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 이번에도 강단의 악행이 들어나는데요. 김지수님이 지적하신 문제. 잘 압니다 재야사학계에서도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사이비 종교를 탄생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단 사학계는 전체가 그런것 아닙니까? 심지어 재야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고 단국대 부총장 윤내현교수님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붇기도.
제 입장에선 강단이 악마로 보이는데요. 재야가 잘못하고 강단이 잘한 일이 있으면 제공 바랍니다..
북한과 일본이 고구려영토를 북경인근 이라고 하는데 남한만 아니한다라.. 재미있는 사실.
강단과 재야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흑백논리가 훨씬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악마라는 표현은 좀 심한것 같군요. 뭐 그래도 우리 사학계가 다소 소극적이고 지나치게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듯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은 듭니다.
김원룡의 내력을 설명하세요 노잘란 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제가 알기론 식민사학의 일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에분께, 김원룡이란 사람이 재야사학계 라는 말도없고 의도도 없는듯합니다. 다시한번 3번과 4번을 주의깊게 읽어주시길바랍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백제가 요서지방에 진출했다고 가르칩니다.
아 승질나...사학자들 다 쏴죽이고싶네..
고구려가 북경까지 진출했던 근거는 많이 있습니다만 고구려의 직할지는 아니었고 속국이나 속령의 형태로 지배했습니다. 그것도 고구려 전 시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죠. 사료적으로 보면 광개토태왕 때나 수당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가 됩니다.
지금도 북경 근처에는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상당기간 동안 고구려의 실질적인 세력권 내에 잇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이란 군영, 즉 최전선기지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고려영 근처에는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판축 기법의 흔적이 보이는 성도 발견되엇습니다.
장수태왕이 붕어했을 때 북위의 태후가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거나, 고구려가 후연을 멸망시키고 북연을 새워 간접 통치한 것이나(배후 북위에 대한 완충지대로 설정),AD 407년 전후로 북연을 전초기지로 백제의 요서지역을 점령한 것 등의 정세를 봐서도
고구려가 상당기간 북경을 장악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가 봐도 4 ~ 5세기 무렵에 요서지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지였을 가능성이 농후한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판축기법은 중국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고구려식의 판축기법은 지나와는 다릅니다. 고구려는 가운데 흙을 판축기법으로 쌓고 포물선 모양으로 밑에는 큰 바위, 위에는 작은 바위식으로 토성을 보호하도록 2중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건 판축기법이 다른게 아니라 축성술이 다른게 아닌지요.
초딩사냥꾼님........말장난을 하시려는 겁니까? -_- 고구려식의 판축기법은 지나의 판축기법과는 전혀 다릅니다.
첫댓글 이번에도 강단의 악행이 들어나는데요. 김지수님이 지적하신 문제. 잘 압니다 재야사학계에서도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사이비 종교를 탄생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단 사학계는 전체가 그런것 아닙니까? 심지어 재야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고 단국대 부총장 윤내현교수님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붇기도.
제 입장에선 강단이 악마로 보이는데요. 재야가 잘못하고 강단이 잘한 일이 있으면 제공 바랍니다..
북한과 일본이 고구려영토를 북경인근 이라고 하는데 남한만 아니한다라.. 재미있는 사실.
강단과 재야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흑백논리가 훨씬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악마라는 표현은 좀 심한것 같군요. 뭐 그래도 우리 사학계가 다소 소극적이고 지나치게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듯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은 듭니다.
김원룡의 내력을 설명하세요 노잘란 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제가 알기론 식민사학의 일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에분께, 김원룡이란 사람이 재야사학계 라는 말도없고 의도도 없는듯합니다. 다시한번 3번과 4번을 주의깊게 읽어주시길바랍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백제가 요서지방에 진출했다고 가르칩니다.
아 승질나...사학자들 다 쏴죽이고싶네..
고구려가 북경까지 진출했던 근거는 많이 있습니다만 고구려의 직할지는 아니었고 속국이나 속령의 형태로 지배했습니다. 그것도 고구려 전 시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죠. 사료적으로 보면 광개토태왕 때나 수당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가 됩니다.
지금도 북경 근처에는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상당기간 동안 고구려의 실질적인 세력권 내에 잇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이란 군영, 즉 최전선기지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고려영 근처에는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판축 기법의 흔적이 보이는 성도 발견되엇습니다.
장수태왕이 붕어했을 때 북위의 태후가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거나, 고구려가 후연을 멸망시키고 북연을 새워 간접 통치한 것이나(배후 북위에 대한 완충지대로 설정),AD 407년 전후로 북연을 전초기지로 백제의 요서지역을 점령한 것 등의 정세를 봐서도
고구려가 상당기간 북경을 장악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가 봐도 4 ~ 5세기 무렵에 요서지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지였을 가능성이 농후한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판축기법은 중국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고구려식의 판축기법은 지나와는 다릅니다. 고구려는 가운데 흙을 판축기법으로 쌓고 포물선 모양으로 밑에는 큰 바위, 위에는 작은 바위식으로 토성을 보호하도록 2중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건 판축기법이 다른게 아니라 축성술이 다른게 아닌지요.
초딩사냥꾼님........말장난을 하시려는 겁니까? -_- 고구려식의 판축기법은 지나의 판축기법과는 전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