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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谷 성리설 비판한 퇴계학파의 선봉 葛庵 李玄逸 (갈암 이현일) 철학적 논쟁 흔적 담겨 | ||||||||||||
한국고전번역원 - 교수신문 공동기획 ‘고전의 숲’ 6. 『국역 갈암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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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庵 李玄逸(1627~1704)은 성리학자다.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도 대개 성리학 측면에서 결정된다. 그는 퇴계의 理氣互發說을 비판한 율곡의 氣發一途說을 재비판함으로써 향후 퇴계학파 성리설을 정립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그의 四端七情說은 영남ㆍ기호 양대 학파의 대립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됐다. 오늘날 학자들이 갈암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 『葛庵集』은 원문 44권이 넘고 譯書도 7책이라 전질을 다 읽기는 쉽지 않다. 갈암의 성리설을 알고 싶다면, 먼저 雜著에서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글은 율곡 이이가 牛溪 成渾의 물음에 답한 편지에서 퇴계 이황의 理氣互發說을 비판한 학설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으로 이 글이 『갈암집』안에서 가장 문제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대개 四端과 七情의 所從來가 각각 主로 삼는 바 있음은 그 근본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니, 발하기 전에는 한 길이었다가 이미 발한 뒤에 그 선한 측면을 가려내어 사단으로 삼은 것은 애초에 아니다. 따라서 나는 ‘사단과 칠정은 그 立言한 뜻이 본래 서로 접속되지 않으니, 굳이 이 둘을 서로 끌어다 配合시켜서 본래 하나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대개 인심·도심의 구별은 그 근본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니, 어찌 미발의 상태에서는 천리와 인욕이 한 곳에 섞여 있다가 발한 뒤에 가서야 理와 氣가 비로소 나뉘어 서로 섞이지 않게 되리요.”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설명하려 한 이황의 理氣互發說을 결과적으로 理氣各發說로 만들어 향후 기호학파에게 반박의 근거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기실 “四端과 七情의 所從來가 각각 主로 삼는 바 있음은 그 근본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라는 말은 朱子의 「答蔡季通書」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주자가 다른 편지에서 “말이 분명치 못하여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다” 했고, 퇴계도 주자의 정설이 아니라고 판단해 그의 편저 『朱子書節要』에서 刪去했다. 사단과 칠정이 마음 속 근본에서부터 다르다고 한다면 사람의 본성 속에 善과 惡이 대립해 공존하는 것처럼 될 수 있기 때문에 맹자의 性善說에 이미 위배된다. 그런데도 갈암이 이 설을 인용한 것은 율곡의 氣發一途說을 비판하는 데 결정적인 논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밖에도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에는 향후 영남학파 성리설의 중요한 논거들이 실려 있으니, 조선시대 성리설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중요한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갈암이 만년에 쓴 「愁州管窺錄」과 「讀金天休論李大柔理氣性情圖辨」도 갈암의 성리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수주관규록」에서 南冥 조식을 퇴계와 비교해 그 학문성향을 비판한 부분을 소개한다. 남명이 그의 시 「江亭偶吟」에서 “새로 불어난 물이 푸른 옥보다도 맑거늘 박차서 물결 일으키는 저 제비 얄미워라(新水淨於靑玉面 爲憎飛燕蹴生痕)” 한 대목을 퇴계가 소년 시절에 지은 「遊春詠野塘」에서 “구름 날고 새 지나는 건 원래 있는 일, 때때로 제비가 물결 찰까 그게 걱정일세(雲飛鳥過元相管 只怕時時燕蹴波)” 한 대목에 대비해, “두 시 모두 천연히 自得한 멋이 있지만 퇴계의 시는 고요할 때 마음을 보존하고 움직일 때 기미를 관찰해 사물이 오면 그대로 순응하는 기상이 있으며, 남명의 시는 마음이 空寂에 쏠려 마음으로 사물이 없는 곳을 비추려는 의사가 있다”고 분석했다. ‘마음이 空寂에 쏠려 마음으로 사물이 없는 곳을 비추려는 의사가 있다’는 것은 불교의 禪과 같이 마음으로 마음의 근원을 되비추어봄을 뜻한다 퇴계의 공부가 儒家의 理學에 바탕을 둬 사물의 이치를 살피고 사물에 순응하는 것이라면 남명의 공부는 佛家의 心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은근히 비판한 것이다. 자기 학파의 宗師인 퇴계의 편을 들어줬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짧은 시를 근거로 삼아 퇴계와 남명의 학문 성향을 분석해 냈다는 점은 예리한 안목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갈암은 학자로서는 특이하게 武略을 좋아했다. 이는 그의 타고난 기질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병자호란의 國恥를 씻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劉備를 도와 漢나라 왕실 부흥에 진력하다가 마침내 陣中에서 죽은 촉한의 승상 제갈공명을 사모하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독서하는 여가에 兵書를 즐겨 읽었고, 15~16세 무렵에는 단풍나무를 꺾어서 깃발을 만들고 아이들을 지휘해 제갈공명의 八陣圖를 펼쳤다고 하니, 어릴 때부터 제갈공명을 매우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갈암이 이렇게 제갈공명을 좋아하게 된 데는 나이 10세 때 겪은 병자호란의 치욕이 가장 큰 원인이 됐다. 10세 때 남한산성이 포위당했다는 말을 듣고 섣달 매화[臘梅]를 읊기를, “꽃나무 아래서 술을 마시고 싶노니, 되놈들이 성을 포위했다네(欲飮花下酒 虜賊圍城闕)”라고 했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어린 나이임에도 비분강개한 심정을 술로 풀고 싶다고 한 것이다. 이보다 앞선 9세 때 그의 仲兄인 存齋 李徽逸이 포부를 물으니 갈암은 “元帥가 돼 군사를 이끌고 가서 遼東을 수복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요동이 오랑캐에게 점거돼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겼던 것이다. 또 그는 “나라를 위해 심신을 다 바쳐서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는 제갈공명의 「出師表」의 구절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9년의 긴 유배에서 풀려 돌아왔을 때 일가친지들이 차린 위로연에서도 「출사표」를 외웠다고 한다. 갈암이란 호를 처음 것은 27세 때 부친 石溪 李時明을 따라 경상북도 英陽縣 首比로 가서 은거할 때 葛庵이란 편액을 걸었을 때다. 그리고 32세 때 「葛庵記」를 지어서 자신의 지향을 표방했다. 이 글에서 갈암은 칡[葛]의 실용성, 검소한 삶을 살겠다는 뜻과 함께 삼국시대 蜀漢의 승상 諸葛孔明을 사모하는 뜻을 분명히 나타냈다. 그리고 59세 때 南嶽草堂을 짓고 은거할 때에도 門楣에 「갈암기」를 내걸었으니, ‘갈암’ 두 글자에는 그의 평생의 정신적 지향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갈암은 항상 정쟁의 와중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오랜 유배생활을 하고 말았다. 갈암은 운명하기 두 달 전에 쓴 절필시에서 “덧없는 인간 세상, 어느덧 나이 팔십이라. 평생에 무슨 일 했던가. 하늘에 부끄러움 없고저(草草人間世 居然八十年 生平何所事 要不愧皇天)”라고 술회했다. 평생토록 是非叢中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 처절한 삶이 담담한 회고 속에 농축돼 있다.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한국경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