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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카페 덕택에 저도 새로 공부 합니다. 가락국기를 발췌하여 올립니다
장달수
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의 탄생과 육가야의 성립 설화 (42년 3월 미상 음력)
가락국기 (駕洛國記) 문종대(文宗代)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金官) 주지사(知州事) 의 문인(文人)이 지은 것으로 이제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 (我刀干)· 여도간 (汝刀干)· 피도간 (彼刀干)· 오도간 (五刀干)· 유수간 (留水干)· 유천간 (留天干)· 신천간 (神天干)· 오천간 (五天干)· 신귀간 (神鬼干) 등 아홉 간(干) 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 (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 (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 (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 구지 입니다.”
또 말하였다. “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어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 (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서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곧 은 (殷)나라 천을 (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곧 한 (漢)나라 고조 (高祖)와 같았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곧 당 (唐)나라 고조 (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곧 우 (虞)나라 순 (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 (首露)라고 하였다. 혹은 수릉 (首陵) 수릉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 이라고도 한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 (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 (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 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 (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 (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 정월(43년)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라고 하고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 (新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답자(畓字)는 속자(俗字)이다. 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고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羅漢) 이 살 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은 여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우(殿宇)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駕洛國記 文庙朝大康年間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今略而載之
開闢之後此地未有邦國之號亦無君臣之稱越有 我刀干 汝刀干 彼刀干 五刀干 留水干 留天干 神天干 五天干 神鬼干 等九干者是酋長領緫百姓凢一百户七万五千人多以自都山野鑿井而飲耕田而食屬 後漢 世祖 光㱏帝 建㱏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所居北 龜㫖 是峯巒之稱若十明 伏之状故云也 有殊常聲氣呼喚衆庻二三百人集㑹於此有如人音隠其形而發其音曰此有人否九干等云吾徒在又曰吾所在為何對云 龜旨 也又曰皇天所以命我者御是處惟新家邦為君后為兹故降矣你等湏掘峯頂撮土歌之云龜何龜何首其現也若不現也燔灼而喫也以之蹈舞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九干等如其言咸忻而歌舞未㡬仰而観之唯紫䋲自天垂而着地尋䋲之下乃見紅幅褁金合子開而視之有黄金卵六圎如日者衆人悉皆驚喜俱伸百拜尋還褁著抱持而歸我刀家寘榻上其衆各散過浹辰翌日平明衆庻復相聚集開合而六卵化為童子容皃甚偉仍坐於床衆庻拜賀盡恭敬止日日而大踰十餘晨昏身長九尺則 殷 之 天乙 顔如龍焉則 漢 之 髙祖 眉之八彩則有 唐 之 髙 眼之重瞳則有 虞 之 舜 其於月望日即位也始現故諱 首露 或云 首陵 首陵 是崩後謚也 國稱大駕洛又稱 伽耶國 即六 伽耶 之一也餘五人各歸為五 伽耶 主東以 黄山江 西南以濸海西北以 地理山 東北以 伽耶山 南而為國尾俾創假宫而入御但要質儉茅茨不剪土階三尺二年癸卯春正月王若曰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宫之南 新畓坪 是古來閑田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四望山嶽顧左右曰此地狹小如蓼葉然而秀異可為十六羅漢住地何况自一成三自三成七七聖住地固合于是托土開疆終然允臧歟築置一千五百歩周迴羅城官禁殿宇及諸有司屋宇虎庫倉廩之地事訖還宫徧徴國内丁壯人夫工匠以其月二十日資始金陽墍三月十日役畢其宫闕屋舎俟農隙而作之經始于厥年十月逮甲辰二月而成㳙吉辰御新宮理万機而懃庻務
수로왕이 탈해를 술법으로 굴복시키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 (琓夏國) 함달왕 (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 (脫解) 라고 하였다. 이 탈해 가 바다를 따라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 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 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 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 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 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 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 가 계림 (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 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忽有 琓夏國 含逹王 之夫人妊娠旀月生卵卵化爲人名曰 脫解 從海而來身長三尺頭圎一尺恱焉詣闕語於王云我欲奪王之位故來耳王荅曰天命我俾即于位將令安中國而綏下民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又不敢以吾國吾民付囑於汝解云若爾可爭其術王曰可也俄頃之間 解 化為鷹王化為鷲又 解 化為雀王化為鸇于此際也寸隂未移 解 还夲身王亦復然 解 乃伏膺曰僕也適於角術之場鷹之鷲雀之於鸇獲免焉此盖聖人惡殺之仁而然乎僕之與王爭位良難便拜辝而出到麟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王竊恐滯留謀亂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 奔入 雞林 地界舟師盡還事記所載多異與 新羅
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다 (48년 7월 27일 음력)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 (留天干)에게 명하여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 (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 (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 (乘岾)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 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 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 가 이에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서로 따라가겠는가”
라고 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 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그렇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 는 산 밖의 별포 (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山神靈)에게 바쳤다. 그 밖에 시종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 (申輔)· 조광 (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 (慕貞)· 모량 (慕良)이라고 했으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 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글를 맞아서 함께 유궁(帷宮)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 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 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 (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 (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 의 왕 수로 (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 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 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 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 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 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 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屬建㱏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九干等朝謁之次献言曰大王降靈已來好仇未得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選入宫闈俾爲伉儷王曰朕降于兹天命也配朕而作后亦天之命卿等無慮遂命 留天干 押軽舟持駿馬到 望山島 立待申命 神鬼干 就 乗岾 望山島 京南島嶼也 乗岾 輦下國也 忽自海之西南隅掛緋㠶張茜旗而指乎北 留天 等先舉火於島上則競渡下陸爭奔而來 神鬼 望之走入闕奏之上聞欣欣尋遣九干等整蘭橈揚桂楫而迎之旋欲陪入内 王后 乃曰我與等素昩平生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 等返逹 后 之語王然之率有司動蹕從闕下西南六十歩許地山邊設幔殿祗候 王后 於山外 别浦 津頭維舟登陸憇於髙嶠解所著綾袴為贄遺于山霊也其地侍從媵臣二貟名曰 申輔 趙匡 其妻二人號 慕貞 慕良 或臧獲并計二十餘口所賷錦繡綾羅衣裳疋段金銀珠玉瓊玖服玩噐不可勝記 王后 漸近行在上出迎之同入帷宫媵臣已下衆人就階下而見之即退上命有司引媵臣夫妻曰人各以一房安置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給之以蘭液蕙醑寢之以文茵彩薦至於衣服疋段寳貨之類多以軍夫遴集而護之於是王與 后 共在御國寢從容語王曰妾是 阿踰陁國 公主也姓許名 黄玉 年二八矣在夲國時今年五月中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爺孃一昨夢中同見皇天上帝謂曰 駕洛國 元君 首露 者天所降而俾御大寳乃神乃聖惟其人乎且以新花家邦未定匹偶卿等湏遣 公主 而配之言訖升天形開之後上帝之言其猶在耳你於此而忽辝親向彼乎徃矣 妾 也浮海遐尋於蒸棗移天夐赴於蟠桃螓首敢叨龍顔是近王荅曰朕生而頗聖先知 公主 自逺而届下臣有納妃之請不敢從焉今也淑質自臻眇躬多幸遂以合歡兩過清宵一經白晝於是遂還來船篙工楫師共十有五人各賜粮粳米十碩布三十疋令歸本國八月一日迴鑾與 后 同輦媵臣夫妻齊鏕並駕其漢肆雜物感使乗載徐徐入闕時銅壺欲午 王后 爰處中宫勑賜媵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餘外從者以賔舘一坐二十餘間酌定人數區別安置日給豐羡其所載珎物藏於內庫以為 王后 四時之費
관제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구간(九干)들은 모두 여러 관리의 으뜸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농부들의 칭호이고 고관 직위의 칭호가 아니다. 만약 외국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마침내 아도 (我刀)를 고쳐서 아궁 (我躬)이라 하고, 여도 (汝刀)를 고쳐서 여해 (汝諧), 피도 (彼刀)를 피장 (彼藏), 오도 (五刀)를 오상 (五常)이라 하고, 유수 (留水)와 유천 (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 (留功)· 유덕 (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 (神道), 오천 (五天)을 고쳐서 오능 (五能)이라 했고, 신귀 (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을 고쳐 신귀 (臣貴)라고 하였다.
계림 (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차례를 두고, 그 아래의 관료는 주 (周)나라 법과 한 (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이른바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여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한 방법이었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욱이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고 그 공은 도산 (塗山)이 하 (夏)를 돕고, 당원 (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의 몽조(夢兆)를 꾸고 태자 거등공 (居登公)을 낳았다
一日上語臣下曰九干等俱為庻僚之長其位與名皆是宵人野夫之號頓非簪履職位之稱儻化外傳聞必有嗤笑之耻遂改 我刀 為 我躬 汝刀 為 汝諧 彼刀 為 彼藏 五方 為 五常 留水 留天 之名不動上字攺下字 留㓛 留徳 攺為 神道 五天 攺為 五能 神鬼 之音不易攺訓爲 臣貴 取 雞林 職儀置角干阿叱干級干之秩其下官僚以 周 判 漢 儀而分定之斯所以革古鼎新設官分職之道歟於是乎理國齊家愛民如子其教不肅而威其政不嚴而理况與王后而居也此如天之有地日之有月陽之有隂其功也 塗山 翼 夏 唐煖 [校勘 興 嬌 頻年有夢得熊羆之兆誕生太子 居登公
수로왕과 왕후가 승하하시다 (189년 3월 1일 음력)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고 구지봉 (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였다. 드디어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처음 와서 닻줄을 내린 도두촌 (渡頭村)을 주포촌 (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 (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 (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 (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 (趙匡) 등은 나라에 온 지 30년 후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부부는 1, 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고향을 생각하다가 모두 죽어서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이에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 3월 23일(199년)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 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거등왕 (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형왕 (仇衡王)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霊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后崩壽一百五十七國人如嘆坤崩葬於 龜㫖 東北䲧遂欲忘子愛下民之惠因號初來下纜 渡頭村 曰 主浦村 解緩袴髙岡曰 綾峴 茜旗行入海涯曰 旗出邊 媵臣泉府卿 申輔 宗正監 趙匡 等到國三十年後各産二女焉夫與婦踰一二年而皆抛信也其餘臧獲之軰自來七八年間未有兹子生唯抱懷土之悲皆首丘而没所舎賔舘圎其無人 元君 乃每歌鰥枕悲嘆良多隔二五歳以献帝立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殂落壽一百五十八歳矣國中之人若亡天只悲慟甚於后崩之日遂於闕之艮方平地造立殯宫髙一丈 周 三百歩而葬之號 首陵王 廟也自嗣子 居登王 洎九代孫 仇衝 之享是廟湏以每歳孟春三之日七之日仲夏重五之日仲秋初五之日十五之日豊潔之奠相継不絶
가야 멸망 이후 가야왕들의 제사 (661년 3월 미상 음력)
신라 제30대 왕 법민왕 (法敏)은 용삭(龍朔) 원년 신유 3월에 조서를 내렸다.
“ 가야국 (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형왕 (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이끌고 온 아들 세종 (世宗)의 아들인 솔우공 (率友公)의 아들 서운 (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황후 (文明皇后)가 나를 낳았다. 따라서 시조수로왕은 나에게 곧 15대 시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당했으나 그를 장사지낸 묘(廟)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겠다.”
인하여 그 옛 궁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묘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 공영(供營)의 비용으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켰다.수로왕의 17대손 갱세 (賡世) 급간(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매해 때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밥·차·과실 등 여러 맛있는 음식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 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비로소 그 향기로운 효사(孝祀)가 우리에게 맡겨졌다.
거등왕 이 즉위한 기묘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 (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묘에 지내는 제사는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그 구형왕 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년)에 이르는 60년 사이에 이 묘에 지내는 제사지내는 예를 가끔 빠뜨리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 (文武王) 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다 은 먼저 조상을 받드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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洎新羅第三十王 法敏 龍朔元年辛酉三月日有制曰朕是 伽耶國 元君 九代孫 仇衝王 降于當國也所率來子 世宗 之子 率友公 之子 庻云 匝干之女 文明皇后 寔生我者兹故 元君 於㓜冲人乃爲十五代始祖也所御國者已曽敗所葬廟者今尚存合于宗祧續乃祀事仍遣使於黍離之趾 ▣近廟上上田三十頃爲供營之資號称王位田付屬 夲土王 之十七代孫 賡世 級干祗禀朝㫖主掌厥田每歳時釀醪醴設以餅飯茶菓庻羞等奠年年不墜其祭日不失 居登王 之所定年内五日也芬苾孝祀於是乎在於我自 居登王 即位己卯年置便房降及 仇衝 朝来三百三十載之中享廟禮曲永無違者其乃 仇衝 失位去國逮龍朔元年辛酉六十年之間享是廟禮或闕如也美矣㦲 文武王 法敏王 謚也 先奉尊祖孝乎惟孝継泯絶之祀復行之也
제사와 관련한 기이한 사건들
신라 말년에 충지 (忠至) 잡간(匝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금관(金官) 고성(高城) 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 (英規)아간(阿干)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냈는데, 단오(端午)를 맞아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이유없이 부러져 떨어져서 인하여 깔려죽었다. 이에장군(將軍)이 스스로 말하기를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진영(眞影)을 그리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그윽한 은혜를 갚아야겠다”
라고 하고, 교견(鮫絹) 3척을 가지고 진영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었다.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고였는데 거의 한 말 정도가 되었다.장군은 매우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들어 가지고 사당을 나가서 불태우고 곧수로왕의 친자손 규림 (圭林)을 불러서 말하였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인가. 이는 필경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진노한 것이다. 영규 (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괴이하고 두렵게 여겨 진영도 이미 태워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주살을 받을 것이다. 경은 왕의 진손(眞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 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다가 나이 88세에 이르러 죽었고, 그 아들 간원경 (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내는데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 의 아들 준필 (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 (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서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냈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그런데 옛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고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앞서 영규 가 있고 뒤에는 준필 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적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하였다. 처음에 오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 화살을 쏘아서 7, 8명을 맞혀 죽이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났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큰 구렁이가 있었는데 길이 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은 번개와 같았다. 사당 옆에서 나와 8, 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넘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리하여 능원(陵園) 안팍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안(建安)4년 기묘에 처음 만든 때부터 지금 임금께서 즉위한지 31년인 대강(大康) 2년 병진(1076)까지 도합 878년인데 제단을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이지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마르거나 썩지 않았으며, 하물며 거기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체부 (辛替否)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라고 말했지만, 오직 가락국 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곧 체부 의 말이 맞지만 수로왕 (首露王)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곧 체부 의 말을 믿을 수 없다.
新羅季末有 忠至 匝干者攻取金官髙城而爲城主將軍爰有 英䂓 阿干假威於 將軍 奪廟享而滛祀當 端午 而致告祠堂梁無故折墜因覆壓而死焉於是 將軍 自謂宿因多幸辱爲聖王所御國城之奠冝我畫其真影香燈供之以酬玄恩遂以鮫絹三尺摸出真影安於壁上旦夕膏炷瞻仰虔至才三日影之二目流下血淚而貯於地上㡬一斗矣 將軍 大懼捧持其真就廟而焚之即召王之真孫 圭林 而謂曰昨有不祥事一何重疊是必廟之威靈震怒余之圖畫而供飬不孫 英規 旣死余甚怪畏影已燒矣必受隂誅卿是王之真孫信合依舊以祭之 圭林 継世奠酹年及八十八歳而卒其子 間元卿 續而克禋 端午 日謁廟之祭 英䂓 之子 俊必 又發狂來詣廟俾徹 間元 之奠以己奠陳享三獻未終得暴疾歸家而斃然古人有言滛祀無福反受其殃前有 英䂓 後有 俊必 父子之謂乎又有賊徒謂廟中多有金玉将来盗焉初之来也有躬擐甲冑張弓挾矢猛士一人從廟中出四面兩射中殺七八人賊徒奔走數日再来有大蟒長三十餘尺眼光如電自廟旁出咬殺八九人粗得完免者皆僵仆而散故知陵園表裏必有神物護之自逮安四年己卯始造逮今上御圖三十一載大康二年丙辰凡八百七十八年所封羙土不騫不崩所植佳木不枯不朽况所排列万藴玉之片片亦不頹圻由是觀之 辛替否 曰自古迄今豈有不亡之國不破之墳唯此 駕洛國 之昔曽亡則替否之言有徴矣 首露 廟之不毀則 替否 之言未足信也
수로왕의 기리는 놀이
이 중에 또 놀이를 하여수로왕을 사모하는 일이 있다. 매년 7월 29일에 백성·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 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떠들며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보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 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 (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린다. 대개 이것은 옛날에 유천간 과 신귀간 등이 왕후 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 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此中更有戱樂思慕之事每以七月二十九日土人吏卒陟 乗岾 設帷幕酒食歡呼而東西送目壯徤人夫分類以左右之自 望山島 駮蹄駸駸而競湊於陸鷁首泛泛而相推於水北指 古浦 而爭趨盖此昔 留天 神鬼 等望 后 之來急促告 君 之遺跡也
가야 고지의 지명 변천 (681년 미상 음력)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신라 제31대 정명왕 (政明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 신사에는 금관경 (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그 후 259년에 우리 태조 (太祖)가 통합한 뒤로는 대대로 임해현 (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 를 둔 것이 48년이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 (臨海郡) 혹은 김해부 (金海府)라고 하고 도호부(都護府)를 둔 것이 27년이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이 64년이었다.
國亡之後代代稱號不一新羅第三十一 政明王 即位開耀元年辛巳號爲 金官京 置太 守後二百五十九年屬我 大祖 統合之後代代爲 臨海縣 置排岸使四十八年也次爲 臨海郡 或爲 金海府 置都護府二十七年也又置防禦使六十四年也
수로왕 능묘 소속 전답과 관련한 일화 (991년 미상 음력)
순화(淳化) 2년에 김해부 (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 (趙文善)은 조사해서 보고하였다.
“ 수로왕 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 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전하여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오래 살았으니 곧 나이 158세가 되었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붕어한 뒤에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진실로 의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그렇다고 여겨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 양전사의 별칭이다 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거의 일이 끝날 때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해 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7, 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였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었다.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이고 부족한 것은 3결 87부 1속이었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또한 고금(古今)에 탄식하는 자가 있었다.
淳化二年 金海府 量田使中大夫 趙文善 申省状稱 首露陵王 廟屬田結數多也宜以十五結仍舊貫其餘分折於府之役丁所司傳状奏聞時廟朝宣㫖曰天所降卵化爲 聖君 居位而延齡則一百五十八年也自彼三皇而下鮮克比肩者歟崩後自先代俾屬廟之壠畒而今減除良堪疑懼而不允使又申省朝廷然之半不動於陵廟中半分給於郷人之丁也節使 量田使稚也 受朝㫖乃以半屬於陵園半以攴給於府之徭役户丁也㡬臨事畢而甚勞倦忽一夕夢見七八介鬼神執縲紲握刀劒而至云你有大憝故加斬戮其使以謂受刑而慟楚驚懼而覺仍有疾瘵勿令人知之宵遁而行其病不間渡關而死是故量田都帳不著印也後人奉使來審檢厥田才一結十二負九束也不足者三結八十七負一束矣乃推鞠斜入處報告内外官勑理足攴給焉又有古今所嘆息者
왕후사의 창건과 폐지 (452년 미상 음력)
수로왕 (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 (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것을 매우 숭상하였는데 시조모(始祖母) 허황후 (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였다. 원가(元嘉) 29년 임진에 수로왕 과 허황후 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하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 은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표(標)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元君 八代孫 金銍王 克勤爲政又切崇真爲 世祖母 許皇后 奉資冥福以元嘉二十九年壬辰於 元君 與 皇后 合婚之地創寺額曰王后寺遣使審量近側平田十結以爲供億三寳之費自有是寺五百後置長遊寺所納田柴并三百結於是右寺三剛以王后寺在寺柴地東南標内罷寺爲荘作秋收冬藏之場秣馬飬牛之厩悲夫
가락국의 사적
시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다. 인륜(人倫)은 비록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지냈지만, 동국 (東國)은 서울을 나누어 계림 (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 (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겠는가.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보았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냈다. 산 속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오히려 아득하고, 밖도 또한 캄캄하였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 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있었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맑게 개었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가닥 자색 줄에 드리웠다.
낯선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다. 구경하는 사람은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렸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남아 있었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다.
진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곧 맑아지려 하였다.
궁전은 옛 법을 따랐고, 흙계단은 오히려 평평하였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베풀었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하였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하였다.
사방은 모두 안정되고, 모든 백성은 태평을 맞이하였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하였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이었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영묘(靈廟)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世祖 已下九代孫暦數委録于下銘曰元胎肇啓利眼初明人倫雖誕君位未成中朝累世 東國 分京 雞林 先定 駕洛 後營自無銓宰誰察民氓遂兹玄造顧彼蒼生用授符命特遣精靈山中降卵霧裏藏刑内猶漠漠外亦冥冥望如無象聞乃有聲羣歌而奏衆舞而呈七日而後一時所寧風吹雲卷空碧天青下六圎卵垂一紫纓殊方異土比屋連甍觀者如堵覩者如羹五歸各邑一在兹城同時同迹如弟如兄實天生徳爲世作程寳位初陟寰區欲清華構徴古土階尚平万機始勉庻政施行無偏無儻惟一惟精行者譲路農者讓耕四方奠枕萬姓迓衡俄晞薤露靡保椿㱓乾坤変氣朝野痛情金相其躅玉振其聲來苖不絶薦藻惟馨日月雖逝䂓儀不傾
거등왕 (199년 3월 13일 음력)
아버지는 수로왕 (首露王), 어머니는 허황후 (許皇后)이다. 건안(建安) 4년 기묘 3월 13일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9년으로 가평(嘉平) 5년 계유 9월 17일(253년)에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 (申輔)의 딸 모정 (慕貞)으로 태자(太子) 마품 (麻品)을 낳았다.
≪ 개황력 (開皇曆)≫에는 “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에 김을 성으로 삼았다”
고 하였다.
居登王
父 首露王 母 許王后 立安四年己卯三月 十三日即位治三十九年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王妃泉府卿 申輔 女 慕貞 生太子 麻品 開皇暦 云姓金氏盖國 世祖 從金卵而生故以金爲姓厼
마품왕 (253년 미상 음력)
마품 (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가평(嘉平) 5년 계유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9년으로, 영평(永平) 원년 신해 1월 29일(291년)에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 (趙匡)의 손녀 호구 (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 (居叱彌)를 낳았다.
麻品王
一云 馬品 金氏嘉平五年癸酉即位治三十九年永平元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王妃宗正監 趙匡 孫女 好仇 生太子 居叱弥
거질미왕 (291년 미상 음력)
금물 (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56년으로 영화(永和) 2년 병오 7월 8일(346년)에 죽었다. 왕비는 아궁 (阿躬) 아간(阿干)의 손녀 아지 (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 (伊尸品) 을 낳았다.
居叱弥王
一云 今勿 金氏永平元年即位治五十六年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王妃 阿躬 阿干孫女 阿志 生王子 伊品
이시품왕 (346년 미상 음력)
김씨이고 영화(永和)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62년으로 의희(義熙) 3년 정미 4월 10일(407년)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譯註 003] 극충 (克忠)의 딸 정신 (貞信)으로 왕자 좌지 (坐知)를 낳았다.
伊尸品王
金氏 永和二年即位治六十二年義熈三年丁未四月十日崩王妃司農卿 克忠 女 貞信 生王子 坐知
좌지왕 (407년 미상 음력)
김질 (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義熙) 3년에 즉위하였다. 용녀 (傭女)에게 장가를 들어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삼으니 나라 안이 소란스러웠다. 계림국 (鷄林國) 이 꾀를 써서 치려하니, 박원도 (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점괘의 말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 라고 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
라고 하니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 를 내쳐서 하산도 (荷山島) 에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永初) 2년 신유 5월 12일(421년)에 죽었다. 왕비는 도령 (道寧) 대아간(大阿干) 의 딸 복수 (福壽)로, 아들 취희 (吹希)를 낳았다.
坐知王
一云 金叱 義熈三年即位娶 傭女 以女黨爲官國內擾乱 雞林國 以謀欲伐有一臣名 朴元道 諌曰遺草閱閱亦含羽况乃人乎天亡地䧟人保何基又卜士筮得解卦其辭曰解而悔朋至斯孚君鑒易卦乎王謝曰可擯 傭女 貶於 荷山島 攺行其政長御安民也治十五年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王妃 道寧 大阿干女 福壽 生子 吹希
취희왕 (421년 미상 음력)
질가 (叱嘉)라고도 한다. 김씨로 영초(永初)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1년 으로 원가(元嘉) 28년 신묘 2월 3일(451년)에 죽었다. 왕비는 진사 (進思) 각간의 딸 인덕 (仁德)으로 왕자(王子) 질지 (銍知)를 낳았다.
吹希王
一云 叱嘉 金氏永初二年即位治三十一年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王妃 進思 角干女 仁徳 生王子 銍知
질지왕 (451년 미상 음력)
금질왕 (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시조와 허황옥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 (始祖)와 혼인한 곳에 절을 지어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영명(永明) 10년 임신 10월 4일(492년)에 죽었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 의 딸 방원 (邦媛)으로 왕자 겸지 (鉗知)를 낳았다.
銍知王
一云 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即位明年爲 世祖 許黄玉玉后 奉資冥福於初與 世祖 合御之地創寺曰王后寺納田十結充之治四十二年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王妃 金相 沙干女 邦媛 生王子 鉗知
겸지왕 (492년 미상 음력)
금겸왕 (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0년으로, 정광(正光) 2년 신축 4월 7일(521년)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 (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 (淑)으로 왕자 구형 (仇衡)을 낳았다.
鉗知王
一云 金鉗王 永明十年即位治三十年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王妃 出忠 角干女 淑生 王子 仇衡
구형왕 (521년 미상 음력)
김씨(金氏)이다. 정광(正光)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보정(保定) 2년 임오 9월(562년)에 신라 제24대 진흥왕 (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 (脫知爾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上孫) 졸지공 (卒支公)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 (分叱水爾叱)의 딸 계화 (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 (世宗) 각간, 둘째는 무도 (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 (茂得) 각간 이다.
≪ 개황록 (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고 하였다.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即位治四十二年保定二年壬午九月新羅第二十四君 真興王 興兵薄伐王使親軍卒彼衆我寡不堪對戰也仍遣同氣 脫知尒叱今 留在於國王子上孫 卒支公 等降入新羅王妃 分叱水尒叱 女 桂花 生三子一 世宗 角干二 茂刀 角干三 茂得 角干 開皇録 云梁中大通四年壬子降于新羅
일연이 논평하다
논평하여 말한다. ≪ 삼국사 (三國史)≫를 살펴보면, 구형왕 (仇衡王)은 양(梁)의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 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建武) 18년 임인(42년)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532년)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상고한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562년)이다. 그러면 30년을 더하여 도합 520년이다. 지금 두 가지 설(說)을 모두 기록해 둔다.
議曰案 三國史 仇衡 以梁中大通四年壬子納土投 羅 則計自 首露 初即位東漢䢖武十八年壬寅至 仇衡 末壬子得四百九十年矣若以此記考之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則更三十年捴五百二十年矣今两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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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선생님, 고맙습니다.가락국기는 원래 금관지주사를 지낸 '김양일(金良鎰,광산김씨)'의 저술이라고 합니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속의 가락국기는 김양일의 가락국기의 다이제스트라고 합니다. 그 원본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