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가산(楞伽山) 개암사(開巖寺) 불기 2558(2014)년 6월 1일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변산반도 동쪽에 위치한 능가산, 변산의 또 다른 이름인 능가산은 남쪽에는 내소사를 안고 동쪽에는 개암사를 품었다. 여기 개암사 자리는 그 옛날 변한의 왕궁터였다고 한다. 변한(弁韓)의 文王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의 공격을 피하여 울금바위 아래로 와 이곳에 성을쌓고 우(禹)와 진(陳) 두 장수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을 짓게 하여 동쪽의 전각을 묘암(卯巖) 이라 하고 서쪽의 것을 개암(開巖)이라 하였다. 우와 진이 죽고 내란이 일어난 후 문왕의 뒤를 이어 30년간 재위하던 마연이 살해되었다. 변한의 유민들이 이 두 장수를 잊지 않기 위해 성 위의 두 바위를 우진암이라 하고 바위가 있는 산을 변산이라 하였다.
개암사는 634년 백제 무왕 35년 백제 왕사인 묘련대사(妙蓮大師)에 의해 창건되고 그로부터 40년 후 676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중창하였다. 1276년 고려 충렬왕 2년 송광사 스님인 원감국사(圓鑑國師)가 개암사를 중창한 후 능가경을 설했는데 이후 변산은 능가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하나더 더해졌다. 고려 말 조선 초를 거치면서 왜구들로 인하여 다시 폐허가 되었던 개암사는 조선태종14년 1414년에 주지 선탄선사(禪坦先師)에 의하여 다시 중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개암사는 다시 폐허가 되었으며, 인조 15년 1636년 계호대사(戒浩大師)가 정유재란으로 병화를 입은 현재의 대웅보전을 중건하였다.
高嶽峨巖 智人所居 碧松深谷 行者所捿(고악아암 지인소거 벽송심곡 행자소서)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있는 사람의 거처할 곳이고 푸른 소나무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의 살아갈 곳이다.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말이다 불도를 깨닫기 위해 수행의 길을 간다면 높은산 험한 바위를 두려워 해서는 안되고 소나무 푸른 깊은 골짜기처럼 청정함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리라.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가 왜 먼 백제 땅까지 와서 개암사를 중창했을까 이는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을 담은 것이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세 사람 창건주 묘련스님 제자 도침(道琛)과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백제 왕자 부여풍(扶餘豊, 豊王)은 우금굴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을 도모했다. 우금바위를 증심으로 둘러 쌓은 우금산성에서 세력을 키워갔다. 그러나 적은 내부에 있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였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왕권에 위협을 느낀 부여풍이다시 복신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백제의 부흥을 목적으로 일어났던 군대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렇게 나라를 잃은 백제의 유민들을 원효대사가 다독였다. 원효스님은 우금굴에서 수행하고 이곳에서 發心修行章(발심수행장)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원효스님은 피와 복수로 점철된 땅을 법향이 가득한 부처님의 땅으로 바꾸어 낸 것이다
원효대사의 용맹정진과 나라잃은 패왕의 눈물과 소금밭 일구며 살던 무지렝이 백성들의 땀이 함께어리고, 천년 세월이 녹아 있는 돌계단을 올라서면 울금바위를 머리에 이고 있는 대웅보전이 눈 앞에 나타난다.뒷산 정상에 웅장하게 솟은 울금바위가 하늘 향해 문을 열 듯 열려 있다고 해서 개암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대웅보전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불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우리 순례단은 대웅보전에서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예불대참회문으로 89분의 부처님 명호를 칭명염불하면서 108배를 하며 부처님을 찬탄하고, 부처님께 귀의 예배하고, 참회, 발원, 회향하였습니다.
발원문
삼계의 도사이시고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 저희들 두손 모아 부처님전에 발원하옵니다.
천년 고찰을 찾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백팔참회로 백팔번뇌를 소멸해 가고자 하는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회원인 저희들에게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오늘 청정도량 능가산 개암사에서 두손 모은 것은 불보살님과 인연있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일심으로 기도하여 불보살님의 가호로 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복덕과 지혜를 다 구족하신 부처님! 저희들이 한없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무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육도를 윤회하며,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었던 탓으로 지은 모든 업장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옵나니 섭수하여 주시옵고 바라던 소원들도 원만히 이루어지기를 발원합니다.
자비의 손길로 온 세상을 감싸주시는 부처님! 백팔고찰순례단원인 저희들은 사회가 보다 더 바로 서고, 경제가 더욱 나아져 온 국민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길 발원하며, 지난 4월 세월호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바라며, 그 가족 친지 온누리 모든 분들이 고통을 벗어나 평안과 행복한 삶이 되어지길 간절히 발원합니다.
한량없는 광명으로 온 세상 밝게 비춰주시는 부처님! 오늘 일심으로 두 손 모은 저희들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원들은 이제 모든 어리석음을 반야의 등불 지혜의 칼로 멸진하여 응어리지고 매듭진 업장과 업연을 녹이려 하옵니다. 부처님의 정법 만난 기쁨으로 모든 불행을 씻어 내고, 인연으로 모여 있는 중생들에게 감사의 정으로 원망을 버리겠나이다.
사바세계를 비추시는 원만한 등불이신 부처님! 생사의 무명장야를 밝힐 믿음의 법등을 가슴속에 소중히 받쳐 들고 저희들의 삶을 자비로 채우고 지혜로 빛내겠사오니, 스스로 빛나는 불성의 빛이 되어 사바를 밝히는 등불이 되게 하옵소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따르며 기뻐하는 불자되게 하옵시고, 언제 어떤 경우에도 만족의 마음을 잃지 않고 원망과 불만이 불행의 씨앗이며 윤회의 업연임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끝없는 공덕의 바다이신 부처님! 오늘 개암사 청정도량에서 두 손 모은 저희들은 늘 부처님을 찬탄하고 따르며 일심으로 기도한 인연공덕으로 선망부모와 조상, 인연있는 유주무주 고혼들이 극락왕생 하옵기를 발원하오며, 여기 동참한 저희들 백팔고찰순례단의 각 가정에 일체의 마장을 막아주시고,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온 가족이 건강하고 마음이 밝아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원만히 성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부처님께 지성으로 귀의 하옵나니 이 오탁악세에 당신의 바른 법이 다시 한 떨기 하얀 연꽃처럼 피어나게 하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대웅보전 내 석가모니 삼존불과 亞자 형태의 닫집 (위 사진출처:문화재청)
닫집은 두가지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보개(寶蓋 또는 天蓋)로서의 상징이다. 寶蓋는 부처님의 머리 위에 설치한 일종의 장엄구로써 그 원형은 일산(日傘)에서 찾아지며, 聖人으로서의 위계와 권위, 존엄 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닫집을 법당 안에 설치한 원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불국정토(佛國淨土)의 궁전 모습을 법당 안에 재현하는 것에 있다고 불 수 있다.
불법과 불국토를 외호하는 천정의 용들이 서기(瑞氣)를 내뿜고 있다.
대웅보전 - 보물 제292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추녀 끝에는 활주가 받치고 있다. 대웅보전의 본 이름은 황금전이었다. 1636년(인조14)에 계호대선사(戒浩大禪師)가 중건하고 황금전(黃金殿)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개칭하면서, 개암사의 주불전이 되었다. 이후 1783년(정조7)에 승담선사(勝潭禪師)가 중수하고, 1960년 해체·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9년 7월 3차 고찰순례시는 맨살을 드러낸 나무결에서 세월의 숨결과 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느낄 수 있었는데 단청된 대웅보전은 고색미가 숨어버려서 어쩐지 낯설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말로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온조왕)15년 봄 정월,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소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이 표현을 “백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의 미감을 대표할 만한 명구”라고 말한다. (아래사진은 2009년 7월 26일 제3차 고찰순례시 단청하기전 사진)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위에는 두개의 용두(龍頭)가 건물을 외호(外護)하고 있다.
(아래사진은 2009년 7월 26일 제3차 고찰순례시 단청하기전 사진)
좌청룡을 나타낸 대웅보전 좌측[向右(향우):바라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우측] 귀공포 (아래사진은 2009년 7월 26일 제3차 고찰순례시 단청하기전 사진)
우백호를 나타앤 백호조각의 대웅보전 우측[向左(향좌)] 귀공포 (아래사진은 2009년 7월 26일 제3차 고찰순례시 단청하기전 사진)
영산회괘불탱 - 보물 제1269호(사진출처:문화재청) 길이 14m, 폭 9m의 이 괘불은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이 서 있고 뒷쪽에는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있으며, 앉아 있는 2구의 작은 불상도 보인다. 석가는 머리끝에서 다섯 줄기의 빛이 나며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서 있는 모습이다. 각 상들의 얼굴 형태와 어깨는 각지게 표현하여 경직되어 보이며, 눈썹은 처지게 처리했고 선은 매우 정밀하고 세련되어 강한 인상을 준다. 채색은 주로 붉은색과 녹색에 금색을 사용하였고 군청색을 넣어 색채 대비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영조 25년(1749) 승려화가 의겸(아래 설명 참조)이 참여한 그림으로 화면을 꽉 채운 구도와 경직된 형태, 강렬한 색채 등으로 18세기 중엽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며, 제작연대도 확실하여 우리나라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암사 괘불탱의 밑그림도 남아 있는데, 현재 밝혀진 유일한 것으로 당시 괘불화의 제작과정과 필치 등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개암사영산회괘불탱초본(사진출처:문화재청)
괘불도밑그림(본존과다보여래,아미타여래)(사진출처:문화재청)
***의겸(義謙) : 조선시대 18세기 전반인 숙종대부터 영조대에 걸쳐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리산 유역을 근거지로 활동한 당대 불화의 일인자인 의겸파 金魚(불화나 불상을 조성하는 집단의 우두머리, 首畵師)인 화승 의겸(義謙: 1690∼1760년경)의 불화는 국보302호 진주 청곡사 영산회괘불, 보물1204호 의겸등필수월관음도, 보물1267호 안국사 영산회괘불, 보물1269호 개암사 영산회괘불, 보물1273호 해인사 영산회상도, 보물1317호 운흥사 괘불 등이 모두 의겸의 손을 거쳤다. 그리고 위 개암사(開巖寺) 괘불 화기(畵記)에서는 의겸을 ‘금어존숙’(金魚尊宿: 존숙은 남의 본보기가 될만한 승려 또는 절의 주지를 말함)으로 적고 있어 그가 회화적 기량 뿐 아니라 수행승으로서도 매우 존경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화승 의겸이 조성한 유일한 불상인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普薩坐像)'이 인근 서대신동 <내원정사>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국보인 진주 '청곡사 괘불'과 '내원정사 관음보살'은 가까우니 한번쯤 참배하시길...... 참고로 진주 청곡사 가는 길목에 유명한 '진주 헛제사밥' 집이 있습니다. 거기서 5분 정도 더 가면 청곡사입니다. 참배후 내려 오면서 헛제사밥도 맛보시면 괜찮을 듯 합니다.
윤왕좌(輪王坐: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라는 자세의 조선 영조 6년(1730)에 조성된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 내원정사의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普薩坐像)
동종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사진출처:문화재청) 이 종은 숙종 15년(1689)에 제작된 조선시대 후기의 범종으로, 전체 높이 89.0㎝, 입 지름 61.5㎝이다. 종의 윗부분에는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다. 어깨부위에는 사각형으로 띠를 둘렀으며, 그 안에 다시 원을 그리고 범자를 새겨 넣었다. 일부는 이 사각형의 구획안에 2행의 한자 명문을 양각하였다. 어깨 아래쪽으로는 4각형 모양의 연곽과 보살입상이 4개씩 교차로 배치되어 있다. 연곽 테두리 안쪽으로 9개의 꽃무늬를 한 연뢰가 있다. 보살입상은 구름위에 천의를 입고 두 손을 모아 꽃을 받들고 있다. 종 입구는 어깨부위와는 다르게 띠를 두르고 꽃무늬를 새겼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숙종 15년(1689)에 주조했다는 명문이 있어서,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유두와 연뢰 : 종에 따라서 유두로 보이는 종도 있고 연꽃 봉오리로 보이는 종도 있으나 유곽이나 유두 보다는 연곽이나 연뢰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청림리석불좌상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사진출처:문화재청) 이 불상은 고려시대의 석조지장보살좌상으로 원래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서운마을의 청림사지에 전해오던 것을 개암사 지장전에 봉안하고 있다. 연꽃을 새긴 받침들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은 어깨와 등부분까지 길게 늘어져있으며, 손은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갠 뒤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곧게 펴 맞대고 있다. 손안에는 보주를 감싸고 있다. 자연석을 받침대로 하고 그 위에 아래로 향한 연꽃잎을 조각한 8각형의 대좌를 올려 놓았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응진전16나한상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사진출처:문화재청)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불교의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열 여섯분을 조각한 이 불상은,
조선 숙종 3년(1677)에 조성한 것으로,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봉안하였으며, 그 좌우로 금강경,
새끼호랑이, 염주, 경전 등을 들고 다양한 자세를 취한 나한들을 배치하였다.
나한들은 각이 진턱에 넓적한 머리의 모습 등 강인한 인상을 준다.
나한의 크기는 대략 92cm에서 98cm사이 이다. 옷은 최근에 색칠을 다시 한 것이다.
부처님 뵈러 온 노부부의 혹 넘어질세라 다정히 손잡은 모습에서, 이를 보는 내 마음도 지극히 평온해지며 10만억 국토를 지나 있는 극락정토를 지금 여기서 봅니다.
지장전
관음전
산신각
공들여 가꾸지 않아 야생 차밭이나 다름 없는 개암사 녹차밭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