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공생애의 본격적인 사역은 갈릴리해변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삼으시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시는 사역을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는 제자 후보생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Follow me!>.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부르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오랫동안 <제자도>(discipleship)라고 불러왔습니다. '제자'란 말은 본래 희랍어의 mathetes라는 말에서 나온 말로 '배우는 자'(learner)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제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배우고자 평생을 통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뜻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께서'시몬 베드로와 안드레'(형제)를 부르시고 이어서 '야고보와 요한(형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과 본문이 언급하는 몇몇 제자들과의 만남 그리고 부르심이 이루어진 장소가 '아름다운 갈릴리'였다고 기록합니다.(갈릴리는 키네렛-해변이라는 뜻, 게네사렛, 디베리아스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움/길이 21km, 폭 13km, 둘래55km, 수심40km, 호수/정경)그래서 오늘의 우리도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갈릴리 마을 숲속에서 주님 열한제자 다시 만나시사" 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남은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갈릴리 어부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냥 갈릴리바다에서 고기잡이로 생을 마칠 그들이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 동료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며 갈릴리의 어부들을 생각에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갑자기 떠오른 시 한편이 있었는데 김춘추의 시 "꽃" 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갈릴리의 단순하고 우직한 삶을 살던 어부들, 그러나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들은 천국의 꽃이 되고 어두운 세상에 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을 소집하는 소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던 그분이 지금 여러분과 저의 이름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21세기 그의 제자로 삼고자 함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갈릴리해변이 아닌 서울과 분당, 수원과 수지의 아파트 정글에서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의 제자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1, <예수의 제자도> 의 구도는 공동체로 출발을 합니다.
제자와 유사한 단어 가운데 '도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apprenticeship'이라 부릅니다. 도제는 한 사람의 스승이 많지 않은 한 두명이 따르는 자를 선택하여 그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제훈련>방식이 아닌 <제자 훈련>방식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는 12제자를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공동체 훈련이었고 단순한 기술만이 아닌 인격과 삶을 전수하는 의미에서 도제 훈련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배울뿐만 아니라, 서로서로의 부딪침을 통해서 서로를 다듬고 빚어가면서 서로서로 격려하며 사랑하면서 서로를 세워가는 가치를 중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교훈에는 특별히 "서로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서로는 서로 사랑하라"고 자주 권면하시고,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 바울도 "서로를 용납하라"고 "서로를 용서하라","서로를 권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12명이라는 공동체의 구도안에서 그들이 제자도를 배워가는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또한 12명으로 구성되는 목장을 제도화하고 목자들의 안내와 교제 안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도록 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금년 한해도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목장으로 다시 깊이 들아가 서로를 챙기며 서로를 세워주는 진정한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것만이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고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가감을 배우는 진정한 제자도의 훙련의 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최인호는 최근 그의 에세이<인연>이란 책에서 인간관계를 통한 인격의 빚어짐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를 합니다. 한 문단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이다, 이 별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소멸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이 신의 섭리를 우리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이 인연이 소중한 것은 반짝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빛을 받고 너는 나의 빛을 받아서 되쏠수 있을별들은 비로소 반짝이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한것 같아도 혼자서 우리는 결코 훈련되지 않습니다. 함께 하면서 기도를 배우고 함께 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함께 하면서 우리는 섬김을 배웁니다.그래서 불편해 보여도 목장 공동체내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훈련이 중요합니다.
2,<예수의 제자도>의 본질은 영혼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 명령과 약속이 있습니다. 명령이 무엇입니까? "나를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약속은 무엇입니까?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를 따라 가는 궁극의 삶의 궁극적인 결과는 사람을 낚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낚는 사람을 우리는 전도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후일 이 땅에서의 그의 마지막 분부를 통해 이 명령으로 "가서 모든 족속<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나의 제자를 삼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제자 디모데에게 딤후4:5에서 마지막 유언을 어떻게 남깁니까?"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참으로 살고 있다면 내 영향을 받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 훈련의 궁극적인 테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본질은 영혼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예수의 제자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믿음의 영향을 받아 구원받는 사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것을 의심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제자 삼는 삶을 날마다의 일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전도는 일년에 한 번 이웃 사랑 축제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그 때 주께로 인도할 영혼들을 만나고 사귀는 일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VIP 리스트'를 지금부터 준비하십시오. 전도가 너무 힘들다고요? 그러나 함께 전도하도록 주께서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주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략을 세우고 함께 할 분담을 통해 만남의 계획을 세우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목장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3,<예수의 제자도>의 실현은 허뇨신적 희생을 통해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모두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기 위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아무런 대가가 없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피흘려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따르고 영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자, 처음 제자들은 어떤 대가, 어떤 희새의 값을 치러야만 했을까요?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베드로와 안드레)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21절-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