쓴다.
뿔의 북쪽(角北) 솔안마을(松內)로 거처를 옮기면서 세속도시에 끼친 인업의 무게를 내려 놓는다.
지천명의 뜰에 내리는 흰 이슬과 가을 구절초 아홉 마디에 스미는 바람소리라니!
저 艾年의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살고 싶다.
삶의 여러 구비를 돌아 이제는 하늘의 뜻을 읽으라는 나이로 알려져 온 知天命. 삶의 새 장에 한 획을 긋듯 시인은 번잡한 사람들의 동네로부터 벗어나 이슬과 바람소리와 더불어 살며 하늘의 뜻을 살피고자 하는 바람을 표하고 있다. 하늘에 밑줄을 그으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새기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 “세속도시를 떠나… 삶의 무게를 내려 놓고”자 함으로 오독했다. 재독하니 “세속도시에 끼친 인업의 무게를 내려 놓는다”는 언표이다. 삶을 정결히 가누어 그 삶으로 종교적 숭고미에 이르고 또한 언어를 세밀하게 빚어 그것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고자 하는 구도자적인 예술가가 지니는 겸손한 언술에 새삼스레 놀란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정물화의 일부처럼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에 이르러 자유로움을 얻고자 하는 시인의 태도는 ‘눈 내리는’ 사소한 일에서도 인연을 찾는다.
하고많은 처마 밑에 하필이면 내 눈썹에
까닭이사 모르지만 먼 절집 쇠종 가에
밤 깊어 나 홀로 마시는 분청 귀얄 찻잔 곁에
-「눈」전문
눈 내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 구별함이 없이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골고루 내릴 따름이다. 하지만 시인은 수많은 집의 수많은 처마 중에서도 유독 자신의 집에 내린 눈송이를 각별히 받아들이며 인연을 찾고 있다. 마찬가지로 먼 절집 쇠종가에 내려 앉은 눈송이 또한 까닭이 있어 그만의 각별한 인연을 찾아 거기 내렸으리라 본다. “밤 깊어 나 홀로 마시는 찻잔”에 내려 와 앉은 눈이라면 그것은 득도의 순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시인의 또 다른 시편, 「달의 門下」에는 “장삼 한 벌”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장삼 한 벌”은 이승에서의 지난한 구도의 과정을 다 끝내고 그 다음 세상으로 건너간 존재가 이승에 남겨두는 허물의 상징으로 읽힌다. 밤 깊어 홀로 차를 마시다 눈송이의 방문을 받는 것 또한 초월이나 승화의 강한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남성성과 역동성의 충만한 이미지로 가장 이질적이고 원심력 강한 이미지의 파편들을 강제로 결합시키며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은 이전의 박기섭 시인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 이를테면 그는 은유라는 이름의 괭이 한 자루로 상상력의 신대륙을 열어가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은 「압력밥솥」같이 평범하고 흔한 시적소재에서도 한껏 발휘되었다. 압력밥솥에 열이 가해지면 밥솥의 뚜껑 손잡이가 덜컹거리며 김을 뿜어내는 것을 두고 시인은 “그렇게 완강한 힘으로 덜컹거리는 추억”이라고 노래했다. 추억이라는 낭만적 주제를 노래하기 위해서 박기섭 시인이 취한 제재란 가장 낭만적이지 못한 소재중의 하나인 압력밥솥이다. 그래서 추억은 닳고 닳은 상투적 형용사, ‘아련한’이나 ‘희미한’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고도 용감하게 “덜컹거리는”과 결합된다. 의미항의 공유성이 없는 독립적인 언어들은 의미의 원심력으로 인하여 서로에게서 분리되고 멀어지게 마련이다. 시인이 은유라는 장치를 통하여 그 독립적인 언어들에 인위적인 구심력을 부여할 때 그 언어들은 결속되어 시어로 다시 태어난다. 끌어 들인 언어들 사이의 원심력이 강할수록 시인의 창의성이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이 시집에서도 그러한 특징은 어김없이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전쟁터, 주식 시장의 모습에서 꽃 피는 봄의 심상을 찾아내 보여준, 「봄/객장」은 독자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든다. 가장 이질적이고, 그리하여 서로 강력한 원심력의 자장을 형성하며 대결하는 요소들을 억지로 결합시킨 시의 재미가 드러난다.
봄의 주식시장은 아연 활황이다
때아닌 갈겨니떼 전광판에 엉겨붙어
난만한 산란의 꿈이 객장 가득 떠돈다
꽃샘 잎샘서껀 시황을 흔들어도
제몫의 배당만큼 햇살은 또 금을 사고
꽃들은 시세 차익을 더 못 남겨 안달이다
가파른 상승 국면에 신명마저 겨웁더니
질척한 늪물이던가 더러 발도 빠지고
갈수록 극성을 부리는 초록의 저 장외거래!
-「봄/객장」전문
겨울동안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며 칩거하던 짐승들이 기어 나오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드는 재료였다. 뉘는 온갖 꽃이 만개한 이런 봄의 정경을 두고 “봄 끓는 향기 끓는 난장진 꽃밭”이라고 노래했고, 어떤 시인은 봄은 전쟁터라 노래했다. 어제까지 잠잠하다가 불시에 망울 터뜨리는 꽃들을 두고 ”꽃밭의 모반“이라고도 하고 “쿠데타”라고 했다. ”진달래 사태진 골에“하고 노래하여 산사태에 빗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봄의 정경을 두고 ”활황의 주식시장“이라니…. ‘이익’과 ‘잉여’를 찾아 객장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형상화함에 있어서, 알을 까서 종족을 증식시키려는 물고기 떼에 비유하여 ”난만한 산란의 꿈“이라고 노래한다. ‘금빛 햇살’은 ”배당“으로 해석되고 서로 시샘하듯 앞 다퉈 피는 꽃들을 ”시세 차익을 더 못 남겨 안달“하는 투자자들에 해당하는 심상으로 읽는다. 이윽고 객장은 파할 때가 되기 마련이다. 봄철이 끝나가면 어쩔 수 없이 초록이 꽃 진 자리에 쳐들어 올 터인데 이를 “극성을 부리는 초록의 저 장외거래!”라고 노래했다. 그의 서정시는 꽃이나 물이나 바람이나 흙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에서만 심상의 질료를 찾지 않는다. 아주 비서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질료들을 취하여 자연이나 인간 심성의 한 장면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시편들은 독자를 소스라쳐 놀라게 만든다.
그러나 강렬하고 원시적인 삶의 동력들을 그리던 이전 시편들과 대비해 볼 때 이 시집에서는 ‘관조’ 즉, ‘들여다 봄‘의 이미지가 눈에 띈다. 자신을 객체화, 대상화하여 자신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그런 마음의 움직임이 지천명에 더욱 분명해진다면, 「개오동꽃」은 바로 그 점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꽃의 모습을 되비치는 연못이나 강을 통해 드러나는 물의 이미지를 눈여겨보자.
黃梅山
가다가 본다
개오동나무 개오동꽃을
개오동나무 개오동꽃을
黃梅山
가다가 본다
그
서녘
반짝이는 물,
그 물 속의
개오동꽃
-「개오동꽃」전문
위 시편에 동원된 소재는 단지 네 가지에 불과하다. 황매산, 개오동나무, 그 나무의 꽃, 물…, 혹은 ‘가고 보는’ 주체로서의 시적 자아를 포함한다면 다섯 가지이다. 매우 단순한 시이다. 시적 화자가 황매산을 가다가 오동나무, 그것도 개오동나무의 개오동꽃을 본다. 그 개오동꽃은 서편의 물 속에도 비쳐있다. 시적 화자는 실제 나무에 핀 꽃과 물에 비친 꽃을 둘 다 보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거울상, 즉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하여 주체를 다시 발견하는 것은 주체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고 정신분석학자 라깡은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서 처음 발견하는 12개월 이전의 아기에게 그 발견이 자아라는 존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시인은 개오동꽃을 보고 다시 물 속의 개오동꽃을 본다. 세속의 번뇌로부터 스스로 물러나며 ‘끼친 업’을 두려워하는 조심스러움과 겸허함으로 시인은 자연의 한 작은 존재를 관찰하고 재현하고 있다. 지천명에 이른다는 것은 이렇게 사물을 보고 인지함에 있어서 그 그늘, 그 비침(reflection), 그 숨겨진 것까지 본다는 것 아닐까? 차안에 한 발을 두고 물을 건너 뛰어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박기섭 시인의 시편에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들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물’의 이미지는 몽상적이고 유동적이다. 바슐라르는 불의 물질성은 ‘불과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설명하면서 물에 관한 연구에 대해서는 ‘물과 꿈’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스스로 해명한 바와 같이 물은 꿈이고 명상이고 변화하는 것이고 유동적이다. ‘물과 연구’가 아니라 ‘물과 꿈’이어야하는 것이다.
물의 상징은 박기섭 시인에게 있어 안정, 관조, 명상, 성찰, 지혜 등의 등가물로 사용된다. 서정춘 시인의 시집, 『죽편』을 읽고 쓴 일종의 헌시에서 시인이 보내는 찬사는 ‘저녁 여울목에 노는 은어떼’로 집약된다. ‘은어’라는 시어가 환시시키는 주는 생동감과 광채가 물이 지닌 정결함과 재생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여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서정춘의 시를 읽다 댓잎 같은 은어떼 본다
아무래도 이승은 아닌 훗승쯤의 어느 여울목
그것도 다 저녁답에 맨발로나 건너야 할,
시간 속에 환히 박힌 가시도 가지지만
아무래도 가을볕 아닌 중년의 허기꺼정도
우리네 시골 촌수로 먼 아재비뻘쯤 되는,
-「竹篇을 읽고」전문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은 같은 강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바슐라르는 이 언술을 두고 이렇게 부연한다. “인간 존재는 그 깊이에 있어 흐르는 물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물은 참으로 변하기 쉬운 존재이다. 그것은 순간마다 죽으며 그의 실체의 무엇인가는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다.” 물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동시에 물에 비친 대상에게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순간순간 나르시스로 하여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물은 거울의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금속성의 거울이 갖는 감금이나 구속의 요소를 갖지 않는다. 고요히 멈추거나 잠긴 물은 관조와 사색을 가능하게 하고 다시 움직여 흐르는 물은 변화와 생성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다시 말한다. “샘의 수정 속에서는 하나의 몸짓이 이미지를 어지럽게 하고, 하나의 휴식이 이미지를 회복시킨다.”
박기섭 시인이 구사하는 물의 이미지는 바슐라르가 그리는 유럽의 강물이나 샘보다 한층 더 복합적인 요소들이 응집된 물이다. 그의 물은 여울목의 물이다. 우리의 여울은 강보다는 작고 정겨우며 샘보다는 열린 이미지이다. 그것도 이승의 여울이 아니라 훗승쯤에 있을 여울이라 하여 그의 물의 이미지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 또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여울인지도 모르겠다. 저승이 아닌 훗승이라 하여 그가 그리는 내세는 필연적으로 이승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마련된 공간이라는 말로도 들린다. 제시한 ‘훗승’이라는 공간적 이미지에 걸맞게 “다 저녁답”이라는 시간성이 또한 겹쳐져 나타나있다. 이승에서의 살이를 대충 다한 시간, 풀어두었던 노역의 도구들을 거두어들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가는 외로운 존재의 그림자가 길게 보이는 듯하다.
정희성 시인이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 그리는 물과 인간의 이미지가 더욱 세련되게 여기서 구사되고 있다. 저문 강에 삽을 씻는 시적 화자가 이 생에서의 노동과 자본주의 사회체제 속에서의 노동의 소외와 그 감회를 그리고 있음에 반해 박기섭 시인이 그리는 물의 이미지는 한층 깊은 철학적 의미의 결을 지닌다. “맨발로나 건너야 할”이라지 않는가? 허물과 가식을 다 벗어던지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구도자의 모습, 소박한 모습으로 자기 삶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다 저녁답에 맨발로 여울목을 건너는’ 모습이다.
다시 시집의 제목이 된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시편을 살펴보자. 4연을 아울러 전개되는 이항대립의 양상들은 그의 삶과 문학의 지향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가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 푸줏간, 생육, 참형, 피멍, 불잉걸, 옹근 마음이 아니라 그것들에 맞서는 하늘, 모시올, 삭임, 공양, 차 한잔, 숯, 오한 등이다. 정글의 법칙 속에 내몰려 아비규환을 벌이는 생존의 공간을 버리거나 벗어나 삭이고 묻고 헐고 말 것을 다짐하는, 올바르게 나이 드는 길을 시인은 제시하고 있다. “이 가을 내 공양은 식은 차 한잔뿐”이라는 구절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를 다시 읽으며 글을 맺는다. 옷깃을 다듬고 허리를 펴며 읽게 된다.
사람 사는 세상, 살 비린 이 푸줏간에
저마다 몇 근씩의 생육을 찢어 놓고
느긋이 피를 말리는, 오오 눈부신 참형의 시간
그래, 그런 날은 갓 맑은 저 하늘에
성긴 모시올 같은 밑줄이나 긋고 살지
뒤척여 몸서리치는 피멍서껀 삭이면서
이 가을 내 공양은 식은 차 한잔뿐
해묵은 뉘 안부를 마른 나무에나 묻고
사무쳐 옹근 마음도 이냥 헐고 말겠네
이제 이 지상의 노래는 식어 숯이 되고
끓는 불잉걸로도 어쩌지 못할 오한만이
온 산천 시퍼런 적막을 대지르고 있으니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전문
박진임
2004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 Narratives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New York: Peter Lang,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