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의 한글사랑]
국어독립운동 길에 들어선 이야기_ 2.
네 꿈은 이루어진다. 대학에 가라.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
대학에 들어가서 농촌과 한글을 살리는 공부도 하고 활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갈 실력과 돈이 문제였다. 그 때 우리 고등학교에서는 토목과와 임학과 학생들만 진학반이라고 해서 입시에 필요한 수학과 영어를 좀 더 잘 가르쳤다. 내가 다닌 농학과와 원예과 들은 농업 공부와 실습을 더 많이 하고 수학이나 영어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거기다가 아버지와 고등학교만 나와서 농사를 짓겠다고 약속한 일도 큰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벌써 마음이 굳어있기에 혼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방학 때 집에 가서 아버지께 대학에 갈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난 내 자식 6남매 모두 고등학교까지는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었고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와주기로 약속을 했지 않느냐? 네가 대학에 가면 네 동생들 교육은 어찌한단 말이냐?”라고 말씀을 하시며 한 숨을 쉬셨다. 사실 아버지는 1930년대인 왜정 때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할아버지께서 허락을 안 해서 서울로 가출을 한 일이 있다. 서울에 가서 가게에 취직해 돈을 벌어 중학교에 갈 준비를 했으나 집에 편지를 했다가 큰아버지에게 붙잡혀 온 분이다.
그리고는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때 아버지는 당신의 중학교 교복도 스스로 돈을 벌어 사두었는데 끝내 입지 못하고 1959년 내가 중학교에 갔을 때 입고 다닌 일이 있다. 왜정 때 교복이라 모양이 좀 다르고 20년이 지나 꿰맨 실의 색깔이 바랬기에 복장 검사에 걸렸으나 학교에서 봐 줘서 입고 다녔다. 그 때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께 하신 말씀이 “나는 조선시대 태어나 학교를 못 다녔다. 그러나 너희 형제는 똑 같이 보통학교까지 가르쳤다. 다음에 네 자식들은 중학교 까지 가르쳐라. 그리고 손자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치라고 해라. 한 층계씩 올라가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아버지는 그 말씀을 따르셨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께 “입학금과 한 학기 등록금만 내 주시면 제가 벌어서 다니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입학시험을 봤으나 떨어졌다. 실력도 모자라지만 등록금을 덜 내기에 경쟁이 심한 국립대학에 시험을 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상심해서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가지 않고 머리를 싸매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아버지 친구 한씨 아저씨가 “형님, 저렇게 공부하겠다는 애를 말리지 말고 내 집에 보내시지요. 우리 애들 공부 봐주며 시험공부를 하게 합시다.”라고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그 아저씨는 우리 이웃집에 살던 분인데 6.25 전쟁 때 늙은 부모를 두고 입대를 했는데 내 아버지가 그분의 부모를 돌봐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친형처럼 고마워하며 가끔 찾아오셨다가 그 우리 집 꼴을 본 것이다. 그 분은 옛날엔 못살았지만 그 때 서산 읍내에 나가 장사를 해 돈을 잘 벌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분의 말을 들어주었다. 마침내 나는 그 한씨 댁에 가서 과외 선생을 하며 다시 입시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혼자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북면사무소에 취직한 고교 동창인 김원석 군이 오라기에 가보니 그는 월급도 받고 잘 지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고 싶은 갈등에 고민하게 되었다.
그 때 신문에서 한양대 국문과 김윤경 교수님이 쓴 한글사랑에 관한 논단을 읽게 되었다. 나는 그 분께 “제가 깨달은 바 있어 대학에 가서 한글운동을 하려는데 공부도 안 되고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한 삶을 바쳐서 한글운동을 할 만큼 한글이 훌륭하고 가치가 있습니까?” 라는 등, 울분 겸 항의 편지를 보냈더니 바로 “한글은 영어를 적는 로마자보다 훌륭한 글자인데 사람들이 몰라보고 쓰지 않고 있다. 나는 한글을 살리려고 일생동안 애썼다. 너 같은 젊은이를 보니 든든하다. 꿈은 이루어진다. 대학에 가라.”는 답장이 바로 왔다.
주소도 정확하지 않게 “서울 한양대 김윤경 교수님”이라고만 썼는데 편지가 잘 가서 바로 답장을 하신 것이다. 꼭 답장을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참으로 꿈같은 일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았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감동을 받았고, 다시 기운을 내 입시공부를 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아버지로부터 입학금과 한 달 치 하숙비를 받아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한 달 하숙을 한 뒤에 1년 전에 대학에 어온 고교 동창 우상희 군과 함께 삼양동 달동네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초등학생들 과외선생이 되어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하늘은 스스로 애쓰는 자를 돕는다고 하더니 먼저 서울 생활을 한 친구가 나를 딱하게 여기고 고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마침 그 대학에 농촌운동모임이 있어 열심히 활동을 했다. 그 때도 나는 도서관에 가서 밤늦게까지 책을 보고 신문을 보았다. 시골 고등학교 도서관보다 읽을 책이 많아 좋았다. 그 때 주요한 선생이 쓴 ‘안 도산 전서’란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안창호 선생을 존경하게 되어 ‘흥사단’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글운동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대학 신문에 “문리대 언어학과 이봉원군이 한글사랑 횃불 점화식을 하다.”라는 소식이 조그맣게 있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이고 놀랐다. 모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고, 하늘은 뜻이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바로 그에게 “나도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빨리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했다. 드디어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을 하겠다는 내 꿈을 모두 실천할 기회가 온 것이다.
첫댓글 고맙게 잘 읽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