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호는 해운(海雲), 신라 사량부 사람이다. 6두품 출신으로 12세의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했는데 그 당시 부친 최견일(崔肩逸)은 "10년 안에 과거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로 격려하였다.
그 후 7년 만에 18세(874)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고, 이후 2년간 낙양(洛陽)을 두루 .유람하며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876년에 당나라 선주 표수현위(宣州 漂水縣尉)가 되었다가 그 후 회양 절도사 고변(高騈)의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창후가 문명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879년 일어난 황소의 난을 토벌하면서부터 인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바로 이때에 지은 것이다.
당시의 공적으로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展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이 당시 고변의 종사관으로 지은 글과 시 등을 모은 것이 바로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다.
문창후는 헌강왕 11년(885)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면서 여러 문인들과 사귀었고, 또 중국 전역에 문명을 떨치었다.
29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事)가 된 최치원은 귀국 후 의욕적으로 경륜을 펼치려 하였지만 신분의 한계와 혼란한 정치 상황 등으로 인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외직을 자원하여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북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남 함양)등지의 태수를 지내며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진성여왕 8년(894) 임금에게 시무책 10여 조의 개혁안을 올렸고, 이러한 공으로 6두품으로서는 최고의 관직인 아찬(阿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안은 실행될 수 없었고 결국 40여세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의 길에 오른다.
문창후는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천을 유람하다 죽었다고도 하며,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지러운 신라의 현실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6두품의 신분적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삼최(三崔)로 일컬어진 최승우(崔承祐)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종사했으며, 최언위(崔彦
)는 고려의 왕건에게 가서 자신의 뜻을 펼쳤으나, 문창후는 이들처럼 역사적 전환기에 주동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은거하여 최후의 신라인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그의 문인들은 대거 고려정권에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최치원은 유학을 불교의 부수적인 학문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유학에 입각한 정치사상은 그 후 최승로 등으로 이어져 고려의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은 바로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또한 한국한문학의 비조(鼻祖)로도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의 문장은 아름다운 수사에 정제된 형식미를 가진 변려체(騈儷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최치원은 불교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도교와 노장사상 등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불도의 삼교사상에 대하여 각자의 주체성을 인정하였고, 이들 사상이 근본적으로 상통한다는 이로동귀(異路同歸)의 삼교회통(三敎會通)을 주장하였다.
이 사상을 통해 모든 사상과 종교가 대립 갈등을 해소하고 대동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문창후의 삼교관은 우리의 고유사상이라 할 수 있는 풍류도(風流徒)를 탐구하는 데에도 적극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의 현묘지도(玄妙之道)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고려 현종 11년(1020)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다음해에 문창후로 증시(贈諡)되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조선조에는 서악서원(西岳書院), 백연서원(栢淵書院), 고운영당(孤雲影堂),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문창후는 많은 저술을 하였으나, 『동문선(同文選)』에 실린 글과 『계원필경(桂苑筆耕)』, 『사산비명(四山碑銘)』등의 약간의 글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