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본주의는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마틴 마티(Martin Marty)에 따르면, “미국 신학의 흐름을 논하면서 근본주의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미국의 자연경관을 살피면서 로키산맥을 빠뜨리는 것과 같다.” 지지자들은 근본주의가 “원칙적으로 기독교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근본주의는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 신조를 믿는 현대 복음주의의 하부 그룹이요, 한 지류다. 반면, 비판자들은 근본주의자란 용어를 조롱과 경멸의 뜻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비교화주의, 분리주의, “새로운 이단,” 혹은 “왜곡된 기독교”로 평한다.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어난 종교운동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지성적, 종교적인 흐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성서적 기독교를 보존하려 했던 다양한 그룹의 연합체였다. 그것은 정통주의의 교리 중 몇 가지 항목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원리로 강조했으며, 핵심은 성경의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이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근본주의가 1910년대, 즉 <근본적인 것들>이 출판되던 기간(1910~1915)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전에는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와 근본주의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것들> 출판 이후,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근본주의자 자신들은 근본주의자라는 명칭 보다 오히려 보수적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을 좋아한다. 그러나 모든 보수적 복음주의자가 곧 근본주의자는 아니다.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극우파 보수주의를 의미한다.
근본주의의 뿌리에 대한 해명은 사회학적 설명, 교리 및 신학적 설명, 문화적 설명 등으로 정리된다. 사회학적 해석은 1970년 샌딘의 <근본주의의 뿌리> 출현 전까지 지배적 견해였다. 그것은 근본주의를 사회적 현상, 즉 사회적 부적응과 도시와 농촌간의 문화적 갈등의 파생물로 보는 것이다. 옛 질서가 사라지면서 나타난 하나의 부산물이 근본주의다.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보수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특히 리챠드 니버는 근본주의가 “미국 농촌문화 대 도시문화의 충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교리적 해석은 근본주의를 사회적 현상이 아닌, 진정한 종교운동으로 간주하고, 그 뿌리를 순수한 교리 전통에서 찾는 것이다. 샌딘은 근본주의가 1920년대 이 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회학적 해석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사회학적 해석이 정당하다면, 반사회적이며 반지성적인 근본주의 교회들은 이미 사라졌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샌딘은 1920년대의 사회적 사건들 보다 오히려 전천년설적인 천년왕국운동과 프린스톤신학이 근본주의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고 주장했다. 즉 샌딘에 따르면, 근본주의의 근원은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이다. “근본주의는 19세기의 서로 연합될 수 없는 두 신학의 조류, 즉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이 1918년까지 공동의 적인 현대주의와 싸우려고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서 형성한 일종의 연합 운동이다.”
문화적 해석은 1차 대전 후의 문화적 위기 의식이 근본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주의를 일차적으로 종교운동으로 이해하면서도, 근본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면을 주목한다.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미국의 환경에 의해 독특하게 형성된 복음주의 기독교의 변형이다. 근본주의자는 새로운 문화에 항거하고 과거의 생활을 유지하기 원하는 보수주의자다. 이 견해를 대변하는 대표적 학자가 말스덴이다.
샌딘이 근본주의의 근원을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으로 보는 것과 달리, 말스덴은 그것 이외에도 다른 요소들이 있음을 주장했다. 말스덴에 따르면, 근본주의는 “기독교를 현대 사상 속에 집어넣으려는 현대주의자들에게 맹렬하게 대항한 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되거나 절대로 일치할 수 없는 전통과 흐름의 모자이크였다.” 말스덴은 근본주의의 중심신학을 형성한 것은 부흥회주의와 경건주의 전통이었으며 여기에 성결운동와 프린스톤 신학전통이 첨부되었다고 보았다.
근본주의의 운동은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룬 후,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 원인은 두 가지 지적된다. 첫째, 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1925년 근본주의자와 진화론자의 대립으로 일어난 논쟁은 일반 대중들로부터 무식하다는 불신을 받게 되었다. 둘째, 근본주의 운동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다. 근본주의로부터 신 복음주의와 전투적 근본주의가 분열되었다.
근본주의의 역사적 의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복음주의적 신앙과 교리를 수호하려 한 것과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주의의 위험성을 각성하게 한 것이다. 초자연주의를 옹호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성실히 보존하려 한 것이 그 공헌이다. 근본주의가 성서의 무오성과 초 자연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반대한 것은 정당하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보존하려는 열심과 순수성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한편, 근본주의의 문제점으로는 분리주의와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지적되고 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자와 자유주의 교단으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 분열을 촉진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근본주의는 지성적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반지성주의의 새로운 원인이 되었다. 근본주의는 종교문제에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이성과 학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근본주의는 과거의 것을 단순히 보수하고 반복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간주함으로써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재 진술하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을 소홀히 했다. 또한 근본주의는 반지성적일 뿐 아니라 또한 지나치게 내세지향적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비전을 지닌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
목창균 교수/서울신대 신학전문대학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