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Wang Yangming, 王陽明]의 삶
개요
본명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 시호는 문성(文成). 심성론(心性論)으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철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관리로서 굴곡이 많은 세월을 보내기는 했지만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워,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100여 년에 걸쳐 평화를 누렸다. 양지(良知 :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가 바로 천리(天理 : 세상의 올바른 이치)라는 그의 주장은 12세기에 활약한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각각의 사물에 그 이치가 있다"라는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색인 : 성리학). 왕양명의 주장은 전통 유교사상과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한동안 사학(邪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색인 : 중국철학).
초기생애와 지적 편력
그는 정부 고관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변방의 진(鎭)인 용삼관(庸三關)으로 가서 궁술(弓術)을 익혔다. 결혼식날 불로장생의 술법인 양생술(養生術)에 대해 도사와 토론하는 데 열중하여 결혼 초야를 도교사원에서 보내고 말았다. 1492년 성시(省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베이징[北京]에 있던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위대한 성리학자 주희의 가르침대로 대나무 앞에 조용히 앉아서 그 이치를 찾아내려 했으나 1주일의 명상 끝에 병에 걸렸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1493, 1495년의 전시(殿試)에 떨어진 그는 병법 연구와 도가의 양생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499년 마침내 전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공부주사(工部主事)에 임명되었다. 황제에게 국경의 수비·전략·행정 등에 관한 8개 조항의 정책을 상소하여 일찍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500년 형부주사(刑部主事)에 임명되었고, 1501년 난징[南京] 부근에 있는 감옥의 죄수기록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많은 부조리를 시정했다.
1502년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양명(陽明) 계곡에서 정양했는데 이때 도가의 도인술(導引術)을 수련한 듯하다. 산둥[山東] 지방의 과거시험을 감독했고 이어 병부주사(兵部主事)가 되었으며, 1505년경부터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몰려들었다. 유교의 성인(聖人)이 되는 데에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중요하다고 가르쳤고, 경전을 암송하고 화려한 문장을 써내는 일 등을 비난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그가 인기전술을 쓴다고 매도했으나, 존경받는 학자·관리였던 잠약수(湛若水) 같은 사람은 그의 학설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1506년 그의 신상에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부패한 환관(宦官) 유근(劉瑾)을 탄핵하다가 투옥된 한 검열관을 옹호하여, 그 자신도 40대의 곤장을 맞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혔다. 그후 구이저우 성[貴州省] 룽창[龍場]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토착민들과 함께 살았는데 자주 병에 걸렸다. 이같은 질병과 고독 속에서 36세가 되던 해의 어느날 밤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이를 룽창의 大悟라고 함). 즉 천리를 탐구해나가는 데 있어 주자의 이론에 따라 실재하는 사물에서 이(理)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良知) 속에서 그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렇게 하여 왕양명은 12세기의 철학자 육구연(陸九淵)이 처음 주장하기 시작했던 심성론(心性論)을 완성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색인 : 육왕학파).
정치적·군사적 경력
1509년 왕양명은 또다시 획기적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효도를 실제로 행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앎이 있어야만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색인 : 인식론). 1510년 장시[江西]의 지방관이 되어, 10가구씩을 묶어 서로의 행위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10가패법'(十家牌法)을 실시하는 등 많은 개혁안을 시행했다. 그뒤 형부와 도찰원(都察院) 등에서 근무한 후 1516년 장시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장시 지방에는 수십 년 동안 비적(匪賊)과 반도(叛徒) 들이 들끓고 있었다. 왕양명은 1517~18년 4차례에 걸친 토벌전을 벌여 이들을 소탕했다. 그는 복구사업, 세제 개혁, 서원 설립 등을 추진했고, 부락민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향당의 규약인 남공향약을 만들었다.
1519년 푸젠[福建]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도중에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그의 근거지인 난창[南昌]을 포위했다. 4일 뒤에 신호와 교전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왕양명은 신호와 전부터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시기심 많은 관리들은 왕양명이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관군이 진격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신호를 공격했다고 모함했다. 그러나 협상을 위해 찾아간 왕양명의 문하생을 신호가 투옥하는 일이 벌어지자 모함이 사라지고, 왕양명은 다시 장시 지사에 임명되었다. 1521년 새로 등극한 황제 가정제(嘉靖帝 : 世宗)는 그를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하고 신건백(新建伯)에 봉했다. 1522년 그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상중에 있었으며, 5년 이상을 고향에 머물면서 중국 각지에서 찾아온 수백 명의 문하생들과 함께 도에 대해 토론했다. 이때에 나눈 대화와 그 이전의 대화들을 하나로 엮은 것이 〈전습록 傳習錄〉이다. 1521년 그는 치양지(致良知 : 마음 속에 있는 양지를 다 발휘함)에 대해 처음으로 가르쳤다.
사후의 명성
1527년 6월 광시[廣西]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6개월 만에 그 반란을 평정했으나, 수년 동안 고통을 받아온 천식이 도져 중태에 빠졌다. 그는 1529년 개선하여 돌아오던 중 장시의 난안에서 죽었다. 세력 있는 대신이 그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의 작위와 세습봉록이 박탈되어 그의 두 아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조치에 항의한 사람들은 파면되거나 유배당했으며, 또한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도 철저히 금지되었다. 그가 죽은 지 38년 후에 새로 등극한 목종(穆宗)이 그에게 신건후(新建侯)의 작위와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584년초에는 공자묘에 배향되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왕양명의 철학은 150여 년 동안 중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그는 2,000여 년에 걸친 중국 철학사에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