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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원창애*1)
【국문초록】
洪履祥은 선조․광해군대 활동한 문관 관료이다. 그의 본관은 풍산이며, 초명
은 洪麟祥이다. 1573년(선조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9년(선조 12) 문과 장
원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사헌까지 지냈다. 그는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의 문하에
서 공부하면서 의리를 깊이 연구하였고, 성균생원이 되어서는 교우들과 함께 성
리대전․심경과 같은 성리서를 강독하는 등 학문에 열의를 쏟았다. 經學으로
이름이 난 홍이상은 문과에 급제한지 1년 만에 사가독서를 받고, 홍문록에 올랐
다. 그는 특히 참상 청요직과 당상관을 거치는 동안 경연관으로서 활약이 컸다.
선조는 그를 최고의 講官이라고 인정했을 정도이다. 또한 홍이상은 조선 건국 후
에 門地가 약해져 가는 풍산홍씨 가문 출신으로 조선 후기 풍산홍씨 가문이 관료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본고에서는 홍이상이 관직에 나가기 전의 학업과 관직 생활를 통해서 그의 어떠
한 면들이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동력이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홍이상은 12세 때
서울로 유학을 와서 승보시를 통해 성균관에 기재되었다. 그는 학교 교육이나 科
業에만 힘쓰는 유생은 아니었다. 20세 때에 민순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
였다. 배운 바의 실천을 중히 여긴 유생 홍이상은 성균관의 잘못된 관습인 성균관
유생 좌차 문제를 개혁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는 문과 급제 후 육조․홍문관․사헌부․성균관․의정부․사간원․사복시․
사재감 등을 두루 거쳐서 12년 만에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승진은 당시 능
력 있고, 門地가 높은 관원의 승진과 비교할 때 결코 늦지 않았다. 당상관에 진출해
서 약 23년간 재직하였다. 홍이상이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지켰던 소신은 ‘公明’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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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이었다.
그가 ‘공명’을 추구했기에 학연이나 당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사간으로
서 정여립의 난 당시의 처신, 당상관이 된 이후 임진왜란 발발 후 파천의 책임론
공방 그리고 기축옥사에 대한 성혼의 처벌론 등이 거론될 때 正道에 근거한 公明
만을 염두에 두고 간쟁하였다. 그가 역임한 관직을 볼 때, 실무형 관료는 아니지만
외관직에 나가서도 성실하게 직임에 임하였다.
그의 소신은 사적인 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출사 이후 그는 사사로운 교유관계가
많지 않았다. 16세기에는 서울에 지식인들의 모임이 많았고, 관원의 계회도 성행
했다. 그럼에도 그가 주도한 계회는 과거 시험을 매개하거나, 노모를 위한 계회
정도였다. 그가 참석했던 모임 중 사사로운 성격을 띤 것은 新橋 모임이다. 그가
신교에 살았기에 이웃과 함께 하는 신교 모임에는 가끔 참석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사적인 생활에서도 修身에 힘쓰는 성실한 삶의 태도는 형제들과 자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의 동생들도 생원진사시와 문과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그의 아
들 여섯 명 중 네 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닦은 기반 위에 후손들의 지속적
인 관직 진출로 가문의 門地가 높아져서 조선 후기 명문 관료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핵심어: 홍이상, 儒臣, 화담학풍, 사가독서, 홍문록, 강관, 公明, 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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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머리말
2. 홍이상의 학업
3. 홍이상의 관력 특징
4. 홍이상의 관직 생활
5. 결론
1. 머리말
洪履祥은 선조․광해군대 활동한 문관 관료이다. 그의 본관은 풍산이
며, 초명은 洪麟祥인데 흉인의 이름을 피하여서 개명하였다.1) 1573년(선
조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9년(선조 12) 문과 장원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사헌까지 지냈다. 그의 나이 20세에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의리를 깊이 연구하였고, 성균생원이 되어서는 친한 벗들과 함
께 성리대전․심경과 같은 성리서를 강독하는 등 학문에 열의를 쏟았
다. 또한 經學으로 이름이 나서 문과에 급제한지 1년 만에 사가독서를 받
고, 홍문록에 오른 엘리트 관원이었다. 그는 특히 참상 청요직과 당상관을
거치면서 오랜 동안 경연관으로 지냈는데, 선조는 그를 최고의 講官이라고
칭하였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사림정치가 형성되는 격변의 시기였다. 사림의 동서
분당을 시작으로 점차 당파가 표면화되어갔다. 또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난 극복을 해야 하는 절박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실천을 중시하는 儒臣
홍이상은 30여 년간 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당파나 학맥에 치우치지 않
고, 공정과 성실함을 추구하였다. 광해군일기에 실린 그의 졸기에 “사람
1) 광해군일기 권95, 광해군 7년 9월 19일(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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됨이 단정하고 온아하며 논의가 편벽되지 않았으며, 혹 조정의 큰 의논을
만나면 정도를 견지하여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한 평가는 관료 홍이상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선조․광해군대의 인물 연구는 학문적으로는 이황․이이 학풍을 공부
하였거나 혹은 당파에 관련 있는 인물들에게 치우쳐있다. 그러나 사실상
기축옥사로 당쟁이 표면화된 후 광해군대를 거쳐 인조반정에 이르는 시기
까지는 당파가 완전히 고착화되지 않았다. 당시 관료 사회는 당쟁이 고착
화된 17세기 중반 이후와는 사뭇 분우기가 달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관료 사회의 분위기를 알려줄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
본고에서 살펴보려는 홍이상이 바로 그러한 관료이다. 역사학계에서는
홍이상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지만2), 홍이상의 문학 작품이나 홍의상의 평
생도를 통해서 당시 관료 의례를 살핀 연구는 있다.3) 본고에서는 홍이상이
起身하여 관직에 진출하기까지의 학업, 관력 그리고 관직생활을 통해서 선
조․광해군대의 사회 정치적 상황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홍이상을 통해서
당시 유생들은 어떠한 학업을 했는지, 그리고 서경덕 학풍을 공부하고, 당
파에 속하지 않았던 관료가 16세기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면서
살았는지는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쟁이 표면화되어가는 과
도기였던 조선 사회 정치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는 역주모당선생님시문집을 바탕으로 선조실록․선조수
2) 역주모당선생시문집 상(윤호진, 민속원, 2012)에 실린 해제가 1편이 있을 뿐이다.
(임민혁, 「모당 홍이상의 생애와 경세관」)
3) 윤호진, 「모당 홍이상의 삶과 시세계」, 한문학보 21, 2009.
김은정, 「16-17세기의 시사(詩社)와 아집(雅集); 16세기 사대부 문인의 시문수창집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 한문학보 21, 2011.
주영하, 「생활사 이야기 7 “홍이상 평생도”를 통해서 본 관리의 평생의례(2)」, 문헌
과해석 2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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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실록․광해군일기에 실린 홍이상 기록, 족보, 방목 등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다. 홍이상에 관한 사료가 풍부하지는 않다. 그러나 홍이상 연보
에 기술된 내용에 대하서 연대기 자료를 활용하여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파악하여 홍이상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자 하였다.
2. 홍이상의 학업
홍이상은 고려시대 洪之慶의 후손이다. 고려가 망하기 전까지 그의 선
대는 과거에 급제하여 동반직에 나갔으나, 조선 건국 후 홍이상이 문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그의 선대는 주로 서반직을 지냈다. 홍이상의 고조부․조
부․부친도 모두 서반직에 나갔으며, 증조부만 사포서 별제를 지냈다.4) 홍
이상의 집안은 조선 건국 후 고양현에 자리를 잡았다. 홍이상은 고양현 귀
이동에서 태어났는데, 12세에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7세가 되던 해인 1555년(명종 10) 李拭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이
식은 1553년(명종 8)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
열에 제수된 문관이었다.5) 그는 효령대군파의 6대손으로서 1547년(명종 2)
부친 李承常이 사망하자 고양현 견달산에 장사지냈다. 1555년에 그가 다
시 견달산에 온 것은 그의 어머니 여흥민씨 부인의 상을 당하였기 때문이
었다.6)
홍이상이 어떠한 인연으로 이식에게 수업을 받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
4) 홍상한, 풍산홍씨족보(장서각 K2-1802) 권1.
5) 명종실록 권17, 명종 9년 10월 29일(병신).
6)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정효공파 세보에 따르면, 李拭의 모친은 1556년(명종 11)에
사망하여 남편인 李承常과 합장되었다고 한다. 모당선생시문집 연보에 1555년(명
종 10) 이식에게 소학을 배웠다는 시기와는 1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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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 홍이상의 집안이 종친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식 가문
과도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이상 부친 洪脩의 고종 사촌이 정
종의 4대손 餘善監 李命長과 혼인하였다.7) 여선감 이명장은 이식 가문과
계통이 다르지만, 종친 가문의 인척인 洪脩가 이식에게 홍이상을 부탁한
것이 아닌가 한다.
홍이상은 어린 시절 소학 이외에 역사서인 사략, 시경․서경
의 대문, 四書 등을 익혔다. 12세 때에 서울로 유학하였다고 하는데, 부친
이 관료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서울에 거처가 있었을 것이다. 연보
에 의하면, 그가 16세 때에 陞補 윤차 과제에서 여러 번 1등을 하였다고
한다.8) 이것으로 볼 때, 홍이상은 12세 때에 서울로 유학 와서 四學에 적을
두고 학업을 하다가 승보시를 통해서 성균관에 기재된 것 같다.
四學 생도는 15세가 되면 승보 시험을 통해서 성균관의 기재생이 될 수
있었다.9) 이렇게 승보시험을 통해서 성균관의 기재생이 된 이들을 ‘陞補’
라고 지칭하였다. 성균관 입학은 원칙적으로 생원․진사이어야 가능하였
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의 정원에 결원이 있을 경우 사학 생도 중에서 15세
이상으로 소학․사서․일경 시험에 합격한 자, 有陰嫡長子로 소학
시험에 합격한 자 그리고 문과․생원진사시 향시나 한성시에 합격한 자로
보충하도록 하였다.10) 이처럼 생원․진사가 아니더라도 성균관에 기재되
는 세 부류 중에서 승보시를 통해서 기재한 경우는 승보 기재로, 유음적장
자로 기재된 경우는 승음 기재로 구분하여 칭하기도 하였다.11)
7) 홍상한, 풍산홍씨족보(장서각 K2-1802) 권1.
첨사 趙榮孫에게 시집간 洪脩의 고모 딸이 餘善監 李命長과 혼인하였다.
8) 윤호진 역주, 역주 모당선생 시문집 하, 민속원, 2012, 19면.
9) 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4월 25일(계사)
10) 경국대전 권3, 예전, 생도조.
11) 세종실록 권97, 세종 24년 8월 4일(신묘).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61
홍이상은 16세에 성균관에서 승보로 기재한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윤
차과제에서 여러 번 1등을 하였으나, 생원진사시 복시에 직부되지는 못하
였던 것 같다. 성균관의 생원․진사는 1년 동안 시행한 윤차 제술을 합산
하여 우등한 3명에게는 문과 복시에 직부하도록 하고, 승보하여 성균관에
기재된 기재생들은 1년 동안 시행한 윤차제술을 합산하여 우등한 사람은
생원진사시 복시에 직부하게 하였다.12) 그런데 홍이상은 윤차 시험에서 여
러 차례 1등은 하였으나, 우등에 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홍이상은 학교 수업에 만족하지 않고, 20세에 閔純을 찾아가서 선학의
성리서와 四書를 공부하였다. 홍이상의 스승 민순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서 산림학자였다.13) 민순은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향시에서 장원을 하기
도 했다. 그는 儒學을 공부하는 자는 道를 표현하는 문장 보다 도학 자체에
힘써야 한다고 여겨, 과업을 포기하고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공부하였다.
민순은 靜에 주로 하라는 서경덕의 가르침을 따라서 자신의 호를 ‘習靜’으
로 하고 성리학 공부에 주력하였다. 민순이 효행으로 천거된 것을 보더라도,
그는 삶 속에서 성리학적 윤리를 실천하는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14)
홍이상은 민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敬’을 함양해야 할 바
로 삼았다. 그의 학문은 날로 깊어져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崔永慶을 종유하기도 하였다. 최영경은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敬義
를 궁구하여 아는 바의 실천을 중요시하였다.15) 홍이상은 학풍의 경향이
成均館啓 親試時 不考圓點多少 但令定限赴試 因此閑遊廢學者 當親試逼期 則爭
先赴學 已過則輒散四方 有違勸學之意 請自今式年後次年別試 則生員進士及升
補承蔭寄齋滿圓點一百者 私糧寄齋 滿三十點者 許令赴試 又次年別試則 點數加
一倍 其圓點已滿者 雖不及限日 限前二十日內已赴學者 幷許赴試 下議政府議之
齎私糧赴國學者 謂之私糧寄齋
12) 최광만, 「조선전기 과시의 신설과정」, 교육사학연구 23, 2013, 246-249면.
13) 신병주, 「화담학과 근기사림의 사상」, 국학연구 제7집, 2005, 59면.
14) 국조인물고 권9, 儒學, 閔純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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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고, 민순을 높이 평가하는 최영경에게도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1573년(선조 6)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여 생원 3등 54위로 합격하였
다.16) 그가 성균 생원으로서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1568년(선조 1) 생원시
에 합격한 許筬과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한 禹伏龍과 친하게 지냈
다. 허성은 서경덕의 제자인 許曄의 아들이며, 부친을 스승으로 삼아 화담
학풍을 공부하였다.17) 우복룡은 홍이상과 마찬가지로 민순의 문인이었
다.18) 이 세 사람은 모두 화담학풍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승가사에서의 성리
서 강독을 주관하기도 하고, 시문을 수창하기도 하면서 동거동락하였다.
이들은 성리서를 탐구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일에
도 앞장섰다. 홍이상과 우복룡은 성균관에서 행해지는 제도라도 법도에 어
긋나는 것은 고치도록 요구하였다. 대신들이 유생 課試의 시관으로 성균관
에 오면, 유생들은 뜰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관례는 세종대
에 영의정이 성균관에 방문하였을 때 다른 신료들과는 차별을 두어서 유생
들에게 뜰아래에서 절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유생 우복룡은
趙光祖의 말을 빌려 君父도 아닌데 시관에게 절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
라고 주장하였다. 우복룡은 당시 시관으로 성균관에 왔던 영의정 洪暹․좌
의정 盧守愼에게 뜰아래에서 절을 했던 다른 유생들과는 달리 홀로 揖을
하였다. 좌의정 노수신은 우복룡의 주장이 옳다고 여겼다. 그 이후로는 영의
정이 과시의 시관으로 오더라도 揖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고 한다.19)
홍이상은 당시 성균관에서 食堂과 마당에서 揖할 때의 座次를 생원진
사시 합격 연도순으로 하는 것을 비판하고 나이순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15) 최해갑, 「최영경의 생애와 사상」, 남명학연구논총 6, 1998, 364면.
16) 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貴古朝26-29-3])
17) 신병주, 앞의 책, 58면.
18) 국조인물고 권37, 蔭仕, 禹伏龍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7.
19) 주 12) 참조.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63
관철시켰다.20) 小學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중종대부터 성균관 유생들은
食堂과 마당에서 揖할 때의 좌차를 생원진사시 합격 연도순으로 하는 것
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하였다.21) 1544년(중종 39) 경연의 자리에서 대사헌
민제인이 소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성균관의 좌차의 기준을 생원진
사시 합격 연도순으로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거론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제학 지경연사인 成世昌은 성균관에서 유생의 좌차를 나이순으로 하면
시비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향당에서의 좌차는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 것
은 옳다고 대응하였다. 그는 성균관을 작은 조정이라고 인식하였다. 성균
관 유생의 좌차는 생원진사시 합격연도를, 하재생의 좌차는 승보입학 순서
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성균관에서 유생의
좌차를 정하는 것은 조정의 일이고, 유생이 독자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22)
성세창은 성균관을 단순한 교육 기관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
은 다른 문과 응시생 보다는 쉽게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문과 초시 때에 성균관 유생은 館試에 응시하였다. 이 관시는 응시 대상이
성균관 유생으로 한정되어 있고, 합격 인원도 50명으로 가장 많이 배정되
었다.23) 또한 국왕이 작헌례를 행한 후에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알성시
를 설행하였다. 이외에 생원․진사는 음직으로 나갈 기회도 주어졌다. 이
처럼 성균관 유생에게는 관료가 될 수 있는 길이 보다 넓게 열려 있어서
20) 윤호진 역주, 역주 모당선생 시문집 하, 민속원, 2012, 21면.
21) 박현순, 「16~17세기 성균관의 유벌」, 역사와 현실 67, 2008, 220-221면.
22) 중종실록 권101, 중종 39년 1월 29일(을축).
23) 문과 초시는 관시, 한성시, 향시로 구분된다. 관시는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성시는
서울 거주 응시자를 대상으로, 향시는 각도에 거주자를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경국대
전 예전 제과조에 의거하면, 관시 합격 정원은 50명, 한성시는 40명, 지방은 경기
20명, 충청․전라 각 20명, 경상 30명, 강원․평안 각 15명, 황해․함경 각 1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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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이들을 예비 관료군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그 좌차 기준은
조정에서 정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성균관에서의 좌차 문제는 교육기관으로서 성리학의 근본이 되는 소학
의 실천을 우선할 것인지 아니면 예비 관료군으로서의 지위를 중요시할
것인지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소학 보급 운동이 활발하였던 중종대에
는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서 대사헌 민제인 같은 이는 성균관 유생들이
자의적으로 좌차 기준을 나이로 바꾼 것을 묵인하였다. 그러나 사화로 사림
세력이 축소되자, 좌차는 다시 생원진사시 합격 연도순으로 환원되었다. 이
처럼 성균관 좌차 기준은 때에 따라서 나이가 되기도 하고 생원진사시 합격
연도가 되기도 하여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선조대에도 성균관 유생의 좌차가 문제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홍이상
이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1573년(선조 6) 경연의 자리에서 유생의
좌차 기준을 나이로 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선조는 이 문
제에 대해서 관료들에게 논의하여 아뢰도록 하였으나, 아무도 回啓하지 않
았다. 선조는 관료들의 의견 개진도 없고, 좌차 기준은 전례에 따라 생원진
사시 합격 연도로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24)
그러나 유생 홍이상 등이 성균관은 明倫을 밝히는 곳이므로 장유의 순서
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좌차의 기준이 생원진사시 연도순에서 나이
로 바뀌었다.
1574년(선조 7) 경연에서 노수신은 성균관 유생들이 자의적으로 좌차
기준을 나이로 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더 이상 좌차에
異論이 없게 좌차는 나이순으로 정한다는 전교를 내리도록 요구하였으나,
선조는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25) 다음 해인 1575년(선조 8) 성균관 掌議
24) 선조실록 권7, 선조 6년 2월 19일(경오).
25) 선조실록 권8, 선조 7년 11월 5일(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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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장에 의해서 다시 생원진사시 합격 연도로 좌차의 기준이 바뀌었다.
그 후에 효종대에도 이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26) 1677년(숙종 23) 숙종이
성균관의 좌차 기준을 나이로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라고 전교하였다.27)
숙종의 이러한 처분에도 불구하고 좌차 기준은 여전히 확정되지 못하였다.
홍이상은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에도 성리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는 허
성․우복룡 등의 성균 유생과 함께 주도하여 1574년(선조 7)과 1575년 승
가사에서 성리대전․심경 등을 강독하였다.28) 성리대전․심경
은 중종대 사림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성리대전
은 1518년(중종 13) 경상도 관찰사 金安國이 성리대전을 강독할 학자를
뽑아서 연구에 전념하게 하고, 그 다음 해에는 경연에도 활용하였다. 성리
학 연구에 성리대전을 활용한 대표적인 학자는 서경덕이었다. 그는 성
리대전을 통해서 장횡거의 氣學과 소강절의 數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
황이나 조식 등도 역시 성리대전을 통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주자 성리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성리대전의 중요성이 감소
해갔다.29) 홍이상 등 성균 유생은 우선 성리대전을 강독하였다. 이때 모
였던 유생들은 대부분 화담 학풍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이 강독 모임에 천
문지리에 일가견이 있는 徐起도 함께 참여하였다.30)
그들은 성리대전을 이해하는데서만 머물지 않고, 새롭게 주목되던 심
경에도 관심을 가졌다. 심경은 1517년(중종 12) 조선에서 간행되었고,
26) 승정원일기, 효종 9년 6월 25일(신묘).
27) 승정원일기, 숙종 23년 4월 25일(갑술).
28) 김은정, 「16세기 사대부 문인의 시문수창집 승가수창록」, 한문학보 25, 2011,
81-88면.
29) 김항수, 「16세기 후반 사림의 경세론-성리학적 학문체계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
국사상과 문화 6, 1999, 108-109면.
30) 김은정, 위의 책, 84면.
166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심경부주도 중종대 말에는 널리 읽히지 시작하였다.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16세기 중반에는 심경부주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
였고, 심경에 대한 조선 학자의 독자적인 해석이 나타났다.31) 홍이상 등
유생들도 승가사에 모여서 심경을 강독하면서 나름 독자적인 시각으로
주자성리학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홍이상은 성균관에서의 학업과 개별적인 공부 모임을 병행하던 중 1578년
(선조 11) 庭試에서 장원하여 전시직부를 하사받았다. 정시는 원래 문신이
응시 대상이었으나, 연산군대에 처음 유생을 대상으로 시행된 것으로 추측
된다.32) 유생을 응시 대상으로 한 정시는 정식 문과가 아니라 일종의 유생과
시로서, 우등한 유생에게는 직부전시, 직부회시, 級分, 물품 하사 등 다양한
형태로 은전이 주어졌다.33) 그 가운데 직부전시는 사실상 문과급제를 하사
한 것이다. 유생과시에서 직부전시를 받은 유생은 원칙적으로 식년문과 전
시에 응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연보에 의하면, 홍이상은 1578년(선조 11)
정시에서 우등하여 직부전시를 하사받았다고 한다.34) 문신정시나 유생정시
는 대개 제술시험이었다. 연대기 자료에는 1578년 정시의 제술 과목이 무엇
이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홍이상의 사돈 李廷龜35)가 지은 「대사헌 홍공
31) 김항수, 위의 책, 114-115면.
32) 연산군일기 권56, 연산군 10년 11월 20일(병오).
이때 연산군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험 과목은 七言律詩로 하고, 어제시를 내려 출
제하였다.
33) 유생 과시로 시작된 庭試는 1542년(중종 37) 처음 정식 문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정시가 정식문과로 시행되지 않다가, 1596년(선조 29)부터는 자주 설행되
었다. 정시가 정식 문과로 완전히 정착되기 전까지는 과도기 현상으로 유생과시로서
의 정시와 정식문과로서의 정시가 공존하였다.
34) 연대기 자료에서는 홍이상이 직부전시를 받은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국조방목(장
서각 K2-3538) 권3 1579년(선조 12) “己卯五月初八日式年榜”에 直赴로 표시되어
있다.
35) 이정구는 홍이상의 4남 洪霙의 장인이다.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67
의 신도비명」에 대정시에서 대책으로 1등을 하였다고 하고, 모당집에 ‘殿
策庭試’ 라는 제목의 대책문이 실려 있어 제술 과목이 대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이상이 정시에서 우등하여 직부전시를 하사받은 다음 해가 마침 식년
이었다. 그는 식년 문과 殿試에 응시하여 갑과 1등으로 급제하였다. 전시
시험과목은 대책이었다. 국조방목에는 試題가 ‘六弊’로 간단히 적혀 있
으나36) 모당집에 시제 全文이 실려 있다. 시제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폐단은 첫째 백성의 고통, 둘째 군대의 정비, 셋째 학교, 넷째 풍속, 다섯째
구언, 여섯째 어진 이에 대한 대우 등이었다. 홍이상은 이 여섯 가지 폐단
의 현실과 국왕의 잘못을 진단하고, 해결책으로 ‘誠’을 제시하였다. 여섯
가지 폐단의 구제는 마음에 달려있는데, 마음을 극진히 하는 방도는 정성
을 다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홍이상의 답안을 본 선조는 근래에 보
았던 科擧의 글이 아니라고 극찬을 하였고, 노수신도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홍이상이 정시와 식년문과 전시 답안으로 작성했던 두 편의 대책은 기
본 형식을 잘 갖추어 작성되었다. 대책문은 虛頭에서 질문의 내용을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고, 中頭에서 답변의 핵심 단어를 거론하면서 立論하였다.
홍이상은 정시의 대책에서는 ‘公明’, 전시 대책에서는 ‘誠’으로 입론하였다.
그는 질문의 조목 하나하나를 따져서 당시의 폐단을 들추어내고, 입론했던
핵심을 중심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16세기 책문은 대책의 기본 틀이 유지되면서도 조선 후기 책문준적에
서 제시된 것과 같이 형식화되지 않았다.37) 홍이상은 대책의 기본적 형식을
지키면서도 글에 그의 진심을 잘 표현하였다. 대책문은 형식도 중요하지만,
36) 국조방목(장서각 K2-1364) 권4.
37) 박재경, 「책문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161-17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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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글을 써야 한다. 홍이상은 두 편의 대책에서
서경․성리대전․논어․맹자 등의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
의 근거를 대면서,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한 진정성을 잘 드러내었
다.38) 홍이상은 이 두 편의 대책문으로 문과 장원에 오르게 되었다.
3. 홍이상 관력의 특징
홍이상은 1579년(선조 12) 문과에서 장원하여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문과 갑과에 급제하면 바로 실직을 제수 받았다. 경국대전에 갑과 1등은
종6품직에 제수한다고 되어있다. 실제 문과 갑과 1등에게 제수된 관직을
보면, 종6품직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시대가 지나면서 종6품직보다는
정6품직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초기 갑과 1등에게는 문한관이나 일반
경관직 등에 제수되었는데,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일반 경관직이었다.
중종대 이후에는 갑과 1등에게 주로 육조 낭관직이 제수되었으며, 인조대
이후로는 성균관 전적을 제수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았다.39)
문과 갑과 1등인 홍이상은 예조 정랑을 제수받았다. 그가 초입사직으로
예조 낭관직에 제수된 것을 볼 때, 그도 스승 민순과 마찬가지로 예에 밝았
던 것 같다. 홍이상의 스승인 閔純은 예학에 일가견이 있었다. 1575년(선조
8) 인순왕후 국휼 때에 민순은 국조오례의에 실린 졸곡 후 服色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선조는 그의 의견에 따라 졸곡 후 복색을 국조오례의
와는 달리 정하였다.40)
38) 박재경, 앞의 책, 52~65면.
39)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의 관직 진출 양상」, 조선시대사학보 43, 2007, 9-17
면 참조.
40) 선조실록 권9, 선조 8년 5월 ??일, 5월 ??일.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69
홍이상은 예조 정랑에 제수된 그 해 12월에 파직되었다. 예조가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담제 후 선조가 陳賀를 받는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인성왕후는 1577년(선조 10)에 사망하여 2년 후인 1579년
(선조 12)에 담제를 시행하였다. 홍문관과 대간에서는 담제 후에 행해지는
진하를 정지하도록 차자를 올렸다. 선조는 언관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담제
후에 진하를 받고자 하였다. 이때 예조에서 홍문관에서 진하를 정지하도록
차자를 올린 것을 대간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선조에게 回啓하여 일
을 진행시켰다. 대간은 이일로 예조 당상과 낭청을 파직하도록 요구하였
다.41) 홍이상은 이 일 때문에 파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이상은 그 다음해인 1580년(선조 13) 호조 정랑을 거쳐서 사간원 정언
에 제수되었고, 홍문록에 올랐다. 조선시대 갑과 1등은 총 766명이다. 그
가운데 홍문관 관원에 제수된 사람은 328명으로 42.8%이다. 조선시대 홍
문관 관원을 역임한 사람 총 3,619명 가운데 갑과 1등은 9%에 지나지 않는
다. 그가 홍문록에 올랐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한때 홍문관 관직이 문과급제자의 초입사직으로 활용되기
도 했다. 그러나 홍문관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더 이상 초입사직으로 사용되
지 않았다. 따라서 문과 급제에서 홍문관 관직 제수까지의 연한은 점차 길어
지게 되었다. 갑과 1등의 홍문관 관직 제수 연한은 0~24년까지 매우 다양
하다. 그중 문과 급제 후 5년 이내에 홍문관 관직에 나가는 경우는 212명으
로 72%이다. 6품직을 받은 갑과 1등이 홍문관 관직에 나가는데 5년 이상의
연한이 소요된 것은 직무 수행에 문제가 있어 관직 승진이 순조롭지 못했거
나 정치적인 문제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과 급제 후 1년 이내에 홍문
41) 선조실록 권13, 선조 12년 12월 6일(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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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관직에 제수되는 경우는 93명으로 32%이다. 이러한 경우는 육조낭청․
대간을 거쳐 바로 홍문관 관원이 된 경우이다. 홍이상은 예조와 호조의 낭청
을 거쳐서 정언으로 제수되었다가 홍문록에 올랐다.
홍문록에 이름이 오른 홍이상은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81년(선조 14) 형조 좌랑을 거쳐서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그 해 부친
상으로 관직을 사임하였다가 1583년(선조 16) 다시 전적에 제수되었고, 여
러 참상직을 거쳐 1591년(선조 14) 승지에 제수되어 당상관으로 승진되었
다. 홍이상이 초입사직을 받은 지 12년 만에 당상관에 올랐다. 참상 직임을
수행한 12년 가운데 부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2년을 제외하면 10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셈이다. 홍이상의 10년 간 참상관 이력을 보면, 육조․홍문
관․사헌부․성균관․의정부․사간원․사복시․사재감 등을 거쳤다.
10년 동안 관직을 거치는 동안 외관직을 나간 적은 없다. 경국대전에
의거하면, 4품으로 승진하기 위해서 외관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홍이상은 5품직에서 4품직으로 승진될 때 외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1580년(선조 13)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과 1589년(선
조 22) 겨울 황해도 안무어사에 제수된 것이 전부이다. 황해도 안무어사란
직임은 외방 사신으로 일시적인 것이었다. 1589년 황해도 안악․재령 등지
에서 정여립과 결탁한 역변이 있었다.42) 이 사건으로 흩어진 황해도 지역
의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황해도 안무어사 홍이상의 임무였다. 홍이상은
참상관에 재직하는 동안 단기적인 使臣으로만 재임하였다.
외관을 거치지 않고, 4품에 승진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있다. 승문원
관원, 吏文 特異者, 홍문관 관원 등으로 재임하는 자들은 외관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43) 文翰을 담당한 관원들은 직책의 전문성 때문에 지방관으
42) 선조실록 권23, 선조 22년 10월 2일(병자), 10월 15일(기축).
43) 원창애, 앞의 책, 40면.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71
로 제수하지 않았다. 홍이상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 관직에 제수되기 전
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9년 이미 4품 이상의 관직에 재임하
면서 황해도 안무어사로 나갔다가 왔다. 홍이상은 사가독서를 받고, 홍문
관 관원을 거치는 등 儒臣으로서 외관직 대신 서장관과 외방 사신에 제수
되었던 것이다.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최선의 코스는 참하관은 예
문관․승정원․홍문관에서, 참상관은 성균관․세자시강원․사헌부․사
간원․육조․홍문관․의정부 등을 거쳐서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참상관일 때 외관직에 나가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아서
당상관까지 승진 연한이 짧다. 두 번째는 참하관으로 淸職은 거쳤으나, 참
상관 때 청요직 이외에도 일반 경관직을 더 거치는 경우이다. 주로 참상청
요직과 함께 各司의 正․副正․僉正 등을 거치는데, 당상관 승진까지의
연한이 길어진다. 셋째는 참하관 때부터 淸職에 제수되지 못하고, 일반 경
관 관원으로 제수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외직 제수가 빈번하고, 청요
직에 나가기가 쉽지 않아서 당상관 승진을 장담하기 어렵다.
홍이상은 장원 급제를 하였기 때문에 참하관은 거치지 않았으며, 참상관
을 지내는 동안 청요직 뿐 아니라 사복시와 사재감에서 正과 副正을 거쳤
다. 그렇다면 홍이상의 참상관 이력은 다른 문과 갑과 1등 출신 관원과 비
교할 때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
홍이상이 문과에 급제했던 시기와 비슷한 때에 갑과 1등으로 급제한 몇
사람의 관력을 검토하였다. 검토 대상은 홍이상과 조건이 유사한 인물로
정하였다. 즉 갑과 1등, 홍문록 등재되었거나 사가독서를 받은 인물로 한정
하였다. 1538년(중종 33) 알성시 갑과 1등 鄭惟吉, 1564년(명종 19) 식년시
갑과 1등 李珥, 1572년(선조 5) 춘당대시 갑과 1등 沈忠謙, 1572년(선조
5) 별시 갑과 1등 柳根, 1573년(선조 6) 알성시 갑과 1등 李潑 등 5명이다.
17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이들의 관력을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정유길․이이․심충겸․유근․ 이발의 관력
이름
관력
정유길44) 이이45) 심충겸46) 유근47) 이발48)
문과급제
연도
1538년 1564년 1572년 1572년 1573년
초입사직 전적 호조 좌랑 전적 전적
홍문록 등재연도 미확인 등재연도 미확인 1573년 1573년 1574년
사가독서 1554년49) 1567년50) 1573년 1574년
경유관청
육조, 시강원,
의정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내자시, 사복시
육조,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육조, 사간원,
사헌부, 성균관,
홍문관, 제용감,
예빈시, 군자감,
내섬시, 군기시,
사복시, 봉상시
육조, 사간원,
사헌부, 성균관,
의정부, 종묘서,
홍문관
육조, 사헌부,
홍문관
사신 서장관
질정관(명나라)
선위사(일본)
외관 청주목사
춘천부사
여주목사
제주 판관
흡곡 현령
당상관
승진
1550년 1573년 1589년 1590년 1582년
비고
* 1544년 모친상
* 1548년 홍문관
부교리 제수 기록
있음
* 1569년 홍문관
교리 제수 기록
있음
* 홍문록 등재는
1573년이나, 홍문
관 관원이 된 것
은 10년 후이다.
44) 정유길의 관력은 국조인물고(권49, 우계․율곡 종유친자인, 鄭惟吉條, 서울대학
교출판부, 1977), 중종실록․명종실록의 관직 제수 기사를 참조하였다.
45) 이이의 관력은 명종실록․선조실록의 관직 제수 기사를 참조하였다.
46) 심충겸의 관력은 국조인물고(권50, 우계․율곡 종유친자인, 沈忠謙條, 서울대학
교출판부, 1977)을 참조하였다.
47) 유근의 관력은 국조인물고(권51, 우계․율곡 종유친자인, 柳根條, 서울대학교출판
부, 1977)을 참조하였다.
48) 이발의 관력은 선조실록의 관직 제수 기사를 참조하였다.
49) 김중권의 「명종조의 사가독서에 관한 연구」에 실린 <표 1> 사가독서일람표(서지
학연구 19, 2000, 94면)에 의거하면, 1554년에는 사가독서 피선자가 없다. 그러나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73
18년이다. 초입사에서 당상관에 오르는 데 9년이 걸린 이이나 이발의 관
력을 보면 경유 관청이 적다. 이이는 서장관과 외관직에 제수되었음에도
당상관까지 승진하는데 9년이 걸렸다. 이발은 정여립의 난을 주도한 인물이
기 때문에, 세세한 관직 기록을 확인하기 어렵다. 김효원과 함께 동서분당
문제에 관련되어 있었으나, 참상 청요직을 거쳤다. 이발은 光州 李氏로서
그의 부친 李仲虎를 비롯하여 5대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했으며,
거의가 한림과 홍문관 출신으로서 명문 관료 가문이라 하겠다.51) 이발 역시
학문적인 역량이 있어서 갑과 1등으로 급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가독서를
받았다. 1584년(선조 17) 선조가 세 정승에게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니, 좌의
정 盧守愼은 이발 등 7명을 추천하였고, 우의정 정유길은 홍이상 등 6명을
추천하였다.52) 이발은 관료가문 출신으로 학문적 역량까지 있어서 한림과
참상 청요직을 거쳐서 당상관으로 빨리 승진된 것으로 추측된다.
정유길은 홍이상과 마찬가지로 참상관에 있을 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당상
관 제수까지 12년이 걸렸으나, 상 기간을 제외하면 10년이 걸린 셈이다. 심충
겸이나 유근은 참상관에서 당상관으로 승진하기까지 정치적인 굴곡이 있어
서 참상 청요직 이외에도 경관 각사를 두루 거쳐서 당상관에 승진하였다.
몇몇 사례를 통해서 갑과 1등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상
1554년 부제학 정유길이 사가독서에 피선되어 부제학의 체차를 원하였다.[명종실
록권17, 명종 9년 8월 11일(기묘)].
50) 김중권, 「명종조의 사가독서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10, 2000, 94면, <표 1>
사가독서일람표.
51) 이발의 부친 李仲虎는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급제자로 한림과 홍문관을 거쳤다.
그의 조부 李公仁은 1519년(중종 14) 식년 문과급제자로 한림과 옥당을 거쳤다. 그의
증조부 李達善은 1486년(성종 17) 식년 문과급제자로 홍문관을 거쳤으며 사가독서를
받았다. 그의 고조부 李亨元은 1451년(문종 1) 중광시 문과급제자로 집현전 학자였
다. 그의 5대 조부 李先齊는 1419년(세종 1) 증광시 문과급제자로 한림을 거쳤다.
52) 선조실록 권20, 선조 17년 11월 1일(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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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까지 승진하는데 9~10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며, 정치적인 문제에 연
루되거나 업무 처리에 실수가 있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홍이상
은 참상관으로 재임할 때 조정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였고, 정치적인 문
제에도 연루되지 않아서 비교적 빨리 당상관까지 승진하였다.
홍이상을 비롯한 갑과 1등 출신 관료의 승진 속도가 갑과 2등 이하로
급제한 관료들 보다 반드시 빠른 것은 아니다. 홍이상과 같이 홍문록에 들
었던 이항복은 문과급제에서 당상관 승진까지 10년이 소요되었다. 그는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서 병과 4등으로 급제하였다.53) 그는 권지 승
문원 정자로 차정되었다가 급제된 그 해에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홍문록
에 올랐다. 그는 참하관은 예문관․홍문관에서, 참상관은 성균관․육조․
사간원․홍문관․의정부를 거쳐서 당상관인 승지가 되었다. 이항복이 다
소 일찍 당상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1590년(선조 23) 평난공신 3등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정부 사인 재임 때 공신에 책봉되어 바로
종3품 전한과 정3품 당하관인 직제학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54)
홍이상과 같은 해 식년 문과에서 을과 1등으로 합격하였고, 홍이상과 함
께 사가독서를 받았던 鄭昌衍도 문과 급제 후 9년 만에 당상관으로 승진하
였다. 정창연은 문과에 급제한 그해에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고, 홍문록
에 오르는 데는 4년이 걸렸다. 그는 육조 낭관,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등
을 거쳐 1588년(선조 21) 당상관인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55) 정창연은
사가독서를 받을 정도로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으며, 급제 후 바로 예문관
에 제수되었으니 門地도 높았다. 게다가 직임을 수행하는 동안 물의가 없
었기에 승진이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56)
53) 국조문과방목 1, 태학사, 1984, 541면.
54) 백사집 부록, 鼇城府院君李公神道碑銘,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 종합DB.
55) 선조실록 권22, 선조 21년 3월 9일(임진).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75
이항복이 공신 책봉으로 참상관의 연한이 단축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상
관으로 승진되는데 10년이 소요되었고, 능력과 문지가 겸비된 정창연은 당
상관에 오르는데 9년이 걸렸다. 을과․병과급제자들도 한림을 거쳐서 참
상 청요직 만을 거치는 경우 당상관까지 승진하는 데 10년 내외의 기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문과급제자는 급제 등위와 상관없이 학문적 역량이 있고
문지까지 갖추어진 인재는 당상관까지 승진하는 데 짧게는 10년 내외의
연한이 걸리도록 인사 시스템이 운용된 것은 아닌가 한다.
1591년(선조 24) 동부승지에 제수된 홍이상은 1614년(광해 6)까지 23년
동안 당상관으로 재임하였다. 홍이상의 당상관 경력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홍이상의 당상 경력57)
날짜
동반직
서반직 비고
경관 외관
1591년(선조 24) 6월 우부승지
7월 이조참의
1592년(선조 25)
봄 파직
1592년(선조 25) 예조참의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첨지중추부사
김공량 일로 임금의
뜻과 어긋남
1593년(선조 26) 1월 병조참의
4월 대사간
첨지중추부사 성절사로 연경에 감
56) 정창연은 정광필의 증손이고 정유길의 아들이다. 정창연 누이의 딸이 광해군의 처이다.
57) 모당집의 행장과 선조실록․광해군일기 관력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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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12월 좌부승지
1594년(선조 27) 우승지
6월 좌승지
8월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
1596년(선조 29)
첨지중추부사
겸 비변사 당상
7월 도총부 부총관
경기도 관찰사
겸 순찰사 개성
유수
1597년(선조 30) 12월 동지중추부사
형조참판
1598년(선조 31) 여름 분 호조참판 파직
8월 한성부 우윤
12월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의흥위
상호군
접반사
1599년(선조 32) 3월 한성부 우윤
4월 한성부 좌윤 사직
7월 동지중추부사
춘천도호부사 乞郡, 파직
1600년(선조 33) 7월
호군 겸
경리사 접반
부사
8월 대사헌
10월 도총부 부총관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77
1601년(선조 34) 1월 상호군
9월 세자좌빈객
1602년(선조 35) 1월 호조참판
대사헌
4월 대호군
6월 안동대호부사
1604년(선조 37) 9월 사임
12월
부호군 겸
동지춘추관사
1605년(선조 38) 4월 동지중추부사
5월 호조 참판
1606년(선조 39) 봄 대사성
5월
용양위
부호군
1607년(선조 40) 1월 청주목사
1608년(광해 즉위) 10월 첨지중추부사
대사간에
보임되었으나,
청주목사 때
추고당하여 체직
11월 대사헌 해유 문제로 인피 체직
12월 부제학
1609년(광해 1) 2월 예조참판
4월 대사헌
5월 대사성
8월 대사헌 체직 모친 병, 모친상
1611년(광해 3) 겨울 부제학 사직 체직
1612년(광해 4) 1월 대사간 사직 체직
2월 대사성
9월 개성유수
1614년 임기 만료
사임
178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홍이상이 재임했던 경관 당상관직은 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대사
헌, 육조 참의․참판, 우윤, 좌윤, 세자빈객 등이고, 외관 당상 관직은 경상
도 관찰사, 경기도관찰사, 춘천도호부사, 안동도호부사, 청주목사, 개성유
수 등이다. 서반직으로는 첨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부총관, 호군, 상호
군, 대호군 등이다.
홍이상이 재임한 당상 관직의 특징은 교육과 간쟁 직임을 주로 맡았다
는 점이다. 승지 혹은 부제학으로서 경연 참찬관을, 세자좌빈객으로 세자
의 교육을 그리고 대사성으로 유생의 교육을 맡았다. 홍이상은 오랫동안
경연에 참석하면서 선조에게 최고의 講官으로 인정받았다.58) 그는 교육에
만 힘쓴 것이 아니라 교육 환경에도 관심을 가졌다. 임진왜란 이후 성균관
이 불타서 동재와 서재 몇 칸만이 남아있는 실정이었다.59) 1606년 대사성
으로 재임할 때 문묘와 명륜당 중건에도 관여하여 완성을 보았다.60) 문묘
와 명륜당이 완성된 후에도 유생식당을 조성하기 위해서 상소를 올렸다.61)
선조는 이 해 겨울 명륜당 재건에 공이 있는 홍이상에게 숙마 1필을 상으
로 내렸다.62)
홍이상은 대사헌․대사간에 여러 번 제수되었다. 그는 선조와 광해군대
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기축옥사 때 최영경의 사망을 막지 못한 성혼을
죄주어야 한다는 논의에 반대하기도 하고, 붕당으로 인한 폐해를 간언하기
도 하였다. 그가 언관의 장관으로 자주 제수되었던 것은 학맥이나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하게 시비를 가려서 간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광해
군은 홍이상을 간쟁의 장관 자리에 두고자 하였으나, 그가 사직 상소를 올
58) 광해군일기 권95, 광해군 7년 9월 19일(임진).
59) 선조실록 권105, 선조 31년 10월 20일(임신).
60) 선조실록 권198, 선조 36년 4월 22일(경신).
61) 역주모당선생시문집 상, 成均館啓辭, 민속원, 2012, 351-352면.
62) 선조실록 권206, 선조 36년 12월 17일(신해).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79
려 여러 번 체차되었다.
홍이상은 참상관 시절 외관직에 나간 적이 없으나, 당상관이 되어서는
외관직에 여러 번 제수되었다. 그가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한 후에
춘천 도호부사에 제수된 것은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 외관직을 원하였기
때문이다.63) 그 외 안동도호부사, 청주목사, 개성유수로 나간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홍이상의 의견을 수렴할 수 없었기 때문
에 외직에 보임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에 홍이상은 북인
의 정권 농단이 거세지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광해군은 대사헌과
대사간을 여러 차례 제수하였으나 사임하고 외임으로 나갔다. 그는 개성유
수의 임기를 끝내고는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홍이상이 서반직에 제수된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첫째 간쟁을 통
해서 국왕의 뜻과 맞지 않아 체차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1592년(선조
25) 선조가 왜란을 피난하여 개성부에 머물 때 부제학 홍이상은 김공량을
처벌하도록 간언하였다. 김공량은 인빈 김씨의 오빠로서 궐을 드나들면서
많은 폐단을 일으켜 백성의 원망이 컸다.64) 부제학 홍이상은 김공량의 죄
상을 처벌하여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였다.65) 선조는 김
공량에 대한 비답을 내리지 않고, 그를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둘째
는 명나라 사신으로 가거나, 명나라의 사실을 접대하는 접반사의 직임을
맡을 때에 서반직에 제수되었다. 셋째는 외관직의 임기를 끝낸 후 바로 마
땅한 동반직 자리가 나지 않을 때에 서반직에 제수되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는 조선 관료 체제 운영상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직임을
수행하면서 국왕의 뜻을 거스르거나 물의를 일으켜서 한직에 보임된 것은
63) 역주모당선생시문집 상, 乞郡疏, 민속원, 2012, 328-330면.
64)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3일(임술).
65)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8일(정묘), 5월 10일(기사).
180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간쟁 활동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홍이상의 당상 관직 경력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실무형 행정 관료는 아
니었다. 그는 경연, 세자 교육 그리고 유생 교육을 담당하는 직임과 언관에
빈번히 재직한 것은 그가 학자 관료 즉 儒臣이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4. 홍이상의 관직생활
홍이상은 당하관 12년, 당상관 23년으로 약 35년간 관직에 있었다. 그
중 부모상을 당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관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는
儒臣이란 이름에 걸맞게 관직 진출 이후에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배
운 바의 학문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그가 선조에게
제시하였던 대책문의 ‘公明’과 ‘誠’을 실천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그가 관직 생활에서 ‘공명’을 실천했던 측면을 살펴보자. 홍이상이
활동했던 시기는 동서 분당, 동인의 남북 분당 등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당파가 생겨나고, 이들 간에 갈등으로 점차 당색이 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동서로 분당 된 이후 정여립의 역모 사건으로 인한 기축옥사로 당색이 본
격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홍이상이 당파에 관여되어 있다고 여겼다. 그의 학문적
성향과 유생시절부터 친밀하게 지낸 인물들을 생각한다면 그런 추측이 가
능하다. 홍이상은 민순의 제자이며, 그가 유생 시절 교유했던 인물들도 거
의 서경덕 문인에게서 배웠다. 동서로 분당된 후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
하였거나, 서경덕 문인에게 공부하였던 사람들은 동인 혹은 서인으로 적극
적으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였다. 당대 사람들은 홍이상도 동인으로 활동
하고 있다는 추측을 하였을 법하다. 그러나 주변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81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때에 서인이었던 白惟咸은 예조정랑으로 사
은숙배를 하자마자 정여립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람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고, 사헌부 헌납으로 옮겨서는 양사의 대간들을 체직시키도록 탄핵하
였다.66) 홍이상은 백유함이 직접 거론한 인물에는 속해있지 않았다. 실록
에는 백유함이 왜 양사의 대간을 체직시키도록 상소를 올렸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아마도 정여립과 관련된 대간들을 체차하도록 탄핵했을 것으로 추
정된다. 그때 사람들은 아마도 사간으로 재직하고 있던 홍이상도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측한 것 같다. 그러나 홍이상이 정여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
었던 李潑․李洁 형제를 탄핵함으로써 그가 당파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임
이 밝혀졌다.
그가 관직에 있는 동안 당파뿐만 아니라 학맥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국왕이 도성을 비우고 피난하게 된
책임 공방이 있었다. 양사에서는 영의정 이산해의 책임이 크니, 그를 삭탈
관직 하도록 청하였다. 선조는 좌의정인 유성룡은 거론하지 않고 영의정
이산해에게만 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선조는 이산해 보다는
유성룡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였다. 선조는 자신이 우환을 대비해야 한
다고 했을 때에 유성룡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
이다. 선조는 이산해와 유성룡 모두에게 파천의 책임이 있으니 둘 다 파직
시키도록 전교하였다. 그러나 관료들은 이산해가 파천의 책임뿐만 아니라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과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른 것까지 지적하였다.
이때 홍이상 역시 파천을 주장한 것은 이산해라고 지적하였다.67)
이산해는 이지함의 조카로 서경덕의 학풍을 이어받았다.68) 학맥으로 생
66) 선조실록 권23, 선조 22년 11월 4일(무신), 11일(을묘).
67)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2일(신유).
18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각한다면 홍이상은 이산해를 두둔할 법도 한데 그는 파천의 책임을 지어야
할 사람으로 이산해를 지목하고, 유성룡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홍
이상은 이산해가 당시 파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들었고, 이산해가 왕실
인척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저지른 비리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러
한 주장을 한 것이다.
파천의 책임을 지고 이산해는 관직을 삭탈된 후에 평해로 유배되었다.
이산해 대신 유성룡이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양사의 탄핵으로 파직되
었다. 申磼은 이산해만 삭탈관직 되었으나 유성룡도 정국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극력 탄핵하였다. 이 때 이항복과 홍이상이 적극적으로 유성룡을
옹호하여 그에 대한 처벌이 파직에 그치게 하였다고 한다.69) 선조는 피난
을 위해서 서울을 떠날 때 유성룡은 체찰사로 서울에 남겨두려고 하였다.
이때 이항복은 유성룡이 중국과 교섭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인재이므로 호종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서 유성룡이 서울에 남지 않게 되었다.70) 홍이상도
유성룡이 당시의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대신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항복과 함께 소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1602년(선조 35) 홍이상이 대사헌으로 재임할 때도 成渾에 대한 처벌을
청하지 않은 이유로 체직되었다. 1591년(선조 24) 세자 책봉 문제로 정철이
선조의 신뢰를 잃자 기축옥사로 무고하게 죽은 최영경의 신원 운동이 시작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는 최영경이 사헌부 대사헌으로 추증되었고71),
68) 신병주, 「17세기 전반 북인관료들의 사상-김신국, 남이공, 김세렴을 중심으로」, 역
사와 현실 8, 1992, 131면.
69)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1일(경신).
연보에는 유성룡이 파직된 후에 평양에 이르러서 다시 그를 귀양보내야한다는 논의
가 일어났을 때 이항복과 홍이상이 선조에게 아뢰어서 그러한 논의가 수그러들었다
고 하여 선조수정실록과는 시차가 있다.(윤호진 역주, 역주모당선생시문집 하,
민속원, 2012, 35면.)
70)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13일(계묘).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83
정철은 관직이 추탈되었다.72) 기축옥사 문제는 최영경의 신원과 정철의 처
벌로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1601년(선조 34) 정인홍의 문인인 경상도
유생 문경호가 최영경을 죽이는데 가담된 成渾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
소를 올림으로써 성혼의 처벌문제가 표면화되었다.73) 이 상소를 기화로 성
혼의 문인을 위시한 서인과 북인간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문경호의 상소에 대하여 대사헌 黃愼을 비롯한 서인 측 대간들은 성혼
을 옹호하면서 상소문의 내용은 고령 이하 몇몇 고을의 의견일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문경호의 상소에 대해 시비와 허실을 가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지역의 인심과 관계된 문제로 단정하면서 서인 대
간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다. 선조는 서인 대간들을 차례로 체차시켰다.
이즈음 1601년(선조 35) 1월 홍이상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74)
문경호가 상소를 올릴 당시 대사헌 황신은 피혐하여 사직하였고, 새로
제수된 기자헌 역시 피혐하여 사직하였다. 문경호의 상소는 성혼만의 처벌
을 청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정철의 심복과 성혼의 문인들이 관직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상소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면 그 피해가 성혼에게 그
치지 않고, 문인들에게도 여파가 미칠 것이기 때문에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대간들이 계속 사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선조는 대간들이 성혼의 처벌을 요구하기를 바랐다. 그것은 문경호의 상
소에서 거론된 金宗儒의 아들 金翬가 피혐하는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한 비
답 비망기에 잘 나타나 있다.75) 선조는 비망기에서 최영경을 죽음으로 몰
고 간 정철은 최고의 간흉이고 성혼은 그의 심복으로 몸은 둘이나 마음은
71) 선조실록 권51, 선조 27년 5월 23일(경자).
72) 선조실록 권57, 선조 27년 11월 13일(정해).
73) 선조실록 권144, 선조 1601년 12월 20일(계미).
74) 선조실록 권145, 선조 35년 1월 26일(기미).
75) 선조실록 권145, 선조 35년 1월 16일(기유).
184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하나였다고 표현하였다. 선조는 성혼도 최영경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입
장을 표명한 것이다.
선조는 문경호의 스승인 정인홍을 사헌부 장령으로 삼은 그날 홍이상을
대사헌에 제수하였다. 선조는 정인홍과 홍이상이 합심하여 성혼의 처벌을
요구할 것을 기대하고 이러한 인사를 단행한 것 같다. 그러나 홍이상이 올
린 상소는 선조가 바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홍이상은 최영경이 무고하게
죽게 된 사실 관계에 대한 시비만을 따졌다. 홍이상의 상소 요지는 다음과
같다.
최영경은 처음에 체포되었다가 실상이 없어서 석방되었는데, 재차 국문
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재차 최영경의 국문을 청한 것은 그 당시
대간들이었다. 그 당시 대간의 계청은 물론 권간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주도한 정철을 빼고는 죄를 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정
철은 이미 죄를 받았으니 언급할 것이 없으며, 지금에 와서 그 당시 계청
했던 대간의 죄를 논하기도 어렵다. 또한 성혼이 정철의 절친한 친구이니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혼이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최
영경을 구하지 못한 것은 책임이 있지만, 그가 저지하지 못했다고 하여 실
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이들과 동등하게 처벌할 수는 없다.
홍이상은 성혼이 실행한 범죄 사실이 없는데 최영경을 죽음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그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홍이상와 사헌
부 관원의 상소가 올라가자, 선조는 매우 언짢았다. 선조가 원한 것은 재차
신문한 대간의 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성혼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이었
다. 홍이상은 선조의 비답을 받고 파직되기를 원하였다.76) 이 상소로 인하
여 대사헌에서 체직되어 대호군에 제수되었다가 안동도호부사로 나가게
76) 선조실록 권146, 선조 35년 2월 7일(경오), 2월 8일(신미).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85
되었다.
홍이상은 선조가 자신을 대사헌에 제수한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그는 사건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공정하게 시비를 가리고자 하
였다. 그는 학맥이나 당파 그리고 국왕의 뜻에 구애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의 정황상 대간들이 문경호 상소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서 빈번히
교체되었으나, 홍이상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하였다.
홍이성은 공명하면서 또한 그의 직임에 성실하였다. 그는 1580년(선조
13)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은 왕의 이목이고,
조정의 기강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16세기 사림이 등장하여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삼사의 언론은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대간은 풍문만으로
탄핵할 수 있고,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근거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관행까지 생겼다. 언관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언관 개개인의 논핵 보다는
동료들과 합의하여 논핵하는 이른바 ‘合啓’ 방식으로 발전되었다.77)
1580년 7월 정언 유덕수가 강화부사로 재임 중이었던 金鋘가 백성들은
돌보지 않고 선물하는 데만 신경을 쓰니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누구에게 선물하고, 무슨 일에 태만하였는지 대라고 비답을 내렸
다.78) 선조의 이러한 태도에 언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정언 홍이상과
헌납 김찬은 풍문만으로도 탄핵을 할 수 있는 언관의 관행에 따라 상소한
것이어서 누구에게 선물을 했는지, 무슨 일에 태만한지도 세세하게 말할
수 없는 자신들을 파직시키라고 하였다. 그들은 선조에게 같은 내용의 상
소를 연속 세 번이나 올렸다. 그래도 선조가 수긍하지 않자, 그럼에도 정언
홍이상은 재차 김오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79) 홍이상은 신하의
77) 구덕회, 「언론과 언관」, 역사비평 39, 1997, 359-360면.
78) 선조실록 권14, 선조 13년 7월 13일(경진).
79) 선조실록 권14, 선조 13년 7월 14일(신사), 15일(임오), 16일(계미).
186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도리는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80)
그가 언관으로서 끝까지 김오의 탐오와 언관에 대한 선조의 잘못된 처사를
논하였다.
그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 선조가 총애하는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의 비리를 계속 아뢴 것도 그러한 예이다. 선조는 김공량을 처벌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하였지만, 홍이상은 공론을 따르도록 간쟁하였다.81)
결국 선조는 그를 부제학에서 체직시키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그는 유신으로서 경연관이나 언관의 직임을 주로 맡아서 행정 실무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1594년(선조 27) 홍이상
은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경상관찰사는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외
직이었다. 선조와 비변사에서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홍이상에게 원했
던 것은 군곡 확보와 장수 간의 화목을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군곡 확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유민을 안집하여
농업에 종사하도록 해야 하고, 수확한 양식은 적군에게 빼앗기지 않고 안
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산성을 수축해야 한다. 장수 간의 화목이란 전쟁에
서의 功過를 공정하게 보고하여 불만이 없게 하는 것이다. 홍이상은 이러
한 조정의 주문에 대해서 농사에 힘쓰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이 급선무라
고 대답하였다.82)
그가 경상도에 부임하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降倭 문제였다. 임진왜란
중 처음 항왜가 나타난 것은 1593년(선조 26)이었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교섭이 답보 상태에 있었던 시기였다. 남해안 일대 주둔하고 있던 왜
병이 명군이나 조선군에 투항하는 일이 잦았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왜군들
80) 선조실록 권22, 선조 21년 1월 3일(정해).
81)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3일(임술), 5월 8일(정묘), 5월 10일(기사).
82) 선조실록 권29, 선조 25년 8월 7일(갑오).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87
이 항복해 오자, 1594년부터는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왜군이 투항하도록 유
인책을 쓰기 시작하였다.83) 그 결가 1594년 7월에 항왜 40명이 서울로 옮
겨졌다.84) 홍이상은 경상감사로 부임하자마자 전 경상 감사 한효순이 진행
중이었던 투항하겠다는 왜인와의 교섭을 마무리지었다.
투항하려는 왜인은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있었던 萱島木兵衛였다. 萱島
木兵衛의 투항 의사를 파악한 동래 유생 宋昌世가 그를 회유하여 항복을
원한다는 문서를 당시 경상 감사였던 한효순에게 보내어 8월 중순에 조정
에 전달되었다. 그 문서의 내용은 萱島木兵衛가 50명을 거느리고 항복하
겠다는 것이었다.85) 홍이상은 부임 준비 중이었던 8월 15일 서울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86) 조정에서는 경상도에 머물고 있던 전 경상감사 한효순에
게 萱島木兵衛의 당상관 교지를 보내고, 그에게 50명이 한꺼번에 나오게
되면 발각될 수 있으니 날짜를 정해서 점진적으로 나오게 하라는 답서를
보내게 했다.87) 홍이상이 부임한 후에도 萱島木兵衛와의 서신 왕래가 있
었는데, 10월 18일 홍이상은 그에게 투항을 재촉하는 답서를 보냈다.88) 萱
島木兵衛의 투항이 정확히 언제 이루어졌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홍이상의
편지로 보아 적어도 10월 18일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萱島木兵衛의 투
항 이후 1596년 4월까지 14건의 왜병 투항이 이루어졌다.89)
83) 한문종, 「임진란 시기 항왜의 투항 배경과 역할」, 인문과학연구 36, 323-324면.
84) 선조실록 권53, 선조 27년 7월 21일(정유).
85) 한문종, 앞의 책, 324면.
86) 선조실록 권54, 선조 27년 8월 15일(경신).
87) 선조실록 권54, 선조 27년 8월 16일(신유).
88) 홍이상이 보낸 답서에 보면, 萱島木兵衛을 절충장군 용양위 상호군이라고 칭하고
있다. 전 경상감사에게 내렸던 교지가 아마도 그에게 상호군을 제수한다는 내용이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현재 풍산홍씨 가문에 소장되어 있다.(홍기원, 「임진
왜란 중에 활약한 직무와 관찰사로서의 모당공과 행적」, 풍산홍씨 종보 4, 풍산홍
씨대종회, 2012, 74면)
188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그는 경상도를 순행하면서 전선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
하였다. 당시 경상도의 상황은 군량이 매우 시급하였다. 전란이 4년이나
계속되어 군량 확보가 관건이었다. 그는 군병과 농민으로 나누었다. 군병
은 수방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농민들은 경작하여 양식을 마련하게 하는
병․농 분리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때 수방하는 군병을 의승군이라고 칭하
였다. 군량의 조달 방법은 납속하는 방법은 9등급으로 나누었다. 곡식 납부
대상은 양반․평민․천민의 구분이 없었다. 이들에게 납속을 받아 군량으
로 사용하였는데, 납속 액수는 郡의 크기에 따라서 정해졌다.90) 유성룡은
홍이상의 의승군 제도에 대하여 경상도 백성들이 편안히 농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91)
홍이상은 이렇게 마련한 군량을 오랜 동안 사용하기 위해서 절약 정책
을 사용하였던 것 같다.92) 홍이상의 군량 공급 정책으로 두서없는 군량 공
급 체계는 정비되었으나, 지급되는 양이 예전보다 적어서 각 진의 장수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도원수에게 홍이상을
만나 상의하도록 했으나, 감사인 홍이상은 경상좌도에 있고 도원수는 경상
우도에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93) 도원수와 경상 감사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자, 비변사에서는 경상도를 좌도와 우도로 다시 나누어 관리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사실 分道는 이보다 앞서서 홍이상이 요청한 것이다. 경상도
가 넓은데다가 전시 상황이 우도와 좌도가 달라서 군기 마련, 유민 관리,
수령과 변장 검칙하는 일 등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전에 경상도는 경상도 관찰사 1명 체제였다. 임진왜란이 발발
89) 한문종, 앞의 책, 325면.
90) 윤호진 역주, 역주 모당선생 시문집 하, 민속원, 2012, 39면.
91) 선조실록 권67, 선조 28년 9월 6일(을해).
92) 선조실록 권59, 선조 28년 1월 4일(정유).
93) 선조실록 권60, 선조 28년 2월 6일(기유).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89
하여 왜군이 경상좌도를 통해서 북상하자,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경
상우도로 도망하였다. 선조는 김성일을 전란의 피해가 적은 경상우도에 초
유사로 보냈다. 김성일이 초유활동을 통해 경상우도 사족의 의병 활동을
촉구하고 격려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 조정에서는 1592년(선조 25) 8월 초
에 경상도를 우도와 좌도로 나누어서 경상좌도 관찰사로 김성일을, 경상우
도 관찰사로 한효순을 제수하였다.94) 그 후 평야성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
은 후퇴하자 명나라 군사의 접대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 경상좌도와 경상우
도를 다시 합쳤다.
홍이상은 관찰사 한사람이 경상도 전체를 관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
기 때문에 다시 경상도 분리를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비변사에서는 군
량 조달 문제로 각 진의 진장이 갈등이 생기자, 홍이상의 의견에 동조하였
다. 그래서 홍이상은 경상좌도 관찰사에, 徐渻은 경상우도 관찰사에 제수
되었다.95)
홍이상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항왜문제, 일본․명과의 교섭, 유
민을 안정시켜서 군량을 조달하는 등의 직임을 수행하여 임기 1년이 지났
으나 체직되지 못하였다. 당시는 전시로써 당상 관료들에게 각도의 방백은
매우 부담스러운 직책이었고, 체직 빈도도 매우 높았다. 1595년(선조 28)
11월 사간원에서 평안도․강원도․전라도․경상우도․황해도 관찰사 등
이 모두 병이나 사적인 이유로 체직을 요청한 것 때문에 추고를 요청하였
다.96) 홍이상은 1596년 3월에서야 체직되었는데, 후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97)
94) 선조실록 권29, 선조 25년 8월 7일(갑오).
95) 선조실록 권54, 선조 27년 8월 15일(경신).
96) 선조실록 권69, 선조 28년 11월 20일(무자).
97) 선조실록 권73, 선조 29년 3월 7일(갑술).
190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경상좌도 관찰사에서 체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경기도 관찰사
에 제수되었다. 경기도 관찰사에 재직할 때에도 1597년(선조 30) 6월 도목
정에 홍이상은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되었으나98), 명나라 군대 접대가 시급
하다는 이유로 경기도 관찰사로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해 12월 홍이상은
병으로 명나라 사진 접대를 제대로 살필 수 할 수 없게 되자 사직하였다.99)
홍이상은 전시에 연거푸 방백의 직임을 맡아서 모두 임기를 채우고 체직되
었다.
안동도호부사로 재직할 때 경상도 순검어사 柳澗이 홍이상에 대해서 자
기 자신은 단속하고 백성들에게 자상하게 정사를 베풀었으며 鎭管을 단속
해서 지속적으로 훈련을 시켰다는 장계를 올렸다.100) 이 장계로 그는 목민
관으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지방군 훈련에도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이 확인
된다. 그는 경상도 관찰사 재임 시절에 농사와 군사 훈련을 병행했던 경험
을 살려서 직임에 임하였다. 선조는 유간의 장계에 대해서 홍이상이 춘천
도호부사 재임 시절에는 수령의 역할을 잘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은 가상하다고 하니 평가가 한결같지 않다는 전교를 내리고는 논상을 하지
않았다.101) 선조는 홍이상이 성혼의 처벌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뜻을 따르
지 않은 것을 언짢게 여겼던 것 같다.
홍이상의 성실성은 사적인 생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출사한 이후 홍이
상의 교유 관계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정구가 지은 신도비명에
도 그는 공무를 마치고 퇴근한 후에도 남들과 부질없이 왕래한 적이 없었
다고 적고 있다. 홍이상은 사적인 모임을 즐겨하지 않고 자신이 배운 바
98) 선조실록 권89, 선조 30년 6월 25일(갑신).
99) 선조실록 권95, 선조 30년 12월 20일(병자).
100) 선조실록 권172, 선조 37년 3월 29일(기묘).
101) 선조실록 권172, 선조 37년 4월 4일(무신).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91
修身에 힘쓴 성실성이 아마도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홍이상이 참여하였던 계회의 성격은 지속적을 교류하던 사람들과
의 사적인 모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계회는 첫째 과거와 관련된 모
임이었다. 사마시 동방 모임으로는 1602년(선조 35) 안동도호부사 재임시
1573년 사마시 합격자로서 영남에서 관원으로 재임하거나 안동 거주자를
중심으로 한 계유사마방회가 있었다. 용두화 모임으로는 1613년(광해 4)
개성유수 재임시 문과 갑과 1등을 했던 관원의 모임이다. 두 번 다 지방관
으로 있을 때 부임지에서 있었던 계회이다. 둘째 1605년(선조 38) 노모를
모시고 있는 관원들이 경수연을 베풀기 위한 계모임이었다. 경수연 계회는
아마도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던 관원들이 뜻을 모아 만든 것으로 여겨진
다. 경수연 계회에 같이 참여했던 姜縉․姜絪․姜紞 형제는 같은 동리에
살면서 교류가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계회 이외에 홍이상이 참석한 모임은 그가 살던 新橋에
서 이루어졌다.102) 이 모임은 주로 같은 동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
되었는데, 경수연 계회 회원이었던 姜紞의 집에 지어진 小樓에서 자주 모
였다. 사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 서울에는 지식인의 교유 모임이
활발하였다. 지식인층 모임이 빈번했던 곳은 도성의 동편에서는 유희경의
침류대와 서쪽에는 姜紞의 小樓, 이유간의 戎臺 등이 위치한 芹洞 일대였
다.103) 강담․이유간의 집 등에서 이루어진 모임에 대한 특별한 명칭은 없
지만, 世舊錄에서는 소루와 융대의 주인과 그곳에 모였던 손님들을 ‘新
橋賓客’이라고 칭하고 있다. 신교빈객의 명단에는 심희수․서성․이호
민․홍이상․이정구 등 75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 모임의 참석
102) 世舊錄(장서각 K2-425) 권1, 洪慕堂履祥條, 14-15면.
103) 이근호, 「17세기 전반 경화사족의 인적관계망」, 서울학연구 38, 2010, 172-174면.
19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자들은 당색이나 학맥이 매우 다양하였다.104) 세구록의 저자도 당시 신
교의 술자리에 동인 출신의 名宰가 과반이 넘으니, 옛날의 당론이 지금과
같이 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홍이상이 新橋 모임에 참석한 것은 姜縉․姜絪․姜紞 형제와는 같은
동리에 살았고, 이유간은 민순의 문인이고, 같은 동리에 살았던 것이 인연
이 되었다. 홍이상은 개성유수로 있을 때 이유간이 주동이 되어서 스승인
민순의 사당인 杏村祠를 지을 때 물력과 工匠을 지원해 주었다. 홍이상과
사돈이 된 이정구는 신교 모임을 주관하는 강신 형제나 이유간과는 절친한
사이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의기가 투합되었던 이항복 역시 이유간의 친
한 친구였다. 이들과 교유가 잦았던 서성 역시 홍이상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시절 그를 도왔고, 경상도가 좌우도로 나뉘었을 때 나란히 좌우도의
방백을 지낸 사이였다.
홍이상은 관직에 나가기 전에는 화담학파 인물들과 친밀하게 교유하였
으나, 관직에 나와서는 다양한 학맥의 인사와 교류하였다. 홍이상이 신교
모임에 얼마나 자주 참여하였는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홍이상은 근
동 일대에 살았던 인사들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은 이
유간의 일기인 愚谷日記에서도 확인된다. 세구록에 의하면 홍이상
당사자 보다 홍이상 사망 후에 홍이상의 형제․아들․손자들이 신교 모임
을 주관하였던 인물들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조반정 후에
서인의 당색으로 정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104) 世舊錄(장서각 K2-425) 권1, 姜氏晉興君判書縉晉昌君左尹絪礪山紞兄弟承旨
綖從兄弟條, 8면.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93
5. 맺음말
이상에서 홍이상의 학업, 관력 그리고 관직 생활을 살펴보았다. 홍이상
은 조선 건국 후에 門地가 약해져 가는 풍산홍씨 가문 출신이었다. 어려서
고향에서는 李拭에게서 소학을 배우고, 12세 때 서울로 유학을 와서 승보
시를 통해 성균관에 기재되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 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20세 때에 민순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573년(선조 6) 생원
시 합격, 1579년(선조 12)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여 관직에 진출하였
다. 그는 科業에만 힘쓰는 유생은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고
실천을 중히 여겨서 잘못된 관습인 성균관 유생 좌차 문제를 개혁하는 데
에 앞장섰다.
관직에 진출한 후에는 문제 급제한지 1년 만에 사가독서를 받았고, 홍문
록에도 올랐다. 육조․홍문관․사헌부․성균관․의정부․사간원․사복
시․사재감 등을 두루 거쳐서 12년 만에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승
진은 당시 능력 있고, 門地가 높은 관원의 승진과 비교할 때 결코 늦지 않
았다. 이것은 당시가 아직 門地 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당상관에 진출해서 약 23년간을 재직하였다. 그의 당상 직임의 특성상
그는 교육과 간쟁을 주로 맡았다. 간쟁의 직임에 있으면서 학연․당파 그
리고 국왕의 뜻에 좌우되지 않고, 그가 배운 바대로 소신을 지켰기 때문에
여러 번 외직에 나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대에 북인들이 득세하
면서 그는 더 이상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개성유수를 마지막으로 사직
하였다.
홍이상이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지키려고 했던 소신은 그가 선조에게
바친 대책문에서 제시하였던 ‘공명’과 ‘성’ 그것이었다. 그가 ‘공명’을 추구했
194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기에 학연이나 당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사간으로서 정여립의 난
당시의 처신, 당상관이 된 이후 임진왜란 발발 후 파천의 책임론 공방 그리고
기축옥사에 대한 성혼의 처벌론 등이 거론될 때 正道에 근거한 公明만을
염두에 두고 간쟁하였다. 그가 역임한 관직의 특성상 그는 실무에 능한 실무
형 관료는 아니었으나, 외관직에 나가서도 성실하게 직임에 임하였다.
그의 소신은 사적인 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출사 이후 그는 사사로운 교
유관계가 많지 않았다. 퇴근한 이후에 남과의 부질없는 왕래를 하지 않았
다. 16세기에는 서울에 지식인들의 모임이 많았고, 관원의 계회도 성행했
다. 그럼에도 그가 주도한 계회가 있었는데, 사마방회․경수연계회․용두
회 등이다. 과거 시험을 매개하거나, 노모를 위한 계회 정도였다. 그가 참석
했던 모임 중 사사로운 성격을 띤 것은 新橋 모임이다. 그가 신교에 살았기
에 이웃과 함께 하는 신교 모임에는 가끔 참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적인 생활에서도 修身에 힘쓰는 성실한 삶의 태도는 형제들과
자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의 동생들도 문과와 생원진사시로 관직에 진
출하였고, 그의 아들 여섯 명 중 네 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닦은
기반 위에 후손들의 관직 진출로 가문의 門地가 높아져서 조선 후기 명문
관료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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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 2014. 10. 30. 게재확정일 : 2014. 12. 11.
196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Abstract
A scholar official Mr. I-sang Hong; His School Training and
Official Carriers
Won, Chang-ae*
105)
Mr. Isang
Hong was a high scholar official who served his careers during the
reigns from King Sun-jo to Kwang-hae-gun. His clan was from Pung-san Hong
family. When he was young he was called In-sang Hong. He passed the first stage
examination of Saeng-won in A. D. 1573(the 3rd year of the Sun-jo reign), won
the first place of the list in the final official examination of Moon-kwa. He was
finally in honour to be appointed at the topmost position, Tae-sa-heon, of Office of
the Inspector-General.
He began to learn, at the age of 20, Mind and Law under the supervision of
Min-soon who was a disciple of the famous scholar, Kyong-duck Seo(The school
of Hwadam). Becoming a student of National Confucian School, Sungkyun-kwan,
he was eager to master typical books of Neo-confucianism with his friends such
as ‘Comprehensive Compilations of Mind and Law’ and ‘Scriptures on Mind’. He
was renowned for his understanding on Confucian Classics. He was given, with
honour, a Leave for Reading, a year after the final official examination, Moon-kwa,
and was also listed in the Roster of Hong-moon-rock. King Sun-jo acknowledged
that he was the best scholar around the time as he attended the seats regularly for
teaching the King(Gyeongyeon-gwan).
His ancestors were outstanding in the initial period of Chosun dynasty and then
gradually faded out as much as other families. He was evaluated as a person who
set up to reconstruct his family again in late Chosun dynasty.
He came over to Seoul to study at the age of twelve. After he passed the
Seung-po examination, he became a student of Seong-kyun-kwan. He was not
satisfied with the routine course work at that time to be an official. He began to
look for a new teacher to pursue some fundamental Neoconfucian
ideas. He met
*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儒臣 홍이상의 학업과 관직 생활 197
a master, Soon Min, when he was twenty years old. He was not usual to aim at
passing official examinations, but rather inclined to learn about the Essences of
Conduct of the Neo-confucian Ideology. He also initiated a reform in Student Order
of Seong-kyoon-kwan.
He served so many low official positions as in six Ministries, Hong-moon-kwan,
Sa-heon-pu, Seong-kyoon-kwan, Ui-jeong-pu, Sa-kan-won, Sa-pok-si, Sa-jaekam,
and others, after he passed Moon-Kwa. It took twelve years that he was
promoted to a High Official Rank, Tang-sang-kwan, after Moon-kwa. His advancement
was relatively not to be late, when compared with good background persons at the
time. Twenty three years witnessed his moto, ‘Fairness’ and ‘Sincerity’, as Tangsang-
kwan careers.
He did hardly pay attentions to belong to any party member nor a school lineage
at all. He took his duty as a critic to dispute the matters with Fairness, when there
happened historical disastrous events : when it was reported the rebellion trial by
Yo-rip Chung, when they quarrelled over who was responsible to ask the King to
flee to China around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when they debated about
the punishment of Mr. Hon Sung who instigated the treason in 1589 in which over
a thousand of persons got harmed. He was not a practical bureaucrat if the
positions which he seated were considered, but he was also assigned to a position
outside the central administration body.
Although it was common, among literati in 16th century, to join in gatherings
in a private mode to support each other, he was unusual in setting up a few private
bonding with others. To count, he joined in such a group as the official examination
passers and the filial meeting supporting old mothers faithfully. He seemed
occasionally to take part in a private gathering of Sinkyo villagers in which he lived
in. His strict life style as a Confucian scholar was a model for his siblings and
offsprings so that his younger brothers became officials after passing the national
examinations and his four sons out of six passed the final stage examinations of
Moon-kwa. The succeeding appointments of his family members to an official
position elevated his family renowned again in late Chosun dynasty.
key words Isang
Hong, scholar official, The school of Hwadam, Hongmoon-
rock, Gyeongyeon-gwan, Fairness, Since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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