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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도공 오천 이문화 선생 서거 600주년 추모행사
3. 추모 강연회
2014.6.27. 烏川齋
<利見臺> 해석: 이보
羅代君王孝子臺(나대군왕효자대)
如今登眺已封苔(여금등조이봉태)
霓旌羽蓋腸堪斷(예정우개장감단)
峻宇雕墻址自頹(준우조장지자퇴)
雲漢分明看北斗(운한분명간북두)
煙濤髣髴望東萊(연도방불망동래)
可憐波上白鷗鳥(가련파상백구조)
潮去潮來依舊廻(조거조래의구회)
신라 때 군왕(君王)의 효자대(孝子臺),
이제사 올라보니 이끼로 덮였구나.무지개 깃발과 깃일산 애를 끊나니,
높은 집과 꽃담은 터마저 무너졌네. 은하수 뚜렷해 북두(北斗)를 쳐다보며,
아스라히 물결 너머 동래(東萊)를 바라본다.
애틋해라, 물결 위의 갈매기,
조수(潮水)는 들고 나는데 여전히 배회하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천 이문화 선생 추모강연회 사회를 맡은 인천이씨 공도공파종회 부회장 이진옥입니다.
날씨가 무척도 더운데 내외 각지에서 많은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천 이문화 (烏川 李文和) 1358~1414
오천 이문화 (烏川 李文和) 선생은 고려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명신으로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외조부(外祖父)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字)는 백중(伯中), 호는 오천(烏川)이다.
1380년(우왕 6)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우정언, 우헌납, 예문응교를 거쳐, 성균사예로 1385년(우왕 11)에 경상도 안렴사를 맡아 울산읍성을 축조했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경기좌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예문관대제학을 세 번, 형조 호조 예조판서, 대사헌, 참찬의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공은 일찍이 비범 탁월하고 타고난 용모가 온화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너그럽고 인자하여 어른과 같은 기상이 있었다.
성균관 생원에 이르러 학업이 날로 진보하고 예(禮)로써 몸을 단속하여 효성과 우애에 독실하였으며, 부모 곁에 있을 때는 종일토록 즐거운 표정으로 어버이 뜻을 순종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극진하였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율정 윤택(尹澤) 선생에게 배웠고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 문(門)에 종유(從遊)하였다. 양촌 권근(權近), 도은 이숭인(李崇仁), 상촌 김자수(金自粹) 등 여러 어진 벗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어 문장과 경학(經學)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추앙 존중하는 바가 되었다. 그 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는 권근(權近)이 글(序)를 증정하였고,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올 때에는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주고 또 자설(字說)을 증정하였으며, 한수(韓脩)도 시를 증정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는 춘정 변계량(卞季良)이 시를 증정하였고 경상도안렴사로 갈 때에는 권근(權近)이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57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태종이 매우 슬퍼하여 정사(政事)를 3일간 중지하고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로 공도(恭度)를 내렸다. 선생이 남긴 시문으로는 경상도관찰사 때 지은 경주 “이견대(利見臺)”, 의성 “문소루(聞韶樓)”, 밀양 “영원사 선조루(塋原寺 先照樓)” 등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다. 대구 서계서원(西溪書院), 함안 도천사(道川祠), 장흥 금계사(金溪祠)에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있다
[내외 귀빈 소개]
가락중앙종친회 김기재 회장님 참석하셨습니다.
전 총무처장관, 행정자치부장관, 15 ·16대 국회의원
파평윤씨 정정공파 교하문중 윤영길 회장님
한양조씨 병참공파종회 조병하 부회장님, 조석호 회장님, 조수원님 참석하셨습니다.
한양조씨 대종회 종보주간 조수형님.
양천허씨 충정공파종회 조웅호 회장님
고부이씨 종회 ***이사장님 이형수님
***상래 부회장님
**성씨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님
***사님
**홍보이사님
**부회장님
**대종회 소**회장님, 소대화 사무총장님
풍양조씨 대종회 조남희 전 회장님
박남박씨 박천욱님
***
안동김씨 이보 김찬회님.
고령김씨 남재 김재호 작가님 참석하셨습니다.
허준문 회장님
허수웅, 허상선, 허봉회 대종회 부회장님
양천허씨 충정공파종회 허 영 회장님
평양조씨 별자공파종회 조웅호
대구지역에서 김범준 전 경주서악서원장, 성균관유도회 대구지부장,
김동태
김상한
김종호
함안군 가락종친회 김석만 회장님
가야면노인회 안병주 회장님
김인식 전회장님
군북면 가락종친회 허남채, 김종두 전회장님
함안면 가락종친회 김옥대 회장님
김용태 전회장님
장흥지역 장흥향교 김두석 전교님
장흥군유도회 조모형 회장님
장흥군 문화원장 김희웅 원장님
장흥군 가락종친회 김두배 회장님
다음은 내빈 소개드리겠습니다
인천이씨 대종회 이영권 회장님
인천이씨 대종회
이상주 고문님-전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이동호 고문님-전 내무부 장관
이용하 고문님
이명식 고문님
이무열 고문님
이경영 고문님
이정재 고문님
이윤상 고문님
이진화 고문님
이영숙 고문님
이만영 뿌리연구위원장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시중공파 이달권 회장님
쌍명재공파종회 이정욱 회장님
충강공파종회 이기락 회장님
오늘 행사를 주최하신 공도공파종회 이규준 회장님
그 외에도 많은 분이 참석하셨습니다만 시간 관계로 일일이 소개해 드리지 못한 점 이해를 구합니다
오늘 헌성금 하신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윤영길님 (파평윤씨 정정공파) 20만원
이기락님 20만원
청양지회에서 100만원
인천이씨 중앙청년회 50만원
평양조씨 별좌공파 **
추모강연회를 주관하여 주신 우리 종회 뿌리 연구위원장이신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님의 개회사가 있으시겠습니다.
[개회사]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개회사]
오늘 우리 선조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 1358~1414) 선생의 서거 600주년을 맞아 후손들이 경건한 뜻을 모아 추모의 예전을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여러 내빈께와 종인들께 먼저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합니다.
오늘 추모 예전을 올리는 이문화 선생은 본관이 인주(소성, 인천)요, 호를 오천이라 했으며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에 5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선생의 선대는 기록상 고려 초부터 현관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혈통은 신라와 가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세계(世系)화되고 있습니다. 신라말경부터 토호세력으로 등장했던 인천 이문은 고려 초에 외척으로 등장, 고려 중기까지 현관요직을 배출했습니다. 고려 중기에 정란에 휩쓸리게 되면서 장화공(章和公, 子淵)계가 대부분 퇴출당하게 되었으나, 상서공(尙書公, 子祥)계는 근왕세력인 문충공(文忠公, 公壽)과 그의 아들 문정공(文正公, 之氐)을 거쳐 그 직계인 오천 선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천 선생은 세보(世譜)상 득성조(得姓祖) 허기(許奇)로부터는 22세손, 관향조(貫鄕祖) 허겸(許謙)으로부터는 13세손에 해당하며 중서사인 조부 익세(益歲)를 거쳐 전공판서 심(深)과 안동 권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인은 충주최씨이며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습니다.
선생은 고려 말에 태어나 윤택(尹澤, 호:栗亭)의 학맥을 이었다고 전해지며, 당대 최고의 학인들로 알려진 삼은(三隱: 牧隱 李穡, 陶隱 李崇仁, 圃隱 鄭夢周)과 권근(權近, 호:陽村) 같은 선배들로부터 촉망받는 후배로 인정받았습니다. 선생은 우왕 6(1380)년 23세 때에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선배들로부터 이장원(李壯元)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여 환로에 나서게 되는 때는 조선조가 개창되기 12년 전입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공직생활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두 분의 강연에서 언급될 것으로 압니다만,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청된다”는 데서 보이듯이, 선생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왕조 교체기에 ‘국록’ 먹기를 꺼려했고 고려왕조에 대해서 일정하게 의리를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선생의 그런 자세가 이미 기울어진 고려 왕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충성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선생이 조선왕조 개창 후에도 관직을 유지한 것으로 보아,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새왕조의 개혁에 대해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선생이 새왕조 개창 후에 경연(經筵)에서 정치의 요체라 할 ‘홍범(洪範)’을 강의한 것으로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또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때에도 시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제도 오늘 이애희 교수의 강연에서 언급될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의 이런 정치적 태도는 새왕조 세력 특히 이방원(태종) 세력에게는 그렇게 탐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실권을 잡은 세력은 그를 내치지도 못했습니다. 선생이 돌아간 때는 태종 때입니다. 조정은 그에게 왕조 교체기에 훈공을 세운 이들에게 수여할 수 있는 그런 시호보다는 그의 성품에 알맞은 시호를 내렸습니다. ‘어진이를 높이고 의를 소중히 여기며 마음 씀씀이가 의에 맞는다’는 뜻의 공도(恭度)라는 시호를 내리고 3일간 철조(輟朝)했다고 합니다. 이를 감안하면, 혁명기에 그가 어떻게 처신했을까 하는 점이 어렴풋이 감지되기도 합니다. “천품(天稟)이 온화”했던 선생은 그 혁명기에 자신의 천품에 알맞은 처신을 했습니다. 그의 처신에 맞는 공도라는 시호는 이를 의미합니다.
그의 공직생활은 내직으로는 좌간의대부, 도승지,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참찬의정부사, 삼군부사 및 예조․형조․호조 판서를 역임했고, 외직으로는 경상도 도관찰 출척사와 개성 유후사 유후를 역임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 조정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고 시호 공도를 내렸습니다. 이런 환로를 통해 기억할 만한 업적도 남겼습니다. 그중 국왕이 사초(史草)를 보려고 했을 때 이를 간하여 바른 기록이 유지되도록 했던 것은 오늘날까지 조선왕조실록이 보존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것입니다. 선생은 또 조선조 초기 대명(對明)외교에서도 볼만한 업적을 남겼고 목민관으로서도 어진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런 점들은 오늘 두 분의 강연에서도 일정하게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선조 오천 선생에 대해서 소략하게 살폈습니다마는, 앞으로 후손들은 그 어른과 그 후손들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분들이 어떻게 그 시대를 고민하면서 사회에 봉사했는가를 살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오천 선생의 서거 600주년을 추도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최근 많은 문중들에서 혈족들이 모여 여러 형태의 기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념사업이 자칫 자기 혈족이나 일문의 명예를 높이려거나 배타적 자존의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받기도 합니다. 오천 선생의 후예들도 그런 행태의 문중행사에 부화뇌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남북, 동서로 분열되어 있는 우리나라가, 이런 문중모임을 통해 혈연에 의한 분열 분파의식을 조장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혈족들의 힘을 모아 우리 후손들을 잘 교육시켜 우리 사회와 세계에 봉사하는 젊은이들로 양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종문(宗門)도 지역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문중 혈족들이 모여 조상을 기리고 혈육의 정을 돈독히 하는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성취하고 나아가 세계와의 유대와 협력을 추구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 선조 오천 선생을 추도하는 이 모임이 그런 귀한 사명을 재확인하고 다짐하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거듭 오늘 이 자리를 찾아주신 여러 내빈들과 종인들에게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하면서 제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6월 27일
인천이씨 뿌리연구회 이만열 삼가
[표창장 수여]
다음은 종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종원에 대한 표창 수여가 있겠습니다.
표창은 이규준 종회장께서 해 주시겠습니다.
대구지회 이대하님
함안지회 이희환님
청양지회 이병엽님
장흥지회 이종찬님
김천지회 이영조님
경주지회 이윤식님
대구지회 이대하
함안지회 이희환
청양지회 이병엽
장흥지회 이종찬
김천지회 이영조
경주지회 이윤식
[추모사]
이어서 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이규준 회장님께서 추모사를 하시겠습니다.
이규준 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장
[추모사]
존경하는 종인(宗人) 여러분!
그리고 자리를 함께해 주신 내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려말 조선초기의 대표적 명신(名臣) 우리 파조(派祖)이신 공도공 오천 휘 문화(恭度公 烏川 諱 文和) 선생님 서거(逝去) 600주년을 맞이하여 높으신 위업(偉業)을 기리고 추모(追慕)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먼저, 조선(朝鮮) 건국초기 신진 지식인(新進 知識人)으로서 애국애민(愛國愛民)으로 백성의 삶이 편안하고 부강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생을 다 바치신 오천(烏川) 할아버님의 영령(英靈)께 삼가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빕니다.
공(公)께서는 1358년 전공판서(典工判書) 휘 심(諱 深) 공(公)의 장남으로 태어나시어 일찍부터 비범 탁월하고 온화한 용모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셨으며 1380년 23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시어 우정언, 우헌납, 예문응교를 거쳐 성균사예로 경상도안렴사를 맡아 울산읍성을 축조하셨습니다.
조선조에 들어와 신진 지식인으로 발탁되시어 도승지, 경기좌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시면서 왕조(王朝) 전환기의 적폐(積弊)와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들어가셔서 태조, 정종, 태종임금등 세 조정에서 이조·형조·예조·호조판서와 사헌부대사헌, 예문관대제학, 개성유후사유후를 역임하시고 참찬의정부사직을 수행하시는 동안 오로지 위국애민(爲國愛民)의 충정(忠情)으로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조선 태조임금께서 사초(史草)를 바치라 하자 공(公)께서는 도승지로서 [역사는 사실대로 바로 써서 숨김이 없어야 하는데 군주와 대신들이 스스로 보게 된다면 숨기고 꺼려서 사실대로 바로 쓰지 못함]을 아뢰옵고 할 일 없이 국록을 축내는 검교시중직(檢校恃中職)을 혁파(革罷)하도록 주청(奏請)하였으며 농사 짓는 방법을 도식화(圖式化)한 가색도(稼穡圖)를 만드시고 호조에서 만든 지폐인 호조저화(戶曹楮貨)를 사용하게 하시는 등 임금께는 강직하게 직언(直言)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되게 하셨음을 6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마음 깊이 추앙하고 계승 발전해야 할 덕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공(公)께서 1414년 음력 6월 1일 참찬의정부사 재직중에 향년 57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자 태종임금은 매우 슬퍼하며 3일동안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중(追贈)하고 [공도(恭度)] 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예장(禮葬)으로 모셨습니다.
1495년 성종임금이 승하(昇遐)하시자 공(公)의 묘소자리에 선릉을 조성하게 됨으로 인하여 부득이 서울 청담동으로 모셨다가 서울도시확장계획으로 1971년 이곳 천안으로 유택(幽宅)을 옮겨모시면서 오천재(烏川齋)를 이건(移建)하고 교육관을 신축하여 해마다 대학에 입학한 후손학생을 대상으로 조상님들의 빛나는 얼을 일깨우는 뿌리교육을 실시하고 장학금도 지급하면서 훌륭한 후예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금년 가을에는 묘소도 재정비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영정각도 새로 짓고 동재와 서재도 개축하는 등 묘역 주변을 성역화하여 명실상부한 [성현(聖賢)의 터]로 조성해 나가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 공(公)의 서거600주년 추모강연회를 개최하는 뜻은 오로지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애민정신(愛民精神)으로 일관되게 살다 가신 오천(烏川) 할아버지의 위대한 생애(生涯)의 경세사상(經世思想)을 재조명(再照明)하여 자랑스러운 삼한갑족(三韓甲族) 공도공의 후손으로서 공(公)의 위업을 계승 발전하여 공도공(恭度公) 후손뿐만아니라 인천이씨 모두가 소통하고 화합 단결하면서 시대적 소명을 다하는 문중이 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천상에 계신 할아버지께서도 저희들을 항상 지켜봐 주시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베풀어 주시옵기를 기원(祈願) 올리면서 다시 한 번 할아버님께 한없는 존경과 추모의 정을 바치며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빕니다.
끝으로 오늘 추모강연회를 주관하여 주신 우리 종회 뿌리연구위원장이신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님과 강연해 주실 두 분 연사님의 노고에 깊히 감사드리며 무더운 날씨에 바쁘신 일정을 뒤로 하시고 참석하시어 자리를 더욱 빛내주신 내빈 여러분과 경향 각지에서 오신 종인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가정과 직장에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년 6월 27일
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장 이규준
[축사]
가락중앙종친회 김기재 회장
[축사]
오늘은 공도공(恭度公) 파조(派祖) 이문화(李文和) 선생 서거 6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파종(派宗)을 뛰어넘어 가락의 후예들이 자리를 함께하여 그분의 위업을 되새기며 감사와 추모의 예를 올리는 자리에 함께 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동안 공도공 할아버님을 정성으로 모시며 자랑스런 종친회로 발전시켜오신 이규준 회장님과 이영권 인천이씨대종회장을 비롯한 종친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인천이씨 공도공파는 종원간에 화합하여 조상의 전통과 유지를 계승발전시키며, 후손들을 위한 종사교육을 매년 실시하고, 장학사업이 모범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종회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고 있어 저는 가락중앙종친회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늘 고맙고 자랑스런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락중앙종친회는 인천이씨대종회, 공도공파종친회와 최선의 친목과 협조관계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이영권 대종회장님과는 국회의원 시절부터 선후배로 각별한 인연을 쌓아오고 있으며 이규준 회장님과는 내무부에 재직하면서 동고동락 해오던 개인적인 신뢰가 깊은 관계로 가락종친회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세사람이 함께 인도를 방문하여 미쉬라 왕손과 아요디아 서장을 비롯한 주요 기관장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허황옥 시조할머님 기념비 건립 13주년 행사를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가락중앙종친회는 서울의 중심부인 중구 필동에 지하 2층, 지상 10층짜리 건물을 매입 이전하여 충무로 시대를 새롭게 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6.4 지방선거에서는 100명이 넘는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 종친들이 시·도지사, 시장·군수, 지방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늘 공도공파 파조이신 이문화 할아버님의 서거 6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700만 가락 종친들은 할아버님의 거룩한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서로의 끈끈한 정과 단결을 통해 새 시대를 주도하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될 것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6월 27일
가락중앙종친회 회장 김기재
[축사]
[제1주제]
공도공(恭度公)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 선생의 생애
허철회 (양천허씨충청공종회 학술회장)
[제2주제]
공도공(恭度公)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 선생의 경세사상
이애희 (강원대학교 교수)
[기념촬영]
귀 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립니다