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얼마 전에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자 '실천하는 지성인'이셨던 리영희 선생께서 작고하셨다. 리영희 선생이 쓰신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수많은 저서는 암울했던 시대의 등불로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그 중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제목이 우리 사회에 가져다주는 함의 또한 대단히 크다고 본다. 특히나 한국의 정치사에서 50년 동안 보수가 정권을 잡다가 최근 10년간 진보가 정권을 잡고 다시 보수로 넘어간 지금의 시점에서 좌와 우, 또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가치를 살펴보고, 각기 국가의 정책비전을 토론하고 차이점과 공통점을 모색해나가는 것은 좀 더 성숙된 정치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한 기회를 제공할 책이 최근에 발간되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누가,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속에 이창곤 기자가 기획하여 《한겨레》에 연재된,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 대담을 수정·보완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국가비전, 분배전략, 성장전략, 사회민주화, 정치개혁, 진보와 보수의 미래논쟁 및 특별대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이 돋보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자, 지식인, 정치인, 시민활동가 등이 모여서 사회의 현안뿐 아니라 각 진영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을 과감하게 토론하고 또 서로의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분단체제에서 진보와 보수의 형성과정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고 그 속에서 양 진영의 사상, 이념, 정책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발생되는 중요한 걸림돌이 있다. 백낙청 교수가 이번 논쟁의 말미에서 지적하였듯이 “한국에는 제대로 된 진보주의자도 부족하고 정말 보수주의자로 인정할 만한 사람도 너무 적은 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한국현대사 60년의 과정에서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이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영역을 넘나들었다. 20대, 30대 진보적 지식인이 40대 이후 기성세대가 되면서 보수적으로 변모한다. “20대에 사회주의에 심취하지 않으면 감정이 메마른 것이요, 40대에 사회주의에 심취한 것은 어리석음 때문이다”라는 격언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유독 맞아떨어지는 이유는 바로 60년 가까이 이념적, 정치적, 지형적으로 남북이 갈라져있는 분단체제 때문일 것이다.
분단체제의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 보수와 진보는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한국현대사에서 진보와 보수가 형성되는 과정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부류로 해방 이후, 좌우 대립과 갈등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한 이념적 상흔은 태생적으로 진보와 보수 세력을 키워왔다. 당시 부모나 가족의 피해와 상처는 다음 세대를 감정적인 또는 극단적인 진보와 보수로 만들어왔다. 또 하나의 부류로 꾸준한 학습과 실질적인 경험 등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진보와 보수이다. 이들은 분단체제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나름대로 객관화하고 서구적인 이론과 틀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이념적 편린을 쌓아온 부류이다. 때로는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때로는 한국적이지 못하며 비현실적인 구도를 만들어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진보와 보수의 영역을 수시로 넘나들고 있는 이념적 부유(浮游)층이다. 지나치게 현실의 논리에 매몰되어 있으면서 진보와 보수를 자신의 출세와 영욕의 도구로 활용하는 지식인이나 정치인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진보와 보수의 상생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를 단편적으로 이 세 가지의 형태로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무엇이었는가가 아니라 현재 어떠하며 미래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이다. 모든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상적·이념적 틀이 현재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래야만 상호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의 안병직 교수나 진보의 백낙청 교수의 대담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자 동일한 출발점이다.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어떤 사안이든지 사실에 근거를 둔 운동과 논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논리나 이익을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선동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이 책의 논쟁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진보와 보수의 가치는 다르기도 하지만 때론 공통점이 존재하면 그 철학적 기반도 비슷하거나 하나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진보의 최장집 교수는 인권과 평등을 지켜주는 자유주의가 뒷받침된 민주화를 강조하고 있다. 보수의 안병욱 교수는 보수의 이념이 자유주의라고 하고 있다. 각자 사용하는 자유주의라는 용어의 개념적 차이가 존재할 수 있겠지만 분단체제 이후 우리 사회가 추구해 나가야할 가치를 모색하는 데 있어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다. 보수의 박세일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민주화·산업화 과정에서 권력투쟁형 정치가 중심이었다면 앞으로 국가경영형 정치로 바꿔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기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보수든, 진보든 국가경영의 맛을 봐왔다.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고 국가의 비전을 창출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또 치밀해야 하는지를 경험하였다면 이젠 더 발전된 연대와 상생의 길을 진보와 보수는 찾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보와 보수를 얘기할 때 ‘진정한’이라는 수식을 붙이곤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 중에서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가치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또 그 삶 또한 자신의 철학과 원칙에 맞는 길을 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지식인 뿐 아니라 정당이나 정치단체도 마찬가지다. 이는 곧, 아직 우리 사회가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구도 속에 정치문화가 형성되어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의 민주화를 고민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의 논점을 존중하는 진정한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 는 책을 통해 활성화되고, 분단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진보와 보수의 상생을 위한 매듭이 잘 풀리길 바란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처럼, 상생이 곧 진보와 보수의 시대적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