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혼절 또 혼절, 하룻밤에도 여러 차례 온 몸 적시며 의식과 무의식의 강을 넘나드시는 아버지. 참으로 오랜만에 꽃을 피우듯 눈을 뜨시며 하시는 말씀.
"자네 얼굴 보니 반갑네."
두 노인, 주름진 이마와 이마를 비비며 볼과 볼을 비비며 눈물로 뒤엉키는데. 저렇듯 이마와 이마를 비벼서 아픔이 부서졌으면. 볼과 볼을 비벼 아픔이 사라졌으면. 내가 파먹은 아버지의 텅 빈 뼈 마디마디마다 내 사랑 아편이라도 되어 스며들었으면.
각혈
딸아, 이게 꽃이더냐. 젊은 날 내 가슴을 뭉글뭉글하게 하며 피어오르던 붉은 꽃이더냐. 내가 피워낸 내 인생의 꽃송이들이 동백꽃처럼 숭어리 숭어리 떨어지며, 목젖까지 차오르며 솟아올라 숨 막혀 뱉어내야 하는 것이 붉은 꽃잎이더냐.
딸아, 밤새워 내 등을 문지르는 내 딸아. 자꾸만 솟아오르는 이 붉은 꽃잎들을 잠재워다오. 꽃잎보다 얇아진 이 몸 이제는 잠들고 싶구나.
임종
참 편안한 걸 거야. 내 안에 가두었던 나를 놓아주는 것이거든. 조이며 쫄아 드는 것이 아니라 느슨해지며 확장되는 것이지. 그대, 서럽더라도 숨 막히는 것들 빠져 나가게 손끝에 달린 문 열어줘라.
그대를 갉아먹던 그 지독한 병도, 심장을 후벼 파던 그 끈질긴 사랑도,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도 이젠 버리는 거야.
그래, 그렇게 비워진 그대 안에 우주를 받아들이는 거야.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거야.
사라지는 것은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깊은 땅속에 아버지를 묻고 돌아오는 길. 딸이 걸아가야 할 그 길 위에 먼저 와 서 계시는 아버지. 나무가 되어 푸른 손 흔들어 주시며, 햇살이 되어 시린 어깨 감싸 주시며, 가슴 너무 아파하지 말라며 산들바람의 손길로 내 가슴 어루만져 주시는 아버지.
그렇구나. 아버지는 딸의 곁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더 눈물겨운 모습으로 늘 내 곁에 머물러 주시는구나.
내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스며들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 주시는구나.
깊은 그리움
나는 그대를 삼키지도 않았는데 그대가 내 오목가슴쯤에 걸려있네.
그대 있는 그쯤을 내 오른 손으로 문지르네. 오래도록 입은 생전의 낡은 러닝샤스 속을 지나
웅크리고 있는 그대의 등, 검버섯 핀 까실한 살갗 같은 그리움이 만져지네. 내 손의 온기 그대에게 전해져 시린 그대 등 따스해져라.
나는 그대를 삼키지도 않았는데 그대는 딸의 오목가슴쯤에 걸려 내려갈 줄을 모르네.
그대여, 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차라리 나를 삼켜라
다시 바다
살다가 살아내다가 빈 껍질로 뒤척이다가, 밀물 같은 그리움 목젖까지 차오르면 아버지의 바다로 갈래요. 살아 숨쉬며 흘려보낸 그대의 웃음, 그대의 목소리, 그대의 눈물이 고여 있으리니. 그대를 거닐며, 그대를 느끼며 바다 가득 내 그리움 풀어 놓으면 그대, 파도치듯 달려 와 하얀 거품으로 스며들어 주세요. 돌아 와 한동안 또 살아가게요.
첫댓글 생명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아름다운 추억을 주신 내 아버지를 그리워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