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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차 고찰순례 제주 관음사, 법화사, 약천사 (관음사 99, 법화사 100, 약천사 101번째 순례 예정된 고찰) 산방굴사, 존자암, 불탑사 (추가로 순례한 사찰포함 관음사 109, 법화사110, 약천사 111, 산방굴사 112 존자암 113, 불탑사 114번째 순례 사찰) 2012년 3월 24일, 25일 (1박 2일)
유채꽃 사이로 보이는 성산일출봉 - 25일 성산항으로 가는 도중에
이하 관음사 관음사는 한라산 동북쪽 기슭 산천단에서 3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관음사는 조계종 제23교구 본사이다. 제주도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한반도에 귀속되기 전인 탐라국 시대 해로를 통해 남방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숙종 1702년 억불정책으로 인해 제주의 사찰들이 완전히 폐사되었고 이로부터 200년간 제주에는 불교와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1908년 10월 비구니 안봉려관 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옛관음사를 복원하므로써 제주 불교가 다시 재건되었다. 봉려관은 원래 떠돌이 무당이었으나 1901년 비앙도로 가던 중 우연히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관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감응하여 비구니가 되어 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습니다. 한 때 주민의 반대로 한라산으로 피신을 했는데, 1912년 승려 영봉과 지사 도월의 도움으로 법정암을 창건했습니다. 그 뒤로 신도가 늘어나자 절 이름을 관음사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1948년 제주도반란사건으로 전소되었는데, 1968년 중창하여 지금의 사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것이 연못에 있는 방사탑이다. 이 방사탑(防邪塔)은 말 그대로 사악한것을 막는 탑으로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하 한라산 천백고지휴게소에서
관음사에서 법화사로 가는 도중 한라산 <천백고지휴게소>에서의 상고대
이하 법화사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자리 잡은 법화사(法華寺)는 서기 840년경 신라시대, 중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동했던 해상왕 장보고가 건립한 사찰이다. 완도 청해진의 법화사와 더불어 산둥반도에는 법화원, 제주에 법화사를 창건하고 바다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한편, 세계로 향하는 해상세력의 근거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일설에는 1273년 여, 몽 연합군이 본도에서 항거하던 삼별초를 토벌,소탕시킨 후 다루가치 총관부를 제주도에 설치하고, '남송' 과 '일본' 정벌의 요충지로 삼은 후 제주는 '원'나라에 직속되었으므로, 원나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자연 원나라의 불교와 신교(神敎)가 들어오게 되자 법화사도 그 때 생긴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8세기 전기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의 절을 불태워 없앨때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지금의 건물들은 1987년 다시 세운 것이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신 제주불교신문 대표이사겸 법화사 주지인 진우스님
옥매(玉梅), 납매(臘梅), 다매(茶梅),수선(水仙)은 설중사우(雪中四友)로 불리어지는데 그중 수선화가 법화사 마당 외진곳에 피어 있었다.
지난 2000년 복원된 구품연지는 극락정토 구품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연지를 일컫는다. 인공을 가미한 4천여 평이 넘는 연지로 국내에서 발견된 연지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이하 중문·대포해안주상절리대 (中文·大浦海岸柱狀節理帶)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ing)란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 나타나는 기둥모양의 수직절리로서 다각형(보통은 4∼6각형)이며, 두꺼운 용암(약 섭씨 1100도)이 화구로부터 흘러나와 급격히 식으면서 발생하는 수축작용의 결과로서 형성된다고 하는데 이곳의 주상절리는 높이가 30~40m, 폭이 약 1km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규모면에서 최대이다.
이하 약천사 현재 藥泉寺(약천사) 자리에는 혜인스님께서 본격적인 불사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돽새미 (도약샘道藥泉→돽샘→돽새미)]라 불리는 수질이 좋은 약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약수를 마시고 기갈을 해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물 좋은 이곳에 절을 지어 이름을 약수가 흐르는 샘이 있다는 뜻에서 자연스레 절 이름을 藥泉寺(약(藥)자와 샘 천(泉)자)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절을 참배함과 동시에 수질 좋은 약천사의 약수를 마시기 위해 절을 찾는다. 약천사를 창건하신 혜인스님은 약천사에 약사여래불을 모셔서 약수와 더불어 부처님의 가피를 얻어 무병장수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아직도 약천사에는 사시사철 수량이 풍부한 약수물이 흘러 연못으로 흘러들고 있다. 현재는 도량내에 사용하는 모든 물이 음료 가능한 약수물로 공급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참배자들이 누구나 손쉽게 즐겨 약수물을 마시고 있다.
제주도의 많은 지명이 불교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약천사가 소속된 서귀포(西歸浦) 라는 지명은 아미타부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는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 로 돌아가고자 하는(西方淨土 阿彌陀佛께 歸依한다) 불자들의 염원이 담겨진 지명이다.
저녁 예불후 1시간 넘게 법문을 해주신 약천사 성원 주지스님
올해가 용의 해라
큰 법당 뒤쪽 약천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굴법당은 큰법당이 완성되기 전에 조성되었다.
이하 산방굴사 해발 395m의 산방산 서남쪽 해발 200m 지점에 있는 천연석굴로 불상을 봉안하고 있어 산방굴사로 불리어지며, 고려시대 혜일스님이 자신을 산방법승이라 하고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굴은 높이 5미터, 길이 10미터, 폭 5미터 크기이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추사 김정희도 자주 찾아와 수양했다고 전해진다. 불상 앞 천장에서는 약수가 떨어지고 있는데 산방산을 지키는 여신인 산방덕(山房德)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산방덕은 산방산이 낳은 굴의 여신으로 빼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우연히 고승이라는 청년과 만나 열렬한 사랑을 하였으나, 산방덕의 빼어난 미모에 반한 벼슬아치가 산방덕을 보고 욕심이 생기자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고승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재산을 뺏고 귀양을 보내버렸다고 한다. 인간 세계가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데 실망한 산방덕은 이를 한탄하며 다시 산방굴로 들어가 스스로 바위가 되어 지금도 울고 있다고 한다.
산방덕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 - 세모금만 마셔야 하며, 그러면 사랑의 복을 받고 수명이 5년 길어진다고 한다.
용머리해안 - 용이 머리를 쳐들고 바다로 뛰어 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곳의 기맥이 범상치 않아 일본사람들이 맥을 끓기위해 수백개의 쇠말뚝을 밖았다고 합니다.
이하 존자암 존자암(尊者庵)은 서귀포시 하원동 산1-1번지 한라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한라산 해발 고도 약 1,280m에 신선이 산다는 골짜기 영실(靈室)이 있다. 이곳 영실은 오백 나한, 혹은 오백 장군이라 불리는 수백 개의 기암절벽들이 들어서 있어 영주십경의 하나로도 꼽힌다. 가히 세인들이 가까이해선 안 되는 선계 중의 선계로 오랜 세월 외경의 대상이 되어왔던 곳이다. 그 때문에 과거에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국가 재(齋)를 지낼 때에도 영실을 가로 지르지 못하고 존자암 옆으로 멀찍이 돌아서 정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때 잡스런 말이나 행동을 하면 구름이 끼거나 안개가 덮쳐 앞길을 가로막았다 하는 한라산의 숨골이 바로 이곳이다. 이 영실의 신령스러움을 그대로 이어 받아 기암절벽 건너편에 어슬렁오름, 망체오름, 불래오름 등이 일어서 있다. 그중 제일 오른쪽인 서북편 방향에 솟아있는 오름이 바로 부처님이 오신 오름, 불래(佛來)오름이다. 그리고 이 1,362m 불래오름을 주봉으로 남사면의 평평한 등선마루에 올라서 있는 사찰이 존자암이다.
존자암의 창건 시기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가운데 존자암의 기원을 『법주기 (法住記)』에서 찾는 이들은 이곳을 주저 없이 한국불교 초전 법륜지로 부른다. 고려대장경 『법주기』에 의하면 석가세존의 제자 16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전도를 위하여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그 중 여섯 번째 존자 발타라가 그 권속인 900 아라한과 더불어 탐몰라주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이 탐몰라주에 대하여 근대의 불교학자 이능화(李能和, 1869~1934)는 1918년에 펴낸 『조선불교통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탐몰라주는 탐라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제주도다. 『동국여지승람』을 살피건대 제주 존자암은 한라산 서령(西嶺)에 있으며 그 동(洞)에 있는 암석이 승(僧)이 수행하는 모양과 같아서 속전에 수행동(修行洞)이라 하였다. 존자암이란 곧 발타라 존자의 이름인 까닭이라 함은 그럴듯하다. 이른바 500장군석은 또한 500나한석이 와전된 이름이라 함도 그럴듯하다.” ...(출처:대한불교진흥원 한국의 사찰 존자암)
대웅보전
국성재 존자암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안녕을 비는 국성재를 지내던 비보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1498년 유배된 뒤 8년을 넘게 제주에 살았던 홍유손(洪裕孫, 1431~ 1529)이 1507년에 존자암을 중수하기 위해 지은 「존자암개구유인문」에서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존자암은 비보소(裨補所)이자 이미 세상에 이름이 난 지 오래다.…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이 암자에 논을 하사하여 벼를 심어 재를 지낼 경비로 삼고, 음력 4월 길일을 잡아 세 읍의 수령 중 한 사람을 뽑은 다음 목욕재계하여 이 암자에서 제사 지내게 하고 이를 국성재라 하였는데, 지금은 이 제사가 폐지된 지 6, 7년이 되었다.” ...
아래는 고려대장경 인경본 사진입니다.(출처:고려대장경 연구소) 第六尊者與自眷屬九百阿羅漢多分住在耽沒羅洲 (제6존자여자권속9백아라한다분주재탐몰라주) 여섯 번째 존자가 그 권속인 900아라한과 더불어 탐몰라주에 들어와 살았다(빨간 줄친 부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오랑캐에게 굴복하기를 끝끝내 반대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선생이 32세 때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되어 기록한 기행문인 <남사록(南槎錄)>에 “존자암은 지붕과 벽이 흙과 기와가 아닌 판잣집이며 9칸 집이다. 존자암 근처에는 20여 명이 들어갈 만한 수행굴이 있고, 옛날의 고승 휴랑이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고 한 뒤에 “오직 존자암의 스님들만이 처를 거느리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남사록>에 실린 글을 보면 제주의 다른 절들의 중들이 대부분 처를 거느리고 살았던 것과 달리 이 절은 수행하는 스님들이 머물렀던 절임을 알 수 있다.
영실 주차장 - 여기서 존자암까지는 20 ~ 30분간 걸어올라가야 합니다. 1박 2일간 <백팔고찰순례단>의 애마가 되어준 버스, 버스 앞유리에 백의관음이 자비로 순례길을 인도하는 '송광사 부산분원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표지판이 한라산 중턱에서 더욱 빛납니다.
이하 불탑사 불탑사는 해발 170.4m 원당봉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불탑사의 원찰인 원당사(元堂寺)는 원제국시대 제주도의 3대 사찰의 하나였다. 13세기 말엽 원나라 기황후(奇皇后)가 삼첩칠봉(三疊七峰)의 명당자리에 절과 함께 불탑을 지어 불공을 드려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원당사는 17세기 중엽까지 존속되었다가 세번의 화재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1914년 원당사터에 불탑사가 재건되었다. 지금도 경내에는 당시 세웠던 오층석탑이 보물 제1187호 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특히 오층석탑의 좌향은 산세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별을 보고 점을 치거나 별의 기운에 따라 인간 개개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천문사상이 이곳 터잡기에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koreatemple.net)
불탑사 혜진스님께서 법문을 해주고 계십니다.
이하 다랑쉬오름 지도상 거의 원형으로 된 밑지름이 1,013m, 오름전체 둘레가 3,391m에 이르는 큰 몸집에 산자체의 높이(비고)가 227m나 되며 둥긋한 사면은 돌아가며 어느 쪽으로나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부에는 크고 깊은 깔대기모양의 원형 분화구가 움푹 패어있는데, 이 화구의 바깥 둘레는 약1,500m에 가깝고 남·북으로 긴 타원을 이루며, 북쪽은 비교적 평탄하고, 화구의 깊이는 한라산 백록담의 깊이와 똑같은 115m로 산 자체 높이의 반 이상이 패어있다. 대부분의 오름이 비대칭적인 경사를 가진데 비해 동심원적 등고선으로 가지런히 빨려진 원추체란 것이 흔하지 않은 형태이다.
다랑쉬 오름에서 바라본 '아끈다랑쉬오름' - 다랑쉬오름 동남쪽에 이웃해 있는 오름으로, 다랑쉬와 닮은 꼴로 낮고 자그마한 원형 분화구를 갖고 있으며, 작은다랑쉬의 의미로 아끈다랑쉬라고 부른다.
재부 남해불교신도회로부터 받은 진제스님 종정추대 기념 염주
2011년도 한국예술문화협회 서예부분 추천작가였으며, 현재 (사)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 제주지회 사무국장인 심전거사님이 며칠에 걸친 수고로 우리 백팔고찰순례단 전원에게 선물한 부채(부채에 쓰여진 글은 31개 부채 모두가 내용이 각각 다릅니다.). <好行善者(호행선자) 天助以福(천조이복) 착한 것을 행하기 좋아하면 하늘이 복을 준다.> 위 부채에 쓰여있는 글입니다. 心田(심전)거사님은 지난 1세기를 통틀어 최고의 명필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김천의 영남 제일문과 직지사, 칠불사 현판, 남해 망운산 화방사 일주문의 현판 등을 쓴 여초 김응현(如初金膺顯1927~ 2007.2.1)선생으로 부터 얼마간 직접 사사받고 이후 여초선생의 제자로 부터 사사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두번 남은 고찰순례, 꼭두새벽 낙동초등학교 아래서 출발하여 버스안에서 불교TV가 제작한 DVD에 따라 아침예불을 올리고, 천수경을 봉송하고, 매회 첫번째 순례 사찰에서 사시불공에 동참후, "대자대비민중생 대희대사제함식........지심귀명례 보광불, 지심귀명례 보명불,..............지심귀명례 석가모니불,..........지심귀명례 법계장신아미타불............. 나무대행보현보살마하살." 89부처님의 명호를 칭명염불하면서 108배로 부처님께 참회하였습니다. 염주도 앞으로 두번 7알만 채우면 108염주가 완성됩니다. 매회 빠짐없이 정일헌거사가 제작한 사찰안내 프린터물은 다 모으면 한권의 훌륭한 사찰안내 책자가 되리라 봅니다.
재무보살은 회향시 표구를 하기 위하여 순례고찰마다 45매씩 화선지에 사찰의 도장을 받았습니다. 위는 약천사, 관음사, 불탑사, 존자암, 법화사 인영입니다.
신행수첩 도장난도 몇장 안남았습니다. 이번 제주고찰순례시 번호패가 31번 까지 나갔습니다. 사찰안내 DVD는 불교TV에 관음사만 준비되어 있기에 관음사만 버스에서 시청하고, 사찰안내 프린터물을 각자 숙지하고, 대불련 제주지부 심전거사가 이틀간 사찰안내를 하여주었습니다.
김재석님, 정연일님, 이원복님, 박정숙님의 보시로 제주고찰순례 동참자 전원에게 나누어 준 제주 쌀 크런치
제주 사찰 순례 몇주전부터 순례할 사찰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접촉하고, 순례시에는 이틀간 시간을 내어 안내를 해주었으며, 귀한 서예부채를 선물해주신 대학생불교연합회 제주동문회 심전 거사님에게는 박달천님이 사례하였습니다.
카페 앨범은 단체사진이 들어 있어 초상권에 관한 문제가 있으므로, 비회원은 읽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고 스크랩이나 복사도 허용하지 않으므로, 카페 앨범에서 단체사진을 빼고 간단한 설명을 덧 붙여 작성하였습니다. 좀 더 많은 사진과 순례기는 추후 각각의 사찰별로 작성할 <백팔고찰순례기>에서 소개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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