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가보고 싶은 곳, 알프스. 그림만으로도 좋다.
아이거 산(독일어: Eiger)은 알프스(Alps) 산맥의 산으로 스위스 베른(Bern) 칸톤에 위치하며, 높이는 3,970m이다. 아일랜드 출신 찰스 배링턴(Charles Barrington; 1834~1901)과 두 명의 그린델발트(Grindelwald) 가이드가 1858년 8월 11일 가장 쉬운 서릉 루트로 초등하였다. 이후 남서릉, 미텔레기능, 라우퍼 루트 등 수많은 루트가 개척되었으나 북벽만은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믿어져 왔다. 융프라우 철도가 아이거 산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아이거 북벽(독일어: Nordwand)은 마터호른(Matterhorn) 산,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 산의 북벽과 함께 알프스의 3대 북벽으로 불린다. 계곡 밑에서 1,800m나 솟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가장 어려운 등반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등반 역사상 아이거 북벽은 사망자가 가장 많은 곳 중의 하나이다. 1938년 7월 24일 안데를 헤크마이어(Anderl Heckmair; 1906~2005)와 루트비히 뵈르그(Ludwig Voerg; 1911~41), 프리츠 카스파레크(Fritz Kasparek; 1910~54)와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 1912~2006)로 이루어진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 팀에 의하여 북벽이 초등되었다. <아이거 빙벽>은 위 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아이거 산(독일어: Eiger)은 알프스(Alps) 산맥의 산으로 스위스 베른(Bern) 칸톤에 위치하며, 높이는 3,970m이다. 베터호른, 슈렉호른, 뮌히, 융프라우와 더불어 5형제봉을 이루고 있다. 사람 잡아먹는 귀신 이라는 뜻을 가진 아이거는 알프스 등반의 빼놓을 수 없는 대상이다. 아일랜드 출신 찰스 배링턴(Charles Barrington; 1834~ 1901)과 두 명의 그린델발트(Grindelwald) 가이드가 1858. 8. 11. 가장 쉬운 서릉 루트로 최초등반하였다. 이후 남서릉, 미텔레기능, 라우퍼 루트 등 수많은 루트가 개척되었으나 북벽만은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믿어져 왔다.
융프라우 철도가 아이거 산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아이거 북벽(독일어: Nordwand)은 마터호른(Matterhorn) 산,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 산의 북벽과 함께 알프스의 3대 북벽으로 불린다. 계곡 밑에서 1,800m나 솟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가장 어려운 등반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등반 역사상 아이거 북벽은 사망자가 가장 많은 곳 중의 하나이다. 1938년 7월 24일 안데를 헤크마이어(Anderl Heckmair; 1906~2005)와 루트비히 뵈르그(Ludwig Voerg; 1911~41), 프리츠 카스파레크(Fritz Kasparek; 1910~54)와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 1912~2006)로 이루어진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 팀에 의하여 북벽이 초등되었다.
<아이거 빙벽>은 위 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아이거(eiger) 북벽은 1935년 이래 많은 사람들이 등반 둥 추락사 혹은 동사했으며, 국내 산악인들도 지금까지 5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험상궂은 이 벽과는 대조적으로 이 지역은 영화 ‘사운드어브뮤직’의 배경인 아름다운 베르네 계곡으로 주위 경관이 아름답다. Eiger, Munchi, Jungfrau가 푸른초원 위에 우뚝 솟아있어, 여름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융프라우행 산악열차를 이용하고 겨울에는 이 지역 전체가 스키장이 되는 곳이다.
′거미의 눈사태는 우릴 내치지 못했지만 허영심과 이기심은 말끔히 씻어버렸다.′ Eiger북벽 첫 등정(1938) 신화로 남고 나치 부역 추문을 오점으로 남긴 채 청춘을 끓게 한 등반 記 생생한데, 「山史의 큰 봉우리」 조용히 저물다. Heinrich Harrer가 죽었다.
20세기 등반사의 영욕을 한 몸에 구현했던 이 시대의 풍운아가 2006년 1월 7일 고국 오스트리아의 한 소도시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94세.
산 사람들에게 하인리히 하러는 전설속의 영웅이다. 전설의 무대는 물론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아이거(3,970m) 북벽이고, 전설의 기록은 그가 남긴 책 ‘하얀 거미’이다.
우리 윗 세대 산악인들은 밤마다 ‘하얀 거미’를 품에 안고 아이거 북벽을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잠들곤 했다.
하인리히 하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대학 지리학과 재학시절 국가대표 스키선수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을 만큼 뛰어난 스포츠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대학 졸업 직후 아이거 북벽에 매달린 이유는 의외로 엉뚱했다.
′나는 낭가 파르바트(8,126m) 원정대원으로 선발되고 싶었다. 무명의 청년이 그런 국가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아이거 북벽 초등자가 되는 수 밖에 없었다.′
아이거 북벽(3,970m)은 낮은 고도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 안가 파르마트 루팔벽, 안데스의 아콩카구아 남벽(6,959m)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3대벽으로 꼽힌다.
숱한 사망자가 속출해 클라이머들의 공동묘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영국 원정대가 등반에 집념을 불태운 산이 에베레스트산 이라면 독일 원정대는 낭가 파르바트를 정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독일은 그때까지 4차에 걸쳐 원정대를 파견했지만 무려 31명의 목숨을 잃었을 뿐 등정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러(Harrer)는 자신의 꿈대로 5차 원정대원에 선발되어 낭가 파르바트로 향했다.
하지만 운명은 이쯤에서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비약한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영국군에 체포되어 인도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네 번의 시도 끝에 포로수용소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21개월 동안 변변한 장비도 없이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개척해가며 걸어서 히말라야를 넘었다. 그가 초인적인 대장정 끝에 도착한 나라가 바로 티베트였다. 그리고 그가 당시 소년이었던 달라이 라마와 함께 보낸 신비한 세월을 기록한 책이 ′티베트에서의 7년′이다.
1953년에 출간된 ′티베트에서의 7년′은 그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르게 하면서 동시에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다. 하인리히 하러는 그 열풍이 가라앉기 전에 또 하나의 베스트 셀러를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아이거 북벽 최초 등반 기록인 ′하얀 거미′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이 책은 ′티베트에서의 7년′ 출간 이후 5년, 그리고 실제 등반 이후로는 무려 20년 만인 1958년에 출간된 것이다. 이 두권의 책으로 그는 남은 생애를 풍족하게 지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평가절하된 산악인이 바로 안델 헤크마이어이다. 실제 아이거 북벽 최초 등반의 일등 공신은 당시 뮌헨파의 대표주자로서 ′12발 아이젠의 달인′이라 불리우던 이 사나이였다. 그는 아인리히가 ′하얀거미′를 출간하기 9년 전인 1949년 자신의 저서 ′알프스의 3대 북벽′을 통해 이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프스의 3대 북벽′을 읽지 않고 ′하얀거미′를 읽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이거 북벽의 최초 등반자는 안델 헤크마이어가 아니라 하인리히 하러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베스트셀러의 위력이다.
1997년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브래드 피트를 캐스팅하여 ′티베트에서의 7년′을 영화로 만들 때 하인리히 하러의 명예는 급전직하한다. 오랫동안 쉬쉬하며 숨겨왔던 그의 나치 부역협의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력지 ‘슈테론’에 따르면 하인리히 하러는 아이거 북벽 등정 당시 나치친위대(SS) 소속이었으며, 이이거 북벽 정상에서도 나치 깃발을 흔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히틀러와 함께 찍은 사진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대한 합리화’의 도구로 폭 넓게 사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