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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허경진*1)
【국문초록】
문인의 한평생을 살펴보려면 문집이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문집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아, 그림이나 서첩
(書帖) 같은 자료를 통해서 그의 생애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홍이상의 작품을 문집 밖에서 찾아보려면 시축(詩軸)과 간찰첩(簡札帖)을 먼
저 살펴보아야 한다.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 뿐만 아니라 모당의 세 차례 연
행(燕行)에 함께 다녀왔던 문인들의 문집이라든가 이 시기 간찰첩들이 제1차 검
토 대상이다. 예를 들면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된 근묵(槿墨)에 모당의
유묵이 실려 있고, 연세대학교 간찰집에도 실려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모당선생유묵(慕堂先生遺墨)에 40여점의 한시와 간찰이 실려 있는데,
한시는 연행(燕行) 시기에 지은 시가 대부분이다. “가모선생친필사십장(可慕先
生親筆四十章)”이라고 했으니(<그림 6>), <행장(行狀)> 첫 줄에 “공의 처음 이
름은 인상(麟祥)이었고, 자는 군서(君瑞)였으며 호는 가모당(可慕堂)이었다”는
기록과도 들어맞는다.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에 갔던 시기의 편지라서 병부상서 석
성(石星)과 관련된 내용도 보인다. 이 유묵(遺墨)이 홍이상의 친필로 확인되면
작품이 많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생애를 밝히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훌륭한 집안에 태어났기에 많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기보다는, 율곡의
말처럼 한미한 가운데 태어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높은 벼슬에 올랐으므로 그림
도 많이 그려지고 훌륭한 집안을 일으켰다. 재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본디부터
중망이 있었고”, “단정하고 방정한 선비”인데다, 오랫동안 명망을 쌓은 노성한 관
원이었기 때문에 그는 다양한 계회(契會)를 주선하여 많은 그림을 남길 수 있었
*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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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람 모으기를 좋아했던 홍이상이 계회(契會)를 결성하고, 즐거운 모임을 오
래 기억하기 위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모당이 지방 수령으로 나갔을 때에 동료들이나 동방(同榜)들을 불러모아 계회
를 결성하고 그 모임을 그림으로 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거시험에 응시하
는 이유는 집이 가난한데다 아버지가 병들었기 때문이었고, 모당이 수령으로 나가
려던 이유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춘천부사, 안동부사, 청주목사로
나아가 어머니를 효성껏 모셨는데, 어머니만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즐거
워하였다. 모당이 주선한 두 차례 동방(同榜) 계회(契會)도 결국은 어머니를 위
한 잔치였다.
홍이상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공신(功臣)에 들지 못했지만, 공신보다 더 많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그 즐거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계회도를 그리게 하다보니, 결국은 가장 행복하게 한평생을 보냈던 사대부로
남들에게 인정받아 첫 번째 평생도(平生圖)의 주인공까지 된 것이다.
핵심어: 홍이상, 모당, 평생도(平生圖), 계회(契會), 모당선생유묵(慕堂先生
遺墨)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33
차례
1. 문집 정본화작업의 필요성
2. 그림을 통해본 모당의 한평생
3. 모당의 한평생에 왜 그림(기록화)이 많이 남게 되었는가?
4. 맺음말 :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
1. 문집 정본화작업의 필요성
문인의 한평생을 살펴보려면 문집이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모당
(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한평생을 살펴보면서 “그림과 작품을
통해” 보려는 것은 문집이 온전치 않기 때문에 그림으로 보완하려는 것이다.
모당의 시문은 시집 1권, 문집 1권이 문중에 전해져 왔는데, 1793년 모당
에게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린 것을 계기로 후손들이 문집 간행을 논
의하였다. 6세손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발문에, “(후손들이) 집안
에 전해오던 시집과 문집 각 1편을 교감하고 여기에 세계(世系), 연보(年
譜), 제문(祭文), 만사(挽詞), 언행록(言行錄), 비지(碑誌)와 모당의 증손
만퇴당 홍만조(洪萬朝, 1645~1725), 7대손 홍낙순(洪樂舜)이 수집한 자
료에서 뽑은 유사(遺事)를 합하여 3권으로 편차하여 판각(板刻)에 부쳤
다.”1)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간행한 문집은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필사본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811.98/홍이상/모-필)과 13
대손 홍병희(洪丙熹)의 가장본(家藏本) 등 두 종류가 있는데, 모두 필사
경위와 연도가 분명치 않다. 연대본은 후손의 가장본에 비해 제목의 주석
1) 遂校讎家傳詩文各一編。 附以世系年譜。 繼之以祭文挽詞言行錄碑誌。 而又採遺
事於曾孫晩退堂○○及七代孫樂舜所蒐輯者。 合成三。 付之剞劂。 -洪良浩, <慕
堂遺稿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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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세하며, 홍양호의 발문, 언행록(言行錄), <계유사마방중회도발(癸酉
司馬榜重會圖跋)>, <송도사장원계회도서(松都四壯元契會圖序)>, 행장
(行狀), 묘표음기(墓表陰記) 등이 더 실려 있다. 후손의 가장본은 시집, 문
집, 연보 3권으로 되었는데, 연대본에 없는 <부제학계사(副提學啓辭)>,
연보 등이 실려 있다.
흩어져 있는 시문을 망라하여 역주 모당선생시문집이 간행되었지만,2)
더 많은 작품을 수집해 정본화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모당과 가장
많은 한시를 주고받았던 악록(岳麓) 허성(許筬, 1548~1612)의 악록집을
재편집하자는 논문에서 현존 문집에 실린 작품의 절반이 되는 분량을 더
찾아냈는데,3) 모당집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두 문집 다 오랫동안 준비
하여 편집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급하게 편집하다보니 두세 종의
시축을 바탕으로 하여 손쉽게 편집되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필자는 위의
논문에서 “홍이상이 편집한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에 실린 허성의 시
가 악록집에 68수 실렸지만, 13수가 더 실려야 한다”고 밝혔는데, 모당집
도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과 연행록(燕行錄), 그밖의 몇몇 시축을 바
탕으로 하여 편집되었으므로 아직도 찾아낼 작품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모당의 작품을 문집 밖에서 찾아보려면 시축(詩軸)과 간찰첩(簡札帖)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 뿐만 아니라 모당의 세
차례 연행(燕行)에 함께 다녀왔던 문인들의 문집이라든가 이 시기 간찰첩
들이 제1차 검토 대상이다. 예를 들면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된 근
묵(槿墨)에 모당의 유묵이 실려 있고(<그림 1>), 연세대학교 간찰집에도
실려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모당선생유묵(慕堂先生遺
墨)에(<그림 2>) 40여점의 한시와 간찰이 실려 있는데, 한시는 연행(燕
2)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상․하, 민속원, 2012.
3) 허경진, 「악록(岳麓) 허성(許筬)의 문집 재편집 시론」, 남명학연구 32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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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시기에 지은 시가 대부분이고(<그림 3>), 간찰의 수결(그림4)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에 실린 사진과 같아 보인다(<그림 5>). “가모선생친필사
십장(可慕先生親筆四十章)”이라고 했으니(<그림 6>), <행장> 첫 줄에
“공의 처음 이름은 인상(麟祥)이었고, 자는 군서(君瑞)였으며 호는 가모당
(可慕堂)이었다”는 기록과도 들어맞는다.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에 갔던 시
기의 편지라서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관련된 내용도 보인다. 이 유묵이
모당의 친필로 확인되면 작품이 많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생애를 밝히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左 <그림 1>
右 <그림 2>
<그림 3> <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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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그림 6>
<그림 7>
2. 그림을 통해본 모당의 한평생
한 인물에 관한 그림이 가장 많은 분 가운데 한 분이 바로 모당(慕堂)이
다. 작품을 통해 문인의 한평생을 돌아보는 연구는 많지만, 그림을 통해서
돌아보는 연구는 화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조선왕조 시기에 초상화를
포함한 기록화와 민속화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인물을 잘 그리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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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그런 면에서 모당에 관한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예외적이
면서도 조선 문화의 한 단면을 돌아보게 한다.
기록화의 대상이 되려면 우선 관직에 있어야 하고, 기록화의 주변 인물
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려면 벼슬이 높아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림을 남길
기회가 많아진다. 모당의 기록화는 연대가 확실한 계회도와 생애가 확실치
않은 평생도가 있다.
2.1. 돌잔치 그림
모당이 그려진 첫 번째 그림은 당연히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
~1806 이후)의 그림으로 알려진 「모당 홍이상 평생도」 가운데 「초도호연
(初度弧宴)」, 즉 돌잔치 그림이다(<그림 7>). 이 그림은 8폭 병풍인데, 마
지막 폭인 「회혼식(回婚式)」 상단에 “신축구월사능화우와서직중(辛丑九
月士能畵于瓦署直中)”이라고 적혀 있어, 김홍도가 와서(瓦署)에 근무하
던 1781년에 그린 것이 확인된다.
이 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한 사람의 한평생을 병풍으로
그려서 전하는 풍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원으로서 모범적으로 한평생을
살았던 홍이상이라는 인물과 김홍도라는 천재적인 풍속화가가 만났기에
우리 미술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평생도(平生圖)라는 그림 형식을 만들어
냈고, 김홍도 시기에 살았던 홍계희(洪啓禧, 1703~1771)의 평생도를 비롯
한 수많은 평생도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2.2. 문과 급제 그림
「모당 홍이상 평생도」 가운데 「혼인식」은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거쳐갔던 관혼상제(冠婚喪祭)의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이지만, 「응방식(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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榜式)」은 모당의 한평생을 좌우하는 시기의 그림이다. 9품으로 임용되던
다른 문과 급제자들과 달리, 모당은 장원으로 급제했기에 정6품 예조좌랑으
로 출륙할 수 있었고, 이후에 동방(同榜)들에게 연락하여 수많은 계회(契會)
를 주선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서 남달리 많은 계회도(契會圖)를 남기게
되었다. 이 그림 가운데 어사화(御賜花)를 복두(幞頭)에 꽂고 풍악을 집히
고 삼일유가(三日遊街)하는 모습은 모당의 대표적인 모습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의 풍속을 소개하는 그림으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2.3. 한림겸수찬시(翰林兼修撰時)
모당이 역임한 관직의 특징은 대사헌, 대사간 등의 청직을 두루 거치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자원했다는 사실인데, 청직의 대표로 한림
과 수찬 시절의 모당을 그렸다.
한림(翰林)은 왕의 명령이나 글을 맡았던 벼슬인데, 고려시대에는 한림
원에 정4품 한림학사가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예문관 검열(檢閱, 정9품)
을 한림이라 하였다. 모당은 정6품부터 벼슬을 시작했으므로 한림에 임명
될 기회가 없었으니, 33세 되던 1581년 여름에 홍문관 수찬(정6품) 시기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생각된다. 이 시기에 왕의 교서를 짓는 지제교(知製
敎)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청직에 올라 재상까지의 벼슬길이 보장되던
순간, 곧바로 6월 8일에 찬성공의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지내며, 모당(慕
堂)이라는 호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부쳤다.
2.4. 계유사마동방계회첩(癸酉司馬同榜契會帖)
모당은 54세 되던 1602년 6월 안동부사(정3품)로 좌천되었지만,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포상을 받았으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39
기 위해 계유년(1573) 사마시(司馬試)의 동년(同年) 가운데 영남 고을의
원(員)과 안동에 사는 13명 및 호남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까지 모
두 15명을 모아 안동부 관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모당선생연보>에서
당에 올라 절하고 춤을 추니, 늙으신 어머니는 얼굴이 환해 지셨다. 거
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밤이 깊도록 지냈는데, 이것도 모자라 촛불을
밝혀 들고 놀았다. 부로(父老)들이 모두 모여서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또의 효성은 인간세계의 성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 일을
그림으로 그려서 병풍을 만들고 관찰사 이시발에게 발문을 지으라고 하
니, 공의 아버님도 또한 계유년 시험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
기 때문이다.4)
라고 기록한 것처럼, 경상감사 이시발(李時發)의 부친 이대건(李大建, 1550
~?)도 계유년 사마시에서 진사(進士) 2등, 7위에 합격하였으므로 연회가
성대해졌다. 이 그림은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가 재임중에 수집하여 그 동안 국내에 전해지지 않다가, 야마구치 현립대학
(山口縣立大學) 도서관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에 소장되어 있던 유물
98종 136점이 1996년 경남대학 박물관에 기증되면서 국내에 공개되었다.
관아의 별채 앞에 친 천막 아래 안동부사 모당의 모친을 중심으로 왼편
에는 사모관대 차림의 9명이 앉았는데, 아마도 안동부사 홍이상, 경주부윤
이시언, 신령현감 채길선, 비안현감 유위, 영주군수 이람, 전 대구부사 김구
정, 함양군수 고상안, 성주목사 신경진, 종사랑 금복고로 생각된다. 오른쪽
으로는 선비들이 평상복인 도포와 흑립 차림의 8명으로 나란히 앉았으니,
벼슬에 오르지 못한 동년들인 듯하다. 안동부사인 모당이 주인공이 아니라,
모당의 모친이 주인공으로 그려졌다.
4)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하권, 민속원, 2012, 5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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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모당이 57세 되던 1605년에 참판 한준겸(韓浚謙)이 “우리 무리 가운데
늙으신 부모가 있는 사람은 각기 한번씩 잔치를 베풀어서 각각 어머니를
받들어 모시자. 백세 부인을 모시고 헌수하는 술잔을 올리는 것은 매우 성
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경연(經筵)에서 임금께 아뢰고, 팔도에 잔
치에 필요한 것을 청하도록 하니, 임금께서 허락하시고, 이에 음악도 내려
주셨다.5) 4월에 장흥동에서 베푼 잔치 그림이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
朝諸宰慶壽宴圖)이다.
계원은 13명이었는데,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가마를
타고 그 대부인을 모시고 오고, 여러 부인들과 여러 자제들이 각각 그 뒤를
따라왔는데, 벼슬의 순서대로 동서의 벽에 나누어 앉았다(그림15). 예의가
질서정연하였고, 성악이 번갈아 연주되니, 원근에서 모여서 구경하던 사람
들이 모두 말하기를, “태평성대의 성대한 일이고, 세상에 보기 드문 기이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2.6. 송도유수도임식(松都留守到任式)
모당이 64세 되던 1612년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9월에 개성유수(종2품)로 부임할 때의 그림이다. 평생도에서 이 이후의 그
림들은 모당의 생애와 직접 관련이 없다. 성공한 사대부의 예로 병조판서,
좌의정, 회혼식 등을 더 그려 넣었을 뿐이다.
2.7. 사장원송도동료계회도(四壯元松都同僚契會圖)
마침 개성부에는 장원 급제한 인물이 4명 근무하고 있었다. 모당이 이듬해
5) 윤호진, 같은 글, 55면.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41
<그림 8>
(1613년)에 이들을 초청하여, 중
국 사신의 숙소였던 태평관(太平
館)에서 용두회(龍頭會)를 베풀
었다. 태평관 그림 밑에 4장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였다. 이 그림
에는 쪽지가 붙어 있는데, 태평관
가운데 앉은 인물이 모당이고, 그
주위에 경력(經歷) 이시정(李時
楨), 도사(都事) 윤영현(尹英賢), 교수 차운로(車雲輅)를 동쪽에 그렸다
(<그림 8>).
이 그림 밑에는 모당의 5대손인 홍명보(洪命輔, 1678~1737)의 호 심재
(心齋)와 주문방인(朱文方印) 1과(顆)가 찍혀 있어, 이 시기까지 모당의
후손이 간직하다가 1917년 10월 경성(京城)에 사는 이성혁(李性爀)이 박
물관에 판매했음을 알 수 있다.6)
“송도에서 동료들끼리 모여서 계를 하는 그림은 사시의 경치를 구별하
여 각각 한 수의 시를 짓고는 이어서 그림을 그려서 각각 병풍으로 하나씩
갖도록 하였다.”7)고 하지만, 이때 만든 병풍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송도용두회첩(松都龍頭會帖)> 해제에 의하면, 모당의
7세손 홍명한(洪名漢, 1724~1774)이 160년이 지난 1772년 6월에 두 벌의
계병(契屛)을 제작하였다고 한다(<그림 9>). 한 벌은 홍명한이 소장하고,
한 벌은 차운로의 후손인 차석오(車錫五)가 소장하였다. 그가 송도 토박이
였기 때문이다.
6) 柳玉暻, 國立中央博物館 所藏 <松都四壯元契會圖屛> 硏究.
7) 윤호진, 같은 글, 7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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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그림 9>
▼右 <그림 10>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송도사장원계회도병(松都四壯元契會圖屛)
은 유옥경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는데, 그림을 확대해보면 모당이 북쪽에
앉아 있고, 이시정, 윤영현, 차운로 순으로 마주보고 앉았다(<그림 10>).
제1폭은 1612년의 송도 사장원 계회 장면을 재현하고 있으며, 그 다음
폭부터는 각 폭마다 <화곡심방(花谷尋芳)>, <박연관폭(朴淵觀瀑)>, <만
월회고(滿月懷古)>, <지족문종(知足聞鐘)> 등 개성 일대의 명승을 봄, 여
름, 가을, 겨울로 나눠 그리고, 4장원 각자의 칠언율시를 써 넣었다. 첫 번째
그림이 모당의 시가 실려 있는 <화곡심방(花谷尋芳)>이다.
3. 모당의 한평생에 왜 그림(기록화)이 많이 남게 되었는가?
3.1. 집안이 좋았는가?
그림이 많이 남으려면 나라에서 공신도(功臣圖)를 그려줄 정도로 공을
세웠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집안이 좋아야 출세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43
하기에도 쉽다. 풍산 홍씨는 부마와 왕비(세자빈)를 여러 번 배출한 문중이
니 당연히 훌륭한 집안이다. 그러나 모당 당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부친은 부사직(副司直, 종5품 군직)을 지낸 홍수(洪脩)이고, 모친은 문
경 백씨로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종9품)을 지낸 백승수(白承秀)의 따님
이니, 모당이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쉽게 출세했다기보다는, 모당이 훌륭
한 집안을 일으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연보(年譜)에서 모당이 과거시험을 보거나 외직에 나갈 때마다 부친이
나 모친 봉양을 이유로 설명할 만큼, 집안 살림이 어려웠다.
계유년. 공의 나이 25세. 식년(式年) 진사에 합격하였다. 집은 가난하고
부모는 병이 들었기 때문에 뜻을 굽혀 시험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합격하
였다.8)
기해년. 공의 나이 51세. (줄임) 7월에 공의 대부인이 연로하시고 집은
가난하여, 힘써 외직에 보임될 것을 구하려고, 소를 올려 어머니 모시기를
구하였는데, (줄임) 상께서 그 사정을 불쌍히 여기셔서 춘천부사에 임명하
셨다.9)
율곡이 전형(銓衡)으로 있을 때 공을 전랑(銓郞)에 의망하였는데, 어떤
동료가 “공의 가세가 한미하여 어렵다”고 하자, 율곡이 말하기를, “한미한
가운데 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더욱 귀하다”라고 하며, 끝내 추천하였다.10)
모당이 21세에 결혼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는데, <행장>에서는 그 무
렵의 가난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8)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하권, 「모당선생연보」, 21면.
9) 윤호진, 같은 글, 43-45면.
10)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하권, 「행록」, 171면.
144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공의 선조는 여러 세대 동안 제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여 가업이
영락하여 거의 지탱하기 어려워서, 두 아우와 두 누이가 모두 결혼을 하지
못하였다. 공은 이를 민망히 여겨서 그들이 성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병을 간호하는 여가에 몸소 두 아우를 데리고 부지런히 글 읽는 과제를
주었다.11)
그가 훌륭한 집안에 태어났기에 많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기보다는,
율곡의 말처럼 한미한 가운데 태어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높은 벼슬에
올랐으므로 그림도 많이 그려지고 훌륭한 집안을 일으킨 것이다.
3.2. 결혼을 잘했는가?
조선시대 한양 성내에 주택이 모자라, 많은 사대부들이 처가살이를 하였
다. 모당 경우에는 외가인 문경 백씨도 한미한 집안이었으며, 처가 또한
특별한 집안이 아니다. 21세에 안동 김씨 집안에 장가들었지만, 장인 김고
언(金顧言)은 선무랑(宣務郞, 종6품)에 그쳤을 뿐이고, 특별한 인물이 없
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김씨 부인이 시집와서 홍씨 집안을 일으켰다.
부인은 천성적으로 유순하고 현숙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재주와 식견이
남달라 부녀자의 일을 배우지 않고도 잘하였다. 그래서 부모가 늘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은 필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공에게 시집온 뒤
로는 어른과 지아비를 예로써 섬겼다. 공의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부인은
몸소 다듬이질하고 불을 때었으며, 손수 음식을 장만하였으나, 군색한 기
색을 보이지 않았다.12)
11)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하권, 「행장」, 91면.
12)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하권, 「대사헌홍공신도비명」, 115면.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45
결혼을 잘했는가?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과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씨 부인이 집안을 일으켰으니, 결국 결혼을 잘한 셈이다.
3.3. 높은 벼슬을 했는가?
모당은 재상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모당선생연보>에는 모당이
재상 후보로 언급된 곳이 몇 군데 보인다.
신묘년. 공의 나이 43세. (줄임) 임금께서 삼공(三公)에 명하여 재보(宰
輔)에 합당한 사람을 뽑으라 하였다. 당상관 가운데 뽑힌 사람이 여섯 있
었는데, 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이 함께
뽑혔다.13)
임자년. 공의 나이 64세. (줄임) 한음 이덕형이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재상은 모름지기 유신 홍아무개를 써야 한다. 경연에서 논하는
바가 우리들은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14)
모당은 재상 후보로 인정받았지만, 결국 재상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상이라고 해서 그림이 많이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모당의 벼슬 이력을
정리해보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띤다.
권력의 핵심이며 재상 진출의 지름길이라는 청요직, 그것도 대사간(大
司諫), 대사헌(大司憲), 대사성(大司成) 같은 청요직의 책임자에 자주 오
르거나 지방 수령을 자주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대사헌이나 대사간은 법치
주의 왕권의 핵심이지만, 위험한 자리이기도 했다. 왕에게 견책을 당하거
나 반대파에게 탄핵 당할 위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13)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하권, 「모당선생연보」, 33면.
14) 같은 글, 69면.
146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모당의 언관(言官) 활동이 활발했던 41세 시기의 연보를 보면 그가 얼마
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는지 알 수 있다.
을축년. 공의 나이 41세. 봄에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고, 또 의정부 사
인,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사인에 체직되어 제수되었다. 또
사간원 사간에 이배되고, 사복시 정에 체직되어 제수되었다. 가을에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줄임) ○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지난 뒤
에 공이 사간이 되었는데, 옥석(玉石)이 함께 타는 화가 있을까 염려가 되
어 헌납 백유함과 더불어 쟁변하여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발(李
潑)형제를 탄핵하여 논하며, 대항하는 말하기를 꺼리지 아니하니, 전에 믿
지 못하던 사람들이 밝고 굳세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의 처사
에 감복하였다. ○ 정여립의 옥(獄) 때에 문사랑(問事郞)이 되었다.15)
일년에 몇 차례나 벼슬이 바뀌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사간원이나 서헌부
에 임명되어서 바른 말을 하였다. 대사헌에 오른 모당이 억울하게 죽은 최
영경을 신원할 정도로 목숨을 걸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지만, 여론에 책임
을 지고 대사간이나 대사헌 직책을 물러나려 할 때마다 광해군은 사직하지
말라고 붙들었다.
행 대사간 홍이상이 사직하니, 이렇게 답하였다. “경은 선왕조의 경악
(經幄)에 있었던 옛날 신하이다. 본디부터 중망이 있었으니, 이 시기에 간
원의 장관 책임은 경이 실로 적합하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16)
대사헌 홍이상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이렇게 답하였다. “차자를 살펴
15) 같은 글, 31-32면.
16) 광해군일기 즉위년 11월 14일 기사.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47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지금 시기에 사헌부의 장관은 마땅히 단정하
고 방정한 선비에게 제수해야 하는데, 경이 실로 이 자리에 적합하니, 사
직하지 말고 일을 보살피라.”17)
대사간 홍이상이 사은숙배를 지체한 것과 병 때문에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사정으로 인혐하니 이렇게 답하였다. “경은 오랜 명망이 있는 노성
(老成)이므로 간쟁(諫諍)의 장관 자리에 합당하니,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힘써 수행하라.”18)
모당이 오랜 기간 동안 사간원과 사헌부의 장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본디부터 중망이 있었고”, “단정하고 방정한 선비”인데다, 오랫동
안 명망을 쌓은 노성한 관원이었기 때문이다. 재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본디부터 중망이 있었고”, “단정하고 방정한 선비”인데다, 오랫동안 명망
을 쌓은 노성한 관원이었기 때문에 그는 다양한 계회(契會)를 주선하여 그
림을 남길 수 있었다.
3.4.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계회도를 그리게 하다
모당홍이상평생도를 그리게 한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계
유사마동방계회첩(癸酉司馬同榜契會帖)이나 사장원송도동료계회도(四
壯元松都同僚契會圖)의 주체는 모당이다. 사람 모으기를 좋아했던 모당
이 계회(契會)를 결성하고, 즐거운 모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남아 있는 계회도는 주로 과거 급제와 관련되지만,
사간원(司諫院) 동료들의 계회 때에도 그림을 그리게 한 듯하다.
17) 광해군일기 즉위년 11월 28일 기사.
18) 광해군일기 4년 1월 10일 기사.
148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미원(薇垣)에 뽑힌 사람들 지금 시대의 최고인데
부끄럽게 재주 없는 사람이 오랫 동안 이름을 훔쳤네.
자리에 가까이 짝지어 앉아 조용하게 담소하고
갈래 길에서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했네.
달 밝은 한수의 북쪽으로 돌아가는 기러기도 끊어지고
가을 깊은 요서에는 피곤한 말도 더디다.
한 폭의 새로운 그림 뜻임을 알겠으니
펴보자 짐짓 그리운 마음 위로가 되네.
薇垣淸選最今時。 自愧菲才久竊吹。
密席偶成談笑穩。 臨歧因作去留悲。
月明漢北歸鴻斷。 秋盡遼西倦馬遲。
一幅新圖如有意。 披來聊復慰相思。- 諫院契軸 己卯
연세대본에는 “기묘년(1579)”이라는 소주가 붙어 있는데, 모당은 1579년
전시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다가 파직되었다. 실록이나 연보
에서 이 시기에 사간원 관련 기록이 없어, 간지를 잘못 기록한 듯하다. 모당
이 어느 직책으로 사간원에 근무하던 시기의 계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계축
에 시만 실린 것이 아니라 계회도(契會圖)도 실려 있어, 뒷날 그림을 펼쳐보
며 예전 동료들을 그리워하는 모당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19)
4. 맺음말 :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
모당이 지방 수령으로 나갔을 때에 동료들이나 동방(同榜)들을 불러모
아 계회를 결성하고 그 모임을 그림으로 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거
19) 임오년(1582) 사헌부 사간원 합동 계회도가 남아 있는데, 모당의 모습은 없다. 부친상
중이어서 벼슬에서 물러난 기간이다.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49
시험에 응시하는 이유는 집이 가난한데다 아버지가 병들었기 때문이었고,
모당이 수령으로 나가려던 이유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해년. 공의 나이 51세. (줄임) 7월에 대부인이 연로하시고 집은 가난
하여, 힘써 외직에 보임될 것을 구하려고, 소를 올려 어머니 모시기를 구
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의 노모가 올해 일흔 두 살입니다.
어려서부터 가업이 빈한하여 죽으로라도 끼니를 잇지 못할까 걱정하였는
데, 많은 식구들을 기르는 어려움은 오직 어머니만이 맡아 하셨습니다.”
(줄임) 상께서 그 사정을 불쌍히 여기셔서 춘천부사에 임명하였다. 부에
이르러 제일 먼저 학교를 일으키고, 효로 이치를 삼고 (줄임)20)
계묘년. 공의 나이 55세. (줄임) (안동부사) 쉬는 날에는 잔을 올려 대부
인의 장수를 빌었는데, 재롱을 떠는 사람이 앞에 가득하고, 음악이 공중에
크게 울리니, 어버이를 모시는 효성이 당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다.21)
정미년. 공의 나이 59세. 2월에 청주목사로 나아갔는데, 전후에 외임을
맡은 것은 다만 어머니를 받들기에 편하였기 때문이다. 고을을 다스리는
여가에는 반드시 음악을 베풀어서 헌수를 비는 술잔을 올리며 매우 즐겁
게 해드렸는데, 관청의 창고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고, 백성들이 즐겁게 일
에 종사하도록 하니, 떠나간 뒤에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22)
춘천부사, 안동부사, 청주목사로 나아가 어머니를 효성껏 모셨는데, 어
머니만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즐거워하였다. 춘천부사 때에는 백
성들에게 효로써 가르쳤고, 안동부사 때에는 백성들이 모당의 효성을 부러
워했으며, 청주목사 때에는 백성들이 즐겁게 일하였다. <선묘조제재경수
20)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하권, 「모당선생연보」, 44-45면.
21) 같은 글, 54면.
22) 같은 글, 56면.
150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는 그림 제목 자체가 여러 재상들의 어머니
가 장수하는 것을 축하하는 효자들의 잔치이지만, 모당이 주선한 두 차례
동방(同榜) 계회(契會)도 결국은 어머니를 위한 잔치였다.
임인년. 공의 나이 54세. (줄임) 6월에 안동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줄임)
10월 16일에 모여서 연회를 하였다. 계유년 사마시의 동년으로서 영남에
서 고을 원을 하는 사람 및 안동에 사는 열세 사람, 그리고 호남에서 소문
을 듣고 오랜만에 모인 사람 등 모두 15명이 안동부 관아의 뜨락에서 연
회를 하였다. 대개 공의 대부인이 당중에 계셨기 때문이다. 당에 올라 절
하고 춤을 추니, 늙으신 어머니는 얼굴이 환해 지셨다. 거문고를 타고 노
래를 부르며 밤이 깊도록 지냈는데, 이것도 모자라 촛불을 밝혀 들고 놀았
다. 부로(父老)들이 모두 모여서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또의 효성은
인간 세계의 성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 일을 그림으로 그려
서 병풍을 만들고 (줄임)23)
동방(同榜) 계회(契會)를 주선한 이유가 바로 어머니가 당중에 계셨기
때문이며, 동방들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그랬기에 “당에 올라 (어머니에게) 절하고 춤을 춘” 것이며.
부로들이 사또의 효성에 감탄하였고, 그 즐거움을 길이 전하기 위해서 그
림을 그려 병풍으로 만들었다. 원래는 병풍이었는데, 현재는 첩(帖)의 형태
로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그려주는 그림은 공신도상(功臣圖像)이 가장 영
예롭다. 모당은 공신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그 기회
를 상실하였다.
23) 같은 글, 50면.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51
임진년. 공의 나이 44세. (줄임) 4월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때 왜
구가 경성에 가까이 쳐들어와서 임금께서 해서로 떠나갔는데, 공이 어가
를 호종하였다. (줄임) 평양에 이르러 노모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핑계로
소를 올려 노모를 방문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시고 이어서 지나는
각 도에 명을 내려 길을 따라 호송하도록 하였다. 공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모시는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24)
이 이야기를 <행록>에서는 “임진왜란 때에 어가를 호종하여 용만(龍
灣)에 이른 뒤에 소를 올리고 어머니를 모셔왔는데, 이 때문에 호성(扈聖)
의 공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의주까지 선조를 모시고 피
난갔던 신하 119명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錄勳)했는데, 왜란 초
기의 힘든 피난길을 잘 모시고 다닌 끝에 평양에서 늙은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가 공신에 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행록>에서는 “선조가 평일에 사랑
함이 매우 극진하였는데, 끝내 경상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이 때문”25)
이라고까지 설명했다.
모당은 공신에 들지 못했지만, 공신보다 더 많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
다. 그 이유는 벼슬이 높아서도 아니고, 공신이 되어서도 아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그 즐거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계회도를 그리게 하다보
니, 결국은 가장 행복하게 한평생을 보냈던 사대부로 남들에게 인정받아
첫 번째 평생도(平生圖)의 주인공까지 된 것이다. 그 이후에 모당홍이상
평생도를 본뜬 평생도가 유행해, 여러 집안에 소장되었다. 모당의 후손이
김홍도에게 평생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한 것인지, 아니면 김홍도가 평생도
라는 새로운 그림 형태를 구상하면서 그 주인공으로 모당을 내세운 것인
지,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좀 더 확인해야 할 과제이다.
24) 같은 글, 33-34면.
25)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하권, 「행록」, 172면.
15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윤호진, 역주 모당선생시문집 상․하, 민속원, 2012.
허경진, 「악록(岳麓) 허성(許筬)의 문집 재편집 시론」, 남명학연구 32권, 2011.
柳玉暻, 國立中央博物館 所藏 <松都四壯元契會圖屛> 硏究.
논문투고일 : 2014. 10. 30. 게재확정일 : 2014. 12. 11.
그림과 작품을 통해본 홍이상의 한평생 153
Abstract
The Life of Hong Isang Through his Art and Writings
Hur, Kyung-jin*
26)
One’s collection of works is the important source in examining the life of a literati.
However, as the writings of Mo Tang(慕堂) Hong Isang(洪履祥, 1549~1615) are
presently not completely extant, his paintings and sketchbooks must supplement his
biography.
In order to find works outside of Hong’s writings, one must first examine his
letters and poetry, including not only Sŭnggasuch’angnok(僧加酬唱錄), but the writings
from his third diplomatic journey to Beijing with other emissaries and poetry from
this period. For instance, the Kŭnmuk(槿墨) in the Chon'gyŏnggak Library of
Sŏnggyun'gwan University and poetry scroll sat Yonsei University contain his
calligraphy while Korea University Library’s Master Mo Tang’s Posthumous Works
(慕堂先生遺墨) has around forty pieces of Classical Chinese poetry and scrolls, with
most of the poetry being written during his journey to Bejing. In the Forty Letters
of Master Ka Mo”(可募先生四十章), the first line of the biography states: “His first
name was Insang(麟祥), his courtesy name was Kunsŏ(君瑞), and his pen name was
Kamodang(可募堂),” which matches with what is recorded of Hong Isang. Written
while in Ming during the Imjin War, the letters also mention the Ming’s Minister
of Defense Shi Xing(石星). If this is confirmed as Hong’s, it will not only add to
his list of works but also aid in shedding more light on his life.
Rather than becoming the frequent subject of many paintings as the descendant
of a famed household, in the words of Yi Yulgok, Hong raised his impoverished
household into prominence with his fine character, numerous paintings, and rise in
the civil service. Although he did not obtain the post of Prime Minister,he “was by
naturepopular”, “an upright and well-groomed scholar,” and well-reputed and experienced
civil servant, organizing various fellowship meetingswherein he left behind many
paintings. A man who enjoyed the company of others, he formed many fellowships
* Yonsei univ.
154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which he had artists paint so that they would be long remembered.
Why did Hong holdfellowship meetings with his colleagues and civil service exam
taking peers as a provincial magistrate while leaving records of them in paintings?
Hong took the civil service exam because of his poor household and ailing father,
and went down to the provinces as magistrate to look after his mother. He served
his mother with utmost filial piety during his posts as governor of Ch’unch’ŏn, Andong,
and Ch’ŏngju County magistrate, but enjoyed not only the company of his mother
but that of the people. Indeed, the second fellowship gathering of his peers who took
the civil service exam with him was a feast in honor of his mother.
Hong did not become a merit subject due to taking care of his parents, but
instead became the main subject of many paintings. In the end, while being filial
and expressing that joy to posterity through the many paintings of his fellowship
meetings, he was recognized as the literati who enjoyed life most and the first to
be the subject of many genre paintings featuring it.
key words Hong Isang, Mo Tang, fellowship meeting (契會), life painting (平
生圖), Master Mo Tang’s Posthumous Works(慕堂先生遺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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