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정씨 12상신 탄생 명가
동래정씨는 3세조 정목이 고려조에서 문과하여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그 아들 넷이 다 문과에 급제하여
번창하였다. 고려조에서 이미 명족으로 성장한 동래 정씨는 조선조에 들어와 17명의 상신을 배출하여 최
고 문벌의 하나가 되었다.
이 중에서도 조선조에 들어와 동래정씨를 명문의 반석 위에 올려 놓은 한 가문이 뜨기 시작했다. 정목의 10
대손 정사가 그 기미를 보였다. 사는 1420년[세종2]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1448년 예
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그뒤 진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얻었다. 사후에 손자 영의정 광필과 함
께 경상도 용궁 완담향사에 제향되었으며 찬성에 추증되었다.
정사의 아들 난종이 이 가문의 문호를 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대기업의 상호를 등
록한 셈이다. 난종은 신수가 훤하고 국량이 컸으며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인물은 서울
에서 큰다는 이야기 대로 고향 경상도 용궁을 떠나 서울을 향하자 고향 사람들이 만류했다. 이에 난종은
한 수의 시로 응수했다.
"꽃나무는 햋빛을 봐야 화춘을 맞이하고 누대는 물가에 있어야 화월이 먼저 비친다."며 서울로 올라간 난종
은 1456년[세조 2] 문과하여 이조정랑을 지내고 1466년 문과 중시에도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세조가 그의 문재를 아껴 총애를 하였다. 어느 날 세조가 " 그대는 원각경과 주역에 대해 어느 것이 더 훌륭
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 불교의 요사스런 글을 어찌 주역에 비교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
다. 이말을 들은 세조는 화가 나서 환관에 명해 매를 치려 하자 태연자약한 지라 더 나무라지를 않았다.
그뒤 좌부승지를 거쳐 예조와 형조의 참판, 오위장을 지냈다. 1467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시애 난
이 일어나 난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469년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 그뒤
[예종실록] 편찬에 모두 참여했다. 사은부사로 명나라를 다녀와 동래군에 봉해졌다. 한성부 판윤,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이때 그 지방의 기후와 토양으로 인해 유발된 풍토병을 앓았다. 부하들이 놀라서 조정에 보고를 올리려 하
자 "임금께서 들으시면 걱정하신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병이 낫다면 불안하실 것이다. 기다려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알려도 늦지 않다고 했다.
정난종이 병을 앓는다는 소문을 들은 오랑캐 이마거가 쳐들어오려는 첩보가 있었다. 이에 병을 앓고 있으
면서도 오랑캐 마을에 의젖하게 나가 "병법이란 지피지기다. 내가 이마거를 잘 알고 있느니! 그에게 변방
칩입의 죄가 있으니 그를 처벌코자 하노라. 나를 따르는 자는 다치지 않을 것이다." 크게 꾸짖으며 위엄을
보이고 돌아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마거는 산골짜기에 숨어 변방을 침입할 엄두를 못냈다고 한다.
4서 3경에 정통했고 서예에 뛰어났다. 서예의 대가 성임과 쌍벽을 이루었다. 성임은 성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송설체의 대가로 시문에 뛰어난 인물이다. 난종은 그와 글씨로 어깨를 겨루는 당대 석학이요, 서예가
이다.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했으며 조맹부체에 뛰어났다. 금석학에도 밝았다. 서울 탑골 공원에 원각사
비문과 양주의 신숙주 묘표를 썼다.
정인지, 신숙주, 권남, 강희맹, 최항, 양성지 등과 함께 많은 업적을 남긴 훈구파의 중진이다. 우참찬을 거
쳐 이조, 공조, 호조의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익혜이다.
난종이 29세에 손자 광필이 태어났다. 광필은 기묘사화로 사림 세력이 화를 입을 때 앞장서서 그들의 희생
을 막으려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간 명상신이다. 증손 유길이 또 상신에 올랐다. 바야흐로 12상신 탄
생의 우렁찬 전주곡이 울려 퍼졌다.
조선조 중,후기 단일 가문으로 최다 상신 15명의 기록을 낸 안동김씨 다음으로 11명의 상신을 낸 가문이
다. 왕후 하나 내지 않은 동래 정씨가 상신 11명을 낸 것은 아주 놀라운 기록이다. 왕후를 셋이나 내며 왕실
과 겹겹으로 혼인한 안동김씨가 상신 11명을 내서 1위를 한 기록보다 몇갑절 의미가 더 큰 값진 기록이다.
청송심씨가 상신의 한 부문인 영의정 항목에서 세운 기록보다 그 규모가 크고 무거운 상신 전체로 따진 것
이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기록이며 청송심씨 역시 왕실과 여러 차례 혼인하며 거둔 그것보다 국구 하나
없이 고군 분투하여 이룩한 영광으로 두 가문보다 훨씬 더 눈물 겨운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중, 후기 상신 가문 동래 정씨 유길 가문의 성격과 특성
가,동래 정씨 유길 가문의 성격
------------------------------
1,왕후를 통한 외척의 정치력 행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집단이다.
광산 김씨는 김만기가 숙종 국구, 대구 서씨는 서종제가 영조 국구, 청송 심씨는 심강이 명종 국구, 심호가 경종 국구이었다. 최고 3대 명벌과 2대 문벌 5개 가문 중 왕후를 내지 않은 가문은 연안 이씨 월사 이정구 가문과 동래 정씨 임당 정유길 가문 두 곳 뿐이다. 여기서 보듯이 동래 정씨는 왕후를 내지 않았으므로 외척에 의한 정치력 행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2, 장신을 통한 군권 장악에 의한 권력 행사가 불가능한 집단이다.
광산 김씨는 숙종 국구 김만기가 총융사를 겸임하여 병권을 쥐었으며 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공을 세웠다.
대구 서씨는 서명선이 금위대장과 총융사를 지냈고 서유대는 어영대장 7번 훈련대장 3번 금위대장 7번 총융사 8번을 지냈고 서춘보는 총융사, 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이 밖에도 장신이 많다. 그러나 동래 정씨 임당 가문은 장신이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이 동래 정씨 유길 가문은 병권 장악에 의한 권력행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3, 집권 세력에 대한 야합이나 맹종에 의한 정치력 행사가 조직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던 집단이다.
동래 정씨 정유길 가문의 파조 유길이 권간 이량의 하수인 역할을 하여 사류의 빈축을 산 일이 있고 우의정 정석오가 지평으로 김일경과 함께 노론 4대신을 논척하여 유배가게 한 일이 있어 정씨 가문의 오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동래 정씨 유길 가문이 배출한 상신 11명 중 2명 정도가 불미스런 일이 있었을 뿐 나머지 상신 9명과 판서 15명은 그런 혐의가 거의 없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동래 정씨 유길 가문은 능력 위주의 자립형 최고위 전문 관리 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나,동래 정씨 유길 가문의 특성
-------------------------------
---- *행정 능력과 *전문성이 높은 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했다.-------
우의정 정홍순[태화 현손]은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 문제에 밝아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5조의 판서를 지낸 정기회는 암행어사로 전임 관찰사와 여러 수령의 비리를 밝혀 다스렸으며 행정력이 탁월했다.
이조판서 정순조는 수령으로서 많은 치적을 올렸고 중앙 행정부서의 장관으로 행정 능력이 탁월했다. 형조와 호조의 판서를 지낸 정형복은 여러 차례 수령과 방백을 지내며 관기를 확립하고 중앙부서의 장관으로는 재정을 확립하고 사대부의 기풍과 관원들의 기강을 세웠으며 올바른 행정을 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이조참판 정만화는 평안도 관찰사로 기민 수천명을 구휼하는 치적을 올려 이원익과 함께 평양에 생사당이 세워졌다. 정태화, 정치화 등 여러 형제 종반간이 모두 외교 수완이 뛰어나서 청나라와의 어려운 외교 문제를 원만하게 잘 해결했다.
이 가문은 이처럼 행정 능력이 있는 고위 관리를 배출했을 뿐만 아나라 분야마다 전문성이 높은 고위 관리를 또한 많이 배출하였다.
----- *헌신적인 최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했다.-------
동래 정씨의 헌신적인 고위 관리는 그 수가 많아서 예를 다 들 수 없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을 몇명만 꼽기로 한다.
정광필!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앞장 섰던 명상신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급히 궁궐로 들어가 임금의 용포를 붙잡고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애원한 정광필의 정성과 간청이 있었기에 애꿎은 선비들의 희생이 그나마 줄지 않았던가?
정태화! 예송이 격화되었을 때 그는 당색을 기피하였으며 신료들의 대립을 누그러뜨리고 양측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기를 업은 아낙네에서부터 등이 휜 늙은이에 이르기 까지 죽그릇을 내밀며 한 술 더 달라고 애원하는 행렬이 늘어졌을 때 정태화는 백발을 휘날리며 진휼소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죽솥에 간을 보고 양을 가늠하며 불철주야 굶주린 백성을 돌보느라 진땀을 흘렸다. 노재상의 정성에 백성들은 감복해 마지 않았다.
정원용! 자식의 생계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채 민생을 살피는 데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왕실에서 내리는 금품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사람을 쓸 때 정에 치우치지 않았다.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탐관오리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공직의 기강을 세우고 외척의 전횡을 막으며 국정을 쇄신하는 일에 앞장 섰다. 그 노력과 그 마음을 아는 백성들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이 가문은 이처럼 멸사 봉공하는 정신이 강하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헌신하는 상신을 가장 많이 배
출한 가문이라 할 수 있다.
---- *겸허한 최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했다.---------
영조가 시호를 하사하는 문제로 대신들에게 문의한 적이 있다. 이 때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정씨들이 시호를 청하지 않는 것은 그 집안의 오래 내려온 가법입니다. 문익공 정광필과 익헌공 정태화는 묘정에 배향할 때 조정에서 시호를 하사하였습니다. 그 이외는 여러 대를 내려 오면서 공경들이 한 사람도 시호를 청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영돈녕부사 조현명도 말하기를 " 정씨들이 시호를 청하지 않는 것은 겸손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 가문은 이처럼 겸손한 게 특징이다. 최고위직인 상신이나 부마, 판서 등 권세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주 역력하다. 겸양의 미덕이 넘치는 가문이다.
----- *검소한 최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했다.--------
정원용은 너무 청빈하여 도포나 관복 한 벌 변변한 게 없었다. 기운 옷을 입고 초라한 집에 살면서 모아 놓은 것은 서화 뿐이었다.
부마 정재륜은 분수 밖 일체의 화려한 일을 멀리 하였다. 초옥에 거쳐하면서 그 의복이 항상 검소하여 모두 왕의 사위인 줄을 몰랐다고 한다.
우의정 정홍순은 딸을 시집보내면서 옷은 입던 옷 그대로이고 밥도 늘 먹던 그대로였다. 상신이 된 뒤 어느날 자기 집을 수리하면서 일꾼과 품삯을 다툰 일이 있었다. 이를 본 아들이 "젊잖으신 신분으로 일개 공인과 품삯 몇푼을 다투시는 것은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닙니까?" 하니 그는 " 상신은 일국의 표상인데 내가 삯을 후하게 주면 온나라의 예가 되어 가난한 백성들이 많은 곤란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동전 한 푼이 깨진 것을 때우는 데 두 푼이 들었다. 이를 본 사람이 "두 푼을 드려 한 푼을 얻으면 손해가 아니냐?"고 묻자 "나 개인은 한 푼을 잃어도 나라에는 한 푼의 이익이니 공익이 아니냐?고 했다.
이 가문은 이와 같이 검소한 것이 큰 특징이다. 이 가문의 인물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