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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완주 대둔산(大芚山. 878m)을 가다.
글 쓴 이 牧 鉦 高 達 五
11월24일, 절기는 입동(立冬11/7) 소설(小雪11/22)을 지났건만 날씨는 포근하고도 고요하다. 사방은 어둑 어둑하여 하늘에는 지다남은 반달과 새벽 별(금성)이 흐릿하게 빛나도다! 밤늦게 비가 올 것이라 드니... 쬐끔은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간단히 조반(朝飯)을 들고는 이것 저것 산행 준비물을 챙기는데, 혼자서는 들기가 많아서 내자(內子)의 도움으로 출발지에 도착하니 홍현문님, 오정순님, 금부총무님 등이 먼저와 있으며, 뒤이어서 서부장님이 바쁜 걸음으로 도착하신다.
서로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정시(6:50)에 반고개를 출발하여 서남시장, 죽전사거리를 경유하여 칠곡 IC에서 최종 출발하니, 연변(沿邊)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시계(視界)가 멀지 못합니다.
차는 신나게 달려 구미 톨게이트(tollgate)에서 처음오신 세분을 더 태워서 옥천 방향으로 진행하니, ‘경부고속국도’는 비교적 한산합니다. 다가오는 머~언~ 山川의 풍광들은 일부는 잎떨어진 나목(裸木)으로, 또 일부는 오색단풍(五色丹楓)과 녹색(綠色)으로 수(繡) 놓아져서... 한폭의 동양화(東洋畵)를 보는 것 같으다!
‘김천휴게소’에서 간단히 조식(朝食)을 하고는 줄곧 내달아 옥천 IC에서 다시 17번 국도를 타고 전주 방향으로 달리니, 저만큼 대둔산의 웅장한 모습이 언~뜻 언~뜻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슴니다.
진산면(珍山面)에서 행정리로 돌아들어 출발기점에 이르니, 며칠전에 나린 눈(雪)의 잔설(殘雪)이 여기저기 보인다. 잎떨어진 나목(裸木)에는 찬서리가 내려 하얗게 얼어붙어 있으며, 산천(山川)은 고요하고 인적은 드물도다!
태고사로 오르는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이 잘 되어서 신작로(新作路)를 걷는 기분이 든다. 포장한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콜 타르(coal tar) 냄새가 약간은 느껴지며, 도로는 어찌나 곱게 다졌는지 반들 반들하다.
차는 오르기 좋겠으나, 등산하기에는 영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할 수도 없는 일이제! 이래저래 산천은 개발이라는 미명(美名)아래 훼손되고 있으니... 환경보존 보다는 개발이 더 편리 해서인가?
20여 분을 오르니, “금산 인삼축제” 와 더불어 “사진전”도 있었는지 노변(路邊) 나무에는 여러곳에 철거되지 않은 사진이 몇점 걸려있다. 얼마를 더 올라 잘 정비되어 있는 약수터에서 표주박으로 감로수(甘露水)를 한바가지 들이키니, 세속의 번뇌(煩惱)가 일시에 싹 가십니다 그려!
갈림길에서 태고사(太古寺) 방향으로 오르니, 옛길은 가파르고 험난하여 철계단과 나무계단을 번갈아 설치해 놓아서 오르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여러계단을 올라서 석문(石門) 입구에 이르니, 우람고도 장엄한 바위가 좌우로 버티고 있어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서 천연(天然)의 일주문(一柱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슴니다.
왼편 바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선생의 친필 “石門”이라고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획이 굵고 활달하여 보기드문 명필이다. 그는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 외가에서 선조40년(1607)에 출생 하였다.
송시열은 여덟 살 때부터 친척인 송이창 밑에서 학문을 했으며, 송이창의 아들 송준길과는 함께 공부하여 평생동안 학문과 정치생활에서 동지로 지내게 된다. 20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의 문인이 되었으며, 김장생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에게 배웠다.
그후 송시열은 인조11년(1633)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에 제수되었고, 이어 봉림대군(훗날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훗날 효종9년(1658) 왕의 부름을 받고 이조판서에 제수 되었으며, 뒷날 두차례의 예송논쟁에 휘말려 숙종 15년(1689)에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국문(鞠問)을 받으러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평생 조정으로부터 109차례나 부름을 받았는데 응한 것은 26차례라고 하며, 그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삼천번이 넘게 언급되었다. 이후 숙종 20년(1694) 그의 관작이 회복되었고,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영조20년(1744)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기에 이른다.(우암문집 참조)
여러 회원님들에게 석문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다시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태고사 돌계단에 오르니, 일시에 전망(展望)이 확 트이는데... 천하가 한눈에 들어오고 안광(眼光)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소이다!
모두들 이~야! 하면서 감탄을 연발하는데... 도시(都是)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 옛날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스님께서 이 절터를 발견하고는 3일 밤낮을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과시(果是) 그의 안목에 탄복을 아니할 수 없슴니다!
자세히 보니 돌계단 밑에는 작은 선방(禪房)을 넣어서 수도(修道)할 수 있는 “무문관(無門關)”이 만들어져 있으며,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참으로 돋보인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는 도량(道場)내로 들어서니, 맞은편에 고색어린 “ㄷ"자 건물에 태고사(太古寺)의 옛 현판(懸板)이 처마밑에 달려있고, 그 옆으로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형식으로 진좌(鎭坐)하고 있다.
도량내 전각(殿閣)의 배치로 봐서는 창건 당시에는 ‘극락보전’을 中心으로 지어 졌는데, 사세(寺勢)의 확장으로 오늘날은 “ㄷ"자 건물이 중심이 됀 것으로 생각된다. 극락보전에 들어 간단히 참배를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니, 주산(主山)은 웅장하고도 수려(秀麗)하여 아기자기한 암봉(巖峰)들이 햇빛에 찬란히 빛나고, 백호(白虎)는 겹겹이 에워싸서 끝없이 펼쳐지며, 외청룡(外靑龍)은 그만 그만하나, 내청룡(內靑龍)이 허(虛)하여 그 끝자락에 거대한 범종루(梵鐘樓)를 세워서 비보(裨補) 하였도다! 또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은 겹겹이 둘러싸여서, 그야말로 중중포리(重重袍裡)다.
가이 없는 풍광에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뜰아래로 나려오니, 좌측 문전(門前)에 노보살(老菩薩)님이 잠시 와 보라시며 손짓으로 반기신다. 조그마한 방문을 열어 주시며 도천(道泉) 스님의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선채로 삼배를 올리고 자세히 보니, 도천스님의 생전에 여러 신문사에서 취재하신 기사들과 스님의 사리(舍利)를 사진으로 모셔 놓았다. 3년전에 답사 왔을때만 해도 법봉(法棒)을 짚고 무심(無心)으로 거닐며 소요(逍遙)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사이 열반적정에 들어서 영롱한 사리로 그 모습을 나투고 계십니다.
“도천스님은 생전에 하루 한끼 공양으로 낮에는 진종일 일하시고, 밤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정진(精進) 하셨다.” 하며, 중국 “백장스님”의 수행가풍(修行家風)을 본받아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삶을 살다 가신분 이시다.
또 대둔산의 남서쪽에는 안심사(安心寺)가 있는데, 조선 영조35년(1759)에 쓰여진 사적기에는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라말여초에 도선국사가 재창하여 이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듭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는데, 당시 전각(殿閣)의 수가 대웅전, 약사전, 시왕전을 비롯하여 27개에 달하고, 암자 수가 석대암, 약사암, 백운암, 지장암, 상도솔암, 하도솔암 등 14개, 공양(供養)을 올리는 스님이 30여 명이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오늘날 사바세계(裟婆世界)에 그 명성이 “태고사”가 더 크게 알려 지는데는 “도천(道泉)스님”이 주석하시면서 부터라고 하니... 스님의 도력(道力)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슴니다.
오고 가는 겉 모습이 진아가 아닐진데
하필이면 서방정토가 극락이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靑山)인 것을
오지도 가지도 않는 것이 참 모습이라
태고사를 벗어나와 다시 낙조대를 향하여 올라도 올라도 남산님들은 얼마나 멀리 가셨는지 보이지 않고, 후미에 필자를 비롯하여 김해진님과 황고문님 셋이서 대둔산의 풍광들을 디카에 담으면서 쉬다 오르고 오르다 쉬면서 다시 오름니다.
날씨가 어찌나 포근하고 청명한지 먼산의 풍광(風光)들을 조망(眺望)할 수 있어 즐거움은 배(倍)가되고, 오를수록 등산객(登山客)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온산에 울긋불긋 나목(裸木)사이로 넘쳐 남니다.
8부능선쯤 올랐을까? 돌너덜에는 천년의 이끼와 태고의 생명이 함께 어우러져서 칡넝쿨, 다래넝쿨들이 얼기설기 얼크러져 서로들 의지하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 신비하고도 장엄합니다.
그럭저럭 능선에 올라 낙조대(落照臺)에 도착하니, 시계(視界)가 약간은 흐려서 서해바다를 볼 수 없슴이 못내 아쉬워서 사진만 잔뜩 찍고는 다시 대둔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얼마를 걸어 왔을까? 정상의 개척탑이 어렴풋이 보이는 칠성봉(七星峰) 부근에서 3명이 함께 점심을 드심니다.
정상이 가까워 질수록 기이(奇異)한 바위와 뾰족뾰족한 암봉(岩峰)들이 볼수록 신기하고 아름다우며, 등산로는 며칠전 내린 눈얼음이 녹아서 질척 질척 산행길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대둔산(大芚山)은 인기도 좋아서 봉우리마다 와글 와글 울긋 불긋 사람들의 열매로 넘쳐남니다.
정상의 개척탑(開拓塔)은 우주를 향한 발사대 같아서 그 끝이 어찌나 날카롭고 강열한지 짜릿한 전율(戰慄)이 느껴지며, 그 주위로는 사방에서 모여든 등산객들이 기념촬영에 분주하시다.
회원님들에게 간단한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는 천하를 조망(眺望)하니, 어찌나 아름답고 기이한 바위들이 많은지... 필설(筆舌)로는 다 표현키 어려워서 필력(筆力)이 둔한 내 자신이 되려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곳 대둔산(大屯山.878m)은 백두대간의 영취봉 부근에서 서북으로 뻗어나온 한줄기를 따라 장안산, 팔공산, 진안의 마이산을 거쳐, 다시 운장산, 왕사봉을 지나 대둔산에 이르고, 그 잔여지맥은 계룡산을 거쳐 부여에서 그맥을 금강에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금남정맥이라 한다.
또 대둔산 일대는 전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여, 배티재(梨峙) 부근에는 선조25년(1592) 임진란 당시에 왜적을 물리친 ‘권율장군’의 “전승기념비”가 있으며, 그는 당시에 광주목사로 있었는데, 왜군이 승승장구하여 금산을 지나 전주로 쳐들어 온다는 기별을 접하여 그해 7월에 ‘배티재’에서 적을 맞아 통쾌하게 격퇴하였다.
연하여 ‘진주성’에는 김시민 장군을 비롯하여 의병들의 활동으로 왜적을 격퇴하고, ‘남해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조선의 수군(水軍)을 이끌고 왜군을 격침하여, ‘호남평야’를 적들의 발굽에서 보호할 수 있었다.
당시 조정과 선조임금은 다급하여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蒙塵)을 갔을 정도였으니,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는 말이 충분히 실감 납니다.
인하여 그해 8월에는 “금산전투”가 있었으니, 금산 읍내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이 그때의 참상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옥천에 조헌(趙憲)이 이끄는 장병 1,000여명과 홍주인(洪州人) 1,600여명, 또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스님이 이끈 승병(僧兵) 500여명이 함께 전사하였다.
이어서 재봉(齋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 의병장이 이끄는 6,000여명의 의병들과 아들 인후(仁厚)와 유팽노(柳彭老), 안영(安瑛) 등이 함께 순절(殉節)했다. 이래 저래 대둔산(大屯山)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어, 아름다운 대둔산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당시 왜장(倭將)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도 나중에 “조조선국충장의담(弔朝鮮國忠壯義膽:조선국의 충장하고 의로운 간담을 조곡하노라!)”이라는 묘표(墓標)까지 세웠다 한다.
이 밖에도 대둔산은 일명 “도솔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따온 말로 “도솔천”은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서 12만 유순(고대 인도의 거리단위)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로써 7보(七寶)로 됀 궁전이 있고, 한량없는 하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하며, 미륵은 여기에 있으면서 설법하여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대둔산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됨니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한채 하산길로 접어들어 20여 분을 가파르고 험난한 돌계단을 나려오니, 육각정자(六角亭子)와 그 옆으로 ‘동학군의 최후 항전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당시 전봉준, 김개남 등이 체포된 직후 투항을 거부하고 동학 “접주”급 이상의 지도자 25명이 대둔산 정상으로 피신, 요새를 설치하고 일본군과 3개월간에 걸쳐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가 1895년 2월 18일 소년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순국하신 역사의 현장이다. “대일역사왜곡시정촉구범국민회의”는 이 곳을 “민족의 성지”로 지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발단의 동기(動機)는 1892년 5월에 전라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으며, 선량한 농민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에 도화선이 되어 동학인 서인주와 서병학 등의 주도로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교조신원) 시키고 동학포교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면서, 아울러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하는 “농민혁명(1894)”으로 이어지며, 이에 조정과 일본군이 합세됀 관군과 싸워 패퇘한 일부 “동학군”이 항전을 하다가 순국하신 곳이다.
다시 20여 분을 더 내려오니 삭도(索道:케이블-카)가 움직이는 옆으로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매점이 두 개나 있다. 행락객이나 등산객들에게 먹을 거리를 제공한다는 장점은 있겠으나, 그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해치는 정도가 더 크다고 하겠다.
길이 길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만대의 “자연유산”을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 철거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니 대협곡 위로 “출렁다리(금강구름다리)”가 건설되어 오가는 행락객들의 모습이 보일락 말락 곡예사를 방불케 하도다!
금강문(金剛門)을 지나 “동심바위”가 있는곳까지 내려와 잠시 올려다 보니 “조물(造物)”의 작품이 참 신비하기도 합니다. 안내문에 그 옛날 신라때 원효대사는 이 바위를 보고 3일 동안 바위 아래서 기도 하였다고 적혀있다.
얼마를 바라보며 쉬다가 산기슭의 소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단풍(丹楓)나무가 곱게 물들어서 초겨울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해 줍니다. 그 아래 잔디밭 광장(廣場)에는 “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가 거대하게 세워져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는데, 민초(民草)들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 들려 오는 듯 합니다. 우리 남산님들은 모두들 하산 하셨는지 보이지 않고, ‘전적비’에 기대앉은 이름도 성도 모르는 님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드리고 물러 나오니, 허허(虛虛)로움이 우주에 가득합니다.
아름답고도 슬프도다 대둔산이여
고통으로 단련하여 금강이 되었구나
천상의 도솔산이 땅에는 웬말인가
상구보리 하화중생 대둔산 이로다
단기 4346년(서기2013년) 11월 24일
금산, 완주 대둔산(大屯山.878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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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
함께하지 못함을 산행후기로 섭섭함을
달래봅니다~
좋은글, 역사공부와 함께
많이 배우고갑니다~
반가워요
날씨가 풀리고 따뜻한 봄에는 산행하면서 건강하기를....
구슬님이 다녀 가셨네요!
부군 선생님의 환후는 좀 어떠신지요?
빠른 쾌유를 빌면서... 슬님의 수고하심에 위로를 드림니다.
보잘것 없는 장문의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슴다.
이렇게 좋은분들이 가까이 계셔서 응원해 주시니, 늘 기쁨니다. 감사합니다.
산행 하면서거움은 맑은 공기와 멋있는 풍광이요
마음것 사진을 찍을수 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어요...
산행 후기를 보면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느낄수가 있으니 최고지요
항상 수고 하심에 감사함을 전 합니다.
황 고문님이 오셨군요! 진실은 만국의 언어입니다.
언제나 진솔하시고 바르게 사시는 고문님의 삶을 존경합니다.
늘 보이지 않게 남산의 발전을 위해서 애쓰심도 감사드리고요!
장문의 글을 보시느라 수고 하셨으며,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람니다.
황고문님~
오랜만에 뵈오니
반갑기 그지없나이다~
건강하신 모습뵈오니 정말 반갑습니다~
남산님들! 모두 잘 계시죠? 차일 피일 바쁘다는 핑계로 산행후기가 많이 늦었슴니다.
특히 김해진선생님, 황고문님의 사진자료를 많이 활용하였으며, 이점 깊이 감사드림니다.
무엇보다 당일 진행에 수고하신 벽송대장님을 비롯하여 구윤서 부대장님, 박총무님, 금부총무님 등
수고하신 모든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림니다. 모든님들! 내내 건강하시고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길 바람니다.
역시 산행의 못다한 아쉬움은 회장ㅇ님의 산행후기를 통해
많은 역사 공부를 뵈우고 갑니다.
긴 장문쓰시느라 많은 수고하셨고 옛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조국,
그분이 있었기에 현세의 우리들은 편안히 잘지내고 있습니다.
회장님 가정에 다복하심과 평온이 항상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벽송대장님이 다녀 가셨군요! 산행 당일 진행에 수고 많으셨으며,
산악회 발전을 위해서 늘 애쓰심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림니다.
산행후기를 쓰고 나면 늘 허전하답니다. 다 쓰지못한 아쉬움과
보잘것 없는 문장력에 자괴감(自愧感)이 큼니다. 인하여 쓰지 않으면
더 허전 하고요!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올리도록 노력하겠슴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귀 가정에 행복이 충만하시길 기원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