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사상사 1. 후스토 L.곤잘레스, 이형기,차종순 공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시작하는 말
교리의 발전과정을 다루는 데 있어서 본 저자는 신학적인 개념으로부터, 즉 진리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진리에 대한 기독교 개념은 성육신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교리에 의하면 기독교적 진리는 구체적이거나, 한정적이거나 혹은 일시적인 어느 것과 연합한다고 해서 그 자체의 의미가 곡해되거나 의미를 상실치 않는다. 이와는 정반대로 진리는 영원이 역사적인 유한과 연합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는 곳에서, 특정한 인간이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곧 진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에서 정확하게 나타났다. (p34)
...기독교는, 진리란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사건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숨겨져 있으나 또한 동시에 모든 역사적 순간들을 통해서 그 진정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진리와 역사의 관계성을 이해하면서 본 저자는 교리의 발전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교리의 진리성은 여기에 영원하고 불변적인 진리가 있으며, 역사적 상대성에 절대로 얽매이지 않는 어떤 것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교리의 진리성은 다양한 교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면서 교회에서 도전해 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의 삶과 말씀선포를 판단하는 표준이 된다.(p35~6)
교리들(dogmas)은 기독교 사상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리들은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생성되나 나중에 가서는 기독교 사상을 또 다시 이루는 근간이 된다. 교리들(doctrines)은 어느 시대의 신앙의 중심을 공격해 오거나 정치적 음모의 결과로 나타나는 잘못된 교리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영성의 맥락에서 생기게 되는데, 특히 기성 예배 해우이들에서 나온 오랜 시간에 걸친 신학적 반성의 소산이다. 더욱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언제, 어떻게 한 교리(a doctrine)가 교리(dogma)가 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만장일치로 의견을 통일한 일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본 저자는 "교리사"를 쓰지 않고 "기독교 사상사"를 쓰기로 결심했는데 교리사는 교리들의 형식적인 진술면을 강조할 분 신조가 형성되기까지의 실질적 진행과정과, 어떻게해서 널리 인정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다.(p37)
2.기독교의 요람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이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오신다는 메시지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신기하고 영원한 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이 세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으로 임재하심을 말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성육신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존재한다.(p39)
2.1유태인의 세계
...1세기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유태주의의 각종 분파들에 대해서 ... 당시의 종교적 삶이 색을 잃고 퇴색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분파가 다양했고 해석이 구구했다는 것은 당시 유태주의의 활기가 그 만큼 더 넘쳤다는 뜻이다. 더우기 이 모든 분파들은 유태주의가 지향하는 두 가지 기본 흐름을 반영한다. 즉 윤리적 유일신 사상과 메시야와 종말론적 기대이다. ... 윤리적 유일신 사상은 각종 분파가 성행하는 가운데에서도 유태 종교의 구심점이었다. 유태인들은 희망을 축대로 삼고서 종교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이와 같은 구원의 희망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때로는 메시야 사상을 중심으로 멤돌았으며, 때로는 "인자"라고 지칭하는 천상적 존재를 맴돌기도 하였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다윗의 왕국이 이 세상에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메시야의 사역은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여 그 위에 좌정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하였다. 한편, 인자의 모습은 묵시적인 단체에서 흔히 언급하는데, 메시야보다는 더 보편적인 성격을 띠면서 이 지상에 다윗의 통치를 회복하러 오실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하늘과 땅을 건설하러 오신다. 인자는 메시야와는 상이한 천상적 존재로, 그는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주관할 기능을 지닌다. 이러한 두 개의 흐름이 오랫동안 함께 뒤섞여져 내려오다가 제1세기에 이르러서 중간적 절충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즉 메시야의 통치는 현 시점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고 그 다음으로 인자가 새롭게 이룩할 새 시대ㅇ가 도래한 다는 것이다. ... 후기 유태 종교 사상이 또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서 마치 삼위일체 신학의 세 기둥을 이루듯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지혜 사상이다. 랍비전통의 유태주의에서는 지혜를 완전하게 실체화시키는 데까지 진전하지 않았지만, 이 사상은 후기 기독교에게 그리스도를 혹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성령을 가리켜서 구약성경에 지혜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p50~1)
70인역은 여러 가지 중요성을 갖는다. 구약성경의 본문비평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70인역을 통해서 고대 히브리어 원문 성경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랍비의 주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70인역 번역자들이 택했던 각종 방법론들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우리들에게는 발생기의 기독교 배경을 연구하는 데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70인역은 기독교권 저술가들이 맨 처음 알고 있던 경전이었으며 신약성경 저자들이 대부분 사용했던 성경이었다. ...또한 70인역은 신약성경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다. ...70인역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심적 상태를-특히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해 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헬라화 경향이 이미 이들에게 두드러졌고, 그들은 유대주의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야만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동시에 순수 희랍 사상과 긴밀하게 연관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했다. (p55~6)
2.2 희랍-로마의 세계
흔히 교육적인 이유 때문에 유대교를 기독교회가 발전했던 여타의 세계와 구별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왔지만, 사실은 주후 1세기의 지중해 연안은 유례가 없을 정도의 이상적인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연합을 이룬 상태였다. 이와 같은 연합은 알렉산더의 정복을 통한 희랍사상의 확산에 기인하였으며 그 후 계속되는 로마의 병합정책의 결과였다. ...철학은 플라톤의 시대에서처럼 시민들이 도시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이룩된 범세계적인 환경에서 개인에 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바로 이 점, 즉 개인주의적인 범세계주의(individualistic cosmopolitanism)야말로 헬라적 사상에 반대되는 헬라화된 사상의 특징적인 표식이다. ... 고대 근동 문화의 부흥은 제1세기 기독교 시대와 함께 동시대적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초대 기독교의 헬라화 배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헬라화된 철학과 서구에 침투하는 많은 동양 종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와 같은 문화적,종교적 요소에다 정치적이면서도 행정적인-즉 로마제국을 첨가시켜서 살펴야 한다.(p62~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시민으로서 이 세상과 사회에서 신분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며, 종교적이고 도덕적 의무는 오랜 전통에 의해서 규제를 받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간은 사색에 전념할 수 있으며 윤리를 철학의 한 요소로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시대에 와서는 범세계적인 사회의 등장으로 인간은 이 세계의 거대함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신들에 대한 숭배가 다른 의무와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되었으며, 행동의 원리들도 새로운 풍습에 따라야만 했다. 이러한 시점에 이르게 되자 철학은 인간들에게 개인으로서의 역할을 분담시킴과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일상생활의 규범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철학은 고대 도시국가적인 구조들에 얽매이지도 않았으며, 희랍인과 야만인 사이에 구별을 지을 수도 없었다. 스토아주의와 에피큐로스주의가 희랍철학의 시기에 이러한 필요를 감당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고대 신들에 대한 불신앙이 만연하게 되자, 인간 역사에서 지금까지 철학이 처해 왔던 입장대로 신들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종교적 성격을 띤 철학적 체계가, 즉 신플라톤주의같은 것이 일어났다.(p64)
...기독교의 요람을 논하면서 로마제국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구조적인 통일성과 통신수단의 용이성으로 인해서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기독교의 팽창에 필요한 각종 수단들을 제공했다. 제국이 취했던 현명한 행정조직은 교회의 조직에 큰 영향을 미쳤고 로마의 법전은 교회법의 제정뿐만 아니라 라틴신학의 용어들을 캐내는 좋은 채석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로마가 기독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실제적이고,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관심이었다. (p77)
3.사도적 교부의 신학
신약성경 정경을 제외하고 가장 초기에 속하는 기독교 문서들로 지금까지 잔존해 있는 글들은 소위 사도적 교부(Apostolic fathers)들의 글들이다. ...로마의 클레멘트, 디다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폴리캅,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바나바의 서신' , 헤르마스의 '목자'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등이다. (p79)
로마의 클레멘트
사도적 교부들의 글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신빙성을 갖고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로마의 클레멘트가 쓴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번째서신'(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이다. 클레멘트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1세기 말엽에 로마의 감독이었는데, 감독으로 재직시인 주후 96년에 고린도인들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이것이 순수한 문학작품으로 보전되었다는 사실이다. (p81)
클레멘트가 반발을 꾀하는 자들에게 권면하는 주장들은 2가지 측면에서 그 근거를 갖는다. 즉 구약성경과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본질적인 조화이론이다.(p83)
클레멘트가 대단히 큰 명성을 얻었던 것은 초창기부터 많은 문서들이 그의 이름으로 저술되어서, 그의 권위를 덧입고 당시의 교회 사이에서 회람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서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클레멘트의 제2서신'(the Second Epistle of Clement to the Corinthians) ... 내용은 신자들에게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저 세상에 가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같은 시대에 로마에서 쓰여진 헤르마스의 목자라는 작품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회개는 2세기 중반에 이르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였음을 증거해 준다.(p85)
디다케
'디다케'(the Didache) 혹은 '12사도의 가르침'(the Doctrine of the twelve Apostles)이 본래의 이름인데, 희랍어로 디다케는 '가르침'을 뜻하며, 근래에 이르러서 발견된 중요한 문서이다. (p87, 문장손질)
기독교 사상사의 입장에서 보면 '디다케'는 무엇보다도 당대의 신학적 흐름을 따름과 동시에 도덕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디다케'는 예배학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례와 성찬에 관해서 매우 흥미있는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찬의 역사와 연관시켜 보면 '디다케'는 애찬과 성찬이 완전히 구별되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한다. ... 교회조직의 역사적 근거로 '디다케'는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중시하는 원시적인 체계가 교회 내에서 서서히 발전하고 있었던 계층적 교권조직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p91)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이그나티우스는 두 종료의 거짓 가르침을 다루려고 했던 것 같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체적 삶을 부인하면서 성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무리들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유대교의 틀안에서 보는 대로 단순한 선생으로 전환시키려는 유대화 경향을 가진 무리들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은 다른 거짓선생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으며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위험스럽게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신 것을 부인했기 때문이다.(p96)
...그리스도의 사역은 무엇보다도 계시이다. 예수는 우리를 죄의 억압에서 구원하러 오셨다기보다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러한 점에서 이그나티우스는 바울과 다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의 큰 원수는 죄로써 인간을 노예처럼 속박하기 때문에 구원이란 무엇보다도 해방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이그나티우스의서신에서 '죄'라는 단어는 단 한번 볼 수 있다. (p98)
이그나티우스는 교회를 하나로 보았으며, 최초로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p99)
이그나티우스는 지역 교회에서 감독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실제로 군주적 감독제도(monarchical epscopacy)의 존속을 맨 처음 증언한 인물이다. 감독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감독에게 속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에게도 속하지 못한다. ...감독과 장로와 집사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사도에게 복종하는 교회와 연합함으로써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합된다. 그리고 이 연합은 특히 성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p100)
서머나의 폴리캅
...'폴리캅의 순교'(Martydom of Polycarp)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보면 이 문서 안에서는 고대에서 어떻게 순교자의 유물을 보관하는지 그 습관을 알려주며, 동시에 기독교인과 이교도간의 마찰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보여 주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p105)
헤르마스의 목자
"사도적 교부"의 이름으로 된 문서 가운데서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하는 것이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인데, 그는 1세기 말엽과 2세기 전반에 걸쳐서 살았을 것으로 보며, 자신이 로마교회의 선지자로 있는 재직 기간 동안에 펴낸 각종 자료들을 수집한 것이다. 그의 주된 관심은 어떤 형제들의 신앙과 정열이 식어가는 데 있었다. 특히 세례 후에 짓는 죄, 즉 개종하고 세례받은 뒤에 범하는 죄들에 관해서 깊은 염려를 나타냈다. ...'목자'는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해서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과 10개의 비유를 수집했다.(p110~111 ,문장손질)
헤르마스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무엇보다도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끊임없는 교훈이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심오한 신비적 느낌도 없고 바나바 서신의 신학적 탐구도 없다. 죄와 용서에 헤르마스에게 기독교 사상사에서 최초로 하나님이 계명을 요구하는 것 이상을 행함으로써 보다 더 큰 영광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전개시키게 하였다. 아직까지는 공로의 보화, 공로의 전가 등에 관한 언급이 없으나, 나중에 섬세하게 다듬어질 로마 천주교회의 고해성사제도가 이미 움트고 있음을 알 수 있다.(p113)
같은 시기에 쓰여진 기타 문서들
구약성경 위경 가운데서 중요한 것에는 '이사야의 승천'(the Ascension of Isaiah), '12족장의 증언'(the Test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 '제2에녹서'(the Second Book of Enoch)등이 있다.(p115 문장손질)
일반적 고찰
이러한 각종 경향들 가운데서 소아시아와 시리아로 연결되는 장소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세분해 보면 소아시아의 사상은 시리아와 또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이 시기에 두 지역은 하나로 연결되어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가 하나로 묶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 소아시아의 신학은 요한적인 작품들, 즉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파피아스, 그외 여러 개의 위경적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이 저작들은 기독교를 기본적으로 도덕적 가르침으로 보지 않고 구세주와 연합함으로써 불멸을 획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도덕적인 규범을 따르는 데 있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합하는 데 있다. ...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기독교에 영향력을 끼쳤던 외부적 힘으로는 신비주의 제의, 영지주의, 에센파 유대교 등이다. ...로마에서는 이와는 다른 유형의 기독교가 싹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클레멘트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신'에서나 헤르마스의 '목자'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가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여서 도덕주의나 율법주의로까지 진전된 것을 보았다. ..이러한 신학적 학파는 스토아주의와 로마인들의 실용주의적 기질에서 발전했다고 보여진다. 스토아주의의 영향력은 클레멘트가 조화를 기독교적 삶의 근본요소로 강조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으며 로마의 실용주의적 기질의 영향력은 클레멘트와 헤르마스의 모든 작품을 통해서 볼 수 있다.(p118~9 문장손질)
세례를 이해하는 면에서나 전체적인 신학적 전망에 있어서 사도적 교부들의 기독교와 신약성경에 나타난 기독교, 특히 사도 바울의 기독교와는 아직 거리가 먼 것을 볼 수 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을 자주 언급하지만 새롭게 시작한 이 신앙은 점점 새로운 율법으로 변해 갔으며 하나님의 은총의 의인 교리는 인간이 의롭게 행동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은총이라고 보는 교리로 발전해 갔다.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인데, 아마도 이들의 신학이 유대적 기독교의 양상을 가장 적게 반영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p121)
4.희랍 변증신학자
아리스티데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변증은 아리스티데스인데, 그가 황제 하드리안에게 기독교를 변론하는 것을 보아서 주후 138년 이전에 쓰여졌음이 틀림없다. (p126)
순교자 저스틴
...저스틴은 제2세기의 희랍 변증신학자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p128)
기독교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저스틴은 2가지의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과 고전적 문화와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신앙과 구약성경과의 관계였다. 저스틴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로고스 혹은 말씀 이론을 동원했다. ...저스틴의 로고스 이론은 필로의 이론과 아주 흡사한데, 아마도 필로의 이론을 주된 자료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희랍 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었던 사상들을 십분 이용하여 저스틴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로고스의 산물이라고 했다.(p129~30 문장손질)
...저스틴은 중기 플라톤주의자로서 동시에 기독교인으로서 스토아 철학의 요소에다가 근본적으로 플라톤적인 철학을 가미했는데도 항상 완전한 진리는 오로지 성육신한 말씀엣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을 다소간 특이한 성격을 띠고 있다 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선명한 플라톤적 사상임과 동시에 심오한 그리스도 중심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스틴은 기독교 신앙과 구약성경과의 관례에 얽힌 문제를 '트리포와의 대화'에서 다룬다. 그는 구약성경이 두 가지 면에서 신약성경을 지향한다고 보았다. 첫째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신약성경의 사건들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둘째는 신약성경에서 실현되는 예언의성취에 있어서 그렇다. 첫째를 가리켜서 '유형들' 혹은 '상징'이라고 하며 둘째를 '말씀들'로 표현된다.(p132~3 문장손질)
역사적으로 저스틴이 지니는 중요성은 기독교 신앙과 이교 철학, 그리고 구약성경과의 관계를 밝혔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초대 기독교 예배, 특히 세례와 성찬에 대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데도 있다. 성찬에 관해서 말하기를, 성찬을 통해서 먹는 음식은 그리스도의 피와 살임과 동시에 지금도 성찬에 참여해서 먹는 자들을 양육시킨다는 의미에서 현재적인 음식이라고 주장했다. ...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그의 이론은 이교도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비웃음에 직면해 몇몇 기독교인들은 플라톤의 영혼불멸 이론으로 모면해 보려고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의 본질에 얄팍한 덧을 입히는 것에 불과했으며 희랍의 영혼불멸 이론과 기독교의 죽은 자의 부활 교리를 혼돈시키는 결과를 빚게 했다. (p135~6 문장손질)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실제적으로 테우필루스가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기독교 저술가이다. 테오필루스는 저스틴과 타티안, 아테나고라스와 더불어 삼위의 제2위를 로고스라고 불렀고, 말씀론에서 필로가 이미 상요해였던 내재적 말씀, 하나님의 마음 호은 심성 안에 항상 계시는 말씀과 표출된 말씀, 만물보다 앞서서 낳으신 말씀을 구별했던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해서 구별하였다. (p145)
일반적 고찰
기독교 사상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이들이 기독교 신학을 조직화하고 로고스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과 고전적 문화 사이에 대화를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에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교회의 신앙을 정의하면서 초대 기독교인들은 생각조차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즉 로고스 이론이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채 발전하게 됨으로써 곧 심각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변증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말씀이 "또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저스틴과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시하는 멜리토 사이에 다양한 견해 차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중간에 테오필루스가 있어서 하나님의 심장 안에 영원히 존재하시는 내재적 말씀과 창조적 대리인으로서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게 되는 표출된 혹은 표현된 말씀을 구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변증신학자들은 기독교를 도덕적이든지 혹은 철학적이든지 간에 하나의 이론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도덕 혹은 참된 철학의 선생이다.(p150)
5.초기 이단들: 도전과 응전
유대적 기독교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 사이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밝혀 보는 것이 좋겠다. 첫째, 기독교인은 구약성경의 율법을 따라야 하는지, 따르지 아니해도 되는지에 얽힌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있어서, 스스로는 율법에 복종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좀더 과격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율법에 복종할 뿐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살맏르은 모두 다 복종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부류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의 율법ㅇ르 복종하는 것이 마땅할 뿐만 아니라 바울은 참 신앙을 배교한 자이며, 그리스도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으나 율법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으로 특출했기 때문에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보는 견해다. 이것이 "에비온주의자"들의 입장으로서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분파였다.(p155)
에비온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있다. 후자는 현세상을 다스리지만 전자는 장차 올 세상을 통치한다. 한편 선의 원리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차례 성육신함으로써 이 세상에 자신을 계시했다. 아담, 아벨, 이삭, 예수 등은 선의 원리의 성육신이다. 그러나 아담 이후 계속해서 선의 선지자가 성육신할 때마다, 악의 원리도 또한 상대 역으로 같이 따라다녔다. 카인, 이스마엘, 세례 요한 등은 악의 원리의 현현으로 여성 원리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사상체계에서 볼 때, 예수는 남성 원리의 선지자이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선의 원리이다. ...이들은 비록 피의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어도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강조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를 요구하는 부분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여성원리의 영향력을 통해서 성경에 첨가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피파니우스는 에비온주의자들이 율법을 준수하면서도 오경을 전체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p156~7)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교리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성격이 무엇인가? 영지주의에 의하면 영이 물질적인 것들과 연합되어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몸과 동물적 혼은 물질적 세계에 속하며, 오로지 영만이 몸에게 생명과 욕망, 그리고 열정을 부여해 준다. 영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상과 속하지 않으며 신적 본질의 한 부분이다. 약간 신비스러운 설명이지만, 영은 이 세상에 떨어져서 물질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므로 영을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지식 혹은 그노시스를 통해서 가능하며, 여기에서 영지주의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이 지식은 단순한 앎을 뜻하지 않고 영원자의 계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신비적인 조명을 뜻한다. ...우리가 ...노예상태로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영우너한 진리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초월적인 영적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해방의 계시를 전달해 줄 사자가 와야 한다. 이 사자 개념은 모든 영지주의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으로, 기독교 영지주의에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이 사명을 완수시킨다.(p161)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로 크게 구별해 볼 수 있다.(p163)
발렌티누스(Valentinus)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의 교리에서 뿐만 아니라 그를연구하면 정통 기독교의 이단연구가들의 증언 내용과 이단에 속한 그 자신의 글들을, 혹은 최소한 이단 학파와 비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p168)기독교 시대가 시작했던 초창기에 영지주의가 큰 매력을 가졌던 것은 단순히 우주기원론적인 사색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구원의 교리, 약속에 근거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관련해서는 '진리의 복음'(the Gospel of Truth)을 참조할 필요가 있음.) (p171)
마르시온
각종 영지주의의 선생들은 학파를 건설하는 데 불과했다. 마르시온은 기성 교회를 대적할 교회를 세웠으며, 그 교인 숫자가 한 때는 급격히 성장함으로써 정통파와의 대결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될지 그 결과가 심히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p172)
마르시온의 이원론은 영지주의와 흡사한 점이 상당히 많았다. 영지주의의 중요한 선생들처럼 마르시온도 악의 문제를 가장 주된 관심으로 삼았다. ...마르시온의 신학 가운데는 영지주의와 다른 내용도 있다. 첫째 마르시온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비밀스런 의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의 글을 보면,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바울이 가르친 기독교 메시지를 세심하게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장들은 자신이 정한 이상의 성경들(주로 바울서신)을 근거로 한 것이며, 자신을 선지자라고 자처하지도 않았으며 신비한 지식의 근원이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기독교 성경의 참된 해석자라 주장할 뿐이었다. 둘째,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사색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따. ...마지막으로 마르시온은 조직적인 면에서 영지주의자들을 넘어섰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보지 않고, 지금까지 교리가 혼탁케 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해석한다는 확신과 자부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교회를 설립하면서, 마르시온은 교회에게 전체적으로 커다란 도전을 한 셈이다.(p173~5)
율법과 복음의 대조, 하나님 은총 교리, 그리고 극적인 그리스도 중심주의 등은 마르시온이 당시 사람들 가운데서 바울의 메시지를 가장 분명하게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사도적 교부 시대부터 기독교를 새로운 도덕적 가르침으로 전환시키고 바울이 주장한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을 도외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경고할 필요가 있었고, 그 일을 마르시온이 시도한 셈이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지와 교회의 선포가 차이가 있다고 너무나도 강조한 나머지 바울의 메시지까지도 반대하게 되었다. 즉 두 하나님에 관한 그의 이론, 구약성경에 대한 부정적 견해, 그리고 가현설 등이다.(p176)
몬타니즘
새롭다고 보는 것은 몬타누스와 그의 동료들이 예언하는 내용이었다. 즉 성령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시를 따라서 새로운 세대가 시작한다고 떠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계시는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내용과 모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윤리적인 면에서나 종말론적인 주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능가했다고 본다. 몬타누스의 윤리규범은 매우 엄격했는데, 이것을 따지고 보면 당시 교회들이 죄인들을 쉽게 용서해 주며, 교회가 세속사회의 요구에 점진적으로 동화되어 가는데 대한 반항이었다고 봄이 옳다.(p177)
...몬타니즘은 교회의 과도한 조직화에 반발하는 운동이라고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순수한 카리스마적 체제를 지녔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실제적으로 몬타니즘은 여러 이단들을 막아 내는 데에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생 교회구조를 약화시켰으며, 신학적으로는 몬타누스주의자들이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가 최종적으로 끝났다고 하는 교회의 주장을 위험하게 했다.(p178)
응전
...정통파 교회들은 상호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연안을 걸쳐서 전반적으로 이단을 퇴치하는 데 비슷한 도구들을 사용하였다. 따지고 보면 이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무기들이란 근본적인 논쟁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특별하게 변형시켜서 여러 이단에 대처하는 것에 사용했던 것으로서, 한마디로 "사도적 권위"라고 할 수 있다. 이 권위는 이단대처도구로써 사용했던 각종 방안들, 즉 신약성경 정경, 신앙의 규범, 신조, 그리고 사도적 계승 등을 총괄적으로 종합한 최종적인 주장이다. ...이단으로부터의 도전과 동시에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해 짐에 따라 제2세기의 교회는 점점 확고하게 발전했으며 통일된 조직체로 성장해 갔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대 가톨릭 교회"가 성장케 되었다.(p181~2)
+히브리서는 맨 먼저 알렉산드리아에서 정경에 포함시켰는데, 이곳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히브리서에 대한 공감대를 일반적으로 형성한 지역으로 본다.(p185)
경전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생긴 것은 제2세기였는데, 이는 어떤 사도적 권위에 기초했다고 주장하는 여러 이단들로부터 "사도적 교리"를 구별해야 할 필요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신앙을 조직적으로 요약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으며-이 규범에 따라서 교회의 신앙 자체와 신앙을 보완해주고 설명해 주는 각종 교리 사이를 구별해 내기에 충분한 것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서 '신앙규범'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동시에 정통성에 대한 확증으로서 신조의 중요성을 증대시켰다.(p186)
6.이레니우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레니우스의 2개의 저서는 '소위 영지주의에 대한 고발과 논박'(Denunciation and Refutation of the So-Called Gnosis)과 '사도적 가르침의 논증'(Demonstration of Apostolic preaching)이다. 이 외의 다른 문서들은 다 실종되었다.(p194)
이레니우스 신학의 중심점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소드는 창조와 구속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근거인데,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를 부인했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되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원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들 가운데 거주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이레니우스는 이 사역을 "총괈갱신"(recapitulation)이라고 불렀다. ...총괄갱신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이며 특징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로써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인간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최초부터 작용했지만, 이 계획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함으로써 만물을 총괄적으로 갱신하는 데서 가장 크고 최종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육신 이전에는, 즉 아들이 하나님의 활동 가운데 잠재적으로 계셨던 그 때는 총괄갱신을 엄격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총괄갱신은 과거에 일어난 활동들의 정점이며, 요약이므로 과거 사건의 맥락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p203)
그의 신학은 개인적 의견보다는 성경과 교회의 교리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반복적으로 신학적 갱신을 도모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총괄갱신 교리에 따른 폭넓은 우주적 견해로 인해서 이레니우스야말로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가한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p207~8)
7.터툴리안
라틴 기독교 문헌의 시조가 로마인이 아니고 북아프리카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매우 흥미있다. ...수세기 동안 로마보다는 아프리카가 라틴 기독교 사상의 중심지였다. 바로 이곳에서 서방 교회의 기본적인 신학 용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초기 몇 세기 동안 가장 뛰어난 라틴 기독교 저술가들이 번성했는데-터툴리안, 키프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기타의 인물들이 있었다.(p209)
터툴리안의 신학적 근거는 기독교 전통과 그가 받았을 것으로 보는 법률교육과 그의 철학적 배경들이다. 물론 터툴리안의 신학은 희랍 변증 신학자, 이레니우스 그리고 헤르마스 등에서 볼 수 있는대로 대부분 기독교 전통에서 직접 물려받았음을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법률적 배경또한 결코 버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논증은 가히 압도적이며, 반대편에게 몰린다는 기분이 들면 수사학으로 가볍게 넘겨 벌니다. 그에게 있어 복음은 새로운 율법이며, 기독교를 옹호하는 그의 논증은 법률적 논증이다. 그가 이단을 논박하는 논증도 근본적으로 이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p212)
터툴리안의 논증은 최종 확정 판결과 같다. 만일 이단들이 성경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면, 정통 교회들과 더불어 논하면서 성경으로부터 참된 신앙 운운하며 논거를 이끌어낼 수 없나는 것이다. 법규는 전체적인 뜻을 갖는다. 이단들은 모든 논증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으며, 오로지 정통에 속하는 사도적 교회만이 무엇이 기독교의 교리인지 혹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p216)
터툴리안의 '프락세아스 논박'은 그 문장과 용어들이 몇 세기 지난후에 교회가 신앙 형식으로 받아들인 내용들에 대해서 암시를 던져 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느다. 특히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교 교리 형성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p217)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떻게 한 하나님이면서도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설명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터툴리안은 다시 한번 법률적 배경에 입각해서 교회가 오랜 세기 동안 사용하게 될 두 가지 용어, "본질"(substance)과 "인격"(person)이라는 두 단어를 소개했다. "본질"은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법률적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본질"은 어떤 한 개인이 사용권을 갖고 있는 재산을 뜻한다. 이것을 군주국에 적용시키면 황제의 재산은 제국인데,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아들과 함께 그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게 된다. 또한 "인격"도 평상적인 의미보다는 "법률적 인격"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격"은 "재산"을 소유한 한 개인이다. 그래서 몇 사람의 개인들이 한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혹은 한 개인이 하나 이상 여러 개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본질과 인격 개념에 근거해서 터툴리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통일성을 주장했다.(p218~9)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교리의 또 다른 중요한 면모는 신적 "경세"(economy)의 주장이다. 이 단어는 희랍어 경세(oeconomia)를 번역하지 않고 음역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우리가 경세(oeconomia)라고 부르는 섭리 아래 계신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은 아들이 있다. 이러한 신적 경세는 군주국 개념을 이해하는 데 적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군주국 아래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에 입각해서 터툴리안의 이론을 "유기적 유일신론"이라고 한다. 즉 유기적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유일신론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우리가 터툴리안을 정당하게 이해한다면 그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갖는 경세적인 면이 본질과 개체의 개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p221)
터툴리안의 신학 가운데서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은 영의 유전과 원죄의 유전 이론이다. 여기에서 터툴리안은 스토아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되며 또한 이 사상이 서방 신학의 형성에 궁극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된다. 터툴리안은 스토아주의 때문에 영과 하나님을 물질적 존재처럼 이해했으며, 여기에 따라 영은 부모의 영으로부터 파생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부모의 몸으로부터 우리의 몸이 파생되어 나온 것과 같다. 이 이론을 "유전설"이라고 부르며, 영혼이 부모로부터 나와서 어린이들에게 유전되듯이 죄도 그렇게 된다는 터툴리안의 주장의 근거가 된다. ... 중세때 유전설은 물질적인 의미를 내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배척했으나 원죄의 유전론을 끝까지 보존했다. (p223~4)
터툴리안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이미 기독교 라틴 문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문서들은 미묘한 신학적 논제들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들을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터툴리안은 이러한 용어 정립의 작업을 수행하면서 희랍저자들의 용어를 단순하게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며, 또한 라틴어 성경의 언어들이나 법률상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서 자신의 개성을 그 용어들에다 삽입시켜서 결국은 전 라틴신학에까지 미치게 하였다. (p225~6)
8.알렉산드리아 학파: 클레멘트와 오리겐
제2세기 말엽과 3세기초에 이르러서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의 하나로 성장했다.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는 로마나 안디옥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활동면에서는 제국의 수도보다도 훨씬 우월했다. ...도서관은 당시에 가장 유명한 학자를 관장으로 모시고서 700,000권에 달하는 장서를 보유했으며, 가장 뛰어난 지식의 보고로 성장했다. ...유대인들만이 성경을 갖고서 알렉산드리아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바벨론 사람들은 점성술을 갖고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원론을 갖곳, 그리고 그 외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자기네들의 사상을 가지고 옴으로써 때때로 신비 종교와 혼합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사상들이 그 도시에서 서로 만나고 번성하여 고루한 전통만을 고집하기에는 너무나도 새롭게 변형되었으므로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사람들이 갈구하는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헬라화된 시기의 특징은 개인주의와 범세계주의라고 이미 말하였는데 이것은 도시중심적인 고대 희랍 사상 및 종교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범세계주의는 당시의 혼합주의적 경향을 보장해주는 전기를 마련했으며, 절충주의적 교리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았다. ...이 도시는 2세기 말엽에 이르러스는 절충적인 성격을 띤 각종 가르침들이 들끓는 가마솥같았다.(p230~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후기 저자들이 인용하는 몇 가지 단편을 제외하고 클레멘트의 저서 5개가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이교도에게 보내는 권면'(Exhortation to the Heathen), '선생'(The Instructor), '잡문집'(Stromata),'부자가 구원받을 것인가?'(Who is the rich man that shall be saved),'테오도투스 초록'(Excerpts from Theodotus)등이다. (p234)
클레멘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그가 기독교의 진리와 희랍철학의 진리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이해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클레멘트는 저스틴과 아테나고라스의 전통에 서 있으며 타티안과 터툴리안의 태도를 반대한다. 클레멘트는 희랍인들의 철학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약간 모순이 되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는 때때로 철학자들은 히브리인들로부터 가장 좋은 생각을 취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동시에 철학자들은 신의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서,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았던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진리를 알게 된다고 주장했다.(p235)
저스틴은 이교도 철학에서도 어느 정도 진리가 있다고 인정했으며, 철학자들의 차원 높은 이론은 성경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으며, 철학자들이 가진 진리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철학을 희랍인에게 준 것은 유대인에게 율법을 수여한 것과 동일한 목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이것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시녀의 역할에 불과하다고 했다. ...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진리가 그들에게 계시될 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진리를 철학에서도 보아야 한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치 않다는 뜻은 아니다. 철학적 작품들이 대부분 합리적 논증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철학자들까지도 다른 모든 논증들이 근거하고 있는 제일 원리를 증명해 낼 수없다. 이 제일 원리는 오로지 의지의 활동, 즉 신앙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지식은 신앙에 의해서 확정된다. 그리고 신앙은 신적인 것과 상호 교률를 통해 지식에 의해 확정된다."(p236~7)
오리겐
오리겐의 저술활동이 어떠했는가라는 느낌이라도 갖기 위해서는 그의 저작을 대할 때 나는 성경을 배우는 학생이구나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야 한다. 오리겐은 자신을 항상 성경의 해석자로 여겼으며 이러한 사명감 때문에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오리겐의 문필 생산의 변모를 보여주는 글들 가운데서 '헥사플라'(Hexapla),'스콜리아'(Scholia),'설교집'(Homilies)과 '주석집'등은 꼭 언급을 하고 넘어가야 한다. '헥사플라'는 성경의 원문이 무엇인가 밝혀내기 위해서 필요한 자료를 총망라해 놓은 것으로 기독교 역사에서는 이 책이 최초로 이러한 시도를 했다고 본다. ...오리겐은 히브리 원문을 70인역과 면밀히 비교 검토해서 개정,생략,추가 부분 등이 무엇인가 밝혀내는 기호체계를 세우는 일 등에 몰두했다.(p253)
...오리겐의 위대한 조직신학적 저술은 '제일 원리'(On First Principles, De principiis)이다. 이 책은 오리겐의 신학을 해석하기 위한 기초적 윤곽을 제공해 주는 4권으로 된 오리게느이 초기 저작(약220년)에 속한다. 이 책은 대부분 루피누스의 라틴어 번역본으로 전해 오는데, 그는 오리겐의 견해가 너무 대담하다고 생각하여 정정을 가함으로써 역사ㅇ를 공부하는 후대 사람들에게 적잖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p255)
오리겐은 성경본문을 해석하는 데 문자적인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각 말씀 속에 문자적 영감이 있음을 굳게 믿었다. ...성경의 참된 의미는 문자적 해석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가장 모순된 듯이 보이는 본문까지도 하나님께서 영감을 부여하였다는 사실이 성경을 "영적으로"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성경의 본문은 3개의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상호보완적인 뜻을 가진다-혹은 가질 수 있다-고 했다. (p256)
...오리겐은 신약경과 심지어는 현실 교회까지 유형론적 상징의 영역에 포함시킴으로써 오리겐의 유형론은 닷히 교회가 발전시켰던 수준을 넘어섰다. 따라서 오리겐은 "구약성경은 신약에 대한 상징으로, 신약은 교회에 대해서, 교회는 종말론의 상징으로, 즉 구원 역사의 각 단계에 나타난 동일한 목적들의 유비"로 해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p259)
오리겐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알았고 또한 자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즉 그의 신학은 한 세기 뒤에 교회를 뒤흔들어 놓은 삼위일체 논쟁의 주된 구원이 되었다. 오리겐은 그때 당시에 정립된 신앙규범에 따라서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앙규범은 정확한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인정했다. 바로 여기에서 오리겐은 그의 독창적인 사색력을 십분 발휘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오리겐은 두 개의 흐름, 혹은 경향을 그의 천재성을 발휘해서 균형있게 유지시키려했음을 역력히 알 수 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의 후계자들이 둘로 나뉘어서 격렬하게 서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첫째가 아들의 신성과 영원성을 중요시해서 아버지와 동등으로 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경향은, 오리겐이 아들의 산출을 논하면서 유출설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만 보아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오리겐의 신학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의 경향이 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말하면서 제한의 개념을 사용했다.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며,이름이며, 얼굴이다. 아버지는 절대적인 통일이나 아들에게는 다중성이 있으므로 이 세상과 인간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 (p261~4)
오리겐은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클레멘트를 앞질러 갔다. 첫째는 폭넓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응집력 있는 그의 신학적 체계, 둘째는 그의 담대한 이론이다. 첫번째 점으로 그는 동방신학의 근원이 되엇으며, 두번째 점으로 그의 이론에 기초를 둔 신학들은 계속적으로 정죄를 받기에 이르렀다.(p273)
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