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到彼岸寺(도피안사) 2011년 5월 28일~29일 2009년 5월부터 85번째 순례 사찰
四天王門(사천왕문) / 사천왕문은 근래 도피안사의 가람 정비를 통해 영지(靈地)와 함께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풍판을 단 겹처마의 맞배 건물로, 좌우 협칸에는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고, 어칸은 통로가 되도록 하였다.
到彼岸寺(도피안사)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到彼岸寺(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道詵國師(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여 철원에 있는 安養寺(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암소 등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하며, 절의 이름은 철조불상이 피안(彼岸 : 열반의 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도피안사 터는 명당으로서 천년에 한번씩 운이 돈다는 자궁형(애기보)으로 편안하며, 도량을 감싸고 있는 화개산은 온통 주변이 양수로 보호되어 있고, 낙산사 홍련암, 오대산 상원사 사자암 중대 적멸보궁과 함께 강원도 3대 명당중 하나라고 합니다.
사천왕상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63호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 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국보6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 등뒤에 통일신라 시대의 글자인 이두문자로 139자의 문양이 주물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국운을 우려 하며 1500 거사들이 현몽받아 조성하는 과정을 설명하였으며, 특히 부처님의 제작년도와 월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함통6년 기유정월" 을 문헌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확인결과 신라 제48대 경문왕 5년 정월에 해당되며 서기로 환산하면 서기865년1월에 해당되며 경문왕은 태봉국을 세운 궁예의 아버지이다(후궁의 자식)
부처님께서는 865년에 봉안되시고 현재까지 이곳을 한번도 벗어나지 않으셨고 외척 침입에도 오히려 피난처로 이용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강탈해 갈려고 당시 철원군청에 갖다 놓으면 다시 절 법당에 와 계시는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일본 사람들이 다시 건드리지 않았으며, 해방후에는 공산당들이 쳐들어 오자 스님들께서는 피신 하시고 당시 도량에는 일하시던 노인께서 부처님 오셨던 자리에 묻어 놓으셨다고 한다.
땅 속에 묻혀 계시던 부처님께서 1957년 전쟁이 끝난 후 수복지구에 정착민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11월 어느날 도량에서 가장 가까이 주둔하고 있던 부대 지휘관인 15사단 39연대 3대대장이었던 고주찬(당시중령)님께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보살님 으로 변신 현몽을 하셨는데 땅속에 묻혀 있는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자비 광명을 베풀어야만 구천에 떠도는 원한 서린 영가들을 위로하고 안전시키므로써 정착민이 살 수 있다고 하시면서 삼층석탑을 기준하여 옮기는 방법을 설명해 주시고 아침에 나가면서 처음만난 사람이 도량의 터를 가르쳐줄것이라고 알려주는 꿈을 꾸고 난후에 밤새도록 연습을 하고 아침에 짚차을 타고 나오는데 꿈에 본 보살님과 똑같은 보살님이 있어서 도량의 터를 물어보니 가르쳐 주셔서 꿈에 현몽한대로 탑을 기준하여 지점을 정하여 파보니 철로 된 불상이 나와서 깨끗하게 하여 천막 을 치고 부처님을 봉안하시고 그때부터 86년 11월까지 군법당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군에서 민간(조계종 총무)에게 이관되어 오늘날까지 이어 왔으며 91년까지 민통선안에 있다가 해제되어 개발이 늦어졌고 94년에 부임하신 현 주지스님인 도견스님께서 현재까지 계속 불사를 하고 계신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보물 제223호 (연꽃좌대 틈사이에 금와보살 출현) 도피안사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 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하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의 맨 윗돌에는 윗층 기단을 괴기 위한 높직한 8각의 괴임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는 연꽃무늬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윗층 기단은 매우 높으나 각 면에 꾸밈이 없다. 다만, 기단의 맨윗돌 아랫면에 다소 두툼한 느낌의 연꽃무늬를 조각 하여 둘러 놓았다. 탑신과 닿는 곳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을 두어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기단의 꾸밈새는 석탑의 기법이라기보다는 불상의 기단 기법으로 보이며, 덮개돌 윗면의 높은 괴임형식은 9세기 통일신라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수법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에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3층은 3단인데,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나,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와보살 사찰에서 금와보살이 출현하는 곳은 도피안사가 2번째이고 먼저 나온 양산 통도사 자장암은 바위의 구멍에서 보이고, 이곳 도피안사는 도량 가운데 있는 3층석탑 팔각 기둥의 기단부위의 연꽃좌대 틈사이에서 나타나는데 새벽 예불시간에 나와서 저녁 예불 종을 치고난 후 30여분 뒤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2002년 10월 24일 오후 7시 10분에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방영되었고, 2005년 9월 5일 KBS2 생방송 ‘무한지대Q' 165회에서도 방영되었다고 합니다.
우주에 충만하사 아니계신곳 없으신 불보살님! 저희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의 1박 2일간 제25차 고찰순례 기도와 심원사 철야정진 기도의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오니, 이차인연공덕(以此因綠功德)으로 모든 중생들이 일체종지(一切種智) 이루게 하여지이다. _()_ _()_ _()_
26차 양평 용문사, 남양주 봉선사, 흥국사로 이어집니다. 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