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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은 사회를 몸소 구현하라
김찬호 우리의 세세한 일상을 살피고 삶을 통찰하도록 돕는 글을 쓰는 그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로 있습니다. 펴낸 책으로는 『문화의 발견』 『사회를 보는 논리』 『도시는 미디어다』가 있습니다.
황폐한 마음의 풍경
몇 달 전 어머니가 입원하신 병실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데 어머니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나올 때가 많았다. 바빠서가 아니었다. 방 안에 틀어놓은 텔레비전 때문이었다. 여섯 명이 함께 쓰는 병실에는 늘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고, 주로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내용이었다. 배우들의 표정은 분노와 허탈과 냉소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이 내뱉는 말도 상대방에 대한 공격과 증오심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평소에 그런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는 나로서는, 그런 장면들을 잠시도 보기가 어려웠다.
병원에 들를 때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이런 드라마들은 환자 치유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방해가 될까. 나도 입원해봐서 알지만 하루 종일 병실에 있는 것은 엄청나게 지루하다. 그 무료함을 달래줄 만한 문화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구김살만 더할 것 같다. 물론 그런 정황을 냉철하게 묘사하면서 승화시킨 문학이나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작품들은 비극을 성찰하면서 인간의 카타르시스를 도와준다. 그러나 요즘 방송 드라마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즉물적이고 반사적인 감정의 폭발을 분별없이 쏟아낼 뿐이다. 치료가 몸과 마음을 두루 돌보는 일이라면 환자에게는 오히려 아름다운 음악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
그러한 미디어 환경은 우리의 사회와 일상을 함축적으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들은 우리의 의식과 인간관계가 투사된 것이다. 시청자들은 그 텍스트를 심심풀이 구경거리로만 보고 넘기는 듯해도, 그 효과는 의외로 크다. 거기에서 넘쳐나는 천박한 감정들에 우리도 서서히 중독되는 것이다.(병실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들도 평소에 그런 드라마들에 익숙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가족들 사이에 톡톡 쏘아붙이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는 습관이 몸에 밴다. ‘타인은 곧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서로를 통해 입증하고 실현하려는 듯 자꾸만 폭력적인 소통으로 치닫는다.
가족만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강화하는 듯하다.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이 갈수록 사라진다. 나는 그것을 도로에서 절실하게 느낀다. 자동차 운전자들이 울려대는 경적 소리와 난폭한 운전에서 우리의 황폐한 심성을 목격한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조금만 굼뜨게 운전하면 욕설을 퍼붓는다. 모두가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의 화약고를 가슴에 재워 넣고 있다가 신경질과 화풀이라는 총탄으로 연신 쏘아대는 모양새다. 그래서 우리 도시의 마음 풍경은 날로 흉흉해진다. 얼마 전 신문에 실린 장영희 교수의 칼럼을 읽고는 심하게 우울해졌다.
며칠 전 일이다. 우리 집 앞은 4차로인데 내 차가 길 건너편에 주차돼 차를 타기 위해서는 그 길을 건너야 한다. 출근하기 위해 여동생과 함께 길을 건너다 내 목발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면서 나는 길 위에 큰 대(大)자로 널브러지고 말았다. 놀란 동생은 비명을 지르며 나를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사이에 나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 양쪽으로 차들이 정지했다. 동생은 겨우 나를 일으켜 앉히고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자동차 한 대가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렸다. 자기의 진행을 방해하니 빨리 없어지라는 경고였다. 동생이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 운전자는 다시 신경질적으로 오랫동안 경적을 울렸다. 그때 맞은편 자가용 운전자가 내려와 동생을 도와 나를 일으켰다. 경적을 울렸던 그 차는 그 틈을 타서 잽싸게 떠났다. 낡은 포텐샤였고, 라 3××× 번호판이었다.(장영희 ‘내가 저 사람이라면’ <동아일보> 2008년 5월 16일)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그 운전자는 도대체 어디에 무슨 일로 가는 길이었기에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그렇게 대했을까.
결손사회의 비극
사회가 불안하다. 태안반도 기름 유출, 숭례문 화재, 새우깡 쥐머리, 소녀 유괴 살해, 초등생들의 성폭행, AI와 광우병…. 사회의 안전망이 붕괴되고 있다. 위험사회의 이론대로, 본디 문명이란 자연의 위험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풍요를 창출하기 위해 이룩한 것인데 이제는 문명 그 자체가 도리어 위험을 생산한다. 고도로 복잡해지는 테크놀로지와 날로 거대해지는 관리체계에서는 작은 실수가 엄청난 재난을 낳는다. 전문가들조차 예측은커녕 사후에 설명조차 하기 어려운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영해도 위험천만한 기계와 시스템인데, 거기에 각종 비리와 온갖 태만이 가중되면 언제 누구를 해칠지 모르는 흉기가 되어버린다.
이는 몇몇 전문가나 관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자체가 위험해지고 있다. 결손가정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 중 한 명 또는 모두 없거나 있더라도 제 구실을 못해 아이들이 방치되고 비정상적으로 자라기 쉬운 가정을 가리킨다. IMF 금융위기 이후 급증한 결손가정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런데 가정만이 문제가 아니다. ‘결손학교’ ‘결손사회’라는 개념도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학교가 제 구실을 못해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사회가 부실해서 개개인의 생활이 위협받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건실한 사회적 유대로 맺어지지 못하고, 치졸한 이기심의 동맹으로 왜곡될 때 사회는 심각한 결손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장영희 교수의 칼럼에는 또 하나 충격적인 일화가 나온다.
진석이네는 성남시 분당에 있는 회사 근처로 가기 위해 분당과 인접 지역인 광주의 H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아는 이웃이 없는 곳에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 아침에 진석이를 출근시키기 위해 휠체어에서 차로 옮겨 태우는 게 문제였다. 덩치가 있는 진석이에 비해 어머니는 몸집이 작고 왜소해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경비원이 도와줘서 진석이는 며칠 동안 무사히 출근할 수 있었다. 한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전체 주민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경비원이 진석이 개인의 고용인처럼 진석이를 돕는다고 불평했고, 관리소 측에 진석이 돕는 일을 계속하지 말라는 탄원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횡단보도에 넘어진 사람에게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댄 운전자는 어쩌다가 있는 정말 예외적인 사람이라 치고 넘어갈 수 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나 인간 이하의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여러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탄원을 낸 것이다. 자동차 운전자처럼 즉흥적인 반사 작용이 아니라 오랫동안 생각하고 의논해서 나온 반응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만일 그런 일이 생겼다 해도 주민들이 그렇게 나올까? 설령 일부 몰상식한 이들이 그렇게 대응한다 해도, 말도 안 된다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만류하는 주민들이 더 많지 않을까 애써 믿고 싶다. 칼럼에 나오는 그 아파트가 예외이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네와 이웃이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족 다음으로 중요한 토대인 지역사회가 심각한 단절과 소외의 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집이 재산 증식 수단으로만 여겨지면서 집들의 집합체인 마을과 그 안에서 형성되는 이웃관계의 가치는 퇴색되어왔다. 돈으로 당장 환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별 가옥만이 투자 내지 투기의 대상으로 여겨지면서 거주와 공동생활이라는 개념은 퇴색하고 만 것이다.
최근 서울 곳곳에 뉴타운 바람이 불면서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분 쪼개기’가 그것이다.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서면 기존의 가옥주들에게 분양권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노리고 기존의 큰 집 소유주들이 집을 허물고 다세대 주택을 지어서는 세대별로 분양한다. 곧 뉴타운 재개발 사업이 시행될 것이라는 미확인 정보를 흘리면서 높은 값에 팔아넘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뉴타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노후 주택 비율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다세대로 재건축을 하면 노후 주택 비율이 자꾸만 떨어지니까 재개발 전망은 점점 불투명해진다. 그 점을 알아차린 다른 주민들은 그런 건축을 허가해준 구청에 찾아가 농성을 하기도 한다.
개별 경제주체 입장에서는 매우 기민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전체적으로 비합리적인 결과에 이르고 마는 경우가 많다. 지분 쪼개기도 바로 그런 우매함의 전형이다. 한국 사회의 부실함은 바로 그러한 모순의 집적이 아닐까. 저마다 개별적이고 단기적인 이익을 쫓아 민첩하게 움직이는데,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어이없는 손실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리막길에 발견하는 것
어느 미국인이 인디언 시장에서 양파를 파는 상인에게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요?”
“10센트요.”
“스무 줄을 다 사면 얼마요?”
“다 팔 수는 없소.”
“왜 못 판다는 거요? 양파 팔러 나온 게 아니오?”
“아니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에 나와 있는 거요.”
인디언 상인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 사람들이 어깨에 걸치는 모포,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페드로와 루이스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얘기하는 걸 사랑한다오. 친구들 만나는 걸 사랑한다오. 이것이 내 삶이오. 바로 이걸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린단 말이오.”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에 나오는 이야기다. 모든 것이 수단화되고, 삶 그 자체도 도구로 전락해버린 우리 현실에서 인디언 상인의 태도는 큰 깨우침을 준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돈과 권력, 높은 학식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게 없다고 행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자기를 정당하게 사랑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충만하게 누릴 줄 아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 넉넉한 자리에 타인을 초대할 때 관계 맺기와 소통의 즐거움이 깃들 수 있다.
지난해 청주의 한 임대 아파트 화단에 팻말 하나가 세워졌다. ‘이 꽃들을 살려주세요.’ 내막은 이러했다. 수도요금이 밀린 주민들이 점점 늘어나 단수(斷水)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수도국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화단에 꽃을 심고 그 팻말을 붙이기로 한 것이다. 주민들이 계속 요금을 체납하면 수도가 끊기고 그렇게 되면 이 꽃들이 말라죽을 테니 도와달라는 애원이었다. 다행히 주민들은 그 메시지를 너그럽게 받아들여 밀린 요금을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듯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섬세하게 읽어내는 능력이다.
잘 산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쉬운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기를 연마하지 않으면 천박한 풍조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키워가지 않은 채 외형적 조건을 부풀리는데 골몰할 때 인생은 저속해진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급속한 질주 속에서 우리는 그 능력을 고갈시켜왔다. 그리고 고공행진으로 이어가던 경제성장이 느닷없이 추락하자 무엇으로 삶을 수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한 중년 남성들이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 시간을 곤혹스러워하고 일상이 공허해지는 것도 그와 비슷한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내려갈 때 / 보았네 / 올라갈 때 / 보지 못한 / 그 꽃’ 고은 선생의 ‘그 꽃’이라는 시다. 인문학이란 바로 그 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성장과 희망의 오르막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좌절과 낙심의 내리막길에서 새삼 눈에 들어오는 존재의 의미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원점으로 인생을 차분하게 조감하는 시공간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다. 위 시에 대해 이문재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은 다 아시리라. 등산은 하산에서 완성된다. 집에 도착해 등산화 끈을 풀어야 등산은 끝난다. 산정에 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하면, 그것은 등산이 아니다. 조난이다. 산을 오를 때는 꽃이 보이지 않는다. 정상이 꽃이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려는 내 의지, 내 체력이 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 그 꽃은 져버린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오르막길만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와 젊은이만 있다. 올라야 할 정상만 있다. 마흔 줄에만 들어서도 곳곳에서 찬밥 신세다. 내리막길에는 안내판도 없다. 진짜 꽃은 홀로 내려오는 하산길에 피어 있다. 그런데 난감하다. 내리막길에서 발견한 이 꽃, 이 꽃을 누구에게 바치랴.
지금 한국인들을 짓누르는 강박은 무엇인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야망이다. 남부럽지 않은 자리에 올라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오기 같은 것이다. 그것이 그동안 급속한 경제성장의 에너지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 신화가 끝나고 어쩔 수 없이 내리막길에 들어선 마당에 인생관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패배와 낙심도 삶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자기와 타인의 나약함을 보듬어 안는 측은지심이 요구된다. 유능함과 무능함 사이의 좁은 거리를 확인하면서 삶에 보다 겸허해져야 한다. 하산길에서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열어야 한다.
일상에 격조와 창의를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었다.” 정부 조직개편 과정에서 해체된 부서 직원들이 남긴 말이다. 아무런 소신 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다가 밀려난 신세를 자탄하면서 그동안의 모습을 문득 되돌아본 것이다. 영혼이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자기존엄 같은 것이다. 거대한 관료체제 속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감은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공무원뿐이겠는가.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 직장 앞에 줄서 있는 청년들의 절규다. 대학 앞에 줄서 있는 청소년들의 영혼은 무사할까. 주부나 노인들의 경우는 또한 어떨까.
사람은 사람에 의해 성장한다. 어린 세대는 기성 세대가 이룩해놓은 삶의 터전에서 자라난다. 어른들의 보살핌과 지지를 받으면서 인격을 형성하고 사회적인 자아를 빚어간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그 기본 토대가 붕괴되어가고 있다. 생명이 온전하게 영위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망에 자꾸만 균열이 생긴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협동과 배려로 자연스럽게 확보해온 생활 조건들마저 이제 돈으로 구매해야 하는 지경이다. 그 재화의 획득을 위해 더욱 각박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고, 그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점점 혹독한 성장기를 보내야 한다. 그럴수록 주변 사람들을 더욱 돌아보지 않게 되고, 사회적 호혜의 기반이 허약해질수록 권력과 화폐를 향한 질주가 드세진다. 끊임없는 악순환이다.
일상을 즐겁게 창조하고 평온하게 유지하는 마음의 자원이 우리에게 얼마나 남아 있는지 점검해볼 일이다. 가학적인 대사로 가득 찬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권태를 견디지 못할 만큼 천박하고 공허해진 내면을 직시하자. 무분별한 자극과 정보로 무료함을 잊으려는 도피, 일탈적인 욕망에 시간을 내맡기고 싶은 충동, 요행이나 대박 또는 탈법으로 인생 역전을 꾀하려는 탐욕, 타인 위에 군림하기 위해 온갖 책략을 동원하는 권모술수…. 이런 질곡들이 개인의 삶을 비틀고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린다. 치유의 길은 있는가. 우리의 심성에 깃든 깊은 병리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집단적으로 감염되었기에 쉽게 자각되지 않는 증세를 알아채고, 조용히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재생의 힘을 얻을 수 있다.
GDP로는 꽤 높은 등수를 차지하지만 삶의 질은 바닥인 것이 한국의 자화상이다. 한국의 직장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일하지만, 일에 대한 흥미와 만족도는 가장 낮다. 인간성장 없이 경제성장에만 매달려온 결과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기존의 경제수치로 포착되지 않는 비시장적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몰골은 더욱 처참해질 것이다. 당장 돈으로 환산되지 않지만 삶과 경제에 필수불가결한 무형의 자산을 제대로 파악하고 보존해야 한다. 문화와 역사, 공통의 가치와 도덕, 타인과 사회에 대한 믿음, 심미적 센스, 생태학적 다양성 등이 더 이상 고갈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이제 성장의 개념과 패러다임이 달라져야 하고, 교육도 지속가능한 삶이라는 비전 위에 재구성되어야 한다.
결손사회를 복구하는 것은 기나긴 작업이다. 무너지는 것은 금방이지만 세우는 것은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그 건설은 여러 차원에서 병행되어야 한다. 정치의 기틀을 바로 잡고 시민사회의 기율을 수립하는 것, 경제 윤리를 투명하게 정착시키고 교육의 본분을 올곧게 실현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일상의 변화와 맞물리지 않으면 안 된다. 업무, 가사, 여가, 구매, 대화, 양육, 부양 등 매일의 경험 속에 격조와 창의를 심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빚어내는 기쁨의 에너지로 삶의 자리가 하나둘 변모해갈 때, 아이들에게 살 만한 세상의 부피는 그만큼 커질 수 있다. 간디의 한 마디가 새삼 울려온다. “당신이 보고 싶은 세계를 몸소 구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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