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츄피츄는 1911년 7월 24일 미국의 대학 교수인 하이렘 빙엄에 의헤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 지게됐다.이 서양 학자에 의해 발견 되기 전까지는 수풀에 묻힌채 그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마츄피츄를 "잃어버린도시"또는 "공중 도시" 라고 불리는데 공중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산과 절벽,밀림에 가려 밑에서는 전혀 볼수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수 있어서이다. 마츄피츄는 총 면적이 5Km2로 도시 절반 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 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마츄피츄(2,280m)는 옛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3,360m)에서 산악 열차를 타고 안데스 산맥의 협곡을 따라 3시간 거리에 있다.
또한 마츄피츄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산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 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 보아도 그 존재를 알수없고 접근조차 어렵다. 마츄피츄에는 약 1만여명이 거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산정과 가파른 경사면에 들어서있어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길이 닿지않은 유일한 잉카의 위대한 유산이다.
정확한 건설 연대는 알수없으나 대략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태양신전과 생계유지를 위한 산비탈의 계단식 밭, 훼손됐을 법한 지붕없는 집, 농사를 짓는데 이용한 태양시계, 콘돌 모양의 바위, 그리고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거대한 피라미드로 구성되어있다.
이 마츄피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준 높은 건축기술이라 할수있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기술이 대단히 정교하며 다듬어진 돌의 각변의 길이가 몇m나 되고 모양도 제 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종이 한장도 들어갈 틈이없이 단단하고 치밀하게 붙였으며 젖은 모래를 표면 처리에 이용함으로써 표면을 매끄럽게 했으며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하여 게단식 밭을 만들고 여기에 배수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게 했으며 모든 이용 시설에 필요한 자재로 돌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이중 하나로 불리는 불후의 유적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있다.
1911년 빙엄이 왕궁과 기타 부속건물을 복원한 뒤로 1956년 부터 대규모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졌으며1974년에 일반적인 복원이 마무리 됨으로써 마츄피츄는 세계에 공개 되었으며 아메리카 최고의 관광 유산으로 손꼽히는 고대 유적지가 되었다.
잉카인들은 통용의 글자와 쇠, 화약,바퀴를 몰랐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강한 군대를 유지했다. 제국은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두갈래 길(잉카로드)를 2만 km나 만들어 광대한 영토를 통제했다.황제의 명령은 국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까지 고루미처 새 한마리도 황제의 명령없이는 날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잉카인들의 돌다루는 기술은 신기(神技)에 가까웠으며 그들이 만들고 세운 돌은 20t이나 나가는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돌을 바위산에서 잘라내어 수십km 떨어진 산위로 날라다 신전과 집을 지었으며 면도날도 들어갈 틈이 없이 석조건축물 구성에 필요한 재주는 남다른데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사용한 가장큰 돌은 크기가 무려 8.53m 높이에361톤이 나가는 엄청난 큰돌을 마치 가벼운 물건 다루듯한데서 현대 건축가들도 혀를 내두른다. 평야가 적었지만 산비탈을 계단처럼 깍아 옥수수를 경작함으로써 그들은 넉넉히 먹고 살았으며 철의 대용품으로 구리를 단단하게 제련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방법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렇듯 강성했던 잉카제국은 겨우 100년여 만에 스페인 군대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고 그들의 패망과 저항에 얽힌 수많은 사연을 집약해주는 최대의 유적이 바로 안데스 산맥 밀림속 해발 2280m에 자리잡고 있는 바위산 꼭대기 공중도시 마츄피츄이다."우리는 비탈에 납작 붙어서 아래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땅에 손가락을 찔어 꽃은뒤 미끄러 지지 않도록 한뒤 미끄러운 풀을 헤치면서 몸을 위쪽으로 끌어 올렸다.아득한 낭떠러지 저 아래에서는 우리가 밧줄을 잡고 건너온 우루밤바강의 성난 급류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누군가의 희생을 가용하고 잇었다. 안내인은 이 근처에서 사냥감을 뒤에서 공격하는 페루드란스 독사가 많다고 귀띔을 해주었는데 밑에는 천길 낭떠러지며 뒤에는 맹독의 독사가 달려든다는 절규처럼 안내인의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이 내용은 미국 예일 대학에서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던 서른 다섯살난 하이램 빙엄이 마츄피츄를 발견한 1911년 7월 24일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탐험대는 빙엄과 그의 대학 동료 두사람, 통역과 안내를 맡은 페루 하사관 1명, 거기에 노새 몇마리.. 그들은 잉카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빌카밤바를 찾으려고 들끊는 모기, 지독한 더위,그리고 위험한 급류를 무릅쓰고 우루밤바 강을따라 페허들을 모조리 조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의 일행이 빌카밤바 계곡에서 야영을 할때 한 인디언이 나타나 그들의 바로앞에 깍아 지른듯이 솟아있는 바위산 정상에 거대한 페허가 있다고 알려 주었으며 빙엄의 일행은 그 산을 오르는 과정에 죽음보다 더 두려움을 느낄만큼 소름끼치는 협곡을 기어올라 마지막 돌로된 관문을 지날때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여행기록]
우리나라에서 마츄피츄를 가기 위해서는 아주 큰 결단이 필요하다. 돈과 시간, 무엇보다 건강이 전제되어야 한다. 서울에서 LA까지, 또 LA에서 페루의 수도 리마(Lima)까지, 리마에서 국내선으로 페루 제2의 도시 쿠스코(Cusco)까지 가야한다. 꼬박 이틀 넘게 걸린다.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수도로, 마츄피츄보다 해발고도가 높은 3400m다. 처음 도착하면 고산병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고 컨디션 조절이 힘드니 하루 동안 적응하는 것이 좋다.
쿠스코에서 기차로 마츄피츄역까지 가는 데 4시간이 걸린다. 물론 지겹지 않다. 오히려 들뜬다. 평생의 소원인 마츄피츄 관광을 위해 전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열차 안은 시끌벅적. 창밖 풍경은 장관이다. 험준한 산과 깎아지른 절벽이 양 옆을 에워싸고, 만년설도 수시로 보인다. 아마존강을 향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와 그 협곡을 따라 트레킹하는 사람들까지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마츄피츄역에 도착하면 ‘마츄피츄 타운’을 만난다. 이곳에서 또 버스를 탄다. 꾸불꾸불한 산길을 15분쯤 올라가면 드디어 마츄피츄 입구에 도착. 여기서부터는 도보다. 계단이 많으니 자신이 없다면 입구에 있는 지팡이를 가져가면 좋다. 마추픽추는 원주민어로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마츄피츄 입구에서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우와!” 외친다.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산에 압도당한다. 아래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낭떠러지다. 산 밑에서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공중도시’라고 하고, 이 때문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츄피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할 만하다. [주간조선발췌]
[라틴 아메리카와 잉카제국의 역사]
Latin America
카리브 해의 섬들을 포함해 로망스어(라틴어에서 분파된 언어)를 사용하는 남·북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일반적으로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를 의미하지만 아이티, 프랑스령 기아나,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같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포함하기도 한다.
남북의 총길이는 1만 2,500㎞에 이르고, 총면적은 2,057만 ㎢로 전세계 지표면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33개의 독립국과 일부 식민지들이 자리잡고 있다. 독립국가들 가운데 20개국은 대륙에 있고, 나머지 13개국은 카리브 해에 있는 도서국들이다. 대륙에 있는 국가들은 1810~20년대에, 그리고 카리브 해의 도서국들은 대부분 1960~80년대에 독립을 이룩했다.
발견 이전의 원주민시대
아메리카 최초의 원주민은 5만~3만 년 전 빙하시대에 베링 해협을 통해 이주한 아시아인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중앙아메리카 지역 최초의 원주민은 BC 2만 4000~2만 1000년에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유입된 아시아인으로 추정된다. 그후 BC 7000~5000년에는 유목민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BC 3500년경 옥수수 산지를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BC 1000년경 베라크루스를 중심으로 석재조각에서 뛰어난 올멕족이 지배영역을 오악사카·치아파스·과테말라 등 중앙아메리카 지역으로 확대했다. 그뒤를 테오티우아칸족이 계승했으나 AD 650~700년경에 몰락했다. 그 여파로 9세기경에는 인접해 있던 마야족도 쇠망하기 시작했다. 이어 13세기 후반에는 나우아족이 힘을 떨치고 아스텍 제국을 건설했으나 이웃해 있는 신마야 제국과 함께 스페인 원정대에 정복당했다.
남아메리카 지역 최초의 원주민은 BC 1만 7000년경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이주한 주민들로 보고 있다. BC 1000년경에는 차빈족(Chabins)이 리마 등 인접지역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그들의 문화는 아마존 강 유역 주민들과 중앙아메리카 지역 올멕족의 문화와도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그뒤를 트루히요를 중심으로 예술적 사실주의 감각이 뛰어난 모치카족이 계승했다.
그리고 AD 6세기 무렵에는 티아우아나코족이 페루 남부를, 우아리족이 페루 북부지역을 장악했다. 그후 1370년경 치무족이 왕국을 건설했으나 잉카족에게 멸망당했다. 잉카 제국 역사의 제1대 망코 카팍에서 제13대 아타우알파에 이르는 기간을 건설기(1~2대), 군주기(3~8대), 그리고 제국을 건설한 역사기(9~13대)로 나눈다. 잉카 제국의 국명은 타우안티수요이고, 잉카를 이루는 주민은 쿠스코 중심의 케추아족, 코야오 중심의 라 코야족 및 연안지대의 라 융가족으로 구성되었다.
잉카 제국은 1524년 제11대 왕 우아이나 카팍의 이복아들들간의 갈등으로 일어난 내란중에 스페인에 정복되었다. 한편 콜롬비아 지역에는 시에라네바다데산타마르타 북쪽에 타이로나 집단이, 그리고 쿤디나마르카·보야가 및 산탄데르 남쪽에 무이스카 집단이 정착해 칩차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외에도 언어가 다른 약 2,000여 개의 부족집단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아스텍 제국의 기본 정치조직은 칼푸이(Calpulli)였다. 아스텍과 마야족은 천문학·수학·예술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마야족은 정복 이전에 가장 뛰어난 문명을 누리던 부족으로 평가되는데 특히 그들의 역법(曆法)은 매우 정확하다. 잉카족은 행정조직인 아이유(Ayllu)를 중심으로 엄격한 도덕률에 따른 생활을 했다. 그들은 특히 계단식 영농 원주민 시대의 기본적 곡물은 다양했으나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옥수수·콩 및 음료수 열매를 애용하고, 남아메리카 지역에서는 감자·타피오카를 더욱 선호했다. 또한 안데스 지역에서는 알파카·야마·야생동물 등이 주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5세기 유럽인들은 동방의 산물, 특히 향료의 무역로를 트고자 새로운 항로를 찾았다. 일찍이 독립왕국을 이룩한 포르투갈은 대서양과 아프리카 쪽으로 진출했다. 포르투갈이 이미 대서양 남부의 아프리카 항로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대서양 서쪽으로 가는 새로운 인도 항로를 찾고자 했다. 그는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서 신항로의 개척을 제의했다가 거절당한 후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는 1492년 8월 3일 3척의 범선에 선원 120명과 함께 팔로스 항을 출항해 10월 12일 바하마의 루카야스에 도달함으로써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후 그는 아이티를 거쳐 1493년 1월 4일 39명의 선원을 히스파니올라에 잔류시킨 후 바르셀로나로 귀항했다.
콜럼버스의 제2차 항해는 17척의 범선에 1,200명을 태우고 1493년 9월에 출발해 11월 3일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제3차 항해에서 그는 1498년 5월 6척의 선박으로 출항해 8월 오리노코 강 하구에 도달해 남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콜럼버스는 1502년 마지막 제4차 항해에서 4척의 선박으로 카디스 항을 출항해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했으나, 신임 총독의 입항 거부로 중앙아메리카와 파나마 지협 지대를 발견한 후 1504년 11월 스페인에 귀국해 1506년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했다. 콜럼버스의 항해가 진행되고 있던 1494년 신항로 개척에 앞장선 포르투갈·스페인 양국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해 이후 새로 발견되는 영토의 소유권을 확정했다. 조약에서는 카보베르데 제도로부터 서쪽 약 1,800㎞까지 포르투갈 소유로 정했는데, 이 규정에 따라 훗날 브라질이 포르투갈 영토가 되었다.
신대륙의 탐험과 정복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 1502년에 부임한 총독 오반도는 재임 6년 동안에 히스파니올라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정복대는 1508년 푸에르토리코, 1511년 쿠바, 1512년 플로리다, 1528년 텍사스·캘리포니아, 그리고 1539~42년에는 미시시피 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그사이 1513년 발보아는 파나마 지협에서 태평양을 발견했으며, 1519년 다빌라는 파나마 시를 건설해 태평양 연안지대 정복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어 1519~21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600명의 병사로 멕시코에서 아스텍 제국을 무너뜨렸다.
멕시코를 장악한 코르테스는 원정대를 파견해 남쪽에서는 1528년 과테말라·온두라스 등 중앙아메리카 지역을, 북쪽에서는 캘리포니아를 정복했다. 니카라과는 1524년 파나마에서 파견한 원정대에 정복당했다. 그 후 1542년 캘리포니아 지역은 북위 40°까지 정복되었다. 16세기말 그 지역에서 은광이 개발됨으로써 스페인은 오늘날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오리건·아칸소 주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베네수엘라 지역은 1528~46년 독일인들이 정복했고, 콜롬비아 지역은 1525~32년 연안지대에 진출한 정복대들에 항복했다(1538).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잉카 제국을 정복한 사람은 1531년 피사로와 알마그로였다. 칠레에서는 알마그로의 원정(1536) 뒤, 1541년 발디비아가 아라우칸인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칠레에 진출한 정복대는 1551~61년 아르헨티나의 서북부지역을 정복했다. 한편 페루에 진출한 정복대가 리우데라플라타 지역에서 1536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건설하고, 일부 원정대는 파라과이 지역으로 나아갔다. 또한 페루에 진출한 또다른 원정대는 1534~38년 키토를 정복하고, 1540~41년 아마존 강, 그리고 1560~61년 오리노코 강을 탐사했다. 브라질 지역은 1500년 카브랄이 발견한 뒤 곧바로 핀손이 아마존 강 하구에서 가이아나에 이르는 지역을 탐험했다. 1530년에는 소사 원정대가 들어와 1531년 바이아 시(市)를 건설했는데, 1549년에 식민지 수도가 되었다. 그후 1555~67년에 프랑스인들이 리우에 정착을 시도하고, 또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된 1580~1640년 네덜란드인들도 브라질에 정착을 시도하다 축출당했다.
식민지 시대
이베리아 반도의 세력 중 포르투갈은 일찍부터 인접한 아프리카나 다른 국가와의 교역을 통제하며 해양국가로 성장했다. 반면에 늦게 통일을 이룩한 스페인은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면서 민족주의와 종교적 열정으로 유대인과 무어인을 추방했다. 약 300년 동안에 걸친 이들 유럽 세력의 라틴아메리카 식민통치는 주민의 생활·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초기의 정복과 약탈이 끝난 뒤 토지를 수탈해 농장을 세우고 수많은 도시와 교회를 설립해 원주민들을 개종시켰다.
스페인의 식민정책
스페인의 식민지 행정체제는 본국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그대로 적용해 1492~1550년에 완비되었다. 16세기 중엽에 형태를 갖춘 정치조직은 18세기말까지 거의 원래의 유형을 유지했다. 스페인 왕실은 1524년에 인디아스 자문위원회(Consejo de Indias)를 설치했다. 이는 18세기말까지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를 관할하는 입법·사법 및 행정의 최고기구였다. 위원의 구성은 귀족·고위성직자·법률가로 이루어졌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는 4개의 부왕령과 여러 개의 총독령이 있었는데 부왕과 총독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같았으나 사법권이 미치는 영토의 범위와 영향력에는 차이가 있었다. 총독은 이론상 부왕의 하위직이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으로 사법권을 행사했다. 부왕과 총독은 식민지에서 무한한 위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로서 본국의 귀족·총신·대부호 등이 임용되었다. 반면에 그들에게는 식민지에서의 결혼·사업금지 등 제약사항도 많았다. 식민지의 사법행정기구로는 아우디엔시아가 있었는데 이는 입법부 역할도 수행해 후일 부왕과 총독의 권한 행사에서 장애 요소가 되기도 했다.
지방행정의 장(시장 또는 읍장)은 지역 시의회에서 왕실의 이익을 대변했다. 시의회의 위원과 판무관 자리는 왕실에 의해 임명되면서 점차 매관매직되고 결국 대지주·광산주·상인등이 독점해 토지의 분배, 원주민 노동력 할당 등을 통해 부의 축적수단으로 악용되었다. 이에 따라 시의회는 초기의 자율권을 상실했다. 카를로스 5세 이후에는 그밖의 하위직도 매직되었다. 농촌의 대농장주들은 봉건영주와 같은 권한을 행사해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이러한 식민사회의 전통적 제도와 모순점은 독립 이후 신생독립국들의 정치사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복 초기부터 스페인의 원주민정책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간에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공물을 바치는 원주민을 유지하려는 왕실과 값싼 노동력을 요구하는 정복자들 간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교회건물과 수도원 등의 건축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한 교회측도 왕실의 원주민 보호정책을 지지했다. 결국 엥코미엔다 제도와 원주민 노동력의 분배제도는 원주민을 말살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1510년 최초로 히스파니올라 섬의 도미니쿠스 수도회 선교사들이 원주민의 노동력 착취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에 스페인 당국이 부르고스 법으로 맞섰다. 도미니쿠스파 선교사인 라스 카사스는 교황의 아메리카 양도는 원주민의 개종을 위한 것이지 착취권의 부여가 아니라고 하면서 원주민의 해방과 엥코미엔다의 폐지를 주장했다. 이러한 반발로 스페인 당국은 1542년 새로운 법을 제정했고, 이로써 엥코미엔다 제도는 서서히 줄고 왕실의 관할지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16세기말 원주민의 급격한 감소로 흑인노예의 수입이 증가해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스페인은 1503년 세비야에 무역관을 설치해 선단 체제로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제했다. 식민지와의 교역은 18세기까지 사실상 세비야·카디스의 상인들이 장악했다. 식민지의 주요무역항은 베라크루스·카 르타헤나·포르토비에호 등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와 저렴한 제품의 공급부족이 심화되기 시작해 식민지에서 상품가격이 오르고 조세와 관세가 인상되는 사태를 낳았다. 이 시기에 북부 유럽의 선진 산업국들은 스페인의 독점체제에 반발해 밀무역과 해적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영국의 J. 호킨스는 1566년 베라크루스에서 노예무역선을 격침시키고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보물을 탈취하는 등 식민 도시의 약탈이나 세계 일주 등으로 영국의 위력과 항해술을 과시했다. 해적활동과 밀무역은 특히 카리브 해와 그 연안지대에서 이루어져 네덜란드는 1634년 쿠라사오를 점령해 밀무역기지로 활용했고, 프랑스는 아이티를(1605), 영국은 자메이카를(1655) 각각 점유했다.
식민지에서 왕실이 가톨릭 교회를 통제하기는 대체로 쉬웠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직자의 임명, 원주민의 개종 등 모든 권리를 스페인 당국에 위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교사업에는 때때로 무력을 썼으며 복음전파는 교파간 또는 성직자간의 갈등으로 이따금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교회의 수와 재산의 증대로 불평등이 발생하고 축적된 부는 토지매입과 고리대금으로 전용되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예수회는 일부 국가의 포교구에서 원주민을 통제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활동은 부르봉 왕조의 민족주의적 교회정책과 마찰을 빚어 결국 예수회는 1767년에 축출되었다. 한편 1569년 멕시코와 페루에 설치한 종교재판소는 식민지에서 스페인의 정치·경제·종교 사상을 고수했고, 효과적으로 원주민을 통제했다.
포르투갈의 식민정책
포르투갈은 일찍이 아프리카·아시아의 식민지 개발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브라질에서의 식민사업은 비교적 늦게 시작했다. 1530년 소사 원정대는 바이아에서 본격적으로 식민사업에 착수했다. 1533년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위도상 15°씩 분할해 12명의 개인에게 양도했으며 1549년 최초로 총독을 임명했다.
16세기 중엽, 동북부의 제당산업은 염료채취경제에서 대체된 것으로 초기에는 원주민의 노동력에 의존했으나 1550년 이후부터는 흑인노예로 바뀌었다. 식민 초기부터 염료나무·제당·담배 등의 생산은 브라질에 외세를 불러들였다. 프랑스인들은 1555년부터 리우에서 정착하고자 했으나 1567년에 축출당했다. 특히 1630~54년 네덜란드인들은 해안지역의 사탕수수 경작지를 점유했으나 브라질의 저항 및 영국과의 전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16세기말 국제시장에서의 제당가격 하락으로 브라질의 제당산업은 붕괴했다.
그후 1690년 남서부지역에서 금이 발견됨으로써 자본과 노동력이 이동한데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까지 남부로 이동해 동북부 지역의 경제는 더욱 쇠퇴했다. 특히 1709년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금·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서부 국경지역과 고이아스에서 새로운 정착사업이 시작되자 1763년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겼다.
1580~164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될 때 브라질의 교역은 포르투갈 상인과 선박으로 제한되었다. 그러자 네덜란드인들은 밀무역을 단행해 동북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직접거래를 시도했다. 포르투갈은 왕정복고 후 브라질에 물자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함으로써 영국과의 교역을 허용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자유무역을 선포함으로써 사실상 영국의 독점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604년 포르투갈은 인디아스 자문위원회를 설치하여 브라질을 관리·감독했지만 식민영토가 방대한데다 식민행정은 관료주의·부패·태만 등으로 비효율적이었고,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 지방정부는 대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759년 포르투갈의 폼발 총리는 예수회를 축출하고 원주민의 약탈·노예화를 금지하는 등의 개혁을 시도했다. 식민 기간에 식민지의 고위관리나 고위성직자, 부유한 전문직 종사자, 유럽 태생 상인들이 수출입을 독점했을 뿐 아니라 농장주들의 사업에도 투자했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마찰은 때때로 브라질에서 무력투쟁을 일으켰다.
부르봉 왕조의 개혁과 스페인령 아메리카
1702~13년 왕위계승전이 있은 후 스페인에 등장한 부르봉 왕조는 개혁정책을 폈다. 부르봉 왕조는 먼저 스페인의 공업과 농업의 회복을 위해 개혁을 시도했으나, 1788년 12월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 혁명으로 개혁은 중단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놀란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을 체포하면서 혁명적·합리적인 내용의 프랑스 문학작품까지도 수입을 금했다. 또한 식민지행정을 더욱 중앙집권화하면서 식민지와의 독점교역을 강화했다. 카리브 해에서의 밀무역 차단은 1739년 영국과의 전쟁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과 베네수엘라 총독령을 설치했다.
1765년 스페인은 서인도 무역을 강화하기 위해 세비야와 카디스 외에 7개 항을 더 개방했다. 그후 1778년 자유무역법으로 스페인의 모든 항구를 개방하고 멕시코와 베네수엘라를 제외한 전식민지와의 교역을 허용했다. 그러나 1789년 멕시코와 베네수엘라도 결국 개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은 무역의 증대, 가격 안정, 밀무역의 감소 등과 같은 긍정적인 결과도 가져왔으나, 기득권을 잃게된 카디스 상인 과두집단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스페인의 산업화를 약화시키면서 외국의 무역업자들을 식민지에 집결시킨 결과를 낳았다. 스페인의 개혁정책은 식민지의 경제활동을 자극했다.
유럽에서의 수요 증대로 설탕·커피·담배·가죽제품 등의 생산이 늘어났지만, 광업은 자본 부족과 운영의 미숙에다 채광방법의 개선의 실패로 18세기말 값싼 외국제품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져 빛을 잃었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포도주·직물, 에콰도르의 직물산업도 차츰 활력을 잃었고, 특히 멕시코의 도자기 산업은 1793~1802년 급속히 쇠퇴했다.
식민지 행정도 변화를 일으켜 1776년에는 리우데플라타 부왕령이 신설되고, 178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아우디엔시아가 설치되었다. 리우데플라타 부왕령은 볼리비아의 은을 장악해 그곳 상인들의 지위를 격상시켰으며 이어 1777년 베네수엘라, 1778년 칠레가 총독령으로 승격되었다. 1782~90년에는 부왕의 과중한 업무를 축소하고, 원주민을 억압하는 시장과 읍장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관리장(Intendente) 체제를 신설했으며, 경제활동과 조세징수를 강화했다.
그러나 1780~81년 식민지의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스페인은 일찍이 1762년 영국의 아바나와 마닐라 침공으로 일어난 7년전쟁(1756~63) 때문에 요새를 건설하고 식민지군을 창설해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많은 크리올(중앙아메리카·남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유럽인)들이 왕실군과 식민지군에 입대해 상위직급으로 오르자, 그들은 서서히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면서 본국의 식민정책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독립
독립투쟁은 전략이나 전술적 측면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는 지리적 장애뿐 아니라 여러 지역의 경제·사회·문화적 차이와 고립에도 원인이 있었다. 특히 강력한 대중적 지지기반이 부족했다. 인종간의 갈등, 지역과 계층 간의 통합성 결여로 인해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을 성취하는 데 오랜 시일이 걸렸다. 독립투쟁은 멕시코, 북부의 베네수엘라, 남부의 아르헨티나, 그리고 브라질 등 4개국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멕시코의 독립투쟁은 1810년 공업·광산 중심지 돌로레스에서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신부가 주도하고 크리올들이 이에 가담하면서 시작되었다. 1810년 9월 16일 이달고 이 코스티야 신부는 노예제도의 폐지와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토지분배를 선포하며 거주민들의 종교적 열정에 호소함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달고 이 코스티야는 1년도 안 되어 체포·처형당했다. 모렐로스 신부도 남부 멕시코에서 독립을 포고했으나 역시 1815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후 독립투쟁은 게릴라전으로 전개되었다.
1820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게릴라 지도자 비센테 게레로와 제휴했다. 그는 독립 군주국의 설치, 가톨릭 우위 인정, 크리올과 스페인인 사이의 동등한 처우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게릴라와 연합군을 결성해 왕실군을 격파하고 1821년 9월 28일 멕시코 시에 입성해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9개월 후에 소집된 의회에서 아우구스토 1세로 황제에 즉위해 과테말라 총독령까지 합병했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제국이 1823년에 붕괴되었다. 이투르비데는 유럽에 망명했으며 1824년 귀국 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투르비데 체제가 무너지자 과테말라 총독령은 멕시코에서 분리되어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결성했으나 1837~38년 해체되어 여러 나라가 독립했다.
남아메리카 북부에서의 독립투쟁은 시몬 볼리바르가 주도했다. 1810년 4월 카라카스에서는 총독을 추방하고 크리올인들이 지배하는 평의회를 구성했다. 그 이듬해 평의회는 독립을 승인했고, 이어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가 귀국해 애국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1812년 지진의 발생으로 사태가 악화되어 다시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볼리바르는 그뒤 다시 카라카스를 점령하여 해방자가 되었으나 1814년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스페인에서 왕정이 복고되고 지원군이 파병되자 콜롬비아를 거쳐 1815년 자메이카로 망명했다. 볼리바르는 1819~21년에 다시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를 해방시켜 그란 콜롬비아를 결성했으며, 이어 페루·볼리비아를 해방시켰다.
아르헨티나는 1806~07년에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 1810년 프랑스군이 세비야와 카디스를 공격하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회는 부왕을 폐위하고 통치평의회를 구성했다. 1813년 플라타 연방이라는 국명으로 개혁조치를 단행하고, 1816년 투쿠만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한편 1814년까지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연방구성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우여곡절 끝에 1828년 독립했다. 스페인 왕실군 출신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에 돌아와 1817년 1월 칠레의 애국군 출신 오이긴스와 함께 안데스 산맥을 넘어 차카부코 전투와 마이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칠레의 독립을 이룩했다.
그후 산 마르틴은 1820년 8월 7척의 전함과 17척의 수송선단을 거느리고 페루로 진격해 다음해 6월 리마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페루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1822년 7월 과야킬에서 볼리바르와 회담을 갖고, 리마를 떠나 아르헨티나를 거쳐 유럽으로 망명했다. 그후 볼리바르는 1824년 12월 아야쿠초 전투에서 승리해 남아메리카 지역의 스페인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브라질의 독립은 전투없이 무혈로 이루어졌다. 1808년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포르투갈 왕실은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왔다. 1814년 나폴레옹의 실각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왕은 귀국하지 않았다. 1820년 포르투갈에서 자유주의혁명이 발생한 후, 포르투갈 의회가 왕실의 귀환을 요구하자 주앙 왕은 왕자 페드루를 브라질에 남긴 채 귀국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의회가 다시 왕자의 귀국을 종용하자 왕자 페드루는 1822년 9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후 반동과 무정부 시기(1825~50)
1825년 이후 25년 동안 신생공화국들은 정치적 혼란으로 사회적·경제적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다. 전래의 속박이나 전통사회의 구조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독립은 도처에서 잠재적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흑인노예는 계속 존재했고, 예속적인 원주민들은 고립된 생활을 원했다. 혼혈인들은 박해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특권층의 구성원들은 무정부상태에서도 과거의 가치관과 전통을 지키고자 힘썼다. 독립초 도시의 반교권주의적 지식인층이 주류를 이룬 자유주의자들은 연방정부를 선호해 민주적 개혁을 요구했다. 이에 반 해 보수주의자들은 가톨릭 사상의 유지에 여전히 집착했고 중앙집권화 경향을 띠었다.
폭력을 통해 이룬 독립은 독립 후에 더 많은 폭력을 낳았다. 군부는 정치에 개입하여 대의민주적 정통성을 무시했다. 결국 폭력은 카우디요(군사지도자)들에게 활동의 무대를 제공해 모든 국가에서 사회질서를 파괴했다. 특히 그들은 정당이나 사상에 얽매이지 않아 정강정책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카우디요들은 독립전쟁에 참여한 일로 고위직에 올라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갔다.
1850년 이전의 카우디요들은 경제적으로 대토지 소유주가 많아 헌법은 그들의 소유의식을 반영했다. 아르헨티나의 로사스, 1835년 이후 브라질의 10년 내전, 멕시코의 산타아나, 중앙아메리카 연방에서 무정부상태의 시기를 거친 후 토지를 소유한 과두정치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민간인을 통제하고, 대통령은 중앙집권적 통제권을 행사했다. 또 교회는 정치권력과 동반관계를 유지했다. 문맹의 여부가 선거권 부여의 기준이 되어 인구의 10% 정도만이 선거에 참여했다. 1825~50년 여러 신생공화국의 경제적 위기는 주로 토지소유 문제에 있었다. 그것은 식민시대의 대토지가 독립 후 정치적 실력자들에게 대량으로 양도되었고 세금은 토지를 제외한 재산에만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상속제·부채노예·인권문제 등에 대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했다.
과두정 체제와 경제적 성장기(1850~1914)
1850년 이후부터 여러 신생공화국은 정치적으로 질서가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실패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지도자들은 영국과 미국의 입헌주의 원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발전은 1850~1914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광업은 수출지향적으로 개발되고 농업도 발전하여 19세기말에 이르러 중앙아메리카·남아메리카 국가들은 온대농산물 수출국, 열대농산물 수출국, 광산물 수출국으로 크게 구분되었다. 남아메리카의 남부국가에서는 철조망의 도입과 육종소의 소개 그리고 냉동기술의 발달로 목축이 발달했고, 일부 국가에서는 커피·바나나 등이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수출에서 벌어들이는 자금은 기계·설비 및 소비제품의 수입에 충당해야 했다.
또한 해외시장을 겨냥한 농산물경작은 이 지역 국가가 유럽과 미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외국의 금융기관들이 대규모의 상업농에 투자했으며 광산의 근대화도 외국인들의 투자로 이루어졌으므로 결국 통상과 공공기업의 확대는 외국자본과 외국기술자들 손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외국투자가들은 안정된 국가를 선호했기 때문에 주로 외자는 브라질에서 페드루 2세의 집권 때에, 아르헨티나에서는 농지소유주가 집권할 때, 칠레에서는 농지주·광산주 및 사업가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리고 멕시코에서는 피리오 디아스가 집권하던 안정기에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영국은 남아메리카 국가에서 농업·공업·광업·철도건설 자본의 공급원이었다. 미국의 민간자본은 카리브 해와 중앙아메리카 국가의 농업에, 그리고 멕시코에서는 광산·철도·석유 분야에 투입되어 결국 미국은 1914년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다. 1914년 이전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총투자액은 85억 달러로 아르헨티나·브라질·멕시코에 집중되어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 해외자본과 기술이 이전됨으로써 경제가 팽창하자 유럽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했다. 1823년 브라질의 인구는 470만 명으로 남아메리카 전체의 50%를 차지했으며, 1852년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120만 명이었다. 1850년 이후 경제발전 과정에서 이러한 희소인구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유럽에서 농산물의 수요가 증대되고 모든 면에서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일부 국가는 헌법을 수정해 이민을 수용하기로했다. 아르헨티나는 1857~1900년에 120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였으며, 1913년에만 30만 명 이상이 입국했다. 결국 1914년까지 아르헨티나에 460만 명이 이민했다. 그중 상당수는 다시 떠났지만 이러한 유럽인의 이주가 아르헨티나를 백인국으로 만들었다. 1924년 팜파 지역에서 인구는 625%가 증가했고, 1865~1914년에 국가의 농산물 생산량은 60배로 늘어났다.
1850~1914년에 철도건설을 통해 광산과 농업지대가 항구와 연결되었다. 1914년에 아르헨티나의 3만 9,000㎞를 포함해 멕시코·브라질·칠레·페루 등지에 총 8만 4,000㎞의 철도가 건설되었다. 내륙의 강에서는 증기선이 운항되고, 항만시설도 많이 개선되었다. 1880년대에 최초로 전화가 설치되었다. 1850년대에는 이미 상하수도 설비가 완비되었다. 또 1850년대에는 고래기름이 가스로, 1890년대에는 가스가 전기로 대체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1910년 이전부터 지하철이 운행되었다. 그결과 아르헨티나는 세계 최대의 곡물생산국, 브라질은 커피 왕국, 칠레는 초석수출국으로 변모했고, 1911년 멕시코는 세계 최대산유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자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는 빠른 속도로 도시화 단계에 들어섰다. 1895~191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구는 3배, 1890~1910년 상파울루의 인구는 거의 6배나 증가했다. 도시의 성장으로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문제가 발생했으며 또한 이와 함께 중산층과 도시산업 근로자계층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 국가에 있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따른 경제적 변화와 도시의 성장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르헨티나·칠레·멕시코 등지에서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집단이 기존의 정치질서에 불만을 갖고 도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도시노동자집단이 동조해 유럽의 무정부주의와 조합주의 영향으로 정치세력화되면서 새로운 정치사상이 출현했다. 단기간에 걸친 급격한 이민의 진출은 정치적 민족주의와 전문화된 군부라는 부산물을 낳았다. 정치가들은 성장하는 인구를 위해 새로운 공간과 국토확장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며 그결과 국경분쟁과 군비경쟁이 강화되어 군부가 전문화되었고 지역 카우디요도 사라졌다. 1850~1914년 가톨릭 교회의 지위도 점차 불안정해져 멕시코·베네수엘라·칠레·엘살바도르 등지에서 반교회법이 공포되고, 일부 국가에서는 정교(政敎) 분리로 국가가 교회를 엄격히 통제했다.
이밖에도 1914년 이전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브라질은 1888년 노예제 폐지에 이어 곧바로 군주국에서 공화제로 변했다. 남아메리카의 여러 남부국가에서는 심각한 도시노동자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국경문제 등은 중재나 전쟁으로 해결되었다. 그 사이 1898년에는 쿠바, 그리고 1903년에는 파나마가 독립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독립국은 20개국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미국은 카리브 해와 중앙아메리카 지역 사태에 무력으로 개입해 경찰국가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다. 1914년의 경우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수입의 32%, 수출의 36%를 차지하는 교역상대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라틴아메리카의 8개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쿠바와 브라질은 군사원조를 단행했다. 그러나 선전포고한 8개국 중 브라질을 제외한 7개국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1919~39)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20개 공화국들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일부 국가는 안정되었으나 또다른 국가들은 혁명과 불황, 외채의 누적 및 사회적 통합의 결여 등으로 정치적·사회적 혼란에 빠졌다. 1920년대에 아르헨티나·칠레·코스타리카·우루과이·멕시코 등은 지역의 선두주자로 발전하고 브라질은 1930년대에 이들의 대열에 진입했다. 라틴아메리카 인구의 2/3를 차지하던 이들 6개국은 지역 총생산도 2/3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발전된 여러 국가는 정치·경제뿐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이념적 통합을 시도했다. 도시노동자와 중산층은 점차 그들의 요구에 목소리를 높였다. 1917년의 멕시코 헌법은 재산을 사회 기능의 개념으로 한정했다. 1925년의 칠레 헌법도 국가재산을 사유재산의 우위개념으로 설정해 사유재산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의 모든 헌법과 노동법에는 복지와 근로조건 등 노동자의 권익을 고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물질적 혜택과 사회적 복지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 민족주의 정부들은 자국산업의 보호, 민족자본의 축적 및 노동자계층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19세기의 자유방임정책을 거부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부문에서 국가의 간섭이 더욱 두드러졌다. 유럽에서 경제적 민족주의가 일어나 원료를 수출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929년의 공황 이후 국제경제의 붕괴로 이 지역 국가들은 채무 이행이 불가능하고, 외자의 도입도 어려워졌다. 칠레와 볼리비아는 1929~32년 수출이 80%나 격감했으며 1930년대에는 볼리비아·멕시코 등지에서 석유·철도 회사 등이 국유화되고 외자기업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산업화로 고용의 기회가 창출되었어도 일부 국가에서는 인종적 차별이 여전했고, 농민·노동자들은 사회적 지위 변화에서 좌절을 경험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군에 입대한 세대가 1930년대에는 군부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는데, 이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1920~30년대의 발전으로 중산층 엘리트들이 중심이 된 문화적 민족주의가 강력히 전개되었다. 민족주의는 경제적 제국주의의 착취에 대항하는 모든 요인을 통합하여 미국의 정치적 간섭과 문화적 침투에 반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1945~92)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제외한 모든 국가는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1942년 1월말 라틴아메리카 9개국은 추축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동시에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같이 라틴아메리카는 전략물자의 공급지가 되었다. 브라질은 이탈리아 전선에 육군을, 그리고 멕시코는 필리핀 전선에 공군을 파병하여 참전했다. 전후에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는 경제적 침체로 위기를 맞이해 국가 수익의 대부분을 외채상환에 써야 했다. 지역 내의 불균형한 발전은 집중적인 수입현상을 초래했으며 농업부문의 생산도 늘어나는 인구의 수요를 따르지 못했다. 볼리비아의 주석, 칠레의 구리, 멕시코의 관광, 페루의 초석,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제외하고 모든 국가에서 농업은 시장지향 상업농으로 전환되어 1960년대 중반이 되자 식량생산이 극도로 감소했다. 토지의 재분배도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해 결국 1970년대에 들어와 농지개혁은 좌익운동의 핵심과제가 되어 모든 국가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에 대해 상당수의 지주들은 농업의 근대화에 무관심했고, 또 일부 지주들은 몰수에 대비해 농지를 방치함으로써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급격한 산업화는 경제부문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초래했다. 민족주의적 정치 지도자들은 천연자원 분야에 대한 외국자본의 투자를 차단했다. 브라질은 제철소·전력회사, 아르헨티나는 철도·석유 산업, 칠레는 구리광산·철강, 멕시코는 석유·철도, 우루과이는 전력·전화, 볼리비아는 주석광산을 정부가 통제했다. 1960년대에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콜롬비아·멕시코·우루과이·베네수엘라가 총교역상품의 50% 이상을 생산했다. 당시 업종별 노동력 분포는 제조업 15%, 서비스업 30% 그리고 농업 45%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7년 중앙아메리카 공동시장(CACM) 그리고 1961년에는 라틴아메리카 자유무역연합(LAFTA)이 결성되어 이 지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했다. 한편 1945~50년에는 민간자본이 석유부문에 유입되고, 1950년 이후에는 광업과 제조업분야에 투자가 집중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는 외국자본의 유입을 환영했으나 장기적인 통신 및 군수산업분야에는 투자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수출입은행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정당의 발전과정을 고찰하면 먼저 19세기 중엽에 자유당과 보수당, 19세기 후반에는 민족주의 정당이 부상했다. 그후 20세기 전반에는 아르헨티나·칠레·우루과이에서 중산층과 노동조합의 지지에 의존하는 정당이 활동했다. 이어 20세기 후반에는 멕시코·파라과이·니카라과·쿠바에서 패권적 단일정당이 부상했고, 다당제는 아르헨티나·브라질·볼리비아·칠레·코스타리카 등지에서 기능을 발휘했다. 그밖에도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브라질의 통합주의, 칠레의 나치즘, 멕시코의 국수주의적 준(準)파시스트 정당도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페루에서 아프라당은 경제·사회 개혁과 정치과정에서 하위계층과의 결속을 추구하며 활동했다.
가톨릭 교회는 90% 이상의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9세기까지 교회의 영향력은 반교권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개혁주의 정부에서 중산층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1960년대에 해방신학이 등장함으로써 지방교회는 노동자와 비특권계층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류층과 지적 중산층의 뇌리에서 이념적 기반을 세워나갔다. 전후 냉전체제에서 1954년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1959년 쿠바의 카스트로, 1970년 칠레의 아옌데, 1979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등 공산정권이 대두해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한편 1958~62년에 존속했던 영국의 서인도 연방 해체로 1962~83년에 많은 국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 등 많은 국가가 외채상환 불능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와 함께 군정에서 서서히 민정으로 정권이 이양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1990년대가 되자 일부 국가에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호전으로 변화의 징후를 보이고 있으나, 베네수엘라 및 페루의 경우 같이 실업, 마약, 테러, 고질적인 인플레이션, 외채상환 불능 등으로 혼란의 징후는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J. J. Johnson 글 | 姜錫永 참조집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