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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자랑으로
야고보서1:1-11
결혼을 앞 둔 남자와 여자의 관심사가 다르다고 합니다. 젊은이에게 “미팅 건수 있는데, 할래?”라고 물어 보면 여자는 먼저 “차는 있어? 직업은 뭐야? 성격은?”라고 물어 본다고 합니다. 남자는 가장 먼저 무엇을 물어 볼까요? “이쁘냐?”라고 한답니다. 친구가 “나 여동생 있는데‥‥”라고 말하면 여자는 “맨날 싸우겠다. 친하게 지내.”라고 물어 본다고 합니다. 남자는 무엇을 물어 볼까요? “이쁘냐?”라고 물어 본답니다. 친구가 “ 나 애인 생겼어.”라고 말하면 여자는 “그래? 잘됐네. 몇 살인데?”라고 물어 본답니다. 남자는 무엇을 물어 볼까요? 첫마디가 역시 “이쁘냐?”라고 물어 본답니다. 결혼 대상을 고르는 남자의 여자에 대한 이상형은 10대에도 이쁜 여자, 20대도 이쁜 여자, 30대도 이쁜 여자라고 합니다. 40대에는 어리고 이쁜 여자라고 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젊고 경건한 신부님이 예쁜 수녀님과 안 예쁜 수녀님과 함께 택시를 탔다고 합니다. 택시 운전기사가 운전을 하는데 좌회전 하면 예쁜 수녀님에게 몸이 쏠리고 우회전 하면 안 예쁜 수녀님께 몸이 쏠렸답니다. 젊은 신부님이 기도합니다. 예쁜 수녀님께 몸이 쏠릴 때는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안 예쁜 수녀님께 쏠릴 때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많은 시험을 당합니다. 성도들끼리 이야기하다가도 “나 시험 들었어요, 이제 교회 안 나갈래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시험은 어떤 것을 말할까요? 성경에서 말씀하는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TEST)이 있습니다. 이것은 테스트입니다. 시련으로 나타납니다. 요셉이 당한 시험입니다. 인신 매매되어 팔려갔습니다. 감옥에 갔습니다. 욥이 당한 시련입니다. 자녀가 죽었습니다. 사업이 망했습니다. 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훈련시키기 위해 시련으로 주는 시험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을 실족케 하여 멸망케 하고자 하는 사단에게로부터 주어지는 시험(TEMPTATION)이 있습니다. 영어로 템프테이션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주는 시험은 유혹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당하는 유혹입니다. 14절에 나오는 시험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다윗이 당한 시험, 아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당한 시험 등 우리가 당하는 많은 시험들이 이런 시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험은 어떤 시험을 말씀할까요? 테스트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TEST)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려다가 당하는 시련입니다. 의를 위해 당하는 시련입니다. 말씀을 지키려다가 당하는 시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다가 당하는 시련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쓸 당시는 스데반의 순교로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입니다. 핍박을 피해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이방 땅으로 도망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옥에 갇히기도 하고 태장을 맞고, 돌로 맞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은 생활을 하였습니다(고후11:23-28)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소유를 빼앗기기도 하였습니다(히10:34) 제자 훈련을 시켰던 한 간호사 자매가 어느 날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수술이 끝나면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들이 스텐드빠에 가서 술을 먹고, 춤을 추고 오는 문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빠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에서 너무 큰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 잘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련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까? 저는 군대에 갔는데 회식을 하면서 매번 술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졸병 시절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들이 믿지 않는 집안에 시집가서 얼마나 많은 시련을 당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습니까?
이런 시련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시험을 통해 겪게 되는 시련이 결국 자랑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9절을 보세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시험과 관련이 없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2-12절까지는 시련 중에 있는 성도의 신앙 자세를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2절의 “시험”은 원문에 “페이라스모스”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련의 시험을(테스트)를 말하고 13절의 “시험”은 “페이라조”로 사탄으로부터 오는 유혹의 시험(템프테이션)을 말합니다. 그래서 13-18절까지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는 비결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절 이하의 말씀도 시련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시험받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형제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높여주심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핍박받는 사람들입니다. 낮은 자는 성경에서 주로 겸손한 자를 말씀하는 내용이지만 여기에서는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비천한 처지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예수 잘 믿으려고 이중장부 안 쓰고, 로비로 안하고, 퇴폐접대도 안하고, 치사하고, 더럽고, 부정한 방법 쓰지 않다가 망했습니다. 그 때 비굴하거나 원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던 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명 접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이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부한 사람도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육적으로 부한 성도가 신련을 통해 낮아진 것 즉 겸손해진 것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물질이 많으면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시련이 오면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세상 부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란 잠시 피었다가 시들은 들풀의 화려함과 같은 것입니다. 시련을 잘 극복하면 사람이 높아져 자랑거리가 되고 시련을 잘 극복하면 부함으로 교만한 사람이 겸손해져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 오는 어떤 시련도 자랑거리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간증 거리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군대 가는 형제에게 가정에 가서 예배드리고 꼭 부탁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군대 생활이 먼 훗날, 자식들에게 수치스런 경험이 되지 말고 자랑할 만한 것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 갖가지 시련을 당하지만 간증한 만한 과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여러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시련이란 “겪기 어려운 단련이나 고비”를 말합니다. 가정의 시련, 질병의 시련, 실직의 시련, 파산의 시련, 실패의 시련, 배신의 시련, 자녀의 시련 등 기대하지 않은 시련이 어느 날 우리 인생의 한 복판으로 쳐들어옵니다. 이럴 때 이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시련이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은 자랑이 될 수도 있고, 시련이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수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랑이 되도록 극복해야 합니다.
2. 그러면 시련이 자랑이 되도록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 가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2).
기뻐하기는 기뻐하되 "온전히 기쁘게"하여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라는 말입니다.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나만 당하는 고난이냐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찾아옵니다. 나만 유독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사람들도 당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거든"이라는 말은 시험이 어쩌다 찾아온다는 말이 아니라 으레 시험은 있다는 말입니다. 손님처럼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이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 시험은 늘 있습니다. 그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여러 가지”라는 말은 시험은 다양하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연단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은 다양합니다. 여기서 온전히 기뻐하라는 것은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기쁨,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지거나 불평하고 원망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험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라는 말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감정적으로 동한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할 수 없지만 기쁜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급 줄 기회를 주었다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훈련시켜 정금처럼 빛나게 해 줄 기회를 주었다고 기쁘게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못 입고, 못먹고, 주를 위해 고난당하고, 주를 위해 손해보고, 주를 위해 감정이 상처받고, 주를 위해 어려움 당하는 것을 기쁜 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기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험을 통한 시련이 주는 유익을 알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3).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 주는 인내를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 아니라 시험을 인내로 이긴 신자에게는 영광과 칭찬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롬5:3-5). 시련은 결국 어떤 경우에도 견디며 성취할 수 있는 인내를 선물로 줍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능동적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태도를 만들어 줍니다. 금광석을 불 속에서 제련하여 금과 은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믿음을 연단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시험을 통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시험을 이기고 승리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시험은 유혹이 아닙니다. 훈련입니다. 테스트입니다. 시련의 과정을 통하여 믿음 있는 사람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시험은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신8:16)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파도 타는 사람은 큰 파도를 기대하고 기뻐합니다. 연 날리는 사람은 바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한 학생은 시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련은 거침돌아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시험은 회피할 것이 아니라 기회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욥은 시험을 당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2)”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라고 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똑 같은 시련이지만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한국인으로 미국 행정부에서 차관보 급에 오른 강영우 박사는 보십시오. 시력을 잃는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디딤돌 삼았기 때문에 오늘날 그와 그 가족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희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이어 아들도 백악관에 들어갔지 않았습니까? 시련은 독약이 아니라 보약입니다. 소설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시련을 통해 명작을 집필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힌 만성두통이라는 시련을 가지고 인류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파스칼은 청년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힌 온몸의 통증이라는 시련을 이겨내고 '팡세'를 남겼습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의 시련을 딛고 위대한 곡을 남겼고, 선교사 마틴은 폐결핵과 악전고투하며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김활란 박사는 첩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시련 앞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시련을 디딤돌로 삼고 도약했습니다. 진주는 시련이라는 조개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나에게 다가온 시험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4).
“온전히”는 “흔들림 없이, 끝까지, 완전히”라는 말입니다. 조금도 흔들림 없이 끝까지 인내하라는 말입니다. 인내라는 것은 단순히 참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망을 바라보고 참는 것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그 나라를 바라보고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여 합격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인격의 성숙을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4).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의 분량에 까지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이루게 만듭니다. 시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약점과 불완전함을 조금씩 제거시켜 나가게 합니다. 결점을 보완하게 합니다. 부족을 깨달아 다듬게 합니다. 시험을 통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시고, 끊지 못하는 일을 끊게 하시고,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게 하시고,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며, 쓸모없는 자를 쓸모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시련을 통하여 결국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시련은 평범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시련은 마치 금광석을 제련하여 금을 만드는 것처럼 사람을 순수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탐욕, 시기심, 이기심 등과 같은 인생의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시련은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사람을 무장시켜 줍니다. 시련을 디딤돌로 삼으면 영광과 칭찬과 존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훈장은 전투에 참여하여 모든 시련을 이기고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참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늘 깨답습니다. 처음에 잘 시작하지만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솔로몬 얼마나 멋지게 출발합니까? 그러나 그는 권력과 명예, 돈이 주어지니까 처첩을 거느리고 이방 신을 섬기고 타락합니다. 성전을 건축했지만 성전에서 예배드리며 생활하는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담 가정 얼마나 멋지게 출발했습니까? 그러나 에덴에서 쫓겨나고 자식이 자식을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엘리 제사장 얼마나 멋지게 출발했습니까? 사무엘 얼마나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말년은 모두 부끄러운 말년이 되었습니다. 유다 예수님의 제자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신매매하고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니골라 안수 받고 집사로 출발했지만 결국 이단의 괴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왕들이 끝까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산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너무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다운 자녀 양육하려고 하면서, 가정다운 가정 만들려고 하면서, 기업다운 기업 이루어 보려고 하면서, 교회다운 교회 이루려고 하면서 너무 조급하여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 앞에 비굴하게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햇빛 쏟아지면 안개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새로운 기회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이 끼었다고 해도 구름 위로 오르면 파란 창공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진정 좋은 것은 긴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관심은 유익, 편리, 재미, 감동입니다. 이것에 맞춰야 잘 됩니다. 이것 맞추기 쉽지 않습니다. 새로 시작한 사업체의 50%가 4년 이내에 망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아마존닷컴의 창설자인 제프 베조스는 모험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1995년에 출발한 이래, 8년 동안 한 푼도 수익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조스는 미래를 낙관하며 끈질기게 견뎌냈고, 아마존닷컴은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온라인 도서 쇼핑몰이 되었습니다. 좋은 일 하면서 쉽게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림은 자연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빠른 것도 필요하지만 인생은 기다림이 중요합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려면 50년 100년 기다려야 합니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이 땅에 태어나려면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하지 못하여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아 역사 속에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세계 전체에 퍼져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인내의 결여 때문에 발생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비오기까지 120년을 기다리며 인내하였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인내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이 되기까지 무려 7년을 기다렸습니다. 꽃샘추위는 꽃을 더욱 오랫동안 아름답게 합니다. 도끼를 갈고 갈면 바늘이 됩니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지만 계속 떨어지면 돌을 뚫을 수 있습니다. 루소가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고 말했듯이 인내의 과정은 고통이 따르고, 그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의 힘입니다. 속담에 "시간과 인내가 뽕잎을 비단으로 바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의 유구한 역사는 참고 견디어서 이룬 인내의 역사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내하는 과정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자굴 속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한 다니엘도, 군중들의 돌에 맞은 예례미야도, 므낫세의 박해를 당하여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사야도, 헤롯의 칼날 앞에 목을 내밀어야 했던 세례 요한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던 예수님도 인내의 힘으로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인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내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3. 시련을 슬기롭게 이기기 위해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5).
시험 중에 인내하는 것 자신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도 스스로에게는 시험을 이길만한 지혜가 없을 때 하나님에게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받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시련일지라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풀만한 지혜가 부족하다면 시련을 극복할 만한 지혜가 부족하다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여야 합니다.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5)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풍부하게 주십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하십니까? 풍성한 지혜를 주었습니다(왕상 4:29-30) 지혜를 줄 뿐 아니라 부귀영화도 동시에 주었습니다.
제한이 없으십니다.(5) 후히 주시되 일부의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십니다. 솔로몬에게만 주시는 것 아닙니다.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받는 사람에게 제한을 두지 않으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입니까?
꾸짖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베풀 때 마음을 상하게 하든지 부담을 주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시고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안이 나옵니다. 시련이 대안을 만들어 줍니다.
지혜를 구하되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여야 합니다(6-8). 믿음으로 구하여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한나의 기도를 보십시오. 구약 시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큰 시련입니까? 그러나 한나는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의 적은 의심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바다 물결이 출렁리는 것처럼 마음에 안정이 없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두가지 특징입니다. 첫째가 두마음을 품었다는 것이고 둘째가 정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앙과 신앙 사이를 왔다 갔다하는 것입니다. 불안정합니다. 변하기 쉽습니다. 신앙 생활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삶이 불안합니다. 모든 일에 정함이 없이 흔들리는 상태에 있습니다. 시련을 당하면 안정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방황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께로부터 받을 수 없습니다. 시련을 슬기롭게 이기기 위해 지혜를 구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구제적인 살의 현장에서 시련을 자랑으로 만드는 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예수님께서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어떤 시련이 와도 그 시련을 자랑으로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