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1510-1560)는 퇴계보다 9년 아래이나 퇴계보다도 10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분이다.금년이 하서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라서 7월달에 장성군 필암서원 집성관에서 기념식을 성대히 치렸는데 여기에 안동 도산서원에서 참가하여 영호남 학문의 교류와 퇴계 집안과 김인후 집안의 각별한 우의 를 나누었다.이 두사람은 하서가 1528년 19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퇴계와 같이 동문수학을 하게 되었으며 이때 서로 깊은 교유를 하였기 때문이였다..
그는 울산 김씨로 시조는 신라 경순왕과 竹房夫人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왕자 김덕지(金德摯)의 후손으로 조선 태종때 왕권강화 정책으로 친인척 제거를 할때 태종의 처족인 민무질,민무구 뿐 아니라 친인척들을 닦치는 데로 숙청하였다. 이때 태종의 사촌 동서인 개국공신 김온(金穩)은 그의 부인 민양의 딸을 데리고 장성군 황룡면 맥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 그로 부터 울산 김씨가 장성에서 살게 되었으며 김온의 5세손이 바로 김인후(金麟厚)이다.
예로부터 전라도에서 행세하는 문벌로는 행주기씨,장흥고씨,연일정씨,순천박씨라고 하는데 "奇高鄭朴"이라 부른다.자세히 말하면 성리학자 기대승의 집안,임란때의 병을 일으킨 고경명의 집안,정철의 집안,영상을 지낸 충주 박씨 박순의 집안이다. 하지만 울산 김씨도 여기에 빠질 수 없다. 울산 김씨들 후손으로 제 2대 부통령을 지내고 고려대학교를 창립한 인촌 김성수씨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 박사가 모두 이들 집안이기 때문이다.
하서 김인후는 의성 김씨인 모재 김안국과, 면앙정 송순에게 수학을 하고 1519년 기묘사화때 순천으로 잠시 귀양살이를 온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 최산두에게 수학을 하고 이항(李恒)과 교유를 하였으며 1545년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내다가 인종이 갑자기 죽자 벼슬에서 물려나 귀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을 가르쳤다.기효간 ,정철,양자징을 후학으로 두어 호남 학맥의 씨앗을 내리게 한 분이다.
하서 김인후의 학설은 주자의 誠敬說을 좇아 우주만물에 일관되며 天理로써 마음에 깃들어 있는 誠과, 마음을 바르고 참되게 하는 敬을 추구해야 성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대체로 이기이원론을 견지하였으며 퇴계의 견해와 비슷하였다.그러나 세부적으로는 理와 氣가 혼합되어 있다는 독특한 이론을 내세워 이기일물설을 주장한 이항과도 논쟁을 하였으며 또 理와 氣가 상관하여 천지만물이 형태화 하여 음양으로 분화 한다는 화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더 나아가 그의 학문이 下學을 무시하고 頓悟에 빠져있다고 우려하였다.
또한 노수신과 이항, 기대승이 논쟁을 벌린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서도 도심은 미발이요 인심은 이발이라고 하는 노수신의 견해보다는 이항 ,기대승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심도심설은 성리학의 4단 7정과 관계되는 것으로 인심은 감각적 욕구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요 도심은 도덕적 본심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서 김인후는 충효를 바탕으로 理와 氣가 혼합되었다는 독특한 이기론을 편 호남 성리학의 태두라 할 수 있다.
결국 김굉필은 전라도 출신은 아니지만 무오사화때 4년간 순천에 유배되어 최산두와 유계린의 스승이 되어 김인후,기효간,정철,변성온 등을 교육하여 후일 호남학맥 형성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담양 소쇄원의 주인인 소쇄옹 영산보의 아들 양자징,미암 유희춘의 아들,이항의 아들을 각각 사위로 삼아 글도 가르쳐 소쇄원 인맥을 쌓았다. 그리고 소쇄원 40팔영을 지어 벗들과 소일하며 학문을 하였다..
끝으로 우리가 학창 시절 배운 김인후의 시를 소개한다.
"靑山은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절로 水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마음이 넓고 꺼리낌이 없다는 뜻의 확연루의 모습)
첫댓글 전라도 쪽 서원으로는 제일이라고 생각되네. 필암서원의 주변정비를 성역화하여 엄청 크게 해놓았다네
오작교는 지난번에 필암서원을 다녀오셨다지! 河西는 당쟁이 심화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이고 호남사림의 종주격이 되는사람이며 그 후손들도 인물들이 많으니 성역화가 되었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