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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행병도통사(濟州行兵都統使) 최영(崔瑩)의 보고서
제주행병도통사 최영의 보고서 내용은 당시의 목호 토벌과 제주 해협을 오가는 선박들의 항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이므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홍무 7년(공민왕 23, 1374년) 7월 25일에 삼가 왕의 명령을 받고 황제의 명을 받들었더니 탐라의 좋은 말 2천 필을 간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탐라의 哈赤 肖古禿不花 · 石帖里必思 · 權萬戶 觀音保 등이 황제의 명을 어기고 말 3백 필만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이제 홍무 5년(공민왕 21, 1372년) 7월에 이미 조서로 명령을 받들은 바, 그 공문에 “탐라의 목자들이 버릇이 없고 제멋대로이니 그대로 모욕을 당할 수 만은 없다. 속히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고 죄를 물으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와 왕의 뜻을 삼가 받들어 관·군인 등을 거느리고 8월 12일에 포획한 왜선 3백 척에 분승하여 즉시 진도로 나가 行使(군을 거느린 여러 장수)들과 회합하였습니다. 所閑島(지금의 所安島)·甫吉島에 도착하니 역풍이 되어 24일에 이르러야 출항하였는데 때마침 악풍이 크게 불어 30여 척이 파손되었습니다. 추자도에 들어가서 수습하고 당월 28일에 출발하여 제주 명월포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호유하여 哈赤 목자들을 불렀는데 귀순치 아니하고 그들에게 보낸 왕의 명령서를 찢었습니다. 앞서 해안에 도착한 11척의 군인들을 모두 살해하였으며 또 목사 李夏生도 살해하였습니다. 마병과 보병을 모아 거느리었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명월촌에서부터 어름비(氷非) 지경, 밝은오름(明近吾音), 검은오름(今勿吾音) 지경, 새별오름(曉星吾音) 지경, 연래(延來) 지경, 홍로(洪爐) 지경에 걸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相拒交戰하여 백방으로 공격 토벌하였습니다.
사진 : 배염(배연)줄이, 제주큰동산, 2010.11.14.16:37, 제주서귀포시 법환동 최영의 목호 토벌 격전지
그 합적·목자들은 항거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니 범섬(虎島)으로 도망하여 들어갔습니다. 이에 군사를 보내어 포위하자 그 섬의 험한 벼랑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곧 肖古禿不花·石帖里必思·觀音保 등의 시체를 인양하여 목을 베어 뭇사람에게 보이었고, 합적 목자 答失蠻 등 101명을 생포하였습니다. 招撫하는 사이에 答失蠻 등이 다시 반역하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장 答失蠻 등을 함께 주륙하고 그 나머지 무리들과 본토 관민 등은 재차 초무하여 편안하게 살도록하였습니다.
삼가 이미 받은 왕명에 의하여 朴允淸을 목사로 삼고, 林 完을 안무사로, 金桂生·石天劍을 馬畜使로 삼았습니다. 판관 金仁桂와 梁大生·嚴孝忠 등으로 하여금 지키고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官馬 1천7백 필을 골라 관가로 도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악풍으로 인하여 명월포에 정박한 병선 40척이 돌에 부딪쳐 파손되었으므로 이에 싣고 갈 배가 적었습니다. 이 때문에 배의 수효가 부족하여 다만 말 930필 만을 현재 남아있는 배에 나누어 싣고 그 나머 지 770필은 안무사 林完에게 책임을 주어 관에서 수령하여 뒤따라 갖추어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當職(최영)은 9월 22일에 승선하여 제주를 떠났는데 火脫이란 해도에 이르자 역풍을 만나 명월포로 회항하였습니다. 다음 날(9월 23일) 다시 출발하여 추자도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10월 5일 추자도를 떠나 鷲島에 이르자 또 역풍를 만나 추자도로 회항하여 머물렀습니다. 당월 18일에 출항하였는데 또 악풍을 만났으나 진도 및 소한도·보길도 등에 도착하였습니다. 11월 초3일에 전라도 목포에 도착하여 해안에 정박하였습니다. 싣고 온 마필은 풍랑으로 인하여 익사하고 쓰러져 죽은게 연이어 93필이고 실제로 있는 것은 837필입니다. 이제 전후의 사실을 갖추어 보내오니 정황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 참고문헌
① 金奉玉, <원(元)의 지배 때 몽고인의 횡포>,『濟州道史硏究』3, 1994. ② 高昌錫, <元·明交替期의 濟州道-牧胡亂을 중심으로->,『耽羅文化』4, 1985. ③ 高昌錫, 『耽羅國史料集』, 新亞文化社, 1995. ④ 『高麗史』, 『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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