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이후 첫 순교자
“순교자의 피는 실로 교회의 기초이다. 죽음으로서 우리는 이긴다.
우리가 목숨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승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2세기의 라틴교부 테루투리아누스의 관찰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라기 보다는 예언적 진술이었다. 지난 2천년간의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자 순교의 역사였고, 그 피의 터 위에 복음은 확장되었다. 그래서 순교의 역사는 교회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증거, 곧 선교와 순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경험이지만, 어원적으로도 그러하다. 즉 증인(witness)을 뜻하는 마루투스는 동시에 순교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데반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그 사회의 공인된 종교가 되기 전까지는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은 이 세상에서는 ‘낯선 것’이었고, 이 세상의 가치와는 상합할 수 없는 ‘전도된 가캄였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당시의 헬라-로마의 사회나 문화전통으로 볼 때 그것은 ‘야만인의 철학’(barbaros philosophia)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은 그 시대의 가치, 사상, 윤리와 동행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박해와 순교의 길이었다. 그래서 선교는 순교와 통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시원이 된 것은 64년 6월 18일 로마시에서 발생한 대 화재사건이었다. 화재는 키루쿠수 막시무스(Circus Maximus)의 남동쪽 구역에서 발생하여 강한 바람을 타고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일주일간 계속된 화재로 당시 로마의 14구역 중 3개 지역이 전소되었고, 7개 지역은 부분적으로 불탔다. 이 화재가 황제의 의도적 방화였다는 의심을 사게 되자 네로(Nero, 54~68)는 화재를 모면한 로마시의 두 구역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임을 착안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씌워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국민적 신임을 잃고 있던 그는 기독교를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함으로서 다수의 이교도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네로가 이교도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음이 분명하다. 네로의 부인 파파야(Pappaea)가 유대교에 동정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대교의 이단이자 신흥 종교 세력인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정치적 효과를 줄 것으로 생각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이후 시대에 있어서 최초의 순교자는 누구였을가?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최초의 기독교 박해로서 첫 순교자가 발생한 곳은 티버(Tiber) 강 너머에 있는 네로의 정원이었다고 한다. 타키투스와 동시대사람이었던 쥬베널(Juvenal)은 그의 책에서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두 번이나 언급했다. 그는 산체로 불살랐다고 기록했다.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와 이로 인한 순교를 가장 먼저 언급한 기독교권의 기록으로는 사르디스(Sardis)의 감독(약 70년경)이었던 멜리토(Melito)였다. 그가 안토니우스(Antoninus)에게 보낸 이 편지글의 일부가 다행스럽게도 유세비우스에 의해 보존되었다. 유세비우스 자신 또한 네로는 “신적 종교를 대적한 첫 황제였다”고 지적했다.
유세비우스는 성경밖의 인물로서 최초의 순교자는 프로코피우스(Procopius)였다고 말한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팔레스틴의 순교자들>(The Martyrs of Palestine) 제 1장에서 그를 “순교자들 중의 첫 사람”이라고 불렀다. 황제숭배를 거부하여 집정관 앞에 끌려온 그는 황제이름으로 제의(祭儀, libations)를 행하도록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부함으로 즉각 처형되었다고 한다. 곧 팔레스틴의 다른 감독이 체포되었다.
그는 피부를 가르듯이 수없이 많은 채찍으로 맞고, 고문당하여 손마디가 어긋나기까지 했으나 그는 꿋꿋이 참았다고 요세비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핍박자의 의도는 한 개인에 대한 고문만이 아니라 지도자를 배교케 함으로서 기독교운동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고 첨기했다.
요세비우스는 그의 책 2장에서는 안디옥에서 체포된 또 다른 순교자 로마누스(Romanus)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심문관이 화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두려워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그리고 기쁨으로 받아드렸고, 그를 나무에 묶고, 그 주변에 나무단을 쌓아 두었을 때, “이제 나를 태울 불은 어디 있느냐”고 했을 만큼 당당했다고 한다. 그는 다시 고문을 당했다. 혀가 잘리기까지 더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으나 고난 중에도 함께 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저들의 고난의 여정이 오늘의 기독교를 지켜온 힘이 아니었을까?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